로동신문

주체107(2018)년 4월 28일 《통일신보》

 

인생의 봄을 주신 은혜로운 손길

 

지금으로부터 일흔해전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발기밑에 평양에서 열린 4월남북련석회의는 북과 남의 정당, 사회단체대표들이 참가하여 외세에 의한 민족의 분렬을 막고 자주적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한 구국대책을 론의하고 견해의 일치를 본 력사적인 민족대회합이였다.

애국애족의 리념아래 당파와 정견, 신앙의 차이와 과거지사 등 모든것을 초월하여 통일애국의 목소리를 합친 각계층 사람들속에는 남녘의 문예인대표로 참가한 황철도 있었다.

가증스러운 외세에 의하여 해방전이나 해방후나 민족적량심과 애국심, 남다른 재능이 무참히 칼부림당하고 짓밟히였던 그는 위대한 주석님의 은혜로운 손길따라 삶의 궤도를 새롭게 정한 4월의 그 봄날이 있어 인생의 봄을 맞이하고 보람찬 삶을 누릴수 있었다.

주체44(1955)년 8월 15일이였다.

그날 황철은 위대한 주석님께서 참석하신 조국해방 10돐 경축연회에 참가하게 되였다.

뜻깊은 그 자리에서 황철을 알아보신 주석님께서는 황철동무가 왔다고, 우리 명배우가 왔다고, 나는 동무의 얼굴만 봐도 마음이 시원하다고 하시며 그를 반겨 맞으시였다. 그러시고는 그에게 다가가시여 몸소 잔을 권하시였다.

순간 황철은 오른팔이 의수였기때문에 위대한 주석님께서 권하시는 잔을 두손으로 받을수 없어 머뭇거리였다. 그의 불편한 거동을 헤아리신 그이께서는 황철의 한손을 들어올리시며 잔을 받으라고 이르시고는 왼손에 잔을 들려주시고 술을 부으시였다.

위대한 주석님께서 따라주신 술잔을 들고 너무도 황송하여 몸둘바를 몰라하며 목메여 흐느끼는 황철을 보신 그이께서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축배를 들자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이번에 황철동무가 인민배우가 된것을 축하한다고 분에 넘치는 치하를 주시였다. 바로 이틀전에 예술인들중에서 첫 인민배우칭호를 수여받은 그였다.

위대한 주석님을 한자리에 모신 국가연회에 참가한것만도 더없는 영광인데 잔을 다 들어야 한다고 하시며 축배와 함께 치하의 말씀을 주시는 그이의 한량없는 믿음과 은정에 황철은 솟구치는 격정을 누를길 없었다.

황철은 1912년 1월 충청남도 청양군의 빈농가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그는 어려운 생활고와 압제의 질곡속에서도 한가닥의 포부인 연예인이 되는것을 포기하지 않은 탓에 얼마후 연극생활에 몸담게 되였다. 신극단체인 조선연극사에서 연극 《홍길동》의 주인공역으로 출연한 황철은 서울 동양극장과 아랑극단, 락랑극희 등 여러 연극단에서 무대생활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 그는 멋진 연기로 사람들속에서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연기형상에서 특기있고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어도 그의 운명은 품팔이인생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그의 예술활동이란 한갖 호구지책에 지나지 않았었다.

해방후 일제를 대신하여 남조선을 타고앉은 미국의 식민지통치하에서 그의 불우한 운명은 달리 될수 없었다. 압제의 총칼과 불법무도한 악법들을 휘둘러 민족문화말살에 광분하는 민족반역세력의 탄압책동으로 하여 그는 연극무대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숙명과도 같이 피할길 없는 불우한 운명의 나락에서 헤매이고있던 1948년 4월 그는 뜻밖에도 영명하신 일성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초청장을 받게 되였다.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대표자련석회의참가와 관련한 초청장이였다.

위대한 주석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는 흥분으로 높뛰는 마음을 진정할길 없었다. 그는 일절 앞뒤를 가리거나 주저함이 없이 서울을 떠났고 련석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다.

온 민족의 커다란 관심과 기대속에 소집된 회의에서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북조선정치정세》라는 보고를 하시였다. 분렬의 위기를 타개하고 민족이 나아갈 진로를 환히 밝혀주신 주석님의 보고는 전체 참가자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열렬한 찬동을 불러일으키였다.

위대한 주석님에 대한 다함없는 신뢰와 흠모의 정이 차넘치는 회의장에서 황철은 비범출중한 예지와 탁월한 식견, 고매한 덕망을 지니신 그이의 풍모에 매혹되게 되였다. 영명하신 일성장군님만이 민족을 이끄실분이시라는것을 온넋으로 절감하게 된 그는 장군님의 뜻을 따를것을 결심하고 남행길을 단념하였다.

어느날 그의 간절한 소원을 헤아리신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황철동무의 소원이 평양에 남아 조국과 인민을 위한 무대예술창조사업을 하는것이라면 그 소원을 풀어주는것이 좋겠다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서울에 있는 그의 가족들까지 념려하시여 평양에서 모여살도록 하라고 일일이 조처하시였다. 그후 황철의 가족이 평양에 왔다는것을 아시고는 살림집으로부터 가구, 이부자리, 부엌세간에 이르기까지 생활에 필요한 모든것을 다 갖추어주도록 하시였다. 황철이 마음놓고 안착되여 예술활동을 할수 있게 가족들을 데려오게 하시고 생활에서 사소한 불편도 없도록 보살펴주신 위대한 주석님의 다심한 보살피심속에서 그는 국립연극극장(당시) 배우로 창작활동을 하였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적의 폭격으로 중상을 당하여 한팔을 잃은 그였지만 위대한 주석님의 각별한 보살피심속에서 생의 활력을 얻고 희열에 넘친 무대생활을 할수 있게 되였다. 황철의 신상을 잘 돌봐주도록 하신 주석님의 사려깊은 보살피심속에서 그는 의수를 하고 예술창조에 전념할수 있게 되였다. 그는 강한 의지와 왕성한 정력, 불같은 열정으로 연극뿐아니라 영화에도 출연하였고 연출도 하였으며 극대본과 문예평론도 쓰고 때로는 소리방송소설랑독도 하였다. 연극 《리순신장군》, 예술영화 《춘향전》을 비롯한 많은 작품들에서 연기형상을 재치있고 구수하게 하여 사람들의 절찬을 받았다.

그 나날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여러차례 그가 출연한 작품들을 보시고 황철동무가 재간있는 배우라고 높이 치하하시였다.

주체47(1958)년 4월의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일부러 시간을 내시여 황철을 만나시였다. 그이께서는 황철동무가 우리와 함께 일을 한지도 이제는 10년이 되였는데 그동안 내가 좀처럼 시간을 내지 못하여 동무와 같이 이야기 한번 나누어보지 못하였다고, 그래서 오늘 동무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자고 시간을 내였다고 하시며 그와 자리를 함께 하시였다. 황철에게 자리를 권하신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그의 의수를 따뜻이 살펴보시였다. 그러시고는 동무는 전쟁시기 적들의 폭격에 한손을 잃고 의수를 하였으므로 불편할것이라고, 그 불편한 몸을 가지고도 연기를 잘하는것을 보면 용타고 하시였다.

그이의 은정어린 말씀을 가슴벅차게 접하는 황철은 눈굽이 젖어들고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위대한 주석님의 은총이 아니였다면 예술활동은커녕 운명의 소생이란 상상조차할수 없는 자신이였다.

그이께서는 계속하여 나는 영예군인동무들을 보고 꽃은 계속 피여야 한다고 말한 일이 있는데 동무가 바로 꽃을 계속 피우고있다고 하시면서 나는 동무와 같은 진실한 배우를 사랑한다고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안겨주시였다.

잊을수 없는 4월의 그 봄날부터 자기에게 두터운 믿음과 무상의 영광을 안겨주시고 친어버이의 정으로 보살펴주시는 위대한 주석님께 황철은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무대를 떠나고싶지 않다고 말씀올리였다.

그날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나는 황철동무가 연극의 주인공역을 맡아 연기를 잘하는것도 마음에 들지만 강의한 성격이 더 마음에 든다고 하시며 치하하시였고 저녁식사도 함께 나누시였다. 그리고 불편한 몸에 나이도 있기때문에 무대생활을 그만두고 다른 사업을 하는것이 어떻겠는가고 그의 의향을 알아도 보시였다. 다른 직책을 맡으면 연기활동을 더는 할수 없게 되는것으로 아쉽게 생각할수 있는데 그 일을 하면서도 필요한 때에는 연기도 하고 방송소설도 읽고 연출도 할수 있다고 하시며 앞으로의 사업방향도 일일이 가르쳐주신 위대한 주석님이시였다.

그이의 크나큰 믿음과 사려깊은 보살피심에 의하여 황철은 그후 교육문화성(당시) 부상 겸 국립연극극장 총장의 중임을 맡고 일하게 되였다. 위대한 주석님의 가르치심대로 예술부문지도일군의 한사람으로, 때로는 작품에 출연도 하면서 보람찬 예술활동을 이어간 그는 그만 불치의 병으로 몸져눕게 되였다. 그때로 말하면 항일무장투쟁을 주제로 한 연극 《돈화의 수림속에서》를 창조하던 때였다. 시시각각 온몸을 엄습하는 병마속에서도 그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황철의 병구완에 마음쓰시며 모든 치료대책을 취하도록 강구하신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그가 입원치료를 받고있는 병원의 책임일군을 전화로 찾으시였다. 지금 황철동무의 병세가 어떠한가를 물으신 그이께서는 그의 병세가 좋지 않다고 하는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살려내야 한다고, 황철동무의 병을 치료하는데서는 아무것도 아까울것이 없다고 하시며 정성을 다하여 꼭 살려내야 한다고 재삼 강조하시였다.

위대한 주석님의 심려어린 말씀과 곡진한 은정에 깊이 감복한 황철은 정신이 혼미하여지는 속에서도 연극대본완성에 기력을 다 바치였다. 그러나 침상에 누운채로 가슴우에 대본을 얹고 작품창작에 전력한 그는 종시 끝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의 운명을 두고 제일 가슴아파하신분은 위대한 주석님이시였다. 그이께서는 황철동무가 잘못되였다는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황철동무는 한시도 무대를 떠날수 없다던 사람인데 이제는 무대에서 그를 볼수 없단말인가고 하시며 애석함을 금치 못해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는 조국이 통일되면 더 많은 일을 하여야 할 사람이였는데 너무 일찌기 우리의 곁을 떠났다고 하시며 그의 장례를 잘 치르도록 할데 대하여 이르시였다. 그리고 고인의 유가족들을 잘 돌보아주도록 하며 자녀들이 아버지의 뒤를 잇도록 보살펴줄데 대하여 일일이 가르치시였다.

민족단합의 숭고한 전통이 마련되던 뜻깊은 4월의 그 봄날부터 황철의 애국심과 재능을 헤아리시여 소망을 들어주시고 꽃은 계속 피여야 한다시며 온갖 사랑과 은정을 베풀어주신 위대한 주석님의 믿음속에서 황철은 인생의 봄을 맞이하고 조국이 사랑하고 인민이 기억하는 유명한 예술인으로 삶의 아름다운 자욱을 새길수 있게 되였다.

주체67(1978)년 6월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정일장군님께서는 황철의 생애와 예술활동에 대하여 회고하시면서 그는 한팔이 없었으나 연기를 아주 잘하였다고, 그는 화술도 독특하였다고, 황철동무는 재능있고 훌륭한 배우였다고 하시였다. 그리고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시기인 주체100(2011)년 12월에는 나라일에 그처럼 분망하신 속에서도 그의 생일 100돐과 관련한 행사를 치르도록 이르시여 황철의 유가족들과 연고자들, 연극예술부문의 창작가, 예술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참가한 회고모임이 의의있게 열리게 되였다.

참으로 위대한 주석님과 위대한 장군님은 사랑과 정으로 인민사랑의 화원을 가꾸시고 민족의 단합과 무궁번영을 위한 애국위업실현을 현명하게 이끄신 인덕의 화신이시다.

 

본사기자 리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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