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동신문

제 3 장

7

 

13시간 기계사이를 뛰여다니고 실을 잇고 생산한 직물을 인수과에 바치고 고역끝에 집으로 돌아가군 하는 공장의 매일은 일견 단조로왔다. 그러나 인간의 마지막권리마저 짓밟히우는 학대와 굴욕의 참혹한 생활처지로 해서 단조로울수도, 단순할수도 없었다. 매일처럼 반드시 누군가가 욕을 당했으며 매를 맞았고 울고 성을 내였다. 누군가가 기력이 진해서 쓰러졌으며 누군가가 사고로 해서 부상을 당하였다. 부상을 당한 한사람의 운명이 자주 온 가족의 운명에 사나운 타격을 주었다. 이 불상사의 련쇄적인 반복이 공장의 례사로운 날들이였다.

과로는 사람들의 육체를 보이지 않게 서서히 깎아먹는다. 기계는 기름이 마르면 돌아가지 않건만 사람의 육체는 야속스러워 체력이 깡그리 소모된 후에도 움직이고있다. 작업을 끝내는 신호가 날 때면 쓰러지려는 몸을 가까스로 지탱하느라고 비칠거리였다. 그런데 천필을 인수과에 바치는 일이 아직도 남아있다. 등급을 가지고 또 한번 억울한 처사를 당해야 하며 천필의 무게때문에 소모된 육체를 다시한번 지지눌리워야 한다.

그 모든 일을 끝낸 후 비로소 후 한숨을 지으며 머리에서 발바닥까지 뒤집어쓴 솜먼지를 머리수건으로 대강 툭툭 털고 탈의실로 갈 때까지 로무자들은 열병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가까스로 걷는다.

더구나 새로 사들인 아사히상사의 낡은 직기들은 직조공과 수리공들의 애를 말렸다. 부속품들의 마모가 혹심해서 기계는 자주 고장을 내였고 날실은 연방 끊어지고 짜진 천에는 원인모르는 흠집이 자꾸만 생겼다. 생산량은 축감되고 생산품의 질은 떨어졌다. 한 직조공이 참다못해 한탄을 한다.

《공장주도 미물이야. 이런 낡아빠진 기계는 왜 사들여?》

수리공이 허구픈 웃음을 그리며 조이던 스파나를 땅에 툭 떨구더니 기운없이 대답하였다.

《제 주머니 돈으로 사왔어야 미물이지. 공금으로 사왔으니 꼬물도 손해볼게 없지. 녹아나는건 로무자인 우리뿐이구…》

《공금? 우리의 임금을 자른것이지?…》

그런데 오늘 탈의실로 뜻밖에 소문이 퍼져 들어왔다.

《임금을 준대. 돈으로 준단다.》

넉달만에 처음 받는 현금이였다. 바라지도 못한 행운이 아닐수 없다. 이럴 때면 언제나 그렇듯이 누구보다도 경옥의 두눈이 빛났다. 그의 눈앞에는 알사탕을 받아드는 조카애들의 깡충거리는 모습이 보이는 모양이였다.

지치고 피곤하지만 않았던들 그리고 그 반달로임이 보름동안의 쌀값과 집세를 충분히 지불할수 있는 량이였다면 그들은 기뻐 만세를 부르며 회계과로 달려갔을것이다. 떠들기에는 너무도 피곤하였고 어차피 부족되는 돈이기에 즐겁기만 할수도 없다.

그러나 옷을 갈아입는 손이 어느덧 헤덤벼졌다.

《나는 믿어지지 않는다. 무슨 꿍꿍이속이 있을거야. 전번에도 공장을 그만두고 나간 사람의 밀렸던 세금까지 우리한테서 받아내지 않았니.》

은실이가 불안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한 처녀가 맞장구를 쳤다.

《공장주가 인심을 쓸 때 오히려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해. 우리 마음을 눅잦혀놓고서는 송두리채 팔아먹을걸.》

《이번은 정말일거야. 로조분회장이 공장주한테 항의했다던데, 명주가 서기한테 들었대.》

《그 아첨쟁이 나비수염이 항의를 해? 명주, 너 정말 들었니?》

명주는 미소를 그리고 그들을 둘러보며 조용히 말하였다.

《들었어. 서기가 나에게 과자까지 주면서 말했어. 그리고 또 말하기를 임금을 받으면서 뭔가 불평을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어. 서기의 말에 의하면 불평을 하는 그런 사람은 로무자들의 권익을 주장하는 훌륭한 회원이라구. 그러니 분회에서 알아야 한다고 하더군.》

옥채가 명주의 앞으로 한걸음 다가선다.

《현금으로 임금을 준다는데 무슨 불평을 한다더냐?》

명주는 여전히 웃으며 대답한다.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어… 훌륭한 회원이 되고싶거든 내앞에서 불평들을 해라.》

옥채의 두눈에 파란 불이 일었다.

《고자질하는 버릇을 아직도 못 고쳤니? 과자를 내놓는건 서기년의 버릇인걸 모르냐? 은실이는 속이 메슥메슥하다고 한개도 안 먹고 나왔어. 언년은 <서기로 오신줄 알았더니 정탐하러 왔구만요. > 하고 말하고 나왔어. 그리고 너는 삐라사건때 약속한걸 잊지 말아야 해.》

옥채는 가슴이 뒤번져져서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라 입술을 깨문다.

명주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다.

《내 다리를 분질러놓겠다는것 말이냐? 언년이는 내 모가지를 분질러놓겠다고 했고… 잊을수 없지. 옥채, 너나 언년은 밸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니까 꼭 그렇게 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겁이 나지 않는구나. 별로 아까운 모가지도 아니니까.》

지혜는 그렇게 말하고있는 명주의 얼굴에 비낀 서글픔의 표정을 보고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지혜는 명주에 대해서 처음보다는 많은것을 알고있었다.

명주는 조부모밑에서 자라났다. 소금을 굽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세살 난 명주를 버리고 어디론가 시집을 갔다고 한다. 며느리를 원망하는 조부모밑에서 자란 명주는 어머니를 미워하면서도 그리워하였다. 그리워지는 그것으로 해서 더 어머니가 미웠다. 일곱살 난 명주를 남의 집 아이보개로 보내야 할만큼 조부모의 생활은 가난하였다. 주인집마누라의 학대, 12살때부터 공장에 다니면서 감독이며 반장들에게 받는 천대, 그런 속에서 명주는 인간의 따뜻함을 전부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고독한 사람일수록 누구보다도 따뜻한 인정을 심혼깊이에서 바라고있다는것을 사람들은 다 리해하지 못한다.

《옥채, 무엇때문에 명주를 탓하고있어? 명주가 정말 일러바치려고 생각했다면 서기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을것 아니냐?》

지혜가 그렇게 말하자 명주는 어째선지 자기의 얼굴을 보이지 않고 휙 돌아서 나갔다. 그 거동에 처녀들은 왜 그런지 가슴이 뭉클하여 잠시 덤덤히들 서있었다. 이윽고 은실이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임금을 타러들 가자.》

회계과앞에는 임금을 타려는 로무자들이 긴 줄로 늘어서있었다. 옥채와 경옥이가 태연하게 앞으로 비비고 들어간다. 젊은 청년들은 말로는 나무라면서도 자리를 내주었다. 옥채는 지혜도 자기앞에 끄당겼다.

지혜는 명주에 대한 생각에 잠겨 어떤 일이 벌어지고있는지 처음에는 알지 못하였다.

지혜앞에 서있던 경옥의 차례가 되였다. 도장을 넣으면서 이름을 댄다. 곧 작고큰 지전들이 나왔다. 다음은 지혜다. 지혜도 도장을 넣었다. 곁에서 경옥이가 돈을 세여보고있다. 지혜가 막 돈을 받아드는데 경옥이가 그를 밀어젖히며 출납구로 달려들었다.

《돈이 모자라요!》

《얼만데 모자란단 말이야?》

《천백원밖에 없어요.》

《그럼 꼭 맞는다.》

옆의 출납구에서도 무엇인가 옥신각신이 벌어지고있었다.

《맞긴 뭐가 맞아요. 제 임금이 얼만데요?》

《천륙백원이지. 그렇지만 <아사히>기계로 짜겠지? 그런 훌륭한 기계에서 이전것보다 덜 짜지 않았어? 그러니 2할 감한다. 그리고 로조입회금이 백원, 세금에, 벌금에…》

회계원은 시끄러워하면서 더 말하지 않았다. 회계과앞은 갑자기 소란해졌다.

《누가 로조에 들겠다 했소?》

《<아사히>직기가 훌륭하다고? 빌어먹을것을 잘도 생각해낸다. 잘도 생각해내!》

한 수리공이 돈을 쥔 손을 쳐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차라리 목을 비틀지! 그럼 고된 일을 하느라고 고통이나 안 당하고 죽을수 있지 않소.》

누군가가 분통이 터져 목갈린 소리로 고함을 쳤다. 한 청년이 회계과의 문을 박차고 들어간다. 서기의 고함소리와 출납원처녀의 악 하는 비명이 들렸다. 의자들이 깨여지는 와지끈 소리가 났다. 뒤이어 문이 탕 열리더니 방금 들어갔던 청년이 피흐르는 코를 움켜잡고 누군가에게 밀치워 비칠거리며 나왔다. 허우대가 큰 덕대였다. 열려진 문으로 몇명의 수위녀석들이 보였다. 수위란 말뿐이고 백창락이 기르고있는 깡패들이였다.

한패의 청년들이 덕대의 코피를 닦아주며 어디론가 갔다.

《혼자서 맞서야 소용없어.》 하는 호일의 말이 그들속에서 들렸다.

《개자식들, 개자식들!…》

덕대의 되풀이하는 피섞인 목소리가 수없이 들려왔다. 주위는 잠시 조용해졌다. 돈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둘 말없이 돌아갔다.

경옥이가 별안간 울기 시작하였다. 그는 돈뭉치를 꾸겨쥔채 멎을줄 모르고 울었다.

지혜는 경옥의 팔을 붙들고 잡아끌듯이 천천히 걸었다. 뒤에서 옥채의 적의에 찬 챙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는 살수 없어. 모든걸 부셔야 해! 버러지처럼 살수는 없단 말야!》

임금을 받은 로무자들은 뜰안의 여기저기에서 한패거리씩 수군거리였다.

울상을 하는 사람, 울분을 터뜨리는 사람, 그러나 아직도 무표정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가혹한 처사에 이미 습관이 되여 한번 크게 한숨을 지었을뿐 그대로 말없이 터벌터벌 돌아간다.

지혜는 때때로 슬며시 뒤를 돌아보면서 누군가를 찾았다. 호일은 몇몇 청년과 함께 덕대를 데리고 저편 구석에 있다. 옥채는 녀공들 몇몇에 둘러싸여 꺼리낌없이 불평을 터뜨리고있다. 두사람은 자기나름으로 자기 성미에 맞게 공장의 부당한 처사를 로무자들에게 명백하게 인식시키자고 한 지혜와의 약속을 지키고있는것이다. 다만 은실이만이 보이지 않았던것이다.

그런데 은실은 뒤에가 아니라 그들보다 훨씬 앞에 있었다. 누군가와 단둘이서 걷고있었다. 례배당 고지기의 딸인 윤심이라는 처녀와 함께 그는 천천히 걸어간다.

지혜는 그들뒤에 되도록 가까이 다가갔다. 윤심의 가는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참아야 해. 참는자에 복이 있느니라 하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어. 모든것은 하느님의 뜻이야. 우리 불쌍한 양의 무리인 사람의 힘으로는 어쩌는수가 없지 뭐. 은실아, 분해하면 하느님앞에 죄를 짓는거란다.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거니까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해. 착한 마음씨를 가져야 해!》

은실은 응, 응 대답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있다. 윤심이가 말을 끝냈을 때야 비로소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느님이나 예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그래서 네 말을 알아들을수가 없구나. 그래도 네가 착하고 얌전한 동무 같아서 좋아. 그렇지만 말이다. 나는 그렇게 참기만 하는 너나 너의 아버지가 훌륭해보일대신에 불쌍해보여. 불쌍해서 막 가슴이 아파. 글쎄 너의 아버지가 듣지 못하게 된것이 어떻게 하느님의 뜻이겠니?》

윤심의 아버지는 30년이나 신학교 례배당에서 미국선교사들의 시중을 드는 노복이였다. 그가 귀를 듣지 못하게 되고 그것때문에 벙어리가 된것은 그가 젊었을 때 갓 낳은 윤심이와 윤심이처럼 착하던 안해와 함께 가난하나 행복하게 살던 어느날에 있은 일이였다.

맥드낼드의 처가 몹시 사랑하던 땅개가 무엇때문엔지 갑자기 죽었다.

녀편네는 울고불고 하고 맥드낼드는 불이 인것처럼 펄펄 성을 내였는데 의사의 진단에 의하면 잘못된 음식을 먹어 관격이 돼서 죽었다는것이다.

젊었던 맥드낼드는 개물을 주군 하던 윤심의 아버지의 뺨을 후려갈겨 고막을 터쳐놓았다.

미국선교사들이 이르기를 하느님의 뜻에 의해서 징벌을 가한 맥드낼드는 잘못이 없고 윤심의 아버지의 귀의 고막이 터진것은 그렇게 운명지어진 하느님의 뜻이여서 참아야 하며 개를 죽인 악마의짓은 일생 하느님께 기도를 드려 속죄를 해야 한다는것이다. 착하고 어질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윤심의 아버지는 아무런 반항도 없이 그렇게 살았다.

《착한 너의 아버지가 무슨 죄가 있어 일생을 속죄해야 한단 말이냐?》

윤심은 한숨을 지었다.

《나도 가슴이 아파. 원망스러워하는것은 죄를 짓고있는것이지만 가슴이 아픈것을 어쩌는수가 없구나. 그래서 나는 때때로 생각하군 한다. 더 참기 어려우니 더 많이 죄를 짓기 전에 차라리 하느님께서 빨리 나를 불러주셨으면 좋겠다고말이다. 우리 아버지도 항상 그렇게 기도를 드리고있어.》

19살에 벌써 죽기를 원한다.

《윤심아, 그건 아주 나쁜 생각이다. 윤심이만 아니고 우리모두가 억울하게 살고있는데 네 생각은 말고라도 동무들이 불쌍해서라도 저만 죽어서는 안되지 않니? 13시간이나 피를 토하며 일하고도 시래기범벅이나 먹어야 하는것이 억울하지도 않니? 그런데 공장주는 또 임금을 낮추었어. 그런 공장주에게 인정이 꼬물만큼이라도 있다고 생각해? 일한것만큼 돈을 받아야 하는것은 당연하지 않아? 너의 아버지를 못 듣게 만든 맥드낼드신부는 하느님앞에 죄를 짓지 않아서 그렇게 호강을 하니? 윤심아, 정신차려야 해. 신부옷을 입었건, 장교옷을 입었건 이 땅에 기여든 미국놈들은 우리를 짓밟고 조선의 재물을 로략질하러 왔어. 조선땅을 전부 병기창으로 만들고 조선사람을 총알받이로 만들기 위해 왔어. 그것도 모자라 괄세를 하고 때리고 죽이고… 그래서 너의 아버지는 듣지 못하게 되고 우리 득찬이는 죽었어.》

은실의 목소리는 낮으나 통절하였다.

《윤심아, 속지 말아야 해. 귀머거리를 만들고도 하느님의 뜻이라니 악착하구나. 아픔을 알아주는 불쌍한 사람끼리 서로 의지해서 살아야 해. 그래서 서로 동정하고 동무들이 수모를 당하면 대신 싸워주고 그래야 정말 착한 사람이 아니겠니?》

총명한 은실이, 지혜는 은실이가 윤심의 착한 마음에 힘과 정당한 항거의 불을 지피는데 성공하리라는것을 믿었다.

지혜는 산놀이계에 차츰 더 조직적인 성격을 강화해갔다. 호일이, 옥채, 언년이, 은실이들을 핵심으로 군중들을 각기 묶어세우게 하였다. 지혜는 그들에게 말했었다.

《조직이란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다섯이 되고 다섯은 스물이 되면서 부당한 사회와 맞대면할수 있는 튼튼한 힘이 되는것이 아니겠어?》

그때 뒤에서 지혜를 부르는 오인숙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부터 너를 찾아다녔어. 분회사무실에 잠간 들렸다 가.》

지혜는 잠시 생각하다가 인숙을 따라갔다. 로무자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지혜를 본다.

로조사무실은 나무토막을 대고 못질을 해서야 겨우 서있는 책상 두개, 나무의자 두개가 있을뿐인 초라한 방이였다.

《인제 방을 꾸려야겠어. 로조사무실이 이게 뭐니? 외양으로 권위가 갖춰지는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무실다워야지. 안 그래?》

《그래도 작업장보다야 좋구나.》 하는 지혜의 말에 인숙은 눈만 힐끗 했을뿐 따지지 않고 이런 말을 했다.

《지혜, 공장주란 정말 욕심꾸러기구나. 며칠동안 나와 분회장이 그렇게도 애를 써서 현금으로 임금을 지불하도록 했는데 이 꼴이 아니니? 공장주녀석은 로총분회가 로무자들의 신임을 받을가싶어 훼방을 놓으려고 그런것 같다.》

지혜는 인숙의 얼굴을 주의깊게 살필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군사깡패와 자본가들이 모의해서 만든 로총의 한 분회가 공장주와 어떤 갈등이라도 있는듯이 지껄이는 인숙이가 가소로왔다. 더구나 진리를 깨달은 자기를 앞에 놓고 너스레를 떨고있는 꼴이 한심스러웠다.

《지혜, 나는 로동운동에 대해서 너무도 아는것이 없단다. 네게 무슨 그런 책이 있으면 빌려주어.》

《내 책은 죄 의학책이였구 아버지것은 교육학, 그것도 거진 팔았어.》

《생활이 곤난해서?》

인숙의 얼굴에 동정의 그늘이 지나간다. 지혜는 그저 웃었다.

《로무자들의 처지는 정말 딱하지? 그 몇푼 안되는 임금을 또 깎아내다니, 너무해.》

인간을 놓고 말할 때 이중적인 계교에서 지혜는 인숙의 적수가 못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미 지혜는 장춘단공원에서의 지혜가 아니다. 자기를 무방비상태에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어떻게 하겠니?》 하는 지혜의 대답에 인숙의 한쪽 눈가가 짧은 한순간 찌프러졌다.

《아니야, 그래서는 안돼. 지혜, 나는 포부가 커. 로무자들이 응당 가져야 할 권익을 위해 싸우는것이 로총이 아니겠어? 지혜, 나와 함께 싸워줘!》

오인숙의 손이 지혜의 손등에 얹혀졌다. 막대기처럼 뻣뻣한 징그러운 손이다.

고리대를 하는 수전노인 오인숙의 애비는 일제때 읍에서 경방단 단장을 하였었다. 그러나 미국선교사들이 들어오자 하루아침에 독실한 신자가 돼서 연보를 두둑이 내군 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집사가 되고 새 목사가 부임하자 장로가 되였다.

딸도 아버지를 닮아 례배당에 가기를 좋아하였다. 오인숙은 대학에 다니면서도 학교에 못 나가는 날은 있어도 일요례배에 가지 않는 날은 없었다. 한것은 윤심이처럼 하느님을 믿어서가 아니다. 돈푼이나 있는 같은 또래 녀학생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사람들속에서 옷맵시와 젊음을 시위하는 들뜬 기분에 취하는것이 좋았던것이다.

대학 2학년이 되는 해 성탄절에 대학교 명예리사인 맥드낼드가 이삼십명의 학생들을 자기 집에 초청하였는데 그 명단속에 인숙이도 들어있었다. 그후 인숙은 자주 맥드낼드의 집에 드나들었다. 그놈의 처도 인숙을 각별히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인숙은 맥드낼드를 따랐다. 어딘가 음흉하기까지 한 맥드낼드의 숭엄한 표정은 그에게 공포 비슷한 불안을 느끼게도 하지만 어쨌든 독수리같은 힘에 꿇어엎드리는 마음이였다. 하루는 맥드낼드가 미국에서 손꼽히는 부호의 아들이라는 한 젊은 미군장교를 인숙에게 소개하였다.

그 장교는 례절이 있었고 쾌활하였고 총명해보였다. 돈의 부족함을 모르는 부호의 아들은 인숙의 후원자로 자처하면서 인숙이가 일찌기 경험해보지 못한 사치와 랑비를 마음껏 시켜주었다. 연회마다 새로 지은 야회복을 입었고 택시로 학교에 다녔으며 매일처럼 고급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호화롭게 지낼수 있는 학생은 신재또래 몇몇 재벌의 자식들뿐이였다. 사람이란 자기 수양을 쌓는데는 시간과 노력이 들지만 부화해지고 타락하는데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없는 법이다. 그런데 그렇듯 례절바르던 그 젊은 미군장교가 별안간 인사도 없이 귀국해버렸다. 그렇게 되자 인숙은 아무리 하고싶어도 연회마다 새 야회복을 입고 갈수 없어졌고 택시값도 절약해야 하였다. 젊은 장교와 교제하는 일년어간에 사치와 허영에 습관된 인숙은 저축했던 돈의 밑바닥이 드러나자 미칠것만 같았다.

탐욕에 눈이 어두운 인숙은 구원을 청하러 찾아갔던 맥드낼드의 집에서까지 랭대를 받자 마음이 뒤집혀 씻을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맥드낼드의 계집이 밖으로 나간 틈에 혼자 남은 인숙은 화장대우에 놓인 진주목걸이를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정신없이 집어들자 허둥지둥 달려나왔다. 대문앞에 나서자 어떤 놈이 기다리고있었던것처럼 손목을 붙잡았는데 인숙은 온몸의 피가 꺼꾸로 솟아오르는것 같아 그 자리에서 실신하였다.

병원에서 눈을 뜬 인숙의 베개머리에 그 젊은 미군장교가 구세주처럼 서있었다. 인숙은 그의 손을 붙잡고 흐느껴울었다. 장교는 빙그레 웃으면서 두툼한 돈뭉치를 내놓더니 자기를 도와 탐정이 되라고 하였다.

《값진 야회복도 진주목걸이도 다 차례질것입니다. 그리고 2년후에는 미국류학도 보내주겠습니다.》

인숙은 엇서지 않았다. 그럴 기력도 없었다. 정탐훈련도 고스란히 받았고 ㄷ방직 로조서기로 활동할 첫 임무를 맡았다. 젊은 장교는 두가지 과업을 주었는데 하나는 무엇때문인지 림억규지배인의 탁상전화속에 들어있는 소형록음기에 테프를 갈아넣는 일, 또 하나는 로무자들의 동태를 살펴 지하조직을 알아내는것이였다.

지혜는 인숙을 타이르듯 말하였다.

《인숙아, 너는 왜 그런 말을 자꾸만 하는지 모르겠구나. 네가 조금도 그럴 생각이 없다는걸 네 눈이 말하고있는데…》

인숙은 흠칠 놀라면서 지혜의 손을 덥석 잡는다.

《왜 너는 나를 믿지 않니?》

《로무자들은 일자리를 떼울가 겁이 나서 한마디의 불평도 없이 일하고있는데 말이다.》

《설사 로무자들이 무맥하다 해도 자각한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한다.》

젊은 장교녀석은 인숙에게 말했었다. 탐욕스러운자는 물질로, 비겁한 녀석은 협박으로 나꿔채야 하지만 깨끗한 심혼을 가진 녀자를 리용하기 위해서는 정의감에 호소해야 한다고 하였었다.

《참, 상두분회장이 애청학원의 교감이였다면서?… 상두는 너에 대해서 좋게 이야기하지 않아. 그렇지만 겁날건 없어.》

《나도 겁나하지 않아. 애청학원에서 그런 일이 있었어. 하지만 그때는 나도 철이 없었으니까. 경찰서에서 나는 어른이 되였어.》

《지혜, 나는 네가 정말이지 마음에 들어. 이전부터도 뭐든지 너를 돕고싶었어.》

그러는데 분회장 안상두가 옷깃밖으로 나온 넥타이를 흩날리며 활기있게 방안에 들어섰다.

《아, 이거 지혠가?》

안상두는 녀공들에게 하듯 하대를 한다. 지혜는 쓴웃음을 띠우고 상대방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였다.

《백창락사장을 모시고 또 일하게 되였구만요.》

《지혜 역시 그렇지. 뭐니뭐니해도 백사장덕을 안 입을수 있나. 교장도 백사장이 특별히 호의를 베풀었으니 ㄷ광산에라도 일자리를 얻었지. 그렇지 않고서야 일곱식구가 문전걸식할번 했지. 영철이, 상애도 백사장께서 자리를 마련해주셨는데 건방진것들이 말을 듣지 않더니 고생들을 했나부더군.》

안상두의 말은 사실이였다. 교장은 가장집물을 실은 달구지를 자신이 끌고 광산으로 떠났다. 영철이와 상애는 반년이나 일자리가 없어 헤매다가 지금 함께 어떤 인쇄소에서 일한다. 백창락은 영철에게 수리공견습자리를, 상애에게 청소부자리를 알선해주겠다고 했었다.

그때 와당탕거리며 땅딸보가 들어섰다.

《분회장, 이거 목이 클클해서 살겠소? 분회장의 옷이라도 팔아서 마셔야겠소.》

분회장 혼자 가로채기를 해서는 재미없다는 어조다. 분회장이 입은 옷은 로조입회금을 가로채서 지은 최신류행옷이였다.

《그러지 말고 감독님께서도 새 양복을 하나 마련하시지. 이만하면 천도 괜찮소.》

너에게도 한벌 해주겠다는 뜻임을 제꺽 알아맞힌 땅딸보는 씩 웃었다.

지혜는 그들의 주거니 받거니 떠들썩한 롱을 하는 틈을 타서 조용히 사무실을 나왔다.

구정물속에서 헤여나온것처럼 구역질이 났다. 피곤이 일시에 밀려들어 가까스로 걷는다.

《인간쓰레기들!》

경멸과 미움때문에 심장이 거칠게 뛰였다. 대학에서도 그랬고 장춘단공원에서도 그랬고 여기 로총분회에서도 언제나 더러운 시궁창속에 서있는 오인숙,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정의를 말하고 흐린 두눈에는 동정의 눈물이 담겨져있다. 그런 오인숙의 얼굴에 침을 뱉듯이 지혜는 또다시 중얼거렸다.

《인간쓰레기들!》

득찬에게 총을 겨눈 미군들, 검은 배속을 검은 도포로 가린 맥드낼드, 살인마의 충견들인 형사들, 깡패녀석들, 감독들… 이 모든 추악한 짐승들을 이 땅에서 쓸어버릴 그날을 앞당겨야 한다.

선량한 아버지와 어린 득찬의 원한을 풀기 위하여, 올가미속에서 신음하는 수천만의 깨끗한 심혼들을 위하여, 지혜, 너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투지와 증오의 홰불이 되여야 한다.

지혜는 밥보자기를 가슴에 부둥켜안고 가슴의 흥분을 누르며 어두운 밤거리를 혼자 천천히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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