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녘의 오빠는 지금도 살아계실가
-체육성 교수훈련국 책임부원 한필화녀성-

속도빙상선수들속에 있는 한필화책임부원(오른쪽에서 세번째)
속도빙상선수로 활약하던 젊은 시절 한필화녀성이 겪은 민족분렬의 비극을 우리 인민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있다.
1971년 제11차 준동기올림픽경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에 갔던 한필화선수는 남조선에서 동생을 만나려고 달려온 오빠를 가까이에 두고도 전화로밖에 만날수 없었다.
그때 이 소식을 전하는 신문과 방송, 통신자료를 보고 들으며 우리 온 겨레는 외세에 의해 민족이 갈라져 겪는 고통과 아픔을 두고 얼마나 가슴을 쳤는지 모른다.
1942년 남포에서 막벌이군가정의 막내딸로 태여난 한필화선수는 해방후 중학교를 졸업한 다음부터 평양시체육선수단에서 속도빙상선수로 활약하였다.
이 기간 그는 세계속도빙상선수권대회와 국제대학생속도빙상경기대회를 비롯한 많은 국제국내경기들에 출전하여 수십여개의 메달을 쟁취하였고 그 공로로 공화국의 최고영예상인 김일성상과 인민체육인칭호를 수여받고 높은 국가수훈의 영예도 지니였으며 고령의 나이인 오늘도 체육성 교수훈련국 책임부원으로 사업하고있다.
많은 손자, 손녀들을 거느린 할머니가 된 한필화녀성은 지난 1월에는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 보내주신 사랑의 70돐생일상까지 받아안았다. 세월이 흐르고 누리는 행복이 커갈수록 가슴속에는 남녘에 있는 혈육들에 대한 그리움이 더더욱 간절해진다며 한필화녀성은 말했다.
《갈라져 그리움에 몸부림치고있는 사람이 어찌 저 하나뿐이겠습니까. 북과 남의 온 겨레가 얼싸안고 통일만세를 목청껏 부를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있는 힘과 정열을 다 바쳐가겠습니다.》
사진 김종현 글 윤금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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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상관에 자주 나가 선수들의 훈련을 지도하는 한필화녀성 |
가족들과 함께 옥류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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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제9차 겨울철올림픽경기대회 3 000m속도빙상경기에서 우승하고… |
1971년 오빠와의 비극적인 전화상봉이 있은지 19년이 지나서야 그들 남매는 일본땅에서 감격적으로 만날수 있었다. 사진은 오빠와 함께 기자회견장에 나선 한필화녀성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