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동신문

제 2 장

2

 

일자리를 얻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였다. 지혜는 오늘도 뻣뻣해진 다리를 끌다싶이 하며 걷고있다. 붐비기 시작한 저녁거리건만 마치 재빛광야를 혼자 걷는듯싶게 지치고 피곤하고 고독하였다. 한손에는 어느 한곳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리력서 몇통이 든 가방이 천근무게를 가지고 축 드리워있었다. 무슨 회사, 무슨 상점, 출판사, 가정교사, 병원 사람을 구하는 곳이면 어디나 닥치는대로 온 서울장안을 헤치며 다니였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이 밑창이 뚫린 구두를 끌며 집으로 돌아가고있었다.

어떤데는 한사람 채용하는데 400명의 구직자가 모여왔고 또 어떤데는 입사보증금이 터무니없이 높아 어떻게 할수 없었고 적지 않은 회사들은 녀사무원을 구한다기보다는 묘령의 녀자를 물색하는 유혹의 마굴이였고 신입사원의 채용을 두고 뢰물을 주고받는 암거래시장이기도 하였으며 입사보증금만 횡취하는 협잡회사들도 적지 않았다.

애청학원에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거북스러운것을 참아가며 두번이나 찾아가보았었는데 교장은 없고 교감이 전혀 그런 말을 들은 일이 없다고 쌀쌀하게 대해주었다. 한 교원이 교문을 나서는 지혜를 따라와서 락심하지 말고 한번 더 와서 교장을 만나라고 귀띔해주었지만 더 다시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교감의 쌀쌀한 태도가 왜 그런지 아버지에 대한 모멸로 간주되면서 다시는 찾아가지 않으리라 생각하기도 한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헤매는 이 몇달어간에 지혜의 두눈은 더 커지고 어딘가 점점 날카로와졌다. 좀 값나가는 옷가지들은 거의 다 팔았고 쌀을 꾸러 동리로 다니기도 인제는 렴치가 없다. 이렇게 일자리가 없고 먹을것도 구할길이 없어 더는 버티고 살아갈수가 없어졌을 때 사람들은 조용히 한많은 세상을 스스로 하직한다.

《어머니, 죽이지 말아요. 배고프다고 안할게.》하고 애원하는 어린것과 함께 자기 목숨을 끊는 어머니들!

구질구질한 다리목에는 로상음식점이 장마당을 이루고있었다.

《랭면 자시고 가셔요.》

《값싼 죽 자시구 가셔요.》

헌 가마니우에 널판자를 밥상대신 깔아놓고 모지라진 저가락 몇개와 사발 몇개를 포개놓은 초라하기 이를데없으나 서울에서는 가장 흔한 대중적인 식당이다. 랭면이란 밀국수우에 오이 몇오리가 뜬 랭국을 끼얹어준다. 그래도 얼음덩이가 떠있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다가온 지게군들이 즐겨 사먹는다. 그물거리는 구멍탄불우에서 부글부글 끓고있는 죽은 식당이나 료리점에서 먹다 남은 찌꺼기를 모아 끓인 《꿀꿀이죽》이라 부르는 실업자들의 끼식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연명하고있었다.

지혜는 천천히 그옆을 지나갔다. 누군가가 자기를 보고있다는것을 느끼면서 고개를 쳐들었다. 뜻밖에도 길건너에 오인숙이가 그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그를 보자 실습려행에서 있었던 일이 일순 눈앞에 떠오른다.

《사정이 딱한줄은 알았다만 학교를 그만두기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지 못했어. …나는 뭔가 지혜를 도웁고싶어.》

지혜의 눈에는 인숙이가 전에없이 발랄해보였다. 사내같은 더부룩한 옷차림이 아니라 녀학생답게 청초해보이기까지 했다.

《지혜, 우리 함께 걷지 않겠어? 이야기라도 나누면 얼마간 마음이 가라앉지 않을가? 정말이지 너를 돕고싶어하는 나의 진정을 알아준다면… 그렇지만 너는 나를 경원했었지. 오늘은 함께 걸어.》

지혜는 더 걸을 기력이 없었다.

《용서해, 난 피곤해서 그래.》

《그래, 내가 미처 생각을 못했었구나. 택시!》

뜻밖에도 인숙은 지나가는 택시를 즐거운 동작으로 멈추었다. 망설이는 지혜를 끌다싶이 차에 오르게 한 후 나란히 앉았다.

《우리 장춘단공원에 가자. 록음이 시원한 그늘을 던져주고있을거야.》

지혜는 폭신한 자리에 파묻혀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인숙의 말을 들었다. 온몸이 나른하고 이대로 언제까지나 앉아있고싶었다.

《이거 먹자. 사실은 너의 집에 찾아가던 길이였어. 크림빵이다.》

학교에 다닐 때 같으면 무심하게 받아먹었을 빵이다. 그러나 굶주리고있는 지금은 오히려 손이 나가지 않았다.

차는 쾌속도로 달린다. 벌써 록음이 우거질 그런 계절이였던가. 전차비를 아껴 매일처럼 걷고 또 걸으면서 기약없는 직업을 찾아다닌 그 어간에 계절은 어느덧 그렇게 바뀌여졌다. 지혜는 말없이 차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정처없이 걷고있는듯 피곤해서 축 늘어진 행인들, 신사들의 소매끝에 매여달려 담배를 사달라고 애걸하는 담배장사아이들, 누렇게 뜬 지게군들의 얼굴… 방금전까지 지혜는 그들속의 한사람이였건만 지금은 폭신한 자동차안에 편히 앉아 그들을 굽어보고있다. 스스로 여기 앉은 자기가 자기 같지 않았다.

공원입구에서 차를 멈추게 한 인숙은 손가방에서 돈을 꺼내 택시값을 치르고나자 재빨리 지혜의 팔을 끼며 말하였다.

《자, 걷자. 공기가 맑기도 하구나.》

우거진 록음이 졸고있었다. 메마른 시내거리에서는 맛볼수 없는 싱그러운 자연의 향기가 불어온다. 잠시 그들은 친구처럼 말없이 걸었다. 이윽고 인숙은 격정이 담겨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정말 부당해. 우등생인 네가, 그리고 4월의 용사인 네가 학교를 그만두어야 한다는것은 사회가 네앞에 죄를 짓고있는거지.》

《나는 용사가 못돼.》

지혜는 고개를 숙인채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인숙은 팔을 낀 지혜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면 나 같은건 어떻거나? 나는 리승만의 하야성명을 듣고서야 돌아왔어. 그 성명을 들으면서 나는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싶은 마음이였어. 나는 두려웠던거야. …하지만 너무도 참담한 싸움이였어. 총탄에 맞아 쓰러지지 않았다고 남자도 아니고 연약한 녀자를 탓할수는 없지 않을가? 물론 나는 모든걸 뉘우치고있어. 동무들은 나를 용서해주었어. 뉘우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수 있어. 그렇지 않다면 너보다도 잘못이 큰 나 같은건 어디서 숨을 쉬겠어?》

《아무도 나를 탓하지 않아. 하지만 자신이 용사가 못된다는것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아니, 너뿐아니라 너의 아버지도 4월의 광장에서 돌아가셨어. 이런 가정은 사회가 돌보아주어야 해. 그리고 너는 학업에 정진할줄 아는 귀중한 학생이였어. 너는 사회가 너에게 주는것 이상으로 사회를 위해 복무할수 있는 인재라고 생각해. 딴 사람은 다 학교에 못 다녀도 너만은 다녀야 할 선발될 인재야.》

강우도 그렇게 말했었다. 지혜는 크게 숨을 쉬였다. 그러니 어쨌단 말인가? 아무리 미련이 없다고 해도 즐겨서 학교를 그만두지는 않았다. 공납금을 누가 지불해주며 내가 벌지 않으면 어머니와 나 두식구가 무엇으로 연명해야 한단 말인가. 지혜는 서글픈 웃음을 그리며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학교에 다닐 생각은 조금도 없어. 일자리만 있다면 나에게는 아무것도 더 바랄것이 없어.》

《그런 너의 마음을 리해한다. 너에 대한 부당한 처사에 도전하는 마음을 나는 리해한다.》

《그것이 도전하는 마음일수가 없어. 살아가기 위해서지…》

그러자 지혜의 팔을 더 힘껏 끌어당기는 오인숙의 입에서는 흥분한 목소리가 튀여나왔다.

《지혜, 나는 너를 도웁고싶어. 진정으로! 너의 아름다운 넋을 돕고싶어. 그리구 너의 고통을 리해하는 나이기에 돕고싶구. 우리는 서로가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함께 도와야 해. …도와야 해.》

지혜는 서먹해서 그 말을 듣고 잠자코 있었다.

공원안은 거의 텅 비여있었다. 나무판자가 반나마 떨어진 초라한 의자주위에 널려있던 휴지쪼박들이 갑자기 밀려온 바람에 날리다가 다시 너저분하게 땅에 주저앉는다. 하늘에는 어느덧 시꺼먼 구름이 가득 덮인다. 그 어수선한 주위처럼 인숙이에 대한 생각 역시 어수선하기만 한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지혜는 대학에 입학한 첫 시기만 해도 인숙이와 그리 서먹한 사이가 아니였다. 오히려 사회와 생활에 대한 일정한 자기주장을 가진 인숙이가 높이 보이기까지 하였다. 인숙은 모든 방면에 박식하였고 학과성적도 우수하였으며 정계인사들과 학자들, 이름있는 문화인들과의 교제도 넓어 은근한 선망을 받고있었다. 그는 녀학생들뿐아니라 남학생들앞에서도 자기주장을 서슴없이 말하는 용기를 가지고있어 즐겨 이런 내용의 말을 하군 하였었다.

《20세기는 민족이라는 협소한 울타리를 제거하기 시작했어. 우리가 과학에서나 철학에서나 도덕에서나 뒤떨어진 우리 민족의 울타리에만 얽매여있을 때 그것은 우리 지성인의 죽음을 의미하지. 그 20세기 청춘답게 전세계와 전인류의 문제를 거머쥐고 그것을 연구하고 그것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 20세기 젊은이의 고향이 서울이나 도꾜, 빠리나 윈이 될수 없어. 그것은 마땅히 지구라는 유성이지.》

인숙의 이러루한 견해들과 그 말을 하는 인숙의 현학적인 태도가 어느덧 차츰 그에 대한 지혜의 마음을 서먹하게 하였다. 지혜의 마음은 대바르고 아무런 가식이 없는 영애와 그리고 맑고 깨끗하고 총명한 윤아에게 끌리였다. 영애나 윤아가 들뜬 인숙을 좋아할리가 없어 자연 지혜도 어느덧 인숙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또 인숙은 영애나 윤아와 지혜와는 달리 부유하게 살았다. 수원의 어느 교회당 장로인 인숙의 아버지는 소문과는 달리 딸에게만은 린색하지 않은것 같았다. 값나가는 옷을 입었고 값비싼 소지품을 가지고 다녔고 웬간한 거리도 택시로 다녔다. 소문에 의하면 맥드낼드가 후원을 해준다는 말도 있었지만 이러나저러나 사람들의 주목속에서 화려하고 소란하고 번쩍번쩍하게 살고있는 녀학생이였다.

《비가 오시려나부다.》

인숙은 재빛구름밑에서 더욱 컴컴해진 사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하였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굵은 비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지혜는 이마에 떨어지는 비방울의 선뜩한 촉감에 오히려 마음이 후련해지는것을 느꼈다. 비는 급작스레 쏟아져내렸다. 두 처녀는 황황히 무도장곁에 있는 정자밑으로 뛰여갔다.

《이 무슨 급작스런 비님이냐?》

인숙은 초조해하면서 비줄기와 물안개에 뒤덮인 공원안을 휘둘러본다. 세찬 물줄기는 땅바닥을 때리고 두 처녀의 발등에 사정없이 흙탕물을 튕기였다. 커다란 나무우듬지들이 비바람과 함께 갑자기 소란스레 모대기였다. 지혜는 몽롱한 비줄기속을 꿰뚫어보면서 혼자 속으로 웨쳤다.

(쏟아져라! 온 누리를 씻어버려라!)

나는 무엇때문에 인숙이와 여기로 올 생각을 하였던가. 거절할수도 있었다. 인숙의 련민이 담긴 말마디들에 거절할 용기가 없었던가. 집에서는 어머니가 보리쌀을 꾸러 다니느라고 기막혀서 또 우시고있을지 모른다.

그때 수림사이길로 고급승용차 한대가 미끄러지듯 천천히 나타났다.

《우리를 발견하고 태워줬으면 좋겠다.》

인숙이가 유난히 눈을 빛내이며 지혜의 귀가에서 속삭였다. 아까와는 판이한 너무도 들뜬 목소리였다. 그런데 차는 인숙의 말을 듣기나 한것처럼 가까이에 왔다. 뜻밖에도 그들의 앞에서 멎는다. 인숙은 유쾌한 표정으로 지혜를 보았고 지혜는 공연히 섬찍해서 날카로운 표정을 지었다.

문이 열리자 의외에도 신부옷차림의 맥드낼드가 차안에서 그들을 향해 말했다.

《오, 길을 잃은 나의 어린 양들! 어서 올라타시오!》

두볼과 눈밑에 달린 기미가 심술궂게 축 늘어져서 보기만 해도 음흉한 인상을 주는 긴 얼굴이 웃음을 담고 두 처녀를 바라보고있었다. ㅊ대 학교 명예리사이며 의대병원 명예원장인 맥드낼드는 한해에 두세번 땅에 철철 끌리는 검은 도포를 걸치고 한손에 양가죽으로 만든 성경책을 들고서 구름속에서 나타나듯 성스러운 거동으로 학생들이 꽉 들어찬 강당 연단에 나타나군 하였다. 긴 얼굴을 약간 치켜든채 잘 울리는 낮은 목소리로 《복음》을 전하는 맥드낼드의 위풍과 때때로 희번득하고 그들을 살피는 시선에 담긴 사나운 광채에 학생들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부르르 떨군 하였다.

그 맥드낼드가 4월봉기가 시작되자 약창고를 자물쇠로 채우고 종적을 감추려 하였을 때 한 간호원처녀가 땅에 주저앉아 차에 오르는 그의 도포자락에 매여달리면서 말했었다.

《인자하신 신부님, 자비를 베푸시여 약창고의 열쇠를 저희들에게 맡겨주셔요. 부상자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옵니다. 신부님!》

맥드낼드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그랬으면 작히나 좋겠소? 하지만 우리 미국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할 권한이 없구려.》 하고는 간호원의 머리에 털이 부시시한 커다란 손을 얹고 기도를 하고나서 천천히 차에 올랐었다. 그 맥드낼드가 지금 입가에 웃음을 그리면서 차에 오르라고 한다.

지혜는 정자기둥에 등을 바싹 기대고 서서 차에 올라타고있는 인숙의 뒤모습을 응시하였다.

《지혜…》

인숙은 움직이지 않는 지혜를 뒤늦게 발견하고 당황해서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불렀다. 잠시후 맥드낼드는 상냥한 웃음을 그리면서 선뜻 차에서 내린다.

《비가 그칠 때까지 여기 앉아 이야기하십시다. 이렇게 만나서 대단히 기쁩니다.》

매여달린 기미가 또 하나의 눈초리처럼 사납게 도드라져 지혜를 지켜본다. 그는 서있는 지혜의 코앞에 앉아 유난히 친근한 목소리로 말한다.

《오, 4월의 어린 양, 학과를 필하고 소풍을 나왔습니까? 아주 좋은 일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길줄 알아야 합니다.》

《맥신부님, 지혜는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인숙은 덤비지 않고 천천히 절절하게 말한다.

《아버님이 4월의 광장에서 돌아가셔서 학비를 계속 낼수가 없는것입니다. 저는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지혜는 남달리 우수한 학생입니다. 동무들과 선생들의 커다란 촉망속에서 학업에 모든 열성을 다하여왔습니다. 이런 학생들이 왜 공부를 못해야 합니까? 독재아성이 무너지고 민주주의의 찬란한 세기가 도래한 오늘 어째서 공부를 못해야 합니까? 부당합니다.》

맥드낼드는 놀란 얼굴로 심중한 표정을 지었다. 인숙은 말을 계속한다.

《저는 지혜에게 뭣인가 도와주고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존심이 강한 지혜는 저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신부님, 간청하옵니다. 부디 지혜에게 저의 도움을 받도록 조언을 주십시오. 네, 신부님!》

《처음 듣습니다. 오오, 그럴수 없습니다.》

맥드낼드는 두손을 들어 기막히다는 시늉을 하였다.

지혜는 잠자코 서있었다.

《신부님, 불쌍히 여기시여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지혜는 종시 격한 목소리로 웨치듯 말하였다.

《인숙이, 내 걱정은 그만해!》

《오, 지혜. 하느님께서는 무수한 어린 양 하나하나에 대해서 근심하십니다. 4월의 용사들이 학비가 없어서 공부를 못해서야 될 말입니까? 아버지마저 4월의 광장에서 희생되였는데… 오, 주여. 당신의 품에 안긴 용사의 령혼에 안식을 주옵소서!… 이 불쌍한 어린 양을 사회는 돌보아야 할 의무가 있소. 이렇게 우연히 만날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 하느님의 자비에 이 맥드낼드는 감사를 드리고싶소.》

그는 두 처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한다. 지혜는 맥드낼드의 손의 감촉에 몸을 부르르 떨다 이윽고 손을 피했다.

《지혜양은 공부를 계속해야 합니다.》

인숙은 감동한 나머지 소리를 친다.

《신부님!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지혜에게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있었습니다. 지혜야말로 공부해야 할 학생입니다. 공부에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 학생입니다. 다만 학비가 없다고 해서…》

《학비가 무슨 문제입니까? 지혜를 퇴학시킨 학감의 처사는 아주 잘못됐습니다. 그럴수 없습니다. 지혜양은 공부를 계속해야 합니다. 그리구 인숙양 역시 동무를 생각하는 그 심정이 갸륵합니다. 하느님께서 굽어보실것입니다. 리사회가 있고 내가 있는데 인숙양에게만 무거운 짐을 지우겠습니까. 지혜양이나 인숙양이나 이 불모지에 화려한 꽃을 피게 할 사도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학생들의 장래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집니다. 미국에 있는 많은 종교단체들이 자선을 베풀려고 나에게 청탁해왔습니다. 재능있는 남녀학생들을 미국에 류학보내달라고 말입니다.》

《고맙습니다. 신부님은 항상 정당하시고 자비심이 많으십니다.》

오인숙이가 또다시 감동을 표시하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지혜는 어째선지 속이 메슥메슥해졌다. 뒤엉키고 혼잡한것들이 온몸을 칭칭 감는것 같았다.

자비를 베푸느라고 한껏 상냥하고 의젓한 표정을 짓는 맥드낼드의 모양은 그의 음흉한 두눈과 심술궂은 두볼로 해서 오히려 포악하고 잔혹하게 보여 지혜의 마음을 싸늘하게 한다.

《지혜양, 사양마시고 래일부터 학교에 나가시오. 이길로 학감에게 들리겠습니다. 학비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국의 한 종교단체가 충분한 장학금을 지불하게 하려는데 이와 관련한 모든 수속을 갖추어놓도록 학감에게 말하겠습니다. 그 단체는 4월의 용사들속에서 그 대상들을 선택해달라고 했습니다. 미국사람들은 <한국>을 원조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지혜는 나무우듬지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하였다.

《원장님,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런 행운에 익숙되지 않았습니다. 학비가 없어 학교에 못 다니는 학생은 저뿐아니라 얼마든지 있습니다.》

맥드낼드의 깊숙이 들어앉은 갈색눈동자가 혼탁한 장막속에서 꿈틀거린다.

《오, 갸륵한 심정입니다. 그 모든 학생들을 다 공부시키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 역시 괴롭습니다. 재능과 열성에 따라 선발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4월의 용사들속에서 선발해달라는 종교단체의 부탁입니다. 지혜양,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지혜는 대답없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먹장구름들이 밀려가면서 비발들을 거두어들인다. 바람에 설레는 나무우듬지들도 비방울을 쥐여뿌린다.

《집에서 어머니가 기다리고있습니다. 저는 그만…》

지혜는 담담하게 말하였으나 맥드낼드의 음흉한 두눈이 장막속에서 사납게 빛발치는것을 보자 그만 저도 모르게 말끝을 채 맺지 못하고 몸부림을 쳤다.

《저는 자기의 운명이 딴 사람의 손에 쥐여지는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지혜는 두사람을 뒤에 남기고 혼자 길가로 나섰다. 등뒤에 총구가 겨누어진듯 한 긴박감속에서 걷는 용기와 결단성이 필요하였다. 그들에게서 보이지 않을 수림속길까지 왔을 때에야 지혜는 피곤이 일시에 밀려들어 비칠거리면서 걸었다.

퍼그나 걸었을 때 오인숙이가 숨을 씨근거리며 달려왔다.

《지혜, 그런 무례한 법이 어디 있어. 너는 경솔했어. 맥신부가 어떤분이시기에… 지혜, 가난한 우리 약소민족은 차례지는 모든 기회를 거머쥐여야 해.》

지혜는 그러는 인숙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는 그러는 네가 불쌍해보여. 그리고 속이 메슥메슥하구…》

지혜는 홱 돌아섰다. 그리고 걸음발을 다우쳤다.

또다시 맥드낼드나 오인숙이가 뒤덜미를 잡아당길것 같은 불안을 느끼면서 거의 뛰다싶이 걸었다. 두려운 생각도, 징그러운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쫓기듯이 큰길로 나온 지혜는 비로소 걸음발을 늦추면서 숨을 가누었다. 무엇이 무서워? 지혜는 마음을 날카롭게 가다듬으면서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그러나 맥드낼드의 시커먼 독수리의 자세와 흐리고 사나운 갈색눈으로 노려보던 얼굴이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에행.》

바로 뒤에서 모멸에 찬 맥드낼드의것과 꼭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지혜는 날카로운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군복을 입은 한 미군놈이 씽글씽글 웃으며 구두닦이소년을 내려다보고있다. 소년은 구두닦은 값을 내라고 손바닥을 쳐들고있었다. 소년의 또렷한 두눈은 웃고있는 그자의 낯짝을 조금도 두렴없이 쳐다보고있었다.

《돈이 없어!》

《돈이 없이 구두는 왜 닦았어?》

소년의 손바닥은 여전히 미군놈의 눈밑에 있었다. 놈은 껄껄 소리내여 웃는다. 소년의 시선은 점점 날카로와진다. 미군놈은 웃음을 멈추지 않으며 가벼운 장난을 치듯 《자, 돈 받으시오.》 하고 권총을 꺼내 그 총구를 손바닥에 대더니 다시 껄껄 웃기 시작한다. 소년의 두눈에 일순 사나운 불꽃이 튀였다. 그런 불꽃이 폭발하였을 때 사람들은 탄우를 뚫고 사납게 돌진하였었다. 그러나 소년은 입술을 깨물고 괴로운 표정으로 손을 내리고 구두닦기통앞에 펄썩 주저앉는다. 압제밑에서 사람들이 몸부림치는 그 고통에 찬 표정이다. 미군놈은 권총을 도로 넣더니 휘파람을 불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발걸음을 멈추고 서있던 행인들이 씹어뱉듯이 욕설을 퍼부었다.

《도둑놈의 새끼들!》

한 로인이 이를 갈았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욕을 당한것처럼 모멸감에 사나운 표정을 띠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지혜는 소용돌이치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해 날카로운 시선으로 어딘가 앞을 쏘아보면서 걸었다. 손바닥을 겨눈 총구, 그 총을 잡은 미군의 너털웃음, 맥드낼드의 도포자락, 기도를 드린다고 자기 머리에 얹었던 손, 상냥한 표정과 음흉한 시선… 지혜는 갑자기 무엇인가 명백해지는것 같았다. 도포자락밑에는 발톱이 가리워져있다. 때로는 총구를 감추지도 않고 드러내고 겨눈다. 온 남조선땅이 그속에서 몸부림치고있는것이다. 갈기갈기 찢어진 생활의 모든 갈피갈피에서 그렇게 쌓이고쌓이는 침략자 미제에 대한 적의와 증오는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분화구를 찾으며 항상 끓어번지고있었다.

지금에 와서 지혜는 맥드낼드에게 더 명백하게 말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갈색눈을 똑바로 쏘아보면서 말해야 하였다.

《독수리! 당신은 검은 도포자락밑에 그 발톱을 다 가리웠다고 생각해요?》

《독수리? 지혜양은 흥분하고있소. 마음을 가라앉히시오.》

《당신은 부상자들이 모조리 죽기를 바랬지요? 조선사람이 더 많이 죽기를 바랬지요? 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채운 약창고의 자물쇠를 도끼로 까부셨어요.》

맥드낼드의 얼굴은 찌그러진다. 콩알만 한 기미가 부풀어오른다.

지혜는 여전히 쏘아붙일것이다.

《조선사람들이 당신들에게 무슨 나쁜짓을 했단 말입니까? 죽이고 모욕하고, 그러면서 나를 공부시키겠다구요? 조선사람들이 당신들의 발톱에 찢기우면서 당신들이 던지는 미끼를 즐겨 받아먹고 그렇게 언제까지나 참고있으리라고 생각해요?》

지혜는 성이 난 사람처럼 걸음발을 다그쳤다.

《어머니, 늦었어요.》

지혜는 피곤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일부러 즐거운 기색을 한다.

《정말 늦었구나. 배고프지?》

뜻밖에도 어머니는 여느때와는 달리 밝은 낯으로 맞아준다. 그간 어머니는 자주 울었다. 의젓하고 착하던 남편의 보호를 잃은 윤씨는 고아처럼 의지가지없어하였었다. 딸은 남편처럼 너그럽지만 않았다. 딸앞에서는 무엇인가 꿀리기도 하였고 조바심스러워 아무리 막아도 눈물만이 솟았다. 생활도 슬픔도 딸에게 의탁하면서도 딸을 두려워하기도 하는 윤씨였다. 어느날 지혜는 어머니의 눈물을 보자 견딜수 없어 간청하듯 나무랐다.

《정말 우시지만 말아주셔요.》

《너까지 모질어지면 나는 어떻게 살란 말이냐.》

그 말에 지혜의 가슴도 저려들어 두 모녀는 함께 울었었다.

《내 상차리는 동안 세면해라. 먼지를 흠뻑 뒤집어썼구나.》

어머니가 오늘은 명절날처럼 수선스럽게 돌아쳤다. 밥상앞에 나선 지혜는 놀라면서 물었다.

《이거 웬 고기예요?》

《소간이다. 푸주간에서 사왔지 뭐냐.》

아침만 해도 돈 한푼 없어 지혜는 온종일 전차도 못 타고 쏘다녀야 하였다.

《어서 먹어.》

윤씨는 대견한듯이 웃으면서 권하기만 한다. 지혜는 영문을 몰라 술을 뜨지 못하고 어머니를 보고만 있었다.

《어서 먹으라니까. 옆집에서 빨래를 해달라기에 좀 해주었더니 글쎄 삯을 주지 않겠니. 많이 먹어. 고기먹어본지도 언제인데.》

지혜는 별안간 가슴이 섬찟하였다. 어머니는 그런 딸을 눈치채지 못하고 더욱 즐거워하면서 말하고있었다.

《지혜야, 나는 인제부터 매일 빨래를 하련다. 한나절 하니까 찬벌이는 되잖니? 하기야 그 집에서 우리 생각을 해서 후하게 준것 같다만…》

《어머니, 삯빨래만은 하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든 취직을 할테니까요.》

지혜는 웨치다싶이 말하였다.

《왜 그러니? 하긴 어미가 삯빨래를 하면 네가 창피할줄은 안다만…》

《창피해서가 아니예요, 어머니.》

《그럼 왜? 나는 힘들지 않다. 되려 한잎이라도 버니까 기쁘구나.》

지혜는 목이 메여 고기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슬픔을 이기신거다. 딸을 돕는것에 생활을 찾으신거다. 지혜는 억지로 밥도 고기도 먹었다. 그리고나서 책상우에 두손을 올려놓은채 움직이지 않았다. 뚫고나갈 구멍이 없었다. 온몸이 굳어진채 후두두 떨리는것 같았다.

《아버지!》

지혜는 혼자 속으로 그렇게 불러본다. 그렇건만 아버지의 영상은 지혜가 마지막으로 본 림종의 얼굴만이 그대로 얼어서 굳어진듯 움직이지 않았다.

 

copyright © 2003 - 2018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