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동신문

제 2 장

16

 

새벽 2시, 지혜는 무엇인가 뒤집힐듯 한 요란한 음향에 잠을 깨였다. 련발하는 무수한 총성이 바깥공기를 때리고 찢으면서 들려왔다.

터질듯 한 심장의 고동에 잠은 삽시에 달아났다. 지혜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지혜야, 무슨 일이냐?》

어머니는 자리에 누운채 눈만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모르겠어요.》

지혜는 떨리는 손으로 옷을 주어입었다. 총성은 멀리 가까이 그냥 계속되고있었다.

《4월에도 이랬단다.》

어머니는 두귀를 막고 해쓱해진 입술을 떨고있다.

《어머니, 내 나가보구 올게요.》

《어딜 나가니? 정신있냐?》

어머니는 상반신을 들어 지혜의 팔목을 모질게 잡아당긴다. 그바람에 지혜는 어머니곁에 주저앉았다.

《무슨 일인지 알아야 하지 않아요?》

《넌 어쩌면 요즘 그렇게 무서운게 없어졌니? 알아보더라도 총소리가 멎은 후에 알아보지 그러니?》

총성은 얼마간 잦아지는듯 하다가는 더 요란해지면서 멎을것 같지 않았다. 지혜는 어머니에게 손을 잡히운채 그대로 앉아있었다.

총성은 한시간쯤 계속되였다. 귀청을 찢고 가슴을 뒤흔드는 그 총성속에서 불안과 공포에 싸여 잠자리에 일어나 앉은 서울시민들은 그 한시간동안에 많은것을 생각하였다.

4월의 총성-그것은 맨주먹의 그들에게 가해진, 지금도 그들을 분노에 떨게 하는 악착한 총소리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총성을 맞받아 노도처럼 밀려나가 독재아성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총성이 불행만 아니라 격한 기쁨을 가져다준 때도 있었다.

1950년 6월 28일, 사람들은 거리에 쏟아져나와 땅크우에 빛나는 공화국기를 바라보며 목이 터지게 만세를 불렀었다. 그때의 총성은 하늘빛을 하루아침사이에 달라지게 만들었었다.

총성에 담긴 공포와 기대의 이 상반되는 기억은 불안에 세차게 뛰고있는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총성이 계속되는 그 한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이였으랴. 드디여 사람들은 문을 박차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총성이 멎은것이다. 하지만 행길에는 지혜처럼 영문도 모르는 시민들이 서성거리고있을뿐 절망의 총소리인지 기대의 총소리인지 알고있는 사람이 없다.

한 녀인이 참다못해 곁의 사람에게 물었다.

《땅크소리가 들리오?》

곁의 사내는 실망에 찬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만 흔들었다. 지금 당장 공화국기 펄럭이는 땅크가 그들앞에 나타난다면 그들은 이 자리에 주저앉아 기쁨과 감격에 흐느껴울것이다. 모든 설음과 고통과 불행이 옛 기억으로 사라져버리고 그들은 다시한번 10여년전 그때처럼 진정으로 보람있게 살기 시작할것이다.

《저게 뭐예요?》

한 처녀가 묻는다.

《기마대요! 장교놈들이 탔소!》

서성거리며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두리번거리다가 회오리바람이 잦는것처럼 일제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텅 빈 거리를 기마대가 질주해왔다.

지혜는 골목모서리에 몸을 숨기고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기마대들은 지혜가 서있는 골목앞을 지나갔다. 한놈의 기병이 2층집에 붙은 간판을 흘깃 보자 권총을 들어 그 간판을 향해 란사하였다. 뒤따르던 몇놈의 기병도 그렇게 쏘고 지나갔다. 그 간판에는 이렇게 씌여있었다.

《4. 19부상자동우회》

지혜는 격한 충격으로 꽉 막히는 가슴속에서 혼자 부르짖었다.

《군사깡패들!》

이렇게 해서 미국은 오래동안 주구감으로 훈련시켜온 박정희군사깡패에게 총칼을 주어 하루아침에 군사괴뢰정권을 조작하였다. 그리하여 남조선전역에 불행과 고통의 극한점이 피섞인 삭풍과 함께 습래한것이다.

 

관청이건 경제기관이건 거드름과 총놀음밖에 모르는 젊은 장교놈들의 고함소리와 턱짓에 의해서 짓밟히였다.

그때로부터 두달이 지났건만 거리거리는 오늘도 스산한 공기속에서 살벌하게 움직였다. 사람들은 되도록 거리에 나다니지 않는다. 할수없이 지나는 경우에도 무표정한 얼굴로 불안에 떠는 두눈만으로 사위를 살폈다.

무서운 검거선풍이 온 남녘땅을 휩쓸고있었던것이다. 《혁명재판》의 이름밑에 5분에 한건씩 법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젊은 장교놈의 즉흥적인 판결에 의해서 온갖 《죄》가 들씌워진다. 매일처럼 나붙는 《명령》과 《포고》들에는 말끝마다 《엄벌에 처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엄포한대로 마구 체포하였고 대낮의 큰길에서 로소를 가리지 않고 구타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되도록이면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일찌기 리승만독재밑에서도 이렇게는 혹독하게 당해보지 못한 살벌한 공기와 무거운 압력이 온 도시를 휩쓸어 사람들은 압착기안에 눌려있는것처럼 정신도 육체도 기를 펴지 못한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였다.

그런 어느날 애청학원 교장에게 곧 출두하라는 교육감의 호출이 왔다. 교장의 얼굴빛은 달라졌고 책상을 짚고 서있는 두팔은 후두두 떨렸다. 권총을 차고 정치를 하고있는 관청의 호출은 경찰고문실에 가는것과 조금도 다름없는 불안과 공포였다.

겁먹은 교장은 목깃이 다 해진 자기 와이샤쯔대신 교감의 새것과 바꿔입고 떨어진 단추를 달아 외모를 갖춘 후 선생들과 작별을 하고 교정을 나섰다. 선생들은 교장의 늙은 등어깨를 어째선지 어수선하고 슬픈 마음으로 바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교장은 가서 오래 있지 않았다.

《벌써 오셨습니까?》

교장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두팔을 책상우에 나무토막처럼 얹어놓고 넋을 빼앗긴 사람처럼 말없이 앉아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누군가가 그렇게 묻자 교장은 대답대신 손을 쳐들어 허공을 휙 가르며 말을 막았다. 그리고 또 한참 그대로 앉아있다.

이윽고 서서히 일어선다. 그러다가 문뜩 거연히 허리를 펴고 똑바로 서더니 가슴가득히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여느때없이 그의 체구가 장대해보였다.

《모든것이 끝장이 났소!》

그답지 않은 우람한 목소리였다. 듣는 선생들에게는 채 영문은 모르지만 뜻하지 않은 불행의 눈사태가 머리우로 쏟아져내리는것 같은 재앙에 대한 예감이 떠올랐다.

어느 선생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말씀인지…》

교장의 얼굴근육이 이그러진다. 그는 통곡하듯 웨쳤다.

《이런 무지막지한 일이 어디 있소? 학원문을 닫으라고 하오. 불쌍한 우리 학생들이 어디서 공부하겠소. …설비가 불충분하다는거요. 서울의 체면을 보아서도 학교를 그대로 둘수 없다고 하오.》

교장은 의자에 다시 주저앉았다. 한참만에 마지막기력을 쥐여짜듯 하는 목소리로 교감에게 말했다.

《안선생, 백사장한테 가서 사정을 좀 해봐주우. 나보다 선생이 그런데야 수완이 있지 않소? 나야 30년동안 코흘리개들 하고 싸움이나 할줄 알았지 무슨 수완이 있소? 아마도 이 늙은것의 마지막부탁이 될지도 모르오. 500명의 불쌍한 학생들을 생각해서 힘을 써주. 아직 정식 통첩장은 오지 않았은즉 늦지 않았을거요.》

교감은 최선을 다하겠다고 깍듯이 대답을 하고 그달음으로 어디론가 나갔다. 그에게 아무런 기대도 걸지 않은 선생들은 그대로 침울하게 앉아있었다.

바로 그때 지혜의 교실쪽에서 학생들의 때아닌 환성이 들려왔다. 지혜는 황황히 교실로 달려갔다.

《선생님!》

처녀애들이 지혜를 보자 한꺼번에 소리쳤다. 별 큰일이 있는것은 아니고 남수가 무엇인가 우스개를 해서 웃고 떠들고있는것이다.

《조용해! 아직 수업을 하고있는 반도 있지 않아요!》

선생의 꾸지람에 모두 시무룩하여 서있는데 연희가 맑은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한다.

《남수는 누나가 방직공장에 다니게 되였다고 기뻐서 그래요.》

옥채의 다감하고 청초하던 얼굴모습이 떠오른다. 기쁨과 슬픔이 어째서 이렇게 함께 살고있단 말인가. 지혜는 학생들앞에서 침통한 빛을 감추려고 애썼지만 현기증을 느껴 이마에 손을 짚고 잠시 서있었다.

《왜 그러세요?》

눈치빠른 학생들이 그의 주위에 다가선다.

《기뻐서 그래. 남수의 누나가 공장에 다니게 돼서…》 하는 지혜의 정다운 목소리밑에 무엇인가 소용돌이치고있는 격정을 감촉한 학생들은 선생을 유심히 살핀다.

지혜는 모여서있는 학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학생들과 갈라질수 있단 말인가? 지혜는 온 세상에 대고 울분의 고함을 치고싶은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날 저녁 지혜는 강우를 찾아갔다. 강우에게로 찾아가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애청학원페교를 두고 무엇인가 그의 도움을 받자고 생각하는것이였지만 어째선지 큰 기대를 가질수 없다는 생각부터 앞서기때문이였다.

강우의 집은 큰 대청마루가 있는 기와집이였다. 지혜는 먼저 안방에 들어가 강우의 아버지에게 앉은절로 깍듯이 문안을 드렸다. 강우의 어머니는 지혜를 보자 한숨부터 지었다.

《지혜냐? 어서 온…》

맏딸은 시집을 보내고 아들이나 남편은 자기 일들에만 골똘해서 살뜰하지 못하므로 항상 마음 한구석이 빈것처럼 허전하게 지내고있는 그 녀인은 지혜가 오면 무척 반가와하였다.

《강우가 요즘 왜 그러는지 알수가 없구나. 신문사에도 잘 안 나가고…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지 원, 네가 좀 달래보려무나 응?》

강우의 아버지는 보료우에 꺼꺼부정하니 앉아 땅바닥에 펴놓은 한묶음의 서류들을 뒤적이고있다가 지혜를 유심히 쳐다본다.

《…너는 언제 보아도 정신이 드는구나.》

어머니가 간청하듯 한마디 더한다.

《어서 강우한테 좀 가봐.》

지혜는 가보겠다고 공손히 인사를 한 후 강우가 있는 건넌방으로 건너왔다. 파산직전에 있는 공허한 불안이 온 집안에 속속들이 배여있었다.

강우는 담벽에 등을 기대고 지혜가 들어와 앉을 때까지 움직이지도 않았고 말도 하지 않았다. 시선만이 지혜의 사소한것도 놓치지 않으려는듯이 주시한다.

강우의 모습은 한달전과는 전혀 딴 사람으로 보였다.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은 어두운 그림자처럼 시커멓고 정기를 잃은 두눈은 공연히 모질어졌다가는 탁 풀리기도 하였다. 게다가 꾸겨진 옷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담배를 몹시 피웠다.

《어디 편찮으셔요?》

지혜는 조용히 물었다. 리유없이 강우가 측은하게 생각되였다. 《모든 부정과 부패를 남김없이 폭로하고 규탄하는것이 신문인의 사명》이라던 강우가 민주주의의 흔적까지도 남김없이 짓밟아버린 군사《정권》의 압력밑에서 속수무책으로 멍해있어야 하는 쓰린 마음이 리해되여서였다.

강우는 거쉬고 지친듯 한 목소리로 짤막하게 대답한다.

《아니.》 하고는 또 담배를 꺼낸다. 피곤해한다기보다는 모든것을 던져버리는듯 한 태도였다.

《왜, 무슨 일이 있었소?》

그 말 역시 어딘가 귀찮아져서 내던지는듯 한 어조였다.

지혜는 말해야 아무런 도움도 받을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잠시후 말하였다.

《구청에서 학원을 없애겠다고…》

《왜?》

강우의 두눈에 비로소 얼마간의 정기가 돌았다. 지혜는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설명하였다.

《…설비불충분이란 외형상의 리유고 페교시키는 진짜리유는 딴데 있을것이라 생각해요. 혹시 백창락의 작간이 아닌지… 누구보다도 페교에 리해관계를 가진 안상두교감이 별로 놀라지도, 분해하지도 않거든요. 실습생산에서 적지 않게 가로채기를 해서 주머니를 채우고있던 교감이니까 응당 놀라고 발버둥치고 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백창락, ㄷ방직공장…》

강우의 표정은 차츰 변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누군가에게 투정을 하듯 욕설을 늘어놓았다.

《ㄷ방직공장을 확장한다는 말이 있었소. 더러운 자식들! 부지를 가로채자는거지. 500명의 학생들에게 배움의 길을 막는것쯤 아무것도 아니게 생각하는 녀석들이니까. 사기협잡의 너절하고 추한 자식들!》

그러던 강우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지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주 낮은 소리로 묻는다.

《그래서? 페교를 중지시키기 위해 무엇인가 내게 도움을 받자고 생각했소?》

《네.》

지혜는 서슴없이 명백하게 대답한다. 강우는 고개를 푹 수그리였다.

한참만에 말을 시작한 그의 목소리는 몹시 우울하였다.

《이 강우에게 힘이 있는줄 아오? 거리에 범람하는 군사깡패들의 계급장과 총검밑에 짓눌려 찍소리 못하고있는 나요. 한심한 나란 말이요.》

문뜩 강우는 서글픈듯이 자기를 바라보는 지혜의 두눈을 보자 입을 다물었다. 맑은 두눈의 빛발은 꾸겨진 강우의 마음속에 샘물처럼 스며들어 부끄러운 생각이 들게 하였던것이다. 그는 담배를 끄고 흩어졌던 양복앞자락을 여미였다.

《생각나오? <버림받은 천사들!>의 내용이? 그 기사가 그렇게 된것은 학원이라기보다는 강제로동소로 만들고있는 백창락의 협잡판을 전혀 몰라서가 아니요. 하지만 샅샅이 파헤치기에는 그때의 나의 기량이 부쳤소. 백창락의 철면피한 방패막이가 절벽처럼 생각되였었소. 하지만 그후 나의 기량은 자랐다고 할수 있지.》

강우의 표정은 초조해졌다. 또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성급하게 뻑뻑 빨았다.

《지혜, 하지만 인제는 그 기량조차 아무 소용도 없어졌소. 요즈음의 신문을 보겠지? 어느 신문이나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어용기관지요. 신문인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소. 군사깡패들앞에 머리를 숙여서 한장의 포고나 명령을 받아오는게 기자들이 밥먹고 하는 일이요. …이런데 내가 무슨 일을 할수 있겠소.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있지?》

지혜는 고개를 숙였을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강우는 낮은 소리로 아까처럼 자기를 던지듯 하는 허망한 표정이 아니라 자책의 쓰디쓴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하기야 페교처사를 폭로하는 그만한것조차 할수 없다고 말하고있는 이 강우를 생각하면 나자신도 서글퍼지오. 신문인인 내가 진실을 말해달라는 청을 리유는 어쨌든 못하겠다고 거절하고있단 말이요.》

진정하려고 애쓰지만 자꾸만 격해지는 마음을 누르지 못해한다.

《놈들은 모든것을 빼앗아갔소.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기도 하였소. 하지만 사람의 힘에는 한도가 있지. 거대한 철추밑에서 눌려버리지 않는 철의 인간이란 없소. 우측통행을 했다고 곤봉으로 맞고 벌금을 내야 하는 사회질서요. 이대로 몇해를 간다면 모두가 벙어리에 귀머거리, 눈뜬 소경의 페인으로 될거요.》

지혜는 강우의 울분이 리해되였다. 그렇지만 절망에 차서 통곡만 하고있을수는 없지 않은가? 통탄한다고 길이 트이는것은 아니다.

《강우씨가 절망해버리시면 저는 어떡해요? 강우씨는 저보다 명석한 판단력을 가지고계시지 않으셔요? 힘도 있지 않으셔요, 네?》

《그렇소. 두달전만 해도 우리에게는 희망과 기대가 있었소. 통일만이 살길이다의 구호밑에 주위는 서사시였으며 미래는 화원이였소. 그러나 놈들은 총검으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키웠던 모든 좋은것들을 다 부셔버렸소. 인제 이 강우가 뭘 하겠소. 아부와 거짓으로 빚어진 어용기자의 붓끝은 무디여야 하오. 그렇건만 남보다 더 날카롭게 벼린 나의 붓으로 무엇을 쓸수 있겠소? 술을 마시고 약자의 넉두리나 하고…》

《왜 자신을 던져버리시나요? 약자라는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예요? 강우씨, 남북학생회담을 두고 우리들의 마음이 부풀어올랐던것은 사실이예요. 그렇지만 그때도 저의 학생들과 그애들이 살고있는 판자집거리에는 아무런 해빛도 없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눅눅하고 어둡고 배고프고 억눌려서 살고있어요. 갑자기 무엇때문에 절망해야 하는지 저는 알수가 없어요. … 더 혹독해지고 더 견디기 힘들어졌지만…》

강우는 온몸으로 절절하게 호소하고있는 지혜를 바라보면서 문뜩 가슴이 철렁하였다. 지혜가 무엇인가 진실을 말하고있기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때는 보람이 있고 꿈이 있었소. 나의 글들은 사람들을 격동시켰고 일떠서게 하였소. 그런데 놈들은 나의 생활의 모든것인 나의 붓을 꺾어버렸소.》

《그렇게 너무 일찍 단념하시면 안돼요. 우리는 페교하라는 선고를 받았지만 가만있지 않을 결심이예요. 우리 힘이 군사깡패들의 힘보다 약하다는것을 모르지 않지만…》

강우는 지혜의 얼굴을 온 마음으로 응시하였다. 그리고 생각하는것이였다. 이 얼굴만이 자기에게 유일하게 남은 모든 소원이라는것, 그러나 이 아름다운 얼굴은 그가 용기와 힘을 가진 정의로운 인간이기를 바라고있다. 강우는 진심으로 목메여 말하였다.

《지혜, 다 절망한것은 아니요. 내 마음속에도 아직 분노가 살아있소. 다만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하던 나는 지금 어쩔수 없는 고독을 느끼오.》

지혜는 몸을 굳히고 오래동안 말없이 앉아있었다. 찾아올 때부터 강우에게서 도움을 바랄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자기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것에 가슴아픔을 느꼈다. 한편 애청학원의 초라한 교사와 학생들의 령롱한 모습이 가슴에 들어차 지혜는 힘들게 숨을 가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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