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7월 3일 《우리 민족끼리》

 

북남공동의 통일대강들을 짓밟고 민족의 근본리익을 해친 만고죄악(1)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참사들과 《우리 민족끼리》기자가 나눈 문답-

 

기자: 력사적인 7.4공동성명이 발표된지 46돐이 다가온다.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에 기초하여 나라의 통일문제를 우리 민족의 의사와 리익에 맞게 민족자체의 힘으로 풀어나갈수 있는 근본립장과 방도를 뚜렷이 명시한 7.4공동성명의 발표는 온 겨레에게 조국통일에 대한 희망과 락관을 안겨준 일대 민족사적사변이였다.

7. 4공동성명이 명시한 조국통일3대원칙과 그 구현인 북남공동선언들이 보수패당에 의해 짓밟히지 않고 줄기차게 리행되여나갔다면 북남관계가 그처럼 우여곡절과 불행을 겪지 않았을것이며 조국통일은 그만큼 앞당겨졌을것이다.

그럼 오늘 시간에는 북남공동의 통일대강과 선언들을 부정하고 동족대결과 사대매국책동에 광분해온 력대 괴뢰보수패당의 반민족적죄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다. 먼저 7.4공동성명을 전면부정한 박정희역도의 배신적행위, 만고죄악부터 시작하자.

참사1: 1972년 5월초 평양에서는 북과 남사이에 첫 고위급회담이 진행되였다. 그로부터 얼마후 북과 남은 력사적인 7. 4공동성명을 통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 내놓으신 조국통일3대원칙을 온 세상에 선포하였다.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3대원칙은 통일문제를 민족의 의사와 리익에 맞게 민족자체의 힘으로 풀어나갈수 있는 근본립장과 근본방도를 천명한 조국통일의 초석이고 민족공동의 통일대강이다.

북남공동성명이 발표되자 북과 남, 해외의 전체 조선민족은 목청껏 만세의 환호를 터치였으며 삼천리강토는 그야말로 기쁨과 감격으로 끝없이 설레였다.

이에 대해 당시 남조선의 《경향신문》은 《통일, 북남의 통일이 오는가, 전국은 저마다 감격에 벅찼다. 기대, 놀라움, 감격, 환호… 마음들은 다시 통일될 날의 기대로 치달았다. 온 강산이 감격으로 젖어흘렀고 TV앞에 모여앉았던 국민들은 북남대표래왕에 눈이 휘둥그래졌고 자주평화통일원칙합의에 목이 메였다.》고 썼다.

그뿐아니다. 언론계, 학계, 종교계 등 남조선의 각계각층속에서는 조국통일3대원칙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북남공동성명을 《통일을 위한 민족의 공동강령》, 《새 력사의 기원》으로 열렬히 지지환영하는 목소리가 날로 높아갔다.

기자: 그러나 박정희역도는 공동성명의 잉크가 마르기도전에 남조선인민들의 통일열망에 찬물을 끼얹지 않았는가.

참사1: 당시 박정희의 사촉을 받은 중앙정보부(당시) 부장은 북남공동성명발표와 관련하여 기자들앞에서 벌린 공동성명에 대한 《배경설명》이란데서 《오늘부터 우리는 대화없는 북남대결에서 대화있는 북남대결의 시대로 옮겨가고있다.》고 떠벌이면서 공동성명발표후에도 동족대결을 계속하겠다는것을 공언하였다.

또한 총리라는자는 북남공동성명이 발표된지 이틀후에 열린 《국회》에서 《공동성명은 조약이 아닐뿐아니라 조약의 성격도 띠지 않는다. 이 몇장의 성명에 우리의 운명을 점칠수 없으며 또 믿을수 없다.》, 《국민은 북남공동성명에 대한 기대를 가지지 말라.》고 뇌까렸다. 그리고 《공동성명반대를 위한 원외운동은 막지 않겠다.》고 하면서 북남공동성명반대운동까지 선동하였다. 이 시기 박정희패당의 사촉을 받은 남조선의 《CBS》방송은 《평화통일을 하자고 해도 몇백만이 죽고 무력을 가지고 통일하자고 해도 몇백만이 죽는다. 몇백만명까지 죽으면서 통일해야 할 리유는 무엇인가.》라는 황당한 궤변을 줴치면서 영구분렬을 고창해나섰다.

한편 역적패당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 《절대로 미국이나 일본의 앞잡이가 되지 않을것을 확실히 맹세한다.》고 떠들어대던 그 입으로 《대미교섭을 전개하여 미군의 계속주둔을 위해 노력하겠다.》, 《한국에 있는 유엔군은 외세가 아니다.》라고 고아대면서 미일상전들을 뻔질나게 찾아다니며 외세의존정책에 미친듯이 매달렸다. 그것은 당시 리후락과 김종필이 일본상전을 찾아가 《사상은 피보다 진하다.》, 《일본만 믿으니 함께 뭉치자.》, 《일한 량국은 단결하지 않으면 안될 운명에 있다.》는 침발린 소리를 마구 늘어놓은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알수 있다.

기자: 정말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그후 박정희역도는 북남관계에서 전면대결을 추구하였다고 보는데…

참사2: 그렇다. 박정희는 《지금이야말로 총력안보태세의 내실을 거두어야 할 시점에 있으며 모두다 총을 들고 일어나서 싸우는 국민총력의 조직화가 필요한 시기다.》라고 떠들며 군사분계선일대에서 《산악지대비상훈련》, 《유격훈련》, 《수색작전훈련》, 최대규모의 《도하작전훈련》, 《방공훈련》 등과 같은 침략적인 군사훈련들을 련이어 벌려놓고 대결과 전쟁책동에 더욱 광분하였다. 이와 함께 박정희역도는 졸개들을 청와대에 매일과 같이 불러들여 《보안법》이나 《반공법》을 풀어놓아서는 안되며 《이런 때일수록 더 조여야 한다.》는 지시를 주어 남조선 도처에서 피비린내나는 살륙과 탄압만행을 감행하게 하였다.

참사1: 서울에 사는 표 아무개라는 사람이 북남공동성명이 발표되던 날 솟구쳐오르는 격정을 참을수 없어 하루빨리 국토가 통일되여 자유로운 북남래왕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한것이 죄가 되여 《반공법》위반에 걸려 기소되고 70고령의 한 로인이 일본을 거쳐 공화국북반부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하여 잡혀갔으며 풍랑을 만났다가 우리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간 160여명의 어민들이 《보안법》, 《반공법》, 《수산업법》에 걸려 가혹한 형벌을 받은것은 다 박정희역도에 의해 감행된 만행들이였다.

북남공동성명이 발표된 직후인 1972년 7월 7일과 15일 나라의 통일을 위해 투쟁한 29명의 애국자들에게 사형과 무기징역을 들씌운 주범도, 같은 달 13일과 15일, 28일에 남조선사회의 민주화와 조국의 통일을 위해 투쟁한 여러명의 애국자들을 야수적으로 학살한 장본인도 다름아닌 박정희였다.

기자: 박정희역도는 공동성명발표후 북과 남사이의 대화도 사사건건 더욱 악랄하게 방해하여나서지 않았는가.

참사1: 박정희는 교활하게도 량면전술과 지연전술에 매달리면서 우리와의 대화에서 북남관계의 개선과 통일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그 어떤 의견도 내놓지 않았을뿐아니라 우리가 제기한 정치, 경제, 외교, 군사, 문화 등 다방면적인 합작과 교류에 대해서는 말로는 다 찬성한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자고 하면 《지금은 론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한사코 거부해나섰다. 그리고 북남사이의 군사적긴장상태를 완화할데 대한 현실적이며 절박한 문제도 시기상조라고 하면서 그 론의부터 극구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북남사이의 대화에서는 아무런 성과도 이룩될수 없었다.

오죽하였으면 당시 일본잡지 《세까이》(1972. 4)가 박정희패당을《통일이라는 력사적과제앞에서 왜소하고 수치스러운 집단》이라고 락인하면서 《지금까지의 보수적이며 반동적인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을뿐아니라 오히려 지금까지 이상으로 매달리고있다.》고 규탄하였겠는가.

참사1: 정말이지 북과 남이 합의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3대원칙을 전면부정한 박정희역도야말로 북남공동성명의 비렬한 배신자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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