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동신문

제 3 장

16

  

오늘 권범은 항상 그에게 낯이 익은 더부룩한 로동복차림이 아니였다. 그리 값비싼 천은 아니지만 몸에 잘 어울리는 신사복이였다. 재빛와이샤쯔에 누르스름한 넥타이도, 산뜻한 신발도, 가는 가죽끈으로 어깨에 멘 사진기도 모든것이 늘씬한 체격에 아주 어울렸다. 깊은 사색이 깃들어있는 얼마간 넓은 이마, 완강한 의지를 말하는 힘있는 턱, 모든것이 그를 돋보이게 하였다. 그는 신문기자로 가장하고있었다.

그리고 태연하게 사람들의 래왕이 빈번한 밤거리를 거닌다. 그에게 체포령이 내린지가 벌써 3년이 된다. 그동안 세월은 바뀌였다. 《제2공화국》의 파괴, 5. 16군사쿠데타, 《민정이양》, ㅅ구경찰서만 하더라도 서장도 형사들도 많은 성원이 바뀌였다. 그리하여 그의 령장은 사찰계의 낡은 서류뭉치속에 끼여있기는 하였지만 집행자인 사찰계주임의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지고있었다.

1964년 봄, 서울거리는 또다시 흥분의 도가니로 되였다. 《한일회담》, 식민지군사파쑈《정권》을 반대하는 대규모적인 대중운동이 온 남녘땅을 휩쓴것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 정경이 4. 19를 련상시킨다고 한다. 그럴수도 있다. 성토대회, 거리거리를 메꾼 수십만의 청년학생들, 최루탄의 초연, 소방차의 물공격, 노도와 같은 시위자의 돌진, 우왕좌왕하는 경관의 떼, 총창과 주먹의 대결, 탄우속에서의 처절한 싸움, 그 모든것이 4. 19를 련상시킬수 있었다.

그렇지만 같을수가 없다. 그때로부터 만 4년, 더 교활해지고 더 포악해진 미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 박정희군사깡패들의 잔인한 탄압이 4월과 같을수가 없다. 보다는 청년학생들의 발걸음이 4월과 같을수가 없다. 3. 24에서 시작되여 수십일간 계속되면서 《한일회담》을 중단하지 않을수 없게 한 조직화된 그 완강한 발걸음이 4월과 같을수가 없다.

《물러가라 일본놈, 미국놈!》 이런 글발이 씌여진 프랑카드를 든 학생들의 념원이 민주주의에 대한 막연한 기대였던 4월의 그것과 같을수가 없다.

투쟁은 밤과 낮을 이어 계속되였다. 지금 권범이가 다가가고있는 동대문앞 교차점에서도 ㅅ대 문리과대학의 학생들이 앉아버티기투쟁을 하고있었다.

2천명의 남녀학생들이 포장도로우에 가마니들을 깔고 초저녁부터 앉아있었다.

권범은 연도에 운집한 시민들의 어깨너머로 학생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그것은 한폭의 전투적인 화폭이였다. 학생들 한복판에는 커다란 우등불이 불기둥을 이루고 밤하늘을 찌르며 뻘겋게 타오르고있었다. 그 주위에 겹겹이 둘러앉아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는 수천 학생들의 열화같은 시선들, 또 그들을 빙 둘러싸고있는 삼엄한 경관의 떼 그리고 그 바깥둘레의 연도를 메꾼 시민들, 그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우등불곁 한곳에 집중되였다. 시뻘건 우등불의 반사광속에서 한 녀학생이 가슴을 버티고 의연히 섰다. 윽윽하는 우등불의 불길소리가 들리도록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였다. 녀학생은 천천히 온넋으로 시를 읊기 시작하였다.

푸른 하늘 뙤약볕에

눈물을 불지르고

반독재, 반매판, 반외세의

펄럭이는 기발밑으로

나도야 가련다

 

한폭의 그림, 타오르는 서사시, 천천히 거니는 권범의 등뒤에서 녀학생의 랑랑한 목소리는 계속되고있었다.

 

이윽고 녀학생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였지만 타오르는 불길은 그대로 보였다.

그 서사시적인 화폭이 준 격한 감동이 채 가셔지기도 전에 먼 어디선가 새로운 함성이 들렸다. 발구름소리도 땅을 흔든다. 최루탄의 총성도 들렸다. 초연에 억눌리운 함성이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찢는다.

끊임없는 항쟁의 거리.

권범은 입을 꽉 다물고 걸음발을 다우쳤다. ㅅ대 문리대앞에 다달았다. 지금 대학의 모든 건물과 넓은 운동장은 괴괴하도록 깊은 어둠과 정적에 잠겨있다. 지난 4. 19의 회상이 권범의 뇌리를 스쳤다. 그것은 마치 유년기의것처럼 표상은 있으나 세월의 장막너머 아득히 얼른거릴뿐이였다.

주위에는 오늘 경관놈들마저 한놈도 보이지 않았다.

권범은 그대로 정문을 지나 키낮은 울타리를 끼고 돌아갔다. 뒤문곁을 지나는 한 청년에게 권범은 담배불을 청했다. 청년은 담배를 붙이는 권범의 얼굴을 세찬 눈초리로 응시하다가 손을 내밀었다.

《좋은 담배구만요. 저에게도 한대 줄수 없겠소?》

《없소.》

권범은 휙 얼굴을 돌리였다. 그러나 청년은 권범의 팔을 힘껏 잡았다. 그리고 뒤문으로 들이밀었다. 운동장에 들어선 그들은 울타리를 끼고 말없이 걸었다.

한 건물앞에 다닫자 청년은 뒤따라오는 권범이쪽을 힐끗 돌아보았지만 그대로 들어선다.

학생기숙사인가보다. 방마다 많은 문이 늘어선 좁은 복도를 한참 걸었다. 그중 맨끝의 방문을 열고 청년은 권범에게 먼저 들어서게 한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문을 닫은 청년은 얼굴표정을 한껏 빛내이면서 무슨 말인가 터치려고 하는것 같았으나 흥분때문에 얼른 말을 하지 못한다. 권범은 그 청년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낮은 소리로 말하였다.

《준하동무!》

《저를 기억하고계십니까? 이렇게 정선생님을 다시 만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더랬습니다.》

더 심한 상처를 입고도 자기를 업어 병원에까지 데려다준 잊을수 없는 사람의 얼굴을 준하는 숙연한 마음으로 언제까지나 바라보며 서있었다.

《이렇게 단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서로 동무라고 부릅시다.》

권범은 권하는대로 의자에 앉으며 말하였다. 준하는 앉은뱅이책상에 걸터앉아 권범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지금 학교주변에는 한명의 경관도 없습니다. 오늘 록음을 듣기 위해 사흘전부터 일체 행사를 교내에서 하지 않았습니다. 어제부터 경관들은 학교주변의 경비망을 거두어 동대문교차점에 집결시켰습니다. 우리 규찰대들은 록음을 듣고있는 지하실주변을 지키고있습니다. 전 어제 대학교련합조직에서 록음을 들었기에 제가 밖에서 기다릴수밖에 없었습니다만 이렇게 만나게 되였구만요.》

권범이가 잠자코 있자 준하는 말을 이었다.

《보내준 귀중한 록음테프는 돌격전야의 우리들을 격동에 타오르게 하였지요. 아니, 엄숙하게 하였습니다.》

권범은 무릎에 얹은 사진기를 두손으로 붙들고 앉아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한일회담>을 배격하는 학생들의 거세찬 투쟁에 발을 맞춰 우리들도 적극 참가하기로 하였습니다. 언제나 우리들을 한시도 잊지 못하시는 우리모두의 어버이이신 일성장군님께서는 지금 이 시각에도 싸우는 우리들을 생각하고계실것입니다.》

《방송으로 그이의 음성을 들은 우리 조직성원들은 일찌기 느껴보지 못한 감격속에 휩싸여 투쟁에 더욱 앞장설것을 맹세하였지요.》

준하는 그 맹세를 다시한번 다지는듯이 잠시 묵묵히 앉아있다가 이윽고 웃음을 그리며 이런 말을 하였다.

《그 록음테프를 지혜가 전해주었다는걸 영애동무에게서 들었습니다. 지혜에게 문안을 전해주십시오. 그리고 정림간호장에게도…》

《또 문안을 전할 사람이 없습니까?》

권범은 웃으며 물었다.

《강우군도 보고싶습니다. 대학에 있을 때만 해도 화려한 인기를 혼자 독점하고있다싶이 했는데…》

《준하동무…》

권범의 갑자기 무거워진 목소리에 준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형세는 준엄합니다. 한사람의 극히 미세한 실수로 해서 한 조직이 파괴되는 경우가 결코 드문 일이 아닙니다. 친어머니의 안부도 묻지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한 가족이, 부모형제가 해를 두고 갈라져 살면서 편지 한장 띄우지 말아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준하는 그 말을 할 때의 권범이가 왜 발음하기 힘들어했는지 알지 못한다.

《우등불모임은 막 감동에 타오르게 하더군요.》

《6월 3일 절정에 이를겁니다. 우리 학생들은 그러면서도 가슴속의 울분을 다 폭발시키지 못해 펄펄 뜁니다. 그러기에 우리 조직자들은 학생들을 투쟁에로 불러일으키는 사업과 함께 그들의 혈기에 침착성을 키우느라고 마음을 씁니다. 우리들은 ㄷ방직의 태업투쟁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완강성, 침착성에 머리가 숙어졌습니다.》

한시간이나 권범과 이야기를 나눈 준하는 북받쳐오르는 새로운 신념에 흥분하면서 이렇게 웨쳤다.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우리의 투쟁에 날마다 수많은 애국적인민들이 합류하고있습니다. 우리의 승리는 목전에 있습니다.》

《그러나 준하동무, 이 투쟁으로 완전한 승리가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맙시다. 우리의 목적은 미제를 몰아내고 식민지통치를 짓부시는것이 아니겠습니까?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이번의 이 거족적인 투쟁도 그 커다란 투쟁의 한 고리입니다.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력량을 부단히 확대하고 강화하면서 미제의 식민지정책에 강력한 타격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다가올 조국통일의 대사변을 맞이하기 위한 튼튼한 성새를 쌓아야 합니다. 그이께서는 …조국통일은 조선인민자신의 손으로 이룩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시고계십니다.》

준하는 눈을 빛내이며 권범의 말을 듣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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