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동신문

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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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조공들이나 수리공들이 공장에 와있는 열세시간중에 그래도 가장 발랄하게 움직일수 있는건 새벽에 출근해서 옷을 바꿔입는 탈의실에서의 얼마동안일것이다. 어쨌든 그들로 말하면 20전후 꽃나이의 즐거울 때가 아닌가. 쉴새없이 말하고싶은 처녀시절이 아닌가. 지금도 누군가가 그 젊음의 탄력있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있다.

《나는 어제 밤에 아주 멋진걸 생각해냈어. 뭔지 알아?》

《내가 네 맘속에 들어가봤니? 멋진대야 그 잘난 녀공의 생각이 그저 그럴테지.》

한 처녀가 입고있던 누데기옷을 옷함에 마구 쓸어넣으며 대꾸했다.

《까불지 마. 그럴 때는 들어줘야 해. … 어디 말해봐. 이얘대신 우리가 들어줄게.》

좀 나이 들어보이는 동그스름한 처녀가 벗은 웃옷과 치마를 방바닥에 놓고 차곡차곡 접으며 말을 꺼냈던 처녀애를 눈만 치떠서 바라본다. 그러자 갈아입을 작업복도 없어 머리만 수건으로 동이던 그 처녀가 모두를 둘러보며 신바람이 나서 이야기했다.

《응, 이런 생각을 했어. 더도말고 한 일주일만 말이다. 이렇게 해봤으면 좋겠어.》

《어떻게?》

들어주겠다던 처녀도 시답지 않은듯 깨진 거울에 비낀 동그스름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건성으로 묻는다. 그러나 말하는 처녀는 무엇인가 혼자 흥분한 목소리였다.

《이렇게 말이지. 땅딸보랑, 반장이랑 그 무슨 기사장, 인수원 그리고 그 무슨 계장들을 몽땅 끌어내다가 말이야…》

《그런것들은 끌어내서 뭘 해?》

《천도 짜고 기계도 고치는 일을 시키잔 말야.》

그제야 모두가 얼굴을 든다. 목깃짬으로 목만 내민 처녀도, 머리수건을 동이던 처녀도, 밥곽을 집어넣던 처녀도, 빈 옷함문을 열어제끼던 처녀도 호기심에 찬 시선을 돌린다.

《말을 마저 해! 그녀석들 로동을 시키고 우리는 뭘 하지?》

《우리는 말이다. 방맹이 하나씩 들고 으시대면서 그놈들을 한대씩 때려준단 말이다. 변소에 갈 때 한대, 한숨만 쉬여도 불평을 한다고 한대,옆을 봐두 한대… 힘들어서 숨을 씨근거려도 한대.》

그러자 녀공들은 즐거워져서 갑자기 웃고 떠들었다.

《정말 그렇게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새로 온 지배인은 왜 안 넣니? 그녀석도 우선 좀 본때를 보여줘야 해.》

《말조심해. 누가 들을라.》

《너나 고자질하지 마.》

《지배인이 새로 왔니?》

《그것도 몰라?》

《그건 알아 뭘 해.》

《하긴 그래. 어떤 놈이 와도 마찬가지지 뭐냐.》

《새 지배인이 말이야. 이전에는 대위였었대.》

《어마나, 취직 잘했구나. 우리 동리에는 제대한 소령이 있는데 넝마 주으러 다닌다나. 그 소령 말이 제대되면 다 그렇게 산다던데?… 그러면서 불평이 이만저만 아니야. 군인이란 총알받이로 써먹을 때뿐이지 그때 지나면 헌신짝만도 못해진다고 울상이지. 그래서 내 말해줬지. 사병이면 모르되 소령나으리가 무슨 총알받이겠는가구. 그랬더니 말이야, 그 소령말이 <국방군이란 다 미국놈의 총알받이란다.>, 그러잖겠어?》

《목소리를 낮춰. 잡혀갈 소리 하지 마. 무섭잖니? 장교들이 권총차고 정치를 하고있는 판인데…》

한 처녀가 얼굴이 해쓱해서 동무들을 말렸다. 몇몇 처녀애도 겁먹은 얼굴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돌아선다.

《그런데 지배인만 바꾸고 공장주는 안 바꿨니?》

《요 맹추, 공장주가 자기 모가지 따겠니?》

《그런데 정말 지배인이 장교였어?》

《그랬다지 않아.》

《제대했으니까 권총은 없겠지?》

《왜, 무섭니?》

《응, 무서워. 정말 무서워. 군사<정권>이라는게 무서운거야. 방맹이찜질이 아니라 총으로 쏘거던.》

《마구 잡아가더라. 거리가 하루아침에 스산해졌어. 마음을 놔야 살지. 뒤에서 누가 부르기만 해도 공연히 가슴이 덜컹 하는구나.》

《내 죄란 변소에 자주 간것밖에 없다. 그랬다고 죽이겠니?》

《흥, 알게 뭐야. 변소에 간다고도 총으로 쏠지. 방맹이찜질 가지고는 안되겠다 하고말이다.》

그때 옥채가 들어왔다. 한 처녀가 좋아라고 옥채에게 화살을 돌린다.

《그럼 옥채가 제일먼저 죽겠구나?》

《왜 죽어, 내가?》

옥채는 머리를 갸우뚱하며 쾌활하게 말하고 옷함 있는데로 갔다.

《변소엘 가면 지배인이 총으로 쏜단다. 너야 하루 열번도 더 가는데 총알이 열개는 더 박힐게 아니냐? 어째 안 죽겠니?》

이것이 녀공들의 즐거운 대화인것이다. 옥채도 유쾌한 목소리로 대꾸하였다.

《걱정마. 그래도 안 죽는다. 내 가슴은 무쇠로 만들어져서 총알이 닿으면 쨍강 소리만 내고 툭 튀여난단 말이다. 그뿐이겠니, 그때 내가 <무니야 무니야> 하고 주문을 외우거던. 그럼 총알은 혼비백산해서 총을 쏜 그녀석한테 도루 날아가지.》

옥채는 도시락주머니를 든채 재미스러워 흥에 겨워 말했다. 녀공들은 그의 터무니없는 말에 어느덧 유쾌해졌다.

《옥채는 별재간 다 있구나. 우리한테도 그 재간을 못 가르치겠니?》

《가르쳐주지. 아주 간단해. 매일 아침 찬물을 한사발씩 들이키고 이렇게 앞가슴을 올렸다내렸다 하루 스무번씩 운동을 하란 말이야. 하지만 나처럼 마음이 착해야 하구 그놈들을 나처럼 미워해야 해. 그래야 총알이 무서워서 달아난단 말이다.》

《옥채, 정말 너는 굶어죽어도 웃고 떠들며 죽겠구나.》

아까부터 창가에 서서 말 한마디 없던 눈이 깊숙한 언년이라는 직조공이 그렇게 조용히 말했다. 조용히 말해도 그 처녀의 목소리는 잘 들렸다. 잘 들린다기보다 가슴속에 파고들었다.

《그럴거야.》

옥채는 태연하게 자기의 옷함앞으로 갔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놀란 소리를 친다.

《아이구머니나, 이게 뭐니?》

탈의실 옷함을 연 한 처녀가 전기에라도 닿은듯이 손을 움츠리며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거기 한장의 글쪽지가 있었다.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항쟁의 땅에서 나서자란 그들은 그것이 무슨 종이라는걸 직감적으로 안다.

《인 줘! 놀래긴, 조용하란 말야. 이런 일에 고아대서는 안돼!》

옥채가 낮은 소리로 질책하더니 종이를 나꿔채여 읽기 시작하였다.

《직조공들!… 그 문 꼭 닫어. 수리공들! 우리는 하루 13시간이나 지쳐 쓰러지도록 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굶고 헐벗고있다. 동생들은 배고파 운다.

어머니, 아버지는 병들어 신음한다.

그렇건만 공장은 점점 더 우리의 목을 조이고있다. 먹다 굶을 임금조차 제대로 준 때가 있는가. 덮어놓고 불합격의 엉터리판정으로 그 임금마저 깎아서 준다. 배고파 쓰러져도 벌금이다. 적은 임금은 벌금때문에 또 뜯기운다.

수리공들, 직조공들, 정신차려야 한다. 왜냐하면 공장주는 새로 20등급의 임금제를 만들어 우리의 임금을 또 낮추자고 하고있는것이다. 임금이 이이상 더 낮아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겠는가. 예서 더 배를 곯고 어떻게 살겠는가. 어린 동생들의 울음소리를 무엇으로 달래겠는가. 어머니의 앓음소리를 무엇으로 위로하겠는가.

직조공들, 수리공들, 그래도 앉아서 참기만 해야 하겠는가.

참을수 없다. 더는 참을수 없다. 아무도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믿을건 같은 처지에 있는 우리자신들뿐이다.

우리는 부당한 모든것을 반대해 싸워야 한다. 힘들고 배고파 쓰러져 죽느니 당당하게 일어서 싸워야 한다.

직조공들, 수리공들!

싸우기 위해서는 마음과 힘을 합해야 한다.

단결하자! 투쟁하자!》

방안공기는 팽팽히 당겨진채 조용해졌다. 흥분한 표정들이 한장의 종이에 집중되였다. 누군가의 속삭이는 낮은 소리가 이렇게 말하였다.

《누가 넣었을가?》

서로 얼굴을 둘러본다. 그 표정들에 놀람도 있었고 공포도 있었지만 보다는 부당한것에 대한 새로운 자각에 흥분하고있다. 그렇건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저쪽 구석 문가에 기대서서 사람들의 표정을 주의깊게 살피던 지혜는 힘을 주어 낮은 소리로 말하였다.

《삐라에는 하나도 거짓말이 없다. 공장은 감옥이다. 우리는 학대받고 굶으면서 죽음에로 비칠비칠 다가가고있단 말이다.》

지혜는 언년의 살피듯 하는 깊숙한 두눈을 보았다. 언년에 대해서 아는것이 적었다. 통찰력이 있어보이는 그의 시선은 피할길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미 돌은 던져버렸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반석우에 서있는것처럼 안전하기를 바랄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러는데 또 두 처녀가 동시에 소리를 쳤다.

《내게도 있어!》

그러자 모두 자기 옷함들을 다시 열어본다.

《내게는 왜 없니?》

불안에 떨면서도 서운해하는 어조다. 갑자기 옥채가 눈을 반짝이면서 말하였다.

《없는 칸에 다시 넣자. 그래서 다 보도록 하자!》

옥채는 자기가 읽은 종이를 다른 옷함에다가 집어넣었다. 뜻밖에 삐라공작은 한계단 더 발전하고있지 않는가. 어제 밤 지혜는 음료수칸에 한장만 붙이라고 한 기태의 과업을 넘쳐 실행할 생각을 하고 열장을 써서 옷함에 넣었지만 그것이 또 날개가 돋아 생각지 않았던 덤을 받고있다.

새로 네다섯의 처녀가 또 들어왔는데 그속에 끼인 경옥이가 들어오자 바람으로 옷부터 벗으면서 숨이 차서 이런 말을 하였다.

《너희들 새 지배인 봤니? 나는 차에서 내리는걸 봤어. 무섭게 생겼어. 내쪽을 힐끗 보지 않겠니. 그리구 말야, 또 한사람 함께 내렸어. 사람들이 그러는데 분회장이래. 분회장이 뭐니?》

아무도 대답을 안한다.

《<한국로총>의 ㄷ방직 분회장이란 말이다.》

뜻밖에도 언년의 대답이다. 그는 아까부터 지혜를 뚫어질듯이 줄곧 바라보고있다.

《분회장도 우리 일하는걸 감독하냐?》

누군가가 묻자 언년은 비웃음 비슷이 입가를 약간 찡그리고 말했다.

《감독할지도 모르지, 군사<정권>이 공연히 파견했겠니?》

지혜는 뛰는 가슴으로 언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 녀공이 언년의 말에 대꾸했다.

《분회장이 감독을 해? 우리 오빠가 그러는데 로동조합이란 로무자들이 억울한 대우를 받을 때 모두 단결해서 공장주와 싸울수 있게 앞장서는거란다. 언년인 공연히 알은체를 하는구나.》

그러자 다른 녀공이 한심해한다.

《억울한게 한두가지냐? 어떻게 그걸 일일이 다 싸우겠니?》

《일일이 다 싸워야 해.》

그리고나서 지혜는 조용히 모든 억울한 대우를 다 렬거한다.

《임금이 먹고 쓸 정도가 못되게 적은것에 대해, 공연히 매를 맞고있는데 대해, 부상을 당했건만 치료비를 내지 않고 리유없이 해고하는것…》

지혜의 목소리는 차츰 흥분하면서 그들이 당하게 되는 부당한 처사들을 끊임없이 드러낸다. 깨우쳐주어야 하는것이다. 천대에 습관된 그들은 그 모든 부당한 처사들이 없어져야 한다는것을 모르고있는것이다.

《기계에 안전장치가 없다든가, 통풍을 하지 않아 솜먼지에 질식할것 같은것에 대해서… 그만하자, 끝이 없으니까…》

《아이구, 그런 싸움에 나서다 그 분회장 당장 목달아나게?》

그런 속에서도 옥채는 동무들의 이야기에는 참견을 하지 않고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옷함에서 삐라가 나오는가에만 주의를 돌리고있다.

《그 종이 빨리 보고 다음칸에 넣어라.》

그러면 자기 옷함에서 종이를 발견한 처녀는 흠칠 놀라면서도 옥채의 말대로 행동하였다. 지혜는 그런 옥채의 거동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문뜩 어떤 감동이 가슴속을 뜨겁게 한다.

사람들은 살아움직이고있다. 하나의 파문은 결코 그 하나로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창의성과 뛰는 마음을 담아 그 파문을 확대할줄 알았다. 한점의 불꽃은 늦던 이르던 언젠가 료원의 불길로 타오를것이다. 언년은 어떤 처녀일가? 호일은 삐라를 음료수칸에 붙였을가?

분회장을 두고 주고받는 말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경옥이가 말한다.

《그런데 모를 일이구나. 그 분회장인가가 무슨 항의를 하리라구는 믿어지지 않는다. 지배인앞에서는 하인처럼 굽신거리던데!… 앞에 타고있었는데 운전사가 내리기도 전에 생쥐처럼 먼저 내리더니 문을 열어주면서 어쩔줄 몰라 갑신거리던데 말이다.》

《그따위것 믿을게 없다.》

언년이가 줄곧 기대고있던 창문가에서 몇걸음 물러나면서 명백한 어조로 웨쳤다. 지혜는 가슴이 뛰였다.

《언년의 말이 옳아. 로총은 이름뿐이지 우리를 속이자고 만든거다. 공장주와 한속이다. 그러니 굽신거리겠지, 원래가 분회장이란 우리가 선거를 해야 한다. 하지만 군사<정권>은…》

군사《정권》이란 발음을 할 때의 그의 두눈에 짧은 한순간이였지만 홰불과 같은 노기가 지나갔다.

《새로운 법을 생각해냈다. 말하자면 분회장을 파견하는 제도를 만들어냈단 말이다. 선거한다면 로무자들은 어쨌든 자기편 사람을 투표하겠으니까. 그자들은 미리 손을 써서 저들의 끄나불을 보냈지.》

지혜는 드디여 언년의 전모를 명백하게 보았다. 손을 잡아야 할 귀중한 자기편이 그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언년은 혼자소리처럼 이렇게 중얼거린다.

《우리들을 무서워하거던…》

그러는데 뒤에서 또 옥채의 말이 들렸다.

《놀라지 마. 읽어봐. 그리고 다음칸에 넣어야 한다.》

경옥이가 언년의 말에 의아해서 반대하였다.

《언년인 별소릴 다하는구나. 아니, 어마어마한 장교들이 우리 같은걸 무서워해? 감독앞에서도 사족을 못 펴는 우리를 말야?》

그런 경옥을 한참이나 바라보는 언년의 얼굴에 멸시의 비웃음이 있었다. 지혜는 언년의 성급한 비웃음을 누르듯 말하였다.

《무서워하고있다마다. 경옥아, 우리가 얼마나 굳센가 생각해보려무나. 우리가 이런 지옥속에서도 견디고있지 않니? 잘 먹고 잘 입는 녀석들에게 우리 같은 고생을 하루만이라도 시켜보려무나. 방맹이찜질을 안해도 견디지 못한다. 경옥아, 우리들이 못살게 되면 얼마나 못살게 되겠니? 로무자들은 잃을것이 더는 없기때문에 오히려 강하다. 감독이 한사람의 로무자는 때릴수 있어도 로무자들모두가 힘을 합쳐 대든다면 감독이 아니라 공장주도 어쩔수 없을거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경찰이며 헌병이며 무시무시한것들이 있어.》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지혜는 태연히 확신을 가지고 대답하였다.

《그뿐이냐, 미국놈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도 우리들만이 아니란다.

4. 19때 경찰이며 헌병이며 그 무시무시한것들을 반대해서 어린 소녀도, 할머니들도 다 일떠섰던것을 잊었니?》

지혜는 잠시 말을 끊고 처녀들을 주시하였다. 못 먹고 못 입어 파리한 몸매들, 그러나 지혜를 바라보는 무엇인가 기다리고있는 절절한 시선들, 이윽고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하고라도 싸울 때면 얼굴쯤 할퀴고 머리칼 몇오리 뜯기울 각오를 하고 달라붙는다. 상대방이 힘이 장사인 경우에도 참을수 없어 달려들 때도 있다. 모욕을 당하고도 참는거야 비겁쟁이지. 필사적으로 대들면 힘이 장수같은 녀석도 뒤걸음친다. 그런 각오와 신념을 가져야 한단 말이다.》

그때 새로 들어온 처녀가 가벼운 소리를 쳤다.

《어마나, 삐라가 있구나.》

아직 삐라에 대한걸 모르고있던 경옥은 달려가서 나꿔채들고 읽는다.

그리고 언년이와 옥채를 둘러보면서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이러다간 큰일을 치겠구나…》

그는 종이를 한손안에 휴지처럼 꾸겨쥐였다.

《왜 꾸겨? 이리 내! 딴 사람도 봐야 할게 아니냐?》

옥채는 뜻밖에 부드러운 소리로 묻는다.

《왜 겁을 내니? 넌 이상해. 여돌찬데가 있으면서도 자주 겁을 내거던… 조카때문이냐?》

조카때문이다. 그렇지만 경옥의 마음은 이전과는 달리 흔들리고있었다.

삼각산 산놀이에서 그의 가슴을 친 공화국의 이야기들이 파도처럼 마음속에 밀려들었다. 그렇게 살게 해야 한다. 이 살벌하고 모진 생활속에서 경옥의 가는 팔이 조카를 보호하면 얼마나 하겠는가. 하다면 부당한것을 반대할 때 내리쳐질 목전의 칼자루나 몽둥이를 무엇으로 막는단 말인가. 경옥은 옥채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자 뜻하지 않게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조카가 불쌍해서인지, 옥채의 따뜻한 심정에 대한 감동때문인지 아니면 자기의 공포에 대한 설음에서인지 그자신도 다 알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별안간 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왜들 꾸물거리고있어!》

어느새 들어온 땅딸보 최감독이였다.

《엥? 일은 안하고 돈만 받겠다는거지?》

《아직 시간이 안됐어요. 그리고 여기는 녀자탈의실이예요.》

웃옷을 벗었던 처녀들이 드러난 팔을 감추려고 어쩔줄 몰라하는 광경을 둘러보는 땅딸보의 표정에는 추악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그런 그는 언년의 말에 이렇게 한마디 했을뿐이다.

《배때먹은년!》

그런데 옥채가 별안간 코웃음을 치며 땅딸보와 마주섰다.

《돈, 돈 하는데 언제 돈을 줘본 일이 있었던가요? 썩은 광목쪼박이 아니면 덩어리가 진 밀가루…》

《뭐라구? 이년이…》

그때 출근하는 녀공들의 새로운 한패가 탈의실에 밀려들었다. 그들은 땅딸보를 보자 습관된 공손한 태도로 머리를 숙이고 자기 옷함앞으로들 갔다.

그동안에도 땅딸보는 말대꾸를 하고있는 옥채와 눈이 빨개 서있는 경옥에게 야단을 치고있었다. 지혜는 새로 들어온 녀공들의 곁에 가서 낮은 소리로 말하였다.

《삐라를 못 본척 해야 해요.》

녀공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삐라는 남겨두고 앞치마만 꺼낸다. 곁의 녀공도 지혜의 절절한 시선을 보고 그렇게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 지혜를 공주라고 한 얄궂은 명주가 들어왔다. 땅딸보에게 볶이우고있는 옥채와 경옥을 보자 웃으며 옷함앞으로 간다. 옆의 처녀가 자기의 옷함안에 든 삐라를 보고 놀라며 명주에게 물었다.

《이게 뭐니?》

지혜의 가슴은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발각났구나! 하는 생각이 온몸을 굳어지게 하였다. 명주는 왜 그런지 지혜쪽을 흘깃 본다. 초조해하는 지혜의 얼굴빛을 보자 소리내여 웃었다. 그러나 삐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했다. 지혜는 삐라를 들고있는 처녀를 땅딸보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앞에 막아섰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땅딸보가 나는듯이 달려와 삐라를 나꿔채였다. 종이를 든 감독의 두손이 성이 나서 와들와들 떨렸다. 몇자를 읽어본 그놈은 뭐라 꽥 소리를 치면서 정신나간 사람처럼 옷함마다 죄다 열어본다. 2백개나 되는 옷함이 다 열려졌다.

녀공들은 바르르 떨면서 땅딸보의 거동을 그저 보고 서있었다. 명주만은 그 땅딸보의 거동도 멸시에 찬 조소를 가지고 바라보고있다.

감독은 몇장의 삐라를 한손에 움켜쥐고나서 널다란 코구멍으로 숨을 씨근덕거리다가 누구라 없이 사납게 쏘아보더니 창황히 밖으로 나갔다.

경옥이가 꾸겨쥐고있던 한장의 삐라만은 그가 치마폭에 감춘채 주저앉아있어 무사하였다. 옥채가 그 삐라를 태연하게 접어서 주머니에 넣는다.

《감독의 잔등에다 붙여줄가? 명주!》

옥채는 명주앞으로 몇걸음 다가섰다.

《아까 그 웃음소리 한번만 더 내보지?》

《흥, 발각난게 내탓이란 말이냐?》

《그렇게 굼땔수 있으리라 생각했구나. 차라리 여기 삐라가 있어요 하고 일러바친편이 정직이라도 하지.》

명주도 록록한 녀자가 아니다. 그는 또다시 코웃음을 치며 대꾸하였다.

《그 말 들으마, 요다음은 정직하게 고자질하지.》

옥채는 명주와의 대결이 말로써는 견딜수 없음을 느끼자 머리끝까지 노기가 치밀었다.

《일러바쳐라! 그러면 내가 부러뜨리게 될 네 다리를 땅딸보가 이어줄지 아냐?》

명주의 표정에서 일순 비웃음이 사라지고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창가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있던 언년이가 이렇게 덧붙였다.

《옥채는 무서운게 없구나, 나처럼 말이다. 옥채, 네가 명주의 다리를 부러뜨릴 때 나는 저애의 목을 꺾어놓겠다.》

그리고나서 언년은 천천히 밖으로 나간다. 경옥이가 떨리는 소리로 말하였다.

《너희들은 왜 그렇게 무서운 이야기들만 하니? 마음을 합치자고 방금 그러지 않았니?》

그 말에 언년은 휙 돌아섰다.

《자기편 사람들과만 마음을 합하는거다.》

명주는 그러는 언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착잡한 시선이였다. 적의가 있는가 하면 어떤 감동의 빛도 있었고 그늘이 있는가 하면 거만한 표정도 있다.

호일은 음료수칸에 삐라를 붙이는 자기의 과업을 어김없이 수행하였다.

삐라는 드디여 작업장에 커다란 파문을 던지였다. 오늘 로무자들은 억눌리여있지만 않았다. 틈만 있으면 일손을 놓고 수군거리였고 감옥같은 작업장을 새삼스럽게 세찬 시선으로 둘러보았다. 지혜는 그런 로무자들의 반응에 가슴이 두근거리였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다가올무렵 은실이가 지혜곁으로 와서 이렇게 속삭였다.

《지혜선생, 삐라보았어요?》

지혜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은실은 어두운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였다.

《최감독이 탈의실에서 몇장의 삐라를 찾아냈다고 해요. 지금 형사 둘이 와서 수색을 하고있어요. 옥채하고 경옥이가 <참회실>에 불리워갔어요. 매를 맞을거예요.》

《참회실》은 이름과는 달리 로무자들을 데려다 문초를 하고 징벌을 하는데다. 감독이 불러가기도 하였고 형사가 불러가기도 하였다. 공장안에 고문실이 있는셈이다. 이 땅에는 일류급의 공장에도 그런 중세기적인 고문실이 있었다.

지혜는 기대곁에 서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예상하지 않았었다. 삐라를 넣은 당사자인 자기가 아니라 다른 누가 문초를 당하리라는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옥채가 매를 맞고있다. 그 생각은 채찍으로 치는것보다 더 쓰린 아픔으로 뼈속에 스며들었다.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걷잡을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가슴속에서 참아야 한다는 생각이 쓰디쓴 약물처럼 솟구쳐올랐다. 지혜는 기둥목에 몸을 기대고 이를 악물었다.

점심시간이 거진 가까와졌을 때였다. 은실이가 또 달려왔다.

《지혜언니, 옥채가 나왔어!》

출입문앞에 옥채가 서있다. 조소에 찬 시선으로 소음과 무더위의 도가니속같은 작업장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옥채!》

지혜는 목청껏 소리쳐 불렀다. 소리는 기계소리가 다 집어삼키고 다만 곁에 서있는 은실이가 간신히 들었을뿐이다. 조금도 굴함없는 옥채의 모습에 지혜는 목이 메였다. 그런데 어째선지 옥채는 밖으로 도로 나갔다. 수위는 나가는 옥채를 뻔히 바라볼뿐 말리지 못한다. 출입문은 다시 닫겼다.

그들이 옥채를 만난것은 골방같은 복도 한구석에 모여앉은 점심시간이였다.

《매를 맞았니?》

한 처녀가 울먹한 표정으로 그렇게 묻자 옥채는 생끗 웃기는 하면서도 대답은 하지 않았다.

《말을 좀 하려무나.》

은실이가 애원하듯 그의 무릎을 흔든다.

《싱거운 일이야. 경옥이보고나 물어봐.》

경옥은 고개를 숙인채 소금에 버무려 가지고 온 국수오리를 먹고있었다. 목이 메여서인지 딸꾹질을 하듯 꿀꺽 삼키군 하였다. 옥채는 입맛이 없는듯 밥곽을 옆으로 밀어놓더니 창밖을 바라본다.

《벌써 락엽이 지는구나. 언제 세월이 저렇게 되였지?》

옥채가 그렇게 말했건만 아무도 락엽이 지고있는 밖을 보지 않았다. 옥채와 경옥이 두사람만 응시하면서 점심도 드는둥마는둥 한다. 옥채의 두볼은 부어올랐고 이마에 멍이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옥채가 낮은 소리로 《참회실》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참회실>에는 형사 두 녀석이 있었어. 하나는 매부리코에 입술이 두터운 험상궂게 생겼고 또 한 녀석은 실눈에 계집애처럼 발씬발씬 웃는 놈이였어. 말씨는 상냥하구… 형사녀석이 상냥하다는건 물귀신이 웃는것 같아 머리칼이 곤두서지. 아, 목이 탄다.》

《내 물 떠다줄게.》

은실이가 냉큼 일어서서 나갔다.

《실눈이 나를 보더니 <옥채, 오래간만인데? 공장에는 왜 또 도루 들어왔지? 사내들의 귀염을 받는게 싫증이 났나?> 하더군. … 더러운 녀석에게서 그런 말을 들어 싸지.》

《옥채, 그것때문에 마음쓸건 없어. … 그것때문에 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모두 동정하고있는데…》

《동정? 싹 집어치워! 건방지게, 동정이나 받을바치고는 차라리 음식점에 있는게 낫다… 에잇, 내 성미두 못돼먹었어.》

옥채는 한숨을 짓고서 미소를 그리였다.

《동정해주어 고맙다. … 실눈은 이렇게 말하더군. <자, 그건 그렇고 아침에 탈의실에 갔을 때 누구누구 있었지?>, 나는 창밖으로 먼산만 보면서 시답지 않게 대답해주었지. <그걸 누가 알아요. 적어두었나요? 나는 공부를 못해서 기억력이 없구요. >, 실눈은 그래도 성을 내지 않고 발씬발씬 웃겠지. <바른대로 말 안하면 재미없어. 더구나 나야 옥채에게 반한 처지인데 때릴수도 없구. >, 그래서 얼마간 바른대로 말해주었지. <땅딸보 최감독이 있었어요.> 하고말이지. 그랬더니 그 실눈이 갑자기 내 어깨를 곤봉으로 콱 찌르겠지. <야, 바른대로 말해!>, 나도 화가 나서 아무렇게나 주어댔지. <땅딸보가 없었는줄 알아요? 내가 들어갔을 때는 경옥이와 단 둘이 있었어요. 경옥이한테 어찌도 치근거리는지 꼴사나와서 내가 성을 내니까 두년놈이 합세해서 날 때리려들지 않아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매부리코가 펄쩍 다가들어 내 뺨을 쳤어. 경옥은 울음소리를 터뜨리면서 나더러 말했어. <옥채, 다 말해, 말하는데 어쨌니?>, 실눈이 다시 상냥하게 웃더군. <경옥의 말이 맞다.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삐라가 너희들이 한짓이 아니란걸 안단 말이다.>, 그래서 내가 또 말해줬지. <바보가 아닌분들이 우리가 모른다는건 왜 몰라요. 똑똑한분들이 누가 넣었는가를 몰라서 공연한 사람을 쳐요?>, 매부리코가 또 내 뺨을 쳤어. 아팠는가구? 아프기야 했지. 두볼에 불이 이는것 같았어. 대번에 볼이 부어오르더군. 그런데 실눈이 다음에는 경옥에게 달라붙었어. <최감독이 들어가기 전에 누구누구 있었냐? 대라!>, 경옥은 나를 보았어. 다 말해버리겠다는 눈치였어. 하기야 삐라를 누가 넣었다는걸 우리가 알리 있어? 넣은 사람자신이나 알가? 그러니 탈의실에 있던 사람들 이름을 죄 주어대도 무방할지 모르지. 그렇지만 형사놈들한테는 뭐든지 말 안하는게 상수야. 나는 눈으로 흘겨봤어. <저는 옥채하고 싸우느라고 잘 보지 못했어요. >, 경옥의 대답이지. 그러자 실눈이 난데없이 경옥의 팔소매를 걷어올리더니 팔죽지를 잡아비틀더군. 경옥이가 비명을 쳤어. 그녀석은 손바닥에 쇠붙이를 넣어가지고 다닌다고 술이 취하면 자랑하군 했는데 경옥은 그 쇠붙이때문에 살이 터졌어. 피가 흐르더군. 피가…》

옥채는 은실이가 가져온 물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경옥이도 나도 겁이 났어. 나는 겁결에 소리쳤지. <최감독보구 물어봐요. 최감독이 다 알고있어요. >, 매부리코가 내 멱살을 잡고 담벽쪽으로 몰고 가더니 내 머리를 짓쪼았어. 경옥은 떨고있었어. 입술이 새파래서… 가엾어보였지. 나는 얼마동안 머리를 짓쪼으니까 점점 눈앞이 희미해지고 아픔도 사라지겠지. … 그렇지만 곁에 있던 실눈의 목소리만은 똑똑히 들었어. <삐라는 빨갱이들이 넣었는데 공연히 너희들만 고생하는구나. 빨갱이란 그런거다. 자기들은 호강을 하구 남은 구렁텅이에 밀어넣구. > 하고말이다.》

지혜는 쓰린 마음으로 옥채를 보고있었다. 옥채가 힐끗 지혜를 본다. 그러나 무심히 다음 말을 이었다.

《나는 정신을 잃지 말자구 막 요동을 쳤지. 눈이 번쩍 뜨이더군. 매부리코의 얼굴이 내 눈앞에 있었어. 그 험상궂은 얼굴이 다만 매부리코의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짓밟는 이 세상의 모든 악마들의 얼굴로 생각되였어. 나는 정말 성이 나서 심장이 터질것만 같았어. 성미가 못돼서 자주 성을 내는 나지만 그렇게 화가 난 때는 더는 없어. 그리고 그건 내 성미때문이 아니야. 억울해! 모든것이 억울하단 말이다. 나는 이 썩어빠진 세상에 대고 고함을 치듯 매부리코의 낯바닥에 탁하고 침을 뱉아주었어… 물.》

옥채는 머리를 숙이고 또 물을 마셨다. 처녀들은 몸을 가드라뜨리고 마음을 조이면서 옥채의 말이 계속되기를 기다린다.

《내 온 힘으로 침을 뱉았건만 목안이 타들고 입안의 침이 바싹 말라 침은 한방울도 나오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소리쳤지. <삐라에는 거짓말이 하나도 없어! 삐라가 아니라도 모두 알고있단 말야!>, 목소리도 말라붙어 한마디한마디에 목이 찢어지는것 같았어. 경옥아, 은실아, 이렇게 살아야 한단 말이냐? 살수 있단 말이냐? 왜들 가만있지? 지혜선생!》

옥채는 몸부림친다. 은실이가 옥채의 무릎을 잡고 말했다.

《네 말이 옳아, 참고만 있어서는 안돼. 올가미가 점점 더 바싹 죄여질뿐이야. 그 다음 말을 해줘.》

《그때였어. 어떤 남자가 벌컥 문을 열고 인사도 없이 들어섰어. 두 형사녀석이 한꺼번에 소리치더군. <누구야?>, 그렇지만 불이 번쩍하더니 그 남자가 사진을 찍었어.》

옥채는 문뜩 말을 멈추었다. 동무들의 한껏 긴장한 눈빛들을 둘러보자 조용히 웃음지었다.

《들어온 청년은 말했어. <무슨짓입니까? 공장에서 사람을 치고…>, 두 형사녀석은 얼마간 당황해하더군. 그래도 큰소리는 치겠지. <공무방해죄로 검속하기 전에 나가라!>, 그 청년도 가만있지 않았어. <나는 신문기자다. >, <신문기자? 공무방해죄뿐아니라 반공법에도 걸린다는것을 기자가 몰라?>, 매부리코가 소리를 치더군. 그 청년은 태연하게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묻더군. <실컷 걸어서 고소해보시오. 나도 취재를 해야겠소. 어느 서에서 왔지요? 당신들도 구타죄를 면치 못할거요. >, 그러니까 실눈이 대번에 씻은듯이 발씬발씬 웃지 않겠어. 그리고 우리더러 말하겠지. <처녀들은 나가도 좋아. >, 그래서 나온거야.》

모두 오래동안 잠자코들 있었다.

《옥채, 넌 정말 용하구나.》

은실이가 감동에 젖은 얼굴로 옥채를 쳐다보았다.

《오늘 나는 살맛이 있어. 삐라를 넣은 그 훌륭한 사람을 얼마간이라도 도와줄수 있었으니까 값이 있는 날이였지. 나는 그 사람이 내가 매를 맞는다고 해서 가슴아파할 대신 나를 칭찬해준다면 더 바랄것이 없어.》 하고 의연히 고개를 드는 옥채의 아름다운 얼굴, 지혜는 마음속으로 그 옥채를 부여잡고 고맙다고 부르짖었다.

《정말이지. 삐라는 한마디도 틀린게 없었어!》

한 처녀가 그렇게 말하자 옥채는 성이 나서 대꾸하였다.

《틀린게 없지. 형사들은 옳은 말이 싫었거던. 흥, 하지만 나와 경옥이가 이겼어. 신문기자가 도와주었다만…》

지혜는 아까부터 떠오르는 강우에 대한 생각을 짓누르고있었다.

《어느 신문사에서 왔는지 모르니?》

《알아보지 못했어. 기다렸다가 나오는것을 만나야 했었다고 인제야 생각이 나는구나.》

지혜는 깊이 숨을 들이키였다.

《옥채, 고마와!》

《고맙긴요. 지혜선생도 그렇게 했을거예요.》

옥채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미소를 그린다.

《그래, 나도 그렇게 했을거야. 은실이, 너도 그렇게 했을거야. 우리들모두가 그렇게 했을거야. 옳은 말을 하고 바르게 행동한다고 감옥에 넣겠으면 넣으라고 하자. 우리가 지금 감옥보다 낫게 사는게 뭐 있어? 우리는 이전처럼 참지만 말자…》

《참지 않겠어요. 20등급임금제만 돼봐요. 나는 혼자라도 가만있지 않겠어.》

《하지만 은실아, 뿔뿔이 마음내키는대로 해서는 안된다. 미리 짜고 꼭같이 행동하잔 말이다.》

《어떻게 짜는지 알으켜주기만 하세요. 우리는 그렇게 하겠어요. 지혜언니!》

지혜의 가슴은 뛰였다.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녀공들의 눈에는 공포가 있었다. 하지만 참고 견디기에는 생활이 너무도 비참하였다. 불씨가 심어졌다. 흥분은 서서히 때로는 급격히 두려움을 몰아내고있다. 그러나 검은 그림자도 그만큼 준동한다. 한것은 며칠후 공장뜰에서 뜻밖에도 안상두와 나란히 걸어가는 오인숙을 본것이다. 그들의 거동은 걸음새부터 주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멍해서 그 뒤모습을 바라보고있는 지혜에게 지나가던 한 로무자가 귀띔해준다.

《로조분회장과 서기랍니다.》

맥드낼드와 만났을 때의 인숙의 구역질나던 거동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 맥드낼드와 가까운 오인숙이가 왜 하찮은 로조서기로 오게 되였는지? 변덕스러운 성미, 허영에 득의양양해지는가 하면 쉽게 자존심을 던지기도 하고 때로는 남에 대한 멸시로 안하무인이 되는가 하면 별안간 스스로 모멸밑에 몸을 던져 동정을 구하기도 하는 헤아릴수 없는 성미의 녀자다.

《안상두분회장에 오인숙서기…》 하고 혼자 중얼거리는 지혜의 가슴은 어둡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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