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후 북조선항해간부학교(당시) 부교장으로 사업하였던 홍문거선생은 자주 대동강의 유람선에 올라 잊지 못할 그 나날들을 뜨겁게 추억하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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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양에서 태여났다고 하지만 나이 90을 바라보는 오늘까지 평양에서 산 날보다 태평양의 날바다우와 남조선의 감옥에서 보낸 기간이 더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어제도 오늘도 나는 자신을 평양사람이라고 당당하게 자부한다. 태여난 고향이 평양이여서만이 아니고 몸은 비록 평양을 떠나있었을망정 내 마음속에서 평양은 단 한순간도 떠난적이 없었기때문이다. 내가 태여난 곳은 평양의 동구역 선교리(오늘의 선교구역 선교1동)이다. 극심한 생활난으로 하여 철부지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남쪽땅에서 떠돌이생활을 하던 나는 왜놈들의 징병에 걸려 놈들의 수송선을 타고 태평양을 넘나들며 별의별 학대와 수모를 다 받아왔다. 그러던 내가 새 민주조선의 수도 평양시민이 된것은 조국이 해방된 이듬해 봄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찾아주신 해방된 조국의 수도 평양에서 나는 20대 열혈의 청춘으로 토지개혁과 중요산업국유화, 건국사상총동원운동에 참가하면서 그토록 바라던 조선로동당원의 영예를 지니게 되였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1946년 4월 6일 평양시인민위원회에서 지도원(당시)으로 사업하던 나는 정성껏 준비한 작업도구들을 가지고 문수봉에 올라 그곳에서 몸소 나무를 심으시는 어버이수령님을 보좌해드리는 남다른 행운을 지니게 되였다. 그때 해빛같이 환한 미소를 지으시고 조국의 일목일초를 아끼고 사랑하는 애국자가 되여야 한다고 하시던 어버이수령님의 그 말씀은 나의 온몸에 넋으로 간직되였다. 그후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 나섰다가 원쑤들에게 체포되여 뼈를 깎는 아픔과 참기 어려운 전향공작의 순간마다 나는 잊지 못할 그날의 문수봉과 평양을 마음속에 생각하군 하였다.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계시는 평양을 생각만 해도 내 조국의 존엄과 위용이 거연히 안겨오고 마음은 저절로 굳건해졌으며 평양사람의 이름을 절대로 더럽혀서는 안된다는 자각이 불끈 솟구치군 했다. 이처럼 평양에 뿌리를 둔 나의 신념과 의지는 그 무엇으로써도 꺾을수도 휘여낼수도 없었으니 나는 마침내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계시는 내 고향 평양으로 승리자가 되여 돌아올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나의 자식들과 후대들에게 말하군 한다. 이 땅에 삶의 뿌리를 내린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그 어디에 살든 백두산장군들이 계시는 우리 조국의 심장인 평양을 자기의 심장깊이에 간직하고 살라, 그러면 삶은 빛나고 언제나 승리자로 산다고. 비전향장기수 홍문거
민속오락장에서 어린 바둑신동과 한판 겨루는 홍문거선생
가족들과 함께 휴식의 한때를 즐겁게 보내고있는 홍문거선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