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동신문

제 2 장

7

 

영애는 자기 집 토방에 멍석을 깔고앉아 해바라기를 하고있었다. 11월에 들어섰건만 봄날같은 따뜻한 해빛이 수척해지기는 했어도 회복기에 들어서 유난히 신선해보이는 영애의 얼굴을 조용히 비치고있다. 그는 멀리 논뚝길을 가로질러오는 지혜와 강우를 키낮은 울타리너머로 발견하자 사립문을 열어젖히고 정신없이 달려나갔다.

두 처녀는 곁에서 웃으며 서있는 강우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오래간만에 만난 저들의 감동에만 젖어 서로 붙잡고 돌아갔다. 무엇인가 흥분속에서 묻기도 하고 대답도 했지만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며 탄성을 올렸고 눈시울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강우가 뜯어말려서야 겨우 진정하고 뜰안에 들어가 토방 멍석우에 앉았다.

《지혜가 학생들을 가르치는걸 한번 보고싶어.》

지혜는 영애가 대학을 그만둔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것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학원이 마음에 드니?》

《선생들도 학생들도 각박한 속에서 열심히 온 힘을 기울여 살고있어.》

지혜는 이렇게 말하고나서 강우를 잠시 바라보다가 눈길을 떨어뜨리고 말을 이었다.

《그애들을 위해서 난 학원에서 무엇인가 힘껏 일하고싶다만…》

《어느새 그렇게? 무엇이 너의 마음을 사로잡았니?》

무엇이? 지혜는 말문이 막혔다. 학원에서 힘껏 일하고싶다는 이 강한 마음이 무엇으로 해서 생겨났는지 말로 표현할수가 없었다. 지혜에게 있어 그것은 론리가 아니라 생활이였던것이다.

《학원은 말할수 없이 참담해. 학생들은 가난하고 힘겹게 일하고 공부해야 하니까. … 득찬이가… 우리 반 학생이야. 배가 고파 쓰레기통을 뒤졌다고 남수에게… 4월에 땅크앞에 나섰던 애말이야. 생각나지? 득찬이가 그 남수한테 매를 맞았어. 매를 맞은 득찬이는 울지 않았는데 때린 남수가 흐느껴울었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구.》

지혜는 그때의 흥분이 그대로 되살아나 격한 어조로 말하고있었다. 듣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맥락이 없는 생활의 단편들을 주어섬기고있는데 불과하다는것을 본인자신은 느끼지 못한다.

《복희가… 방직공장 녀공이야. 참, 4월에 서준하씨댁에서 강우씨랑 무사히 피할수 있게 해준 행랑채 처녀말이야. 야학에서 국어를 가르쳐달라고 나에게 부탁했어. 그리고 정선생님이 경찰의 추격을 받고있어.》

지혜는 자기가 애청학원에 사로잡히게 되는 리유를 그렇게 얼마든지 말할수 있을것이다.

《정선생님이라니? 정권범씨말이냐?》

《응, 마취제없이 수술을 한…》

그이가? 만나고싶었는데… 서울 가면 만나리라 생각했는데…》

《영애, 나는 너에게 설명할수가 없구나. 내 마음이 어째서 학원에 사로잡혔는가 하는걸 말이다.》

영애는 지혜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대답하였다.

《난 알아들었어.》

《그렇다고 덮어놓고 학생들을 동정해서가 아니야. 나의 학생들은 누구의 동정을 받게 그렇게 값눅은 아이들이 아니야.》

《그것도 안다. 나는 네가 다 말하지 않는것까지 너의 마음속에 무엇이 자리잡기 시작했는지 알것 같아. 네 눈빛이 달라졌어. 너는 역시 불덩어리야!》

《영애, 너는…》

불덩어리가 아니라 린광이라고 하던 영애의 모습이 떠오른다. 영애는 총명한 두눈으로 강우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강우씨는 보지 못하세요? 지혜의 두눈에 타고있는 저 불빛…》

《지혜에게 비낀 아무리 사소한것이라도 내 눈은 놓쳐버리지를 않소. 다만 그 불덩어리가 나를 밀어던지는지 당기고있는지 그것만을 모르오.》

강우는 웃으며 말하였다. 지혜의 얼굴이 일순 우울해졌다. 영애는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아까 강우와 지혜가 걸어온 논뚝길 어딘가를 바라본다.

《그 말씀 리해되지 않아요. 강우씨, 지혜의 불꽃에 저는 마음이 뛰지요. 밀어던진다고 생각하는것이 리해되지 않아요.》

《나도 모르겠소. …》

강우는 입가에 자기자신을 비웃는듯 한 가벼운 미소를 그리며 일어섰다.

《논벌이며 마을을 좀 다녀보겠소. 오늘 내가 이리로 온다니까 신문사에서 또 일을 맡기지 않겠소.》

강우가 행길 저쪽으로 보이지 않게 되자 영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강우씨와 무슨 일이 있었니?》

《아니. …하지만 모르겠어. 아마도 우린 서로 리해하고있지 못하나봐. 헤여져있을 때는 만나고싶지만 만나고나면 즐겁지 않아.》

《지혜, 우리도 어디 거닐어보지 않겠어? 가을한 농촌을, 페허같은… 그러나 역시 아름다운 우리 산천을 말이야.》

어깨에 목도리를 걸치고 사립문밖에 나선 영애는 잠시 서서 산과 들을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혜와 나란히 서서 천천히 걸었다. 좁고 우불구불한 신작로길, 누렇게 메마른 풀덤불들… 벼그루만 남은 논벌에서 이삭을 줏던 아이들이며 아낙네들이 고개를 들어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허리를 굽힌다. 키낮은 야산들에는 산주름마다 뻘건 흙이 헌데처럼 드러나있었다.

《이 고장만은 그래도 올해는 농사가 괜찮았지. 비료만 제대로 냈다면 아마도 이전에 없었던 수확을 거두었을거야. 그렇지만 농군들의 얼굴에 기쁨이 비꼈던건 이삭이 패기 시작했을 때뿐이였어. 땅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자기것이든 아니든 열매가 맺힐 때면 어떤 형언할수 없는 환희를 느끼는 법이니까.》

영애는 갑자기 추워지기라도 한듯이 어깨를 싼 목도리를 더 힘껏 여민다.

《춥니?》

《아니… 이삭이 팼다는것을 알자 사처에서 빚쟁이들이 모여왔어. 채 여물지 않은 벼가 아직 물에 잠겨있는데 그것이 깡그리 장사군들의 손으로 넘어갔어. 립도선매라는것 알지? 온 집안식구가 여름내 알알이 가꾼 금싸래기인 그 낟알들이 빚문서종이쪽지 한장과 바뀌였지. 하루에도 몇번 탐스럽게 가지를 뻗는 벼포기들을 어루더듬으며 기쁨을 간직하던 그 논두렁길우에서 그 문서종이를 받아드는 농군들의 얼굴을 나는 차마 눈뜨고 볼수가 없었어. 눈물마저 말라버린 아낙네들의 절망에 찬 얼굴표정, 그들의 치마귀에 매여달려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쿨쩍쿨쩍 울던 헐벗은 아이들, 그래서 지금은 온 식구가 저렇게 이삭을 줏고들 있지. 이것이 가을을 맞은 나의 고향이야.》

그들은 어느덧 산자락에 이르렀다. 파랗게 싹이 솟은 밀밭을 한쌍의 부부와 여라문살 난 총각애, 그렇게 세식구가 밟고있었다.

《농군들은 정말 부지런해. 결국 아무것도 주지 않는 이 땅을 주린 창자를 움켜잡고서라도 가꾸고 또 가꾸거던. 목숨이 붙어있는 한 땅을 뚜지는 손을 멈추지 않지. 땅이 더 중하냐 목숨이 더 중하냐 하고 묻는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할 농군들이 이 땅을 버리고 떠나야 할 때 그들의 가슴속이 어떻겠는가는 상상할수 있지.》

그들은 바위턱에 걸터앉았다. 영애의 집이 있는 네다섯채의 초가집들이 논벌 한가운데 멀리 바라보였다. 그 둘레에 잎이 떨어진 백양나무 한그루가 서있었고 그밑에는 시내물이 흐르고있었다.

《소박한 정서가 있구나. …공기는 맑고 산과 들, 푸른 하늘… 정말 살것 같구나.》

지혜는 페허같은, 그러나 아름다운 산천이라고 한 영애의 말을 생각하면서 한숨소리로 말하였다. 이에 대답하는 영애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담겨져있었다.

《언제 가면 이 농촌에서 저 애수에 잠긴 정서가 없어지겠는지? 절망에 찬 눈물을 흘리지 않고 주먹을 부르쥐고 보복의 칼을 벼리면서 사납게, 포악하게 모든걸 짓부셔버리겠는지…》

《우리는 4월이전에도 그걸 바랬었다.》

《그랬어. 하지만 우리의 피와 그 거대한 힘은 리승만이란 허수아비 하나를 때려눕히는데만 용감했던거야. 불의와 악정이 뿌리내린 이 땅을 갈아엎는데는 우리의 힘이 너무나 헛된것이였어. 하지만 이 땅을 갈아엎을 그 힘은 서서히 자라고있어. 그 힘이 바로 여기에서도 솟아오르고있지.》

갑자기 까욱까욱하는 소리가 소란하게 들리더니 한떼의 까마귀가 나무가지며 풀덤불속에서 푸드득거리며 날아올랐다.

《까마귀들도 배를 곯고있으니 울수밖에 없지. 떨어진 이삭이 있는가, 산에 열매가 남아났는가, 쓰고달고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죄다 훑어먹었거던… 저기 강우씨가 오누나.》

지혜는 신작로를 따라 이리로 오는 그를 아까부터 보고있었다. 함께 오는 세 청년의 얼굴은 낯이 설었다.

《윤호씨…》

영애가 손을 저어보이자 그들은 걸음발을 다우쳐왔다.

《집에 가니까 없지 않아? 그래서 필경 여기 있으리라 생각했지.》

머리수건까지 질끈 동인 농군차림의 한 청년이 바위에 걸터앉으며 말하였다. 세 청년중에서 한사람만은 지혜에게도 낯이 익었다.

《오래간만입니다. 지혜씨, 다 잊어버린줄 알았던 서울의 거리와 대학강의실이 생각나는구만요. 마치 향수와도 같이…》

《우리모두 대학을 쫓겨난 실농군들이지요.》

그러나 그들의 얼굴표정에는 우울과 락망의 자취가 없다. 자기스스로 개척한 길을 걷는 사람만이 생활의 밑바닥에서도 그렇듯 싱싱할수 있다. 지혜의 기분까지도 괜스레 유쾌해진다.

《강군, 무엇보다 농촌을 주목해야 하네. 남녘땅 인구의 70프로가 살고있지 않나? 그리고 지금 농촌은 벼랑에 서있는 정도가 아니라 나락밑으로 곤두박히고있지. 사태처럼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리지? 그밑에 깔려 신음하는 농군들의 비명이 자네 귀에 들리지 않나?》

낡은 잠바를 걸친 청년이 무릎에 얹은 두손을 불끈 그러쥐고 말하였는데 두눈에 불이 일었다. 영애가 윤호라고 부른 농군차림의 청년이 마른 풀덤불우에 드러누워 하늘을 쳐다보며 혼자 이야기하였다.

《맑기도 하구나. 속절없는 가을하늘… 우리는 4월에 너무 기대를 걸었었다. 공납금이 없어 학교에서 쫓겨나왔다고 해서 신음소리를 치지는 않는다. 선발된 층에 속하지 못했다고 불평을 하게 건방지지는 않단 말이다. 하지만 농사군이라 해서 당해야 하는 천대와 박해는 참을수 없다.

<제2공화국>이라고? 제2라는 수자는 무슨 새것이라도 있단 말이냐? 너무도 달라진것이 없다. 제2, 제3, 제4, 제5 하나도 믿지 않는다. 모든 질서가 송두리채 뒤엎어졌을 때, 그래서 농촌의 빚문서장들이 활활 불에 타고 일하는 농사군이 천대를 받는것이 아니라 놀고먹는 놈들이 천대를 받게 되는 그때, 모든 공장의 주인이 바뀌고 경찰과 헌병놈들의 총칼이 꺾어질 때, 그때는 내 모든것을 믿으리라.》

《나는 어제 밤 일본으로 도망뺄 생각을 해보았지. 그때는 진정으로 생각하였어. 밀선을 타고… 목적은 북에 가보고싶어서였지. 그렇게 한 사람들도 있다는거다. …그렇지만 아침이 되자 떠날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 참담한 고향을 두고 내가 어디로 가려고 생각한단 말인가? 가슴이 쓰리더군.》

《이 우국지사들아! 통탄만 하면 뭘 한다더냐?》

두손바닥우에 턱을 올려놓은채 논벌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청년이 종시 한마디 하였다. 그는 무릎을 기운 학생복을 입고있었다.

《나는 솔직한 말이지 학교에 가고싶다. 나를 밀어던진 학교건만 미련을 버릴수 없어. …두더지처럼 이렇게 묻히고마는가 하고 생각할 때마다 심장이 타버릴것 같다. 정계는 소란하다만 여기 벽촌에는 중세기가 그대로 숨쉬고있단 말이다. 청춘의 이 끓는 피가 늙은이의것처럼 썩고있단 말이다.》

지혜는 왜 그런지 또 갑자기 우울해졌다. 잠바를 입은 청년이 별안간 싸움을 걸듯 소리쳤다.

《왜 묻혀?… 누가 늙은이란 말이냐?》

《묻히고싶어서 묻힌다더냐? 그래, 너의 집에 농량이 얼마나 있지? 닥쳐올 보리고개를 생각하면 숨이 막히지 않는단 말이냐?》

《숨이 막히지. 그렇지만 비명은 치지 말란 말이다.》

농군차림의 윤호가 뜻밖에도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중세기적인 몽매에서 농촌을 구원하자고 약속을 하지 않았단 말이냐? 두더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일을 다그쳐야 한다. 강군, 학교를 그만두었던 처음 얼마동안 우리에게도 절망적인 기분이 없었던것은 아니였어. 이녀석의 넉두리가 바로 그 잔재지. 그렇지만 4월은 우리의 정신을 버쩍 차리게 해주었어. 하기야 그 4월로 해서 얻은것은 적다. 생활은 예전 그대로지. 그렇지만 그 피의 항쟁은 우리 가슴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였어. 그것은 <단결>이라는 거대한 힘의 자각이지.》

지혜는 윤호의 얼굴에 비낀 광채를 놀라는 시선으로 응시하였다. 방금전까지 그 얼굴은 비바람에 그슬리기는 했어도 활기만은 잃지 않은 보통청년에 지나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그 광채로 해서 얼마나 훌륭하게 보이는지 지혜는 그에게서 눈을 뗄수 없었고 그의 말마디들에 온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을수 없었다.

《그후였어. 우리는 짓밟히고 허덕이면서 빈궁과 굶주림과의 절망적인 씨름을 하고있는 농사군들, 그들의 정신과 육체속에 깃들어있는 반항의 무서운 잠재력을 발견하였어. 설사 그들이 고통과 과로에 시달려 자기들의 힘을 다 자각하지 못하고있지만 말이다. 그 잠재력을 발견한 날 우리들은 이 사랑하는 고향땅에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것을 깨달았지. 그것을 깨달은 날 우리는 셋이서 함께 흥분에 못이겨 밤을 밝히였네. 먼동이 트자 바로 이 산마루에 올랐지. …산마루에서 붉은 노을을 바라본 일이 있나? 장쾌하고 신선하고 그것은 미래와 희망, 우리는 가슴을 벌리고 뻘건 동녘하늘을 향해 소리쳤었네. 뭐라고 했던지는 생각이 안 나. 누군가의 시 한구절을 외우기도 하고 그저 북받치는대로 소리쳤지. 그렇게 미래에로 달리는 그때의 기분을 우리는 잊지 않기로 하였어. 두더지가 되느냐 매가 되느냐 하는것은 오직 자기자신에 달렸다는것을 깨달았지.》

강우의 눈에도 어느덧 감동이 어렸다. 그는 자주 무엇인가 수첩에 적었다. 문뜩 잠바를 입은 청년이 강우를 웃는 낯으로 바라보았다.

《강군, 자네는 자네의 날카로운 필봉으로 이 나라에 청신한 바람이 불게 하는 신문인의 사명을 다하겠다고 했지? 그러나 우리의 소박한 투쟁계획에는 자네의것처럼 그런 화려한것은 없어. 여기에는 명예나 부귀나 영화가 없지. 하지만 강군, 우리는 자네를 부러워하지 않아. 우리에게는 그대신 크낙한 랑만이 있어. 왜냐하면 우리가 갈망하는 저 언덕너머에 미래가 나래치고있다는걸 우리는 자각하고있거던…》

강우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너그럽게 웃었다.

《영애씨, 너무 오래 밖에 앉아있군요.》

세 청년이 영애를 진심으로 아끼고있다는것이 그들의 간단한 말마디와 동작, 표정들에 자주 나타나군 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도 그들은 영애를 부축하고 오듯이 주위를 감돌면서 보호하는것이였다.

《학생도련님들-》

동뚝우에서 한 아낙네가 그렇게 큰소리로 부른다.

《갑니다-》

세사람은 손을 쳐들며 함께 대답하였다.

《힘을 합해서 동뚝을 수리하고있네. 점심을 먹으러 오라는거지. 땅을 빼앗기고 개바닥에 논을 풀어볼 생각이네만 벌써부터 관청에서 이상스레 주목하고있지. 우리가 풀기만 하면 그것을 또 빼앗으려는 놈이 한두놈이 아닐걸세. 경찰에서는 아마 우리들이 힘을 합해 개간한다고 용공딱지를 붙일지도 모르고… 우리도 각성을 높이고있지. 언론기관은 그럴 때 시비를 가려줘야 하네. 옳은걸 지지해야 한단 말이네. 그리고 우리들로 말하면 개간한 우리 땅에 원쑤놈들의 손이 닿게 되는 그때야말로 농군들속에 잠재해있는 항거의 폭풍을 불러일으켜 어떠한 싸움에도 선두에 나설 각오를 하고있지.》

그들은 곧 헤여졌다. 세사람은 영애에게 몸조심하라고 몇번이나 당부하면서 아까 아낙네가 소리치던 동뚝을 향해 달려갔다.

차에서 내리자 강우는 그대로 헤여지려 하지 않았다.

《함께 저녁을 먹지.》

그는 굳이 지혜를 앞세우고 《불새》라는 다방에 들어섰다. 열대화초가 그윽한 고급다방이다.

《뭘 먹겠소?》

다방의 한 탁자를 잡고 앉자 강우는 차림표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곁에서 접대원이 손님의 분부를 기다리고있다.

《아무거나…》

지혜는 정말 아무거나 좋았다. 집에서는 어머니가 보리밥에 된장만 놓고 기다리고있을것이다. 강우는 뭔가 여러가지 시켰고 접대원은 《네, 네.》 하면서 쪽지에 적었다.

《그리고 맥주…》

접대원은 익숙한 동작으로 약간 허리를 굽히며 돌아서 갔다. 그들은 창문가에 앉아있었고 다른 손님들은 그들에게서 멀리 있었다.

《…우리의 농촌은 살풍경이요.》

강우는 담배를 붙여물며 그렇게 말하였다.

《…모두 괴로와하고들 있어요.》

《어디 가나 빈궁과 과로… 기막힌 인생뿐이요.》

《하지만 그분들의 기개에 머리가 숙어져요.》

《젊은이들이 무너져가는 기둥을 붙잡고 그렇게 버티고 살고있소. 눈물이 나더군…》

지혜는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말았다. 그는 강우와는 다르게 생각하였던것이다. 세 청년이 바라보았다는 장쾌하고 신선한 그 아침노을이 그들 매 사람의 가슴속에서 불타고있음을 느끼였었다. 지혜의 가슴도 그들과 함께 감동과 흥분에 뛰였었다.

《하긴 나 역시 그렇소. 부패한 사회와 맞대면해서 스산한 싸움도 해야 하고 권모술수와 사기협잡판에서 상처를 받지 않고 때도 묻히지 않기 위해서 항상 신경을 도사리고있어야 하는 거치른 생활에 부대끼고나면 조용한 휴식터가 그리워지기도 하오.》

그 마지막말을 하고나자 강우는 지혜를 유심히 바라본다. 지혜의 얼굴에는 어떠한 다른 기색이라고는 찾아볼수 없이 조용하였다.

《나는 내 힘껏 일하고있소. 량심껏 일한다고도 할수 있소. 정상배들은 기자들을 구슬려보려고 이것저것 집어주기 일쑤요. 하지만 나는 그 하나도 받지 않았소. 내 붓끝을 더 날카롭게 벼리고있을뿐이지. 그자들이 아무리 위장해도, 빚어놓은 사건이 아무리 착잡해도 나는 속속들이 헤쳐내고 정확한 판단을 내릴줄 아오. 지혜, 나는 신문인의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하였소. 그자들은 신문인을 어느 정도 두려워하고있지. 4월의 피가 다 헛되이 흐른것은 아니요. 되게 얻어맞은 놈들은 겁이 많아졌소. 게다가 서로 파벌싸움하느라고 벌둥지같소. 이럴 때 사람들은 정신을 버쩍 차려 민주주의를 쌓아올려야 하오. 바로 우리 신문인들은 그 선도적역할을 하고있소. 종처를 파헤치면서 백일하에 폭로하면 대중투쟁은 우리가 파헤친 종처를 도려내지.》

지혜는 강우의 말을 유심히 들었다. 어째선지 흥분과 열정에 찬 그의 포부나 야심에 대한 설명은 아무리 들어도 리해하지 못할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때 접대원이 축음기에 새 축음기판을 넣는다. 야릇한 목소리의 일본가요였다. 쟈즈화된 일본민요는 을씨년스럽게 마음을 치까스른다. 강우가 접대원을 불렀다.

《저 소리 그만두지 못하겠소?》

《왜 그러나요?》

《잔말말고 끊어!》

《아이유, 손님두…》

강우는 하는수없이 지전 한장을 쥐여주었다. 접대원은 일본노래를 멈추고 류행가를 튼다. 피장파장이였으나 왜색이 없는만큼 내버려둘수 있었다.

《범람하는 왜색, 약삭바른 왜놈들은 재침의 기회를 노리고있소. 아니, 이미 기여들기 시작하였소. 다방에서 흘러나오는 을씨년스런 일본가요, 밀려드는 일산품… 지혜, 밸이 꿀떡거려 참을수 없을 때가 많소. 놈들은 철면피하기 이를데없소. 또다시 조선민족의 상전으로 행세하려드오. 주<한>일본대표부를 설치하라, 평화선을 없애라… 굴욕적인 <한일회담>이 이미 뒤골목에서 벌어지고있소.》

강우는 역정스럽게 이야기하고있었다. 그의 역정속에는 무엇인가 지혜에 대한 불만도 섞여있었다.

접대원이 식사를 나르기 시작하였다. 두사람 다 마지못해 먹듯이 천천히 술을 놀렸다. 가져온 음식의 절반도 손을 대지 않고 강우는 쓰디쓴 웃음과 함께 나머지 맥주를 쭉 들이키고나서 입술에 묻은 거품을 닦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지혜, 우리 아버지는 파산에 직면하고있소. 방직기계부속품을 만들고있는 공장은 밀려드는 일산품때문에 판로가 막혔소. 우울해진 아버지는 화를 낼 대신 벙어리처럼 입을 봉해버렸소. 이런 혼잡판에서 내가 깨끗한 량심인 지혜를 따뜻한 가정, 어린시절의 고향, 조용한 안식터로 생각한다고 그것이 그렇게도 못마땅하오?》

지혜는 서글픈 얼굴로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용서하세요. 제가 살뜰치 못한거예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요. 지혜는 언제부터인가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 시작하였고 내가 리해할수 없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소. 하긴 사람이란 상대방의 속을 꿰뚫어보는 재주를 가지고있지 못하오. 그저 짐작하고 자기의 경험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상대방을 리해하오. 리해되지 않을 때는 서로 비난하고 싸우고 때리고 죽이고… 지혜, 나는 어제 밤새껏 지혜생각을 하였소. 당장 만나지 않고는 못 견딜것 같아 집을 뛰쳐나오기도 했었소. 하지만 만나고나니 언어는 통하지 않고 지혜의 의혹에 찬 표정은 찬물을 끼얹는것 같고… 그래도 지혜는 아름다운 그 모습대로 내앞에 있소.》

강우가 돈을 치르는 동안 지혜는 먼저 밖으로 나왔다. 문을 나서자 바로 코앞에 승용차 한대가 멎어있었는데 《국군》장교 한 녀석이 차안에 있는 녀자와 야릇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고있었다. 뒤따라 나온 강우가 그 장교를 보자 멈칫 섰다.

《아직 대위군.》

혼자 중얼거린 강우는 천천히 그 대위의 뒤를 지나갔다.

《대학강당에 왔던 대위녀석이요.》

결코 유쾌할수가 없는 림억규에 대한 기억에 강우는 얼굴을 찌프린다. 몹시 붐비는 저녁의 유흥거리였다. 술취한 미국놈들, 그놈들의 품에 안기다싶이 하고 걷는 계집들의 짙은 화장, 천한 몸단장, 모든걸 내던진듯 한 일그러진 표정, 《양키식문명》을 따르느라고 류행옷, 류행머리에 값나가는 장식품들을 붙이고 외마디 영어를 섞어가며 사내들과 시시닥거리는 부자집 계집들과 그들의 비위를 맞춰주느라고 어깨를 으쓱거리는 방탕아들… 그들은 즐겨 이런 거리를 거닐기 좋아한다. 사치와 허영과 랑비의 세계, 지혜는 눈앞의 모든것에 구역질이 났고 너무도 가난한 애청학원을 생각하고 가슴이 아팠다. 무엇인가 생각에 잠긴 강우는 너무도 천천히 걷는다.

《이상하오. 림억규녀석이… 한달전에 만났을 때는 평복을 입고있었소.》

지혜와 이야기를 나눈다기보다는 혼자 생각을 더듬는듯 한 낮은 소리였다.

《부산행 차안에서 만났었소. 한차칸에 타고있던 나는 어쩐지 그녀석을 눈여겨보았소. 되도록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는 눈치였는데 분명 그와 대각선으로 한 좌석뒤에 앉아있는 두 녀석이 자주 억규의 거동을 살피고있는것 같아 호기심이 갔던거요. 그들은 한마디도 말을 주고받지 않았는데 억규가 대구에서 내리자 두 녀석도 뒤따라 내렸소. …그리고는 혼잡통에 그만 자취를 잃어버렸지만 어쩐지 마음에 걸려 지금도 잊지 않고있는거요. 그런데 지금 저녀석은 사복이 아니라 또다시 군복을 입었소. 서울역에서는 분명 림억규녀석이 자기 친구에게 제대되였노라고 하는 말을 들었었는데 이상하오.》

강우는 그대로 말없이 한참 걸었다. 그러다가 유흥거리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얼마간 뜸해지자 이런 말을 하였다.

《얼마전에 <국무총리>비서실에 놀라운 정보가 들어왔소. 경상도에서 <국군>장교들의 쿠데타음모가 있었다는것이였소. <총리>는 참모총장에게 추궁하였소. 그러나 참모총장은 그런 일이 없다고 딱 잘라버렸소. 그래도 처음 얼마동안은 웅성웅성했더랬었지. 그후 일은 흐지부지되고말았지만 우리 신문인들은 전혀 건덕지가 없는 일은 아니라고 보고있소. 참모총장의 비호하의 음모였던지 아니면 더 큰 배경이 있었는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흐지부지해버릴수가 없으니까 응당 무자비한 극형,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일어났어야 하오.》

그들은 번화한 거리에서 곧 벗어났다. 강우는 별안간 혼자 흠칠 놀라면서 낮고 재빠른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혹시 그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가?…》

《네?》

《신문인의 륙감에 지나지 않는지 모르지… 지혜, 나는 지금 림억규가 쿠데타음모사건과 관련이 있지 않는가 했소.

4. 19후 사람들의 투쟁기세는 높이 뛰여올랐고 오늘도 앙양일로를 걷고있소. 지난 시기의 투쟁들에서 일정한 승리를 얻은 학생들은 무엇인가 더 거족적인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고있건만… 어쩐지 흑막뒤에서 이상한 검은 그림자들의 조폭한 거동이 느껴지오. <총리>는 매일처럼 미대사관에 드나들고있는데 나올 때마다 얼굴빛이 퍼렇게 질려서 말도 제대로 못한다고 하오. 우리 신문인이 스산한 싸움을 벌려야 할 때요.》

지혜는 허전한 기분으로 거리우에 길게 보이는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먼지와 누런 가로등때문에 별빛도 흐리터분하였다. 날씨는 또다시 쌀쌀해졌다. 지혜는 겹저고리를 입은 등어깨에 오한을 느껴 보자기를 가슴에 꼭 껴안으면서 몸을 옹송그리였다.

《춥소?》

강우의 부드러운 다정한 목소리였다.

《네.》

《이쪽에 서오.》

강우는 지혜를 바람이 불어오는쪽에서 반대편에 서게 하면서 걱정스러운듯이 얼굴을 들여다본다. 순간 지혜는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강우였다는것을 페부에 스미게 느꼈다.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고있다고 생각하는것은 잘못이며 그것은 서로가 각기 다른 생활범위의 이야기를 하였기때문에 리해되지 않았을뿐이였다고 생각하였다. 자기는 언젠가 강우의 《스산한 싸움》이 어떤것이며 무엇때문이라는것을 깨닫게 될것이며 그래서 그 싸움에 지친 강우를 진심으로 위로할것이라는것 그리고 또 강우는 애청학원에서 자기가 보고 느끼고 가슴을 불태우고있는 가난과 빈궁의 쓰라린 생활과 그 쓰라림을 이기고있는 줄기찬 아이들에게 끌리는 마음을 리해하리라 생각하였다. 지혜는 지금 춥다고 하는 자기를 감싸주듯 걷고있는 강우의 뜨거운 마음만을 생각하려고 눈을 감고 조용하고 아늑한,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설레는 가슴의 고동에 스스로 귀를 기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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