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동신문

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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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축축한 방안에서 잠을 깨였다. 공연히 가슴이 철렁하는것이 이상하다. 방안은 굴속처럼 캄캄하였다. 뙤창으로라도 밤하늘의 어두운 빛이 들어올상싶은데 창문도 보이지 않는다. 동서남북이 분명하지가 않았다. 그는 채 깨여나지 않은 무거운 머리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예가 어딜가?》

경찰서 감방안에서 깨여나던 생각이 났다. 감방에 와있을리 없건만 생활이 뒤엎어진것 같은 불안이 가슴을 휘젓는다. 그 불안때문에 잠이 완전히 깨여났다.

《그렇구나. 나의 집이구나.》

판자집거리로 이사온지도 반년이 넘는데 아직도 관습되지 않았단 말인가. 봄이 가고 무더웠던 여름도 가고 맑고 보송보송하던 가을도 가고 다시 겨울이 와서 그 마지막고비를 겪고있건만 아직도 남의 집처럼 서먹하단 말인가. 랭기가 팔다리를 가드라들게 하는가 하면 습기가 온몸을 끈적끈적하게 하였다. 곰팡내 같은것이 머리를 어지럽게도 한다.

《좀처럼 습관이 되지 않는구나.》

지혜는 자기가 아직도 단련이 부족하기때문에 견디기 힘들어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다른 생각이 그 생각을 밀어던지며 격분해진다. 로동자라고 해서 반드시 습기와 곰팡내에 익숙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부당한것이다. 로동자도 사람답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

지혜는 그런 마음의 탄력을 가지고 일어나 불을 켰다. 장난감처럼 좁은 방이다. 어머니가 불빛에 눈이 부셔하며 방금 잠에서 깨여난 목소리로 말하였다.

《벌써 동리가 모두 일어났구나.》

판자집은 길복판에 나앉아있는것처럼 주위의 소음이 그대로 울려왔다.

어뜩새벽이지만 사람들은 벌써 깨여난지 오랬다. 이전에 살던 동리와는 아예 관습이 달랐다. 얼어붙은 수도가에는 물통을 든 남녀로소가 추위에 와들와들 떨면서 장사진을 치고있다. 새치기한다고 욕설을 퍼붓고 그에 대꾸하는 소리가 온 동리의 졸음을 밀어던진다. 어느 집에선가 남편을 깨우는 아낙네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의 뒤통수를 때리는 소리며, 그 아이의 울음소리, 동리에는 어제의 피곤이 절반도 풀리기 전에 깨여나야 하는 생활에 대한 노기가 랭기속에서 거칠게 숨을 쉬고있었다.

곧 선잠을 깬 처녀들과 남정들이 부석부석한 눈에 졸음이 가득차서 공장으로 향했다. 그들의 선하품을 칼날같은 추위가 후려치자 눈에 눈물이 어리였다. 조반을 먹고난 지혜도 갈 차비를 하고 일어섰다.

《어머니, 갔다오겠어요.》

밥곽을 들고 문앞에 나선 지혜가 여느때없이 유난히 다정하고 밝고 무엇인가 더 말하고싶으나 말하지 않는 그런 표정으로 인사를 한다. 어머니는 그런 딸의 모습이 가슴에 짚여 유심히 바라본다. 애청학원에서 시위가 있던 날 아침에도 딸은 지금과 같은 표정을 했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

지혜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하였다.

《네, 하지만 걱정하셔야 할 그런 일은 아니예요. 돌아와서 죄다 말할게요. 어머니.》

어머니는 딸의 말을 항상 그대로 믿었다.

집을 나온 지혜는 생각에 잠기면서 천천히 그러나 힘있게 걸었다. 오늘 그는 한교대 200명의 직조공과 수리공들을 투쟁에로 일떠서게 해야 한다.

신심은 있었으나 태연할수가 없다.

요즘 공장은 전에없이 술렁술렁하였다.

그동안 위태로운 살얼음장우에 앉아 칼부림을 해오던 박정희도당은 그 무슨 《민정이양》이란 꼭두각시놀음을 벌려놓고 《대통령》자리를 가로타고 앉았다. 《군정》 대신 《민정》에는 그의 졸개들인 군복벗은 군사깡패들이 욱실거리였고 박정희의 정치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백창락이와 같은 예속자본가무리들이 자주 청와대의 으슥한 뒤문을 드나들었다.

ㄷ방직에도 깡패들의 수효가 늘었으며 사복경관이 자주 드나들었다. 작업장에는 감독이 또 한명 늘었다. 1직조에는 땅딸보와 함께 석철이라는 녀석이 하나 더 늘었는데 키가 작달막하고 매눈인 그녀석은 거의 작업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자는 주먹으로 질서를 확립하는데 있어 자기의 능력을 자부하고있는 사납기 그지없는 녀석이다. 그의 매눈이 가닿은 직조공들은 그 눈속에 담긴 살기로 해서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차디찬 소름이 돋쳤다. 박정희역도의 공포정치는 그렇게 모든 공장, 농촌의 구석구석까지 점점 더 사납게 죄여들고있었다.

문자 그대로의 혹독한 노예로동은 날이 감에 따라 한걸음씩, 한걸음씩 더 가혹해졌다. 기력이 진하여 쓰러지는 직조공의 수효가 늘었으며 먹을것이 없어 시래기를 줏거나 걸식을 하려고 조퇴하는 사람도 늘었다. 그리하여 생산이 감퇴되는 징조가 보이자 림억규는 감독을 늘이고 더 발악적으로 로무자들을 혹사하는것이다.

림억규는 리윤을 짜내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사장인 백창락의 몫은 물론 자기 주머니도 불려야 하며 ㄷ방직이 담당한 박《정권》에게 보낼 정치자금도 조달해야 하는것이다. 공장에서의 리윤은 로무자들의 기름을 짜고 목을 비트는것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억규는 생각한다. 그의 눈에는 로무자들이 자기들의 피치 못할 운명에 순종하듯 묵묵히 일하는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는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이렇게 흰소리를 쳤었다.

《로무자들이란 오히려 병사들보다 더 온순하다. 나는 진심으로 우리 로무자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어느때부터인지 그도 알수가 없으나 로무자들의 우울한 얼굴에서 두눈이 사나와져갔다. 처음에는 그래도 주먹으로 능히 다스릴수 있는 사소한 말썽이 드물게만 있군 하였지만 요즘에는 그러루한 작은 충돌이 빈번해졌고 사건의 내용도 스쳐지날수 없는것으로 확대되였다. 작업시간에 밖에 나와 담배를 피우는것이 금지되여있건만 그런 수리공 하나를 몇대 때렸다고 해서 한 감독이 보복을 당하여 3주일간 입원치료를 받을 정도로 부상을 당하였는데 누가 때렸는지조차 모르고있다. 그런가 하면 한번은 20명이나 되는 남녀직공이 한꺼번에 회계과에 몰려들어 로자가 없어 병세가 위독한 고향의 어머니한테 가보지 못해 울고있는 녀공의 체불임금을 받아내였다.

그밖에도 그런저런 언뜻 보기에는 우연적인 사소한 사건의 련발이 공장 깡패들이며 감독들, 지배인을 비롯한 관리들의 마음을 어수선하게 하였다. 로무자들의 눈은 날카로와졌다. 이전에는 가슴속에서 통곡하면서도 참을수 없게 억울한것들을 참아왔었다면 요즘에는 참을 대신 툭하면 항거의 날을 벼르는것이다.

하지만 지혜에게는 아직 완전히 장악했다고 할수 없는 몇몇 로무자들이 있었다. 명주도 그속의 한사람이다. 그는 의연히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았다. 여전히 자주 오인숙에게 불리워 다녔는데 그때마다 옥채나 언년이 아니면 지혜의 기분을 공연히 거슬리게 하면서 비웃음을 띠고 인숙이가 무슨 말을 하더라는것까지 비쳐보이군 한다. 때때로 지혜를 유심히 살피였는데 시선이 부딪치면 얼굴을 돌렸다.

하지만 그런 몇사람때문에 일을 지연시킬수는 없었다. 그들에 대한 불안을 누르며 지혜는 똑바로 시선을 쳐들고 공장정문에 들어섰다. 정문 맞은편에 서있는 광고판에는 얼마전부터 한장의 종이가 추위에 하느적거리며 그대로 붙어있었다.

《금월부터 종전의 불합리한 임금제를 페지하고 새로운 25등급임금제를 실시함. 매개 로무자들에 대한 등급규정은 지난 3개월동안의 실적에 의해서 제정함.》

광고판주위에는 깃털을 댄 외투며 가죽잠바들을 뜨뜻이 입은 깡패들이 살기띤 낯으로 출근하는 로무자들을 바라보고있었다. 20등급임금제를 실시한지 일년도 못되여 또 25등급제다. 20등급제를 실시한다고 할 때에도 로무자들은 《지금도 굶는데 임금이 더 낮아지면 뭘 먹고사누.》 하고 피나는 한숨을 지었었다. 그런데 다시 또 낮아졌다. 예고도 없이 한장의 종이쪽지로 된 고시가 수천명의 창자를 쓰리게 하고 굶고 병들게 한다.

하지만 오늘 로무자들은 한숨만을 짓지 않는다. 그들의 두눈에도 록록치 않은 격한 빛발이 있었다. 아침부터 공장안의 공기는 다치면 튕겨날듯이 팽팽하였다.

솜먼지, 소음, 감독놈의 눈총, 오늘도 작업은 여느날과 마찬가지로 진행되고있었다. 다만 호일이, 덕대, 옥채, 언년이들의 두눈이 자주 지혜를 향해 번뜩이군 한다. 지혜는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작업을 계속하였다.

드디여 전등이 깜박이며 점심신호가 났다. 언제나처럼 기계소리의 요란한 소음이 일시에 멎는다. 덕대가 몇몇 수리공들을 데리고 사람들의 앞장에 서서 뛰다싶이 밖으로 나갔다. 뒤따른 옥채는 따라나가지 않고 출입문을 다시 닫더니 안으로 빗장을 꽂았다.

《무슨 일이요?》

밖으로 나가려던 수리공들이 소리친다. 지혜가 작업장 한구석에 놓인 볼반작업대우에 올라섰다. 긴장때문에 얼마간 창백해진 얼굴이 사람들을 굽어본다.

놀라움과 호기심에 찬 수리공과 직조공들이 지혜앞으로 다가온다. 어떤 사람은 걸음발을 다우쳐 다가왔고 어떤 사람은 멍청하니 서있다가 급기야 사람들을 헤집으며 그렇게 모두가 욱 모여왔다. 새까만 눈동자들!

겁나하면서도 무엇인가 기대하는 시선들, 생활의 충격을 각오하는 빛발치는 시선들.

지혜는 그들모두를 옥채나 은실이, 언년이처럼 각성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들도 지혜를 똑바로 쳐다보며 다가오고있는것이다. 아무도 문을 열라고 소리치지 않았다. 파도같은 그 움직임, 로동의 대오가 지혜곁으로 모여들고있는것이다. 서둘러야 한다. 점심시간은 20분. 점심을 먹고있을 수위나 감독이 눈치채기 전에 빨리 끝내야 한다. 밖으로 나간 덕대네들은 망을 보고있을것이며 그들은 설사 순경들의 떼가 몰려와도 목숨을 걸고 20분은 막아줄것이다.

《여러분!》 하고 부르는 지혜의 절절한 목소리에 대답하는 시선들, 긴장된 기대로 해서 더한층 령롱해진 눈들이다. 이들의 가슴에 항거의 불을 지펴야 한다. 지혜, 너의 온넋으로!

《여러분, 우리는 매일 열세시간 일합니다. 마지막 피땀까지 쏟아 팔다리가 끊어지도록 일을 합니다. 참을수 없는 욕설을 들으며 일을 합니다. 짐승처럼 매를 맞으며 일합니다.》

고동색 짧은 치마에 검은 고무신을 신은 지혜는 두주먹을 쥐고 낮고 힘있는 목소리로 말하고있었다. 과로와 설음의 고통을 나누면서 낯이 익고 친숙해진 200명의 젊은이들을 향해 미여지는 가슴으로 호소한다.

《오늘도 점심을 싸가지고 온 사람이 몇명이나 됩니까? 우리의 임금은 굶어죽으라는 임금입니다. 그렇건만 감독들은 먹지 못하고 잘 자지도 못한 우리들을 안전장치도 없는 피대곁으로 그냥 때려몹니다. 우리가 그렇게 채찍밑에서 짐승노릇을 하려고 이 고된 로동을 하고있습니까?》

문뜩 녀공들의 얼굴너머로 쏘는듯이 바라보고있는 명주의 얼굴이 눈에 띄였다. 지혜는 격한 마음으로 한걸음 나선다.

《경옥은 잘리운 팔목을 안고 울고있습니다. 하지만 백창락은 위자료는커녕 치료비도 안 내려고 으르렁거리고있습니다. 경옥의 불행을 보고만 있겠습니까? 자기 일이 아니라고 얼굴을 돌리고만 있겠어요? 바꿔 생각해요. 명주, 우리의 팔목이 잘리웠을 때 동무들이 보고만 있다면, 외면해버린다면 마음이 어떻겠어요? 가난한 우리들은 이럴 때 서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군사<정권>이나 경찰은 자본가들이 우리를 굶겨죽여도, 피대에 감겨 불구가 되게 하여도 그놈들의 손끝 하나 다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 도울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못 가진 우리가 어떻게 도우면 되겠어요? 모두가 힘을 합해서 자본가들에게 대들어야 합니다. 공장은 종시 25등급임금제를 선포했어요. 사장은 미국놈과 짜고 군납품생산계약이 되자 공장에 헌병들을 득실거리게 하고 실시한것입니다.》

사람들이 너무도 조용하여 갑자기 지혜는 불안해졌다. 어떠한 진실도 이들의 가슴은 이미 흔들수 없게 굳어져버린것이 아닐가? 이 세상에 태여나서 거의 해빛이라고는 보지 못한 이들에게 어둠이 부당하다는것을 아무리 웨쳐도 알아듣지 못하는것이 아닐가? 지혜는 창자를 찢는 애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 우리는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집짐승처럼 온순해야 합니까. 어머니가 되였다고 해서 한푼의 퇴직금도 없이 거리에 쫓겨나야 하는것이 응당하단 말입니까. 체불된 임금은 받지 못하고 약값이 없어 부모형제를 잃는 사람이 한두사람입니까. 경옥이처럼 병신이 되는 동무가 한두명입니까. 왜 참아야 합니까?!》

지혜는 입안이 메말라 잠시 말을 끊었다. 성이 난 사람들처럼 묵묵히 서있던 수리공들중에서 누군가가 종시 소리를 쳤다.

《누가 참기만 하겠다고 했소? 더는 참을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왔소. 우리가 이래도 양처럼 온순하기만 한다면 얼마 안 있어 30등급, 40등급이라도 만들것이요.》

지혜는 북받쳐오르는 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요. 참을 때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습니다. 정녕 참을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왔습니다. 쓰러져 죽지 않기 위해 공장주와 싸울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대표를 뽑아 공장주에게 우리의 주장을 들이대야 합니다. 우리의 결심을 누구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할수 있는 우리의 대표를 우리 손으로 뽑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 회의의 목적이기도 하였다.

지혜는 대표가 가지고 갈 요구조건 10개 항목을 천천히 읽었다. 20% 임금인상, 구타금지, 벌금제페지, 8시간로동, 위자료와 치료비지출 등등 최저의 요구가 있을뿐이였지만 로무자들의 시선은 불현듯 불안에 가물거렸다.

처녀들이 이렇게 속삭인다.

《그렇게 됐으면야 오죽 좋겠어? 하지만 꿈이야.》

《우리 같은 팔자에 저런 일이 차례질려구?》

《공장주가 들어줄리 있어?》

《안 들어주면 일을 안하지!》

《일을 안하다니, 파업?》

파업소리가 나오자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파업! 쉬운 일이 아니다. 경찰들의 감시, 수입의 두절, 체포, 고문… 생각하면 응당한 요구가 무엇때문에 그런 무서운 위험의 각오를 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우리의 의사를 그대로 들이댈 용기를 가진 대표를 뽑읍시다. 대표는 우리 로무자가 소나 말이 아니라 사람이라는것을 떳떳하게 주장할것입니다.》

《지혜언니를 대표로 뽑아요!》

한 처녀가 그렇게 웨치자 지혜의 이름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올랐다.

지혜는 상기한 얼굴로 자기를 쳐다보는 로무자들을 뒤설레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무지한 폭압에 대항할 책임을 수행해야 할 대표로 된다는것이 결코 꽃다발의 영광일수가 없음은 물론이다. 대표인 그자신도, 그의 가족도 도마우에 올려놓는 비장한 각오없이 수행할수 없는 준엄한 임무다. 하지만 썩은 세상을 매장할 로동자들의 대표임을 자랑할 보람찬 임무이기도 하다. 지혜에게 각오가 모자라는것은 아니였다.

며칠전 모임에서 대표선출을 두고 지혜는 권범에게 성을 내였었다.

《위험한 일을 남에게 맡기는 그런 사람을 군중은 믿지 않을겁니다.》

《그럴 때도 있소.》

권범은 신중한 표정으로 지혜를 보고있었지만 입가에는 보일듯말듯 한 미소가 있었다.

《그럴 때라니요? 바로 지금이 공격개시를 알리는 홰불을 들어야 하는 결정적인 시각이예요.》

《그렇소. 그러기에 아무나 선출할수 없소. 거부 백창락이앞에서도 숙어들지 않는 기개와 체포, 고문, 투옥을 각오할줄 아는 용기를 가진 훌륭한 동무가 대표로 선출돼야 하오.》

지혜는 얼굴을 찌프렸다. 권범은 타이르듯 말했다.

《지혜, 최후를 각오할줄 안다고 해서 다 투사가 되는것은 아니요. 죽음을 각오하기란 그리 힘든 일은 아니요. 때로 너절한 인간들도 시시한 일때문에 목숨을 끊기도 하오. 우리는 죽음도 삶도 오직 투쟁을 위해서만 바쳐야 하오. 교수대에 설 각오가 있다고 다되는것은 아니요. 승리의 그날까지 걸어가야 하는 간고한 길-가시밭도, 암흑도, 절벽도, 혹한도, 굶주림과 학대와 굴욕이 있을수 있는 험난한 투쟁의 매 걸음이 훌륭해야 하오. 그 엄혹한 길을 헤쳐나가는 무서운 싸움의 나날의 극복과 전진이 죽음보다 헐하다고 생각지 마오. 지혜에게는 더 많은 시련을 이겨나가야 할 더 중한 과업이 있소. 더 큰 신심을 가진 사람만이 그 간고한 로정을 굴함없이 헤쳐나갈수 있소. …》

지혜는 권범이가 말하는 동안 그의 두눈에 비낀 준엄한 빛발을 뚫어질듯이 응시하고있었다.

《지혜, …그 어떤 고통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힘과 용기를 내여 끝까지 싸운다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수 있소.》

지혜는 고개를 숙이였다. 가슴속깊이에서 무엇인가 솟구쳐올라 크게 숨을 들이키였다. 이윽고 얼굴을 들어 권범의 검실검실한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숙연히 대답했었다.

《저의 생각이 모자랐어요.》

지혜는 자기의 이름을 부르며 흥분하고있는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본다. 나는 이들에게 정녕 투쟁의 불씨를 안겨주었단 말인가? 기쁨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때 언년이가 볼반작업대에 올라 지혜곁에 섰다. 그는 잠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더니 큰소리로 이렇게 웨쳤다.

《내가 가겠어요!》

신념에 넘치는 그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가슴에 무엇인가 찡하고 울려옴을 느낀것이리라,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인다.

《공장주와의 담판은 우리 투쟁의 출발입니다. 우리의 본격적인 투쟁은 담판뒤에 시작될것입니다.》

언년은 한마디한마디에 힘을 주어 천천히 말한다.

《어떤 공장에서도 자본가들이 순순히 로무자들의 요구를 들어준 례가 없습니다. 우리의 투쟁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자본가뒤에는 경찰들이 있고 군사깡패들이 있고 우리의 원쑤 미국놈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피를 흘리는 참담한 충돌도 각오해야 합니다. 누가 이 모든 가혹한 싸움을 이끌고나가겠습니까? 여러분! 대표로 저를 선출해주십시오. 저는 목숨바쳐 내가 맡은 임무를 다할것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큰소리로 수군거리였다.

《언년이는 훌륭히 할수 있어.》

《그렇지만 참을성이 없지.》

《참을성이 무슨 필요가 있어. 그애에게는 무서운 결기가 있는데…》

《어쨌든 좀…》

《괜찮아, 그만하면 잘난 처녀야.》

그리하여 대표는 선출되였다.

이윽고 점심시간이 끝난 고동소리가 울렸다. 옥채가 달려나가 출입문의 빗장을 뽑는다. 점심을 먹을 시간이 없는 그들은 그대로 자기 장소로 돌아갔다. 언년이가 지혜곁을 지나면서 말했다.

《명주에게 감시를 붙여요.》

비밀은 보장되지 못하였다. 작업이 거의 끝날무렵 명주가 땅딸보와 함께 나갔다. 그것을 본 옥채가 재빨리 그들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수위가 떠밀치는 바람에 문짝에 머리를 짓찧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옥채는 명주가 틀림없이 오인숙이한테 가리라 생각하였던것이다. 옥채는 인숙을 믿지 않았다. 명주가 인숙이와 자주 만나는 이상 그는 명주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명주는 오래 있지는 않았다. 돌아온 명주를 보자 옥채는 그에게로 달려가 딱 마주선다.

《땅딸보와 어디 갔었지?》

《남이 뭘 하던 너와는 상관이 없어.》

명주는 조금도 꿀리는 기색이 없이 눈을 치떠 옥채를 보며 말하였다.

《말해!》 하는 옥채에게는 오히려 명주만큼의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대표들이 백창락을 만나 무사히 담판을 끝낼 때까지 경찰이 몰라야 한다는 초조감이 앞서서였다.

《못하겠어!》

명주는 휙 돌아서더니 북짜기가 된 단사를 잇기 시작하였다. 지혜는 그때 명주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있음을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표정은 마음의 가책이 주는 그늘이 없이 언제나처럼 도고하였다.

뜻밖에도 옥채가 명주에게로 달려들어 모질게 팔을 잡아끌어서 일손에서 떼여내였다.

《놓아!》

명주가 노기에 차서 소리를 치면서 잡히운 팔죽지를 사납게 흔들었다.

기계들이 그의 목소리를 잡아먹고 더욱 기승스럽게 돌아친다. 그들의 목소리는 그들곁에 다가간 지혜만이 들었다.

《버러지만도 못한것이! 과자부스레기나 얻어먹겠다고 수천명을 불행에 처넣어?》

이상하게 명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흩어진 머리칼을 매만지면서 고아대는 옥채를 보고있을뿐이였다. 한참만에야 그는 아주 침착한 소리로 말하였다.

《흥, 내 다리를 분질러놓는다고 수천명의 불행이 씻어질줄 알어? 지혜도 이런 일이 감쪽같이 되리라고 생각했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어. 1직조가 아니라면 2직조에서, 아니면 정방에서 비밀이란 새여나기마련인줄을 모르고 했어?》

그는 다시 실을 잇기 시작하였다. 옥채는 어쩐지 여느때와는 다른 명주의 어딘가 통절한 표정에 한참이나 우두커니 섰다가 제자리로 돌아간다. 모였던 사람들도 제가끔 돌아간다. 작업장은 아무 일도 없었던듯이 소음과 무더위속에서 다시 부글부글 끓었다.

이윽고 지혜는 급히 호일에게 가서 말했다.

《이 쪽지를 어떻게 해서든 되도록 빨리 남수나 동혁에게 전달해줘요.》

호일은 기대의 가죽끈을 끊고 반장실로 달려가 가죽끈을 타러 창고에 나가야겠다고 말하였다. 반장은 성이 나서 호일의 머리를 갈겼다.

《이 자식이… 그러게 아침에 점검을 잘해야 하는거야, 부속만 가지러다니고 언제 일을 해?!》

어쨌든 하는수없이 창고에 나갈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나서 두어시간후 지혜는 기름을 치러 온 남수에게서 쪽지가 권범이한테 무사히 가닿았다는것을 알았다. 남수는 그밖에도 지혜에게 한장의 두툼한 편지를 전하고 갔다. 겉봉에 아무것도 씌여있지 않은 그 편지를 받아쥐자 지혜는 뜻하지 않은 예감에 가슴이 뒤설레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자 지혜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편지를 펼치였다. 원고에 익숙한 둥글둥글한 글씨가 지혜의 손을 떨리게 하였다. 오래동안 소식을 알길없던 강우의 편지였던것이다.

《지혜! 당신의 곁에 있을 때의 강우가 아니라 많이 달라진 새로운 강우가 이 글을 쓰고있다는것을 알아주오. …》

첫줄부터 편지는 지혜의 가슴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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