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동신문

제 3 장

15

 

인숙은 자기가 서있는 곳이 돌자갈밭인지 아니면 오물적치장인지 알수가 없었다. 땅이 뒤흔들기라도 하는듯이 자꾸만 비칠거렸다. 낭떠러지우에서 그의 상급인 미군장교가 미친것처럼 웃으면서 올라오라고 손을 내민다. 인숙은 구원을 청해 두손을 뻗치였다. 그런데 장교의 털이 부스스한 손에는 방금전에도 없었던 진주목걸이가 있었다. 인숙의 내뻗친 두손에 그중 몇알이 떨어진다. 그러나 진주는 손가락짬으로 흘러내렸다. 또 던져준다. 자꾸만 던져준다. 드디여 사태처럼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진주가 아니였다. 흙덩어리와 돌자갈이 쏟아져내린다. 인숙은 머리며 어깨며를 수없이 얻어맞고 오물우에 쓰러졌다. 장교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인숙은 공포에 질려 신음소리를 쳤다. 그리고 자기 소리에 깨여났다.

분회사무실 쏘파에 앉아 잠시 눈을 붙였을뿐인데 꿈을 꾸었다. 완전히 깨여났으나 꿈속에서 엄습했던 공포가 사라지지 않았다. 요즘 오인숙은 불안한 날들을 보내고있었다. 상급은 인숙의 보고를 들을 때마다 칼끝으로 도려내듯 매서운 질문과 욕설을 퍼부었다.

《나는 맥드낼드가 추천했기에 많은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정보원의 보고입니까? 혹시… 그들과 내통하고있지 않습니까?》 하고는 물고있던 담배를 인숙의 면상을 향해 던졌다.

더구나 어제는 백창락이가 림억규지배인실에서 밤늦도록 뭔가 옥신각신 하고있어서 -요즘 그들은 공장일때문에 자주 다퉜다. - 록음테프를 빼낼수가 없어 가져가지 못하였는데 미군장교는 그를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더니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태공이요? 아니면 억규와 짜고들었소?》

그리고는 초인종을 눌러 정보원 두 녀석을 부르더니 곧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들은 삼십분이 못되여 테프를 가져왔다. 장교는 똘똘 말린 테프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비웃었다.

《정보원은 과업의 실행을 위해서라면 육체도 두뇌도 다 바쳐야 하오. 정보원이 수행하는 과업은 정보원의 값어치의 수백배에 해당하오.》

상급의 표정이나 욕설보다 더 무서운 운명이 자기에게 다가오는듯 한 예감을 느끼며 인숙은 공포에 떨면서 자기자신이 몹시 불쌍해보였다.

시계를 본 인숙은 웃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살아가기가 힘에 겨운듯 한 지친 걸음으로 지배인실을 향해 복도를 지난다. 혜화약방에 상급을 만나러 갈 시간이 다가온것이다.

(인제 모든것을 던져버릴수 없을가?)

그렇게도 생각해본다. 인제 와서 맥드낼드의 미끼를 거절한 지혜가 자기보다 령리했다고 생각된다.

(령리한것도 아니지. 나는 그런 천대를 받으며 로동할수는 없어… 될대로 되는거지. 발버둥친대도 소용없으니까. )

어느덧 지배인실이다. 그러나 문고리에 손을 댄 인숙은 그대로 귀를 기울이였다. 억규의 목소리가 들렸다.

《뭘? 원면이 도착했다고? 송장이 왔나?》

누가 온것이 아니라 전화로 하는 말소리가 분명하였다. 인숙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억규는 반쯤 일어나 어쩔줄을 몰라하며 수화기를 든채 헤덤비고있다.

《어쨌든 도착하는대로 창고에 넣어야지… 뭘? 창고에 물이 찼다구? 방수포라도 깔고 넣게… 으응? 화물차가 고장?》

억규는 펄쩍 주저앉는다. 그러느라고 인숙이가 들어온것도 모르고있다.

얼굴이 뻘겋게 부풀어올랐다가 퍼렇게 질렸다 한다.

《어쨌든 무슨 수든지 써보란 말이다. … 사장이 알면…》

인숙은 자기 신세나 매한가지인 억규가 가련해보였다. 요즘 백창락이 억규에 대한 구박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림억규를 지배인으로 받았던 초시기만 하여도 창락은 오히려 황공해하였었다. 리승만이와 결탁했던 죄과가 적지 않은 백창락은 억규를 중개로 해서 군사《정권》과 접근하려는 심산에서였다.

세월과 함께 백창락은 어느덧 《군정》과 굳게 결탁되여 림억규라는 중개자가 필요없이 되였다. 그는 박정희의 요구이상으로 정치자금을 풍부하게 갖다바쳤으며 《군정》은 《군정》대로 그런 정치자금을 배로 보상할수 있는 이런저런 특혜조치를 베풀었다. 말하자면 밀수입할수 있도록 보호해주었고 딸라가 환률될 때면 적어도 두주일이전에 알려주어 많은 딸라를 걷어모으게 하였다가 환률이 인상되였을 때 팔아서 폭리를 보게 하는 등 부정행위의 결탁에 림억규가 필요없이 된것이다. 설상가상 요즘 계속되고있는 생산의 축감이다.

하지만 억규도 낮잠만 자고있은것은 아니다. 로무자들의 태업상태를 어떻게 해서든 타개해보려고 갖은 수단으로 로무자들을 때려몰아보았지만 생산은 여전히 30프로아래로 낮아진채 더 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원면이 대량 입하되였다. 군납기일은 다가오고… 지금 책상에 푹 고개를 떨구고있는 억규의 등어깨가 후드득 떨리기까지 한다.

《지배인님.》

인숙은 바싹 다가가서 진심으로 다정하게 불렀다.

《엉?》

놀란 얼굴을 든 억규는 인숙을 보자 한숨을 쉬였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생산이 떨어지는게 어디 지배인님탓이예요?》

《그걸 알아준답디까.》

그런데 문이 벌컥 열리고 바로 백사장이 성이 독같이 올라서 들어섰다. 인숙은 재빨리 눈에 띄지 않게 한옆으로 피했다. 창락은 고래고래 소리쳤다.

《당장 자리를 내놓게! 창고는 물에 차고 화물차는 고장? 네녀석의 일하는 본때가 이렇단 말이지?》

《아닙니다, 사장님…》

억규는 자기가 뭘 아니라는지 스스로도 모르면서 그저 떨고있었다.

《ㄷ방직을 말아먹자고 어떤 놈과 결탁했나? 바른대로 말해라! 응?》

《결탁하다니요?…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원면에 기계에 다 갖추어놓았는데 생산이 감퇴된다는게 될말이냐? 실토해라. 이녀석, 바른대로 안 대면 가만두지 않겠다.》

창락은 단순히 억규가 비위에 맞지 않아 호령을 치고있는것이 아니였다. 로무자들의 단결이나 투지에 대해서 깊이 알지 못했던 그는 일이 뒤틀리고있는것이 정말 억규의 소행이라 생각하고있었다.

《아닙니다. 사장님, 아닙니다…》

억규는 사장의 추궁에 아무것으로도 변명할수가 없어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있었다.

그때 문두드리는 가벼운 소리가 들렸으나 두사람 다 그 소리를 못 들었다. 백창락은 그냥 소리를 높인다.

《백창락이가 머저리인줄 아는가? 날 속여먹자고?…》

문두드리는 소리는 종시 요란스러워졌다. 인숙은 조용히 다가가 문을 열었다.

《어떤 녀석이야? 문을 패는게! 네년은 또 뭐고?》

백창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모든것에 화풀이를 하였다.

들어온것은 뜻밖에도 신재였다. 백창락의 독기오른 표정은 얼마간 수그러졌다.

《무슨 문두들기 본때냐, 응?》

《아니, 그럼 싸우시는데 그냥 들어오겠어요?》

《공장에는 뭣하러 왔냐?》

《맥드낼드씨가 반도호텔에서 기다리신다구요. k회사대리인의 초청이라구요.》

《같이 가겠냐?》

《그래서 왔지요 뭐.》

《차에서 기다려, 내 곧 나간다.》

신재는 억규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갔다.

억규는 두손을 빌듯이 가슴우로 치켜들고 목메인 소리로 말하였다.

《사장님, 제가 사장님을 속이다니요? 아닙니다. 사장님, 다만 저도 알수가 없어요. 무슨 판인지 알수가 없단 말씀입니다. 로무자녀석들이 갑자기 말을 듣지 않습니다요.》

《무슨 수수께끼같은 소리를 하고있어?》

《사장님, 생각해보셔요. 그 로무자녀석들의 대표인가 뭔가 하는 녀석들이 사장님을 만나고난 그때부터입니다. 로무자들이 일을 하지 않아요. 형사도 깡패녀석들도 눈을 밝히지만 누가 그렇게 시키는지 알수가 없답니다. 생산만이 낮아지고있으니… 사장님, 저도 정말이지 딱합니다요.》

《최주임이 대표들을 몽땅 잡아넣었는데 시키기는 누가 시켜?》

《아닙니다요. 최주임은 두 녀석밖에 붙잡지를 못했습니다. 나머지 녀석들은 어디로 도망쳤다고…》

그 말은 백창락에게도 뜻밖이였다.

《뭐라고? 네녀석이 거짓말을 하고있지?》

전화종이 울렸다. 차에 있기 갑갑하니 빨리 내려오라는 신재의 전화였다. 딸은 일찌감치 가서 아사히상사 대리인한테 들려보는게 더 좋지 않은가 귀띔까지 한다. 얼마전에 셍가는 《아사히》직기뿐아니라 조선에 있는 이전 일본제직기들의 마모되는 부속품들을 일체 만들어서 보낼수 있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창락은 오늘 그와 만나서 ㄷ방직 부속뿐아니라 많은 중소방직공장에서 사용할 부속들도 자기가 독점해서 수입할수 있도록 셍가와 상담을 하려는것이다. 셍가로서도 중소공장들과 일일이 대할수도 없는것이고보면 창락을 매판으로 해서 판로를 넓히는편이 훨씬 유리하다. 그것으로 해서 국내의 방직기계공장들이 파산을 하거나 왜놈의 자본이 점점 더 조선의 방직공업을 손아귀에 틀어넣거나 이런 경제적예속이 바로 정치적예속이 되건말건 백창락에게는 전혀 고려밖임은 물론이다.

《인제 곧 내려간다.》

창락은 일어섰다. 그렇지만 억규나 공장형편을 이대로 두고 가기가 불안하여 억규의 꼴을 한참 노려보다가 말하였다.

《들어온 원면은 무슨 일이 있어도 래일안으로 다 창고에 넣어야 한다.

그리고 이삼일어간에 생산을 원상대로 올리지 못한다면 지배인을 딴 사람과 바꿔야 하겠다는것을 알아두게.》

억규는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무서운 낭떠러지에 서있는것처럼 현기증이 난다. 장돌뱅이라도 좋으니 누구에게 매이지 않고 벌어먹고싶어진다.

오인숙이가 아직도 한구석에 서있건만 생각에 잠긴 억규는 눈치채지 못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사기협잡으로 돈이나 좀 모았다고 사람을 괄시해?》

백창락의 불호령하던 얼굴이 눈앞에 떠올라 밸이 꿀떡거려 견딜수가 없다. 자기도 일확천금해서 창락을 파산시킬 방도는 없는가, 뒤틀리는 밸속에서 열심히 생각해본다. 인숙은 미소를 그리고 억규앞에 나섰다.

《창락이 내 목을 따겠다고 하오.》

억규는 인숙을 조금도 경계하지 않았다. 인숙이가 억규의 비위를 맞출줄 알고있기도 하였지만 두사람은 어쩐지 만나면 마음이 통했고 친근감을 느끼군 한다.

《사장님도 무리하시네요.》

자기를 두둔하는 인숙의 어조는 창락에 대한 억규의 울분을 더욱 키질한다.

《인숙양, 창락이가 내 목을 따겠다면 나는 그를 감옥에 처넣겠소.》

인숙은 얼굴을 찌프렸다.

《공연히 그런 말씀 하시지 마셔요.》

《백창락의 돈벌이에 어느 하나 법에 걸리지 않는것이 있는줄 아오?》

《진정하셔요. 법에서 사장님의 소행을 몰라서 가만있겠어요? 부정축재하지 않는 재벌이 어디 있게 그러세요? 빽이 있어야 해요.》

《나도 그만한 빽은 있소.》

치밀어오르는 울화때문에 전후좌우를 생각하지 못하였고 인숙을 터놓고 말할수 있는 심복처럼 알고있는 억규는 헛소리를 치듯 이렇게 중얼거리였다.

《백창락이가 뭐요? 리승만에게 선거자금을 조달한 선거원흉이요. 벌써 감옥에 들어가야 했지. 그런 녀석이 감히 나에게 호령을 쳐? 생각하면 분이 터지오. 그러나 나는 <5. 16혁명>의 특사였어. 미중앙정보국의 위임을 받은 특사였어. 그때만 해도 박의장각하께서는 나를 하느님의 사도를 대하듯 하셨소.》

오인숙의 가슴은 별안간 흥분에 뒤설레였다. 억규의 말은 록음테프에 기록될것이다. 결코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다. 어쩌면 지하조직을 알아내지 못한 실책을 보상하고도 남으리라. 인숙은 귀를 기울인다. 억규의 말은 계속되였다.

《생각하면 내 공로에 비길 때 나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있소. 나는 정보부장을 만나서 맞대놓고 말할테요. 당신들은 모두 한자리씩 차지하고 나에게는 이따위 머슴살이를 시키는가구?》

인숙은 수화기를 들었다. 아무 번호나 돌려본다. 그리고 혼자소리를 하였다.

《아이 전화가 또 고장이예요.》

억규는 혼자생각에 얼굴을 찌프리고 눈을 감고있었다. 전화기앞에 막아선 인숙은 재빨리 나사못을 돌려 씌우개를 뜯고 테프를 꺼냈다. 그리고 가방속에 집어넣은 후 작별인사를 하였다.

《저는 가보겠어요. 너무 상심하지 마셔요.》

그리고나서 두시간이 못되여 인숙은 다시 림억규를 찾아 공장으로 돌아왔다. 억규는 그 두시간동안 공장간부들을 불러놓고 창락에게서 받은 화풀이를 하고있었다.

《생산을 이삼일동안에 제대로 높이지 못한다면 모조리 다 목을 딸테다. 정신을 바싹 차리고 일해라!》

모두 표정이 시쁘둥해서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인숙은 억규에게 다가갔다.

《정보부장님이 부르십니다.》

《아니 뭘? 그런데 인숙양이 어떻게?》

《차가 기다리고있어요.》

《차까지 보내주셨나?》

억규는 기쁨에 넘쳐 어째서 오인숙이가 정보부장의 심부름을 올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지도 않았다. 인숙의 빽이 어쩌면 정보부장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머리 어느 한구석에서 어렴풋이 해보았을뿐이다. 억규는 언젠가 정보부장이 자기를 부르리라는것을 은근히 믿고있었다. 정보부장은 억규가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밀려나올 때 이렇게 말했었다.

《그간 <국가재건최고회의>안에서 서로 오해해서 오는 미묘한 공기가 좀 있은것 같네. 그래서 억규군에게 얼마간 화가 미친 모양이네만 내 반드시 올려오겠으니 당분간 참아주게.》

억규는 무엇인가 공연히 떠들썩해서 인숙을 앞세우고 층계를 내려왔다.

그런 그는 인숙의 어딘가 해쓱해있는 얼굴빛을 보지 못하였다.

《아, 이거…》

미군운전사를 보자 림억규는 자기가 최상의 대우를 받는데 감격해마지 않았다. 그는 무엇때문인지 시계를 보았다. 오후 8시 30분, 지혜가 ㄷ광산 페갱에서 강우며 복희들을 만나고있던 같은 시간이다. 억규는 정보부장이 이맘때 찾는걸 보니 만찬회가 있을것이 뻔하다고 생각하면서 공연히 저녁을 먹었다고 생각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있을 때 젊은 장교들이 매일처럼 밤마다 료정에 모여 유쾌하게 기염을 뿜던것을 회상하고 빙그레 웃었다.

한시간후 인숙은 죽은 사람처럼 컴컴한 얼굴빛으로 혼자 자동차안에 등을 기댔다.

차는 신학교앞에서 멎었다. 정문을 들어서는 인숙의 두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그는 정문에서 다시 례배당쪽으로 가는 철문에 들어섰다.

례배당꼭대기에 달린 외등이 수림에 싸인 뜰안을 우중충하게 비치고있었다. 불빛을 따라 걷는 오인숙의 모습은 주위를 둘러싼 우거진 고목의 그늘과 어둠때문에 위험으로 다가가고있는 정체모를 녀자의 영상 그대로였다.

인숙은 례배당 정문이 아니라 뒤담으로 돌아간다. 거기 조그만 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곁에 잡부인 벙어리령감이 기다리고있을것이였다. 30년이나 이 교회에서 잡부노릇을 하여온 윤심의 아버지다.

오인숙은 조그만 문을 열고 들어서서 다시 지하실로 통하는 비밀문곁으로 갔다. 이 지하실로 인숙은 세번째 찾아온다. 인숙에게 무엇인가 직접 물어볼 일이 생길 때 맥드낼드는 인숙을 이 지하실로 불렀다. 그때마다 오인숙은 잡부령감이 항상 마음에 께름직하였다. 벙어리라 말도 할수없었지만 인숙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어째선지 사나와보이군 해서 오한이 일어나는것처럼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로인은 거기에 없었다.

강아지를 죽게 한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자기를 벙어리로 만든 맥드낼드의 지시에 의해서만 움직여야 하던 그는 이 원한의 소굴에서 벗어나 지금은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딸과 함께 새로운 생활을 하고있는것이다.

인숙은 안으로 빗장을 꽂고 주단이 깔린 계단으로 조용히 내려갔다.

그런데 오늘 그는 마치 무덤속으로 어쩔수없이 다가가는것처럼 생각되면서 가슴속에 이름모를 공포가 설레였다. 그러면서도 인숙은 거역할수 없는 바줄에 끌려당기우는것처럼 내려가고있었다.

《정탐!》 혼자 그렇게 중얼거린 인숙은 왜 그런지 몸을 우두두 떨었다.

첫방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인숙이가 조그만 의자에 앉자마자 맞은편 문으로 맥신부가 나타났다. 그는 기미가 달린 얼굴을 약간 천장으로 올리고 검은 도포자락으로 방바닥을 쓸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고개를 숙인 오인숙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알아듣기 힘든 낮은 소리로 중얼중얼 간단한 기도를 했다. 그리고는 다시 뒤로 물러나 커다란 안락의자에 앉자 꿰뚫을듯 한 눈초리로 인숙을 바라본다.

인숙은 별안간 현기증을 느껴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러자 마치 독수리가 미끼를 발견하고 커다란 두 날개를 펼치듯 도포를 걸친 검은 두팔을 벌린 맥드낼드는 쓰러질듯 한 인숙의 어깨를 감싸안고 의자에 앉히였다.

거동은 친절스러웠으나 쏘는듯 한 얼굴표정만은 바꾸지 않는다.

《오우, 얼굴빛이 나쁩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맥드낼드는 그의 높은 코가 인숙의 볼에 스칠듯이 기미가 달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다정한 표시를 하는것이였으나 인숙은 부지중 새로운 공포에 또다시 몸을 떨었다. 험상궂은 독수리의 얼굴이 너무도 가까이에 있었다. 혼탁한 갈색눈, 탄력이 없는 불그스름하게 흰 피부, 미국놈들의 얼굴이란 응당 그런것이였지만 인숙은 새삼스럽게 그 생김새에 혐오감을 느끼였다.

독수리는 다시 허리를 펴더니 인숙의 앞을 천천히 거닐면서 명령하였다.

《말하시오!》

맥드낼드의 한마디의 명령으로 인숙의 머리에서는 그에 대한 혐오감도, 이 지하실에 대한 공포감도 다 사라졌다. 오직 공허한 공백속에 되살아난 정탐의 관습이 대답을 하게 한다.

《림억규가 죽었어요.》

《어떻게 죽었소?》

《운전사가 단도로…》

《그리고 어쨌습니까?》

《곧장 이리로 왔습니다.》

《커피를 한잔 드시오.》

그는 차주전자에서 미적지근해진 커피를 한잔 따랐다. 그러나 차잔을 든채 웃으며 또 물었다.

《림억규가 무슨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억규는…》

인숙은 자기의 심장이 아프도록 고르롭지 못하게 고동치고있음을 느끼였다. 그러나 머리는 텅 비여있어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그저 아팠다.

맥드낼드는 차잔을 놓고 별안간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방안을 거닐었다.

한사람의 죽음이 준 충격때문인지 아니면 일이 뜻대로 진행된것에 만족을 느껴서인지 알수가 없었다. 다만 그때의 맥드낼드의 얼굴은 못생긴 돌처럼 험상궂었을뿐이다.

《인숙양, 큰일을 했습니다. 물론 방직공장의 지하조직을 알아내지 못한것으로는 쓸모없는 정탐이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공로는 높이 사야 합니다. 약속대로 곧 미국류학을 보내겠습니다.》

인숙은 그 말을 꿈속에서처럼 멍해서 들었다. 오랜 소원이 이루어졌건만 도무지 기쁘지 않았다. 억규의 죽음을 눈앞에 본 충격때문일가? 아니면 정탐생활 몇해의 기억이 너무도 어지러운것이여서 지친때문일가? 이상한것은 그런 선심을 쓰면서도 맥드낼드가 웃지도, 상냥하지도 않은것이다.

그의 얼굴에 그려진 보일듯말듯 한 미소는 오히려 잔인한 비웃음같았다.

《말하시오.》

맥드낼드의 가뜩이나 얇은 입술이 더 얇아지면서 말이 이새로 새여나왔다. 인숙은 중얼거렸다.

《아무 말도 안했어요. 그저 저를 무서운 시선으로 노려보았어요.》

갑자기 맥드낼드는 소리내여 웃었다.

《인숙양, 그래서 무섭습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억규는 비밀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안전을 위해 죽은 억규는 그의 값어치를 다했습니다. 자, 커피나 마시시오.》

미중앙정보국은 저들의 조작과 지시에 의해서 벌어진 박정희군사깡패들의 정변놀음의 진상이 세상에 드러날가 두려워 림억규를 죽인것이다. 흑막뒤의 이런 잔인한 놀음은 미제살인귀들의 상투적인 수법인것이다.

인숙은 설탕을 넣지 않은 쓰디쓴 커피를 단숨에 쭉 마시였다.

《정신이 듭니까?》

《네.》

맥드낼드는 잠시 인숙을 응시하자 휙 돌아서 들어갔다. 인숙은 왜 그런지 긴장이 탁 풀리고 온몸이 나른해졌다. 단도자욱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지던 억규의 영상이 떠오르면서 또다시 머리가 쑤셨다. 가슴이 찢어지는듯이 아팠다.

그는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비로소 커피속에 독이 들어있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목구멍에 불이 이는듯싶다. 인숙은 숨을 헐떡거리면서 쑤시는 머리로 쥐여짜듯 무엇인가 생각해내려고 애썼다.

《미국류학!》

입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린 인숙은 갑자기 맥드낼드에 대한 사나운 미움과 분노에 온몸이 터질듯싶어 《으악!》 하고 외마디소리를 쳤다. 그러자 전신에도 모진 충격이 와서 인숙은 의자를 넘어뜨리면서 방바닥에 쓰러졌다.

 

copyright © 2003 - 2018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