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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 장편소설
석윤기 (제8회) 제 1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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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화역은 왜놈군대들로 란장판을 이루고있었다. 군벌전쟁에 지치고 반공에 얼이 빠져 어리어리해 돌아가는 동북군상층부의 뒤통수를 탁 쳐서 만주땅을 일거에 강점하기는 하였으나 워낙 자귀밭은 왜놈의 두다리로 광막한 대륙을 다 가로타고 앉기는 힘에 부치여 조선이며 국내에서 연방 새 부대들을 실어들여 철도연선에서 차츰 깊은곳으로 들이미는판이였다. 본시 독립수비대가 있던 돈화는 이런 군대의 집산지처럼 되여 특히 복잡하였다. 역뿐아니라 성안에까지 군대가 넘쳐나서 악마구리끓듯하였다. 추운 만주땅에 온다고 부랴부랴 해씌운 모양인 털모자에 개털외투들을 펄럭거리는 누런 무리들이 거리로 밀려다니고 정거장앞 광장 한끝에서는 신호병이 비자루같은 흰 입김을 내뿜으며 집합나팔을 불고있었다. 거리엔 헌병완장을 두르고 군도자루를 움켜쥔 헌병들이 쏘다니기도 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역구내에서 곧장 교외로 나오시였다. 얼어붙은 목단강을 건늘 때부터 바람이 일더니 들판에 나서자 눈보라가 태질을 하였다. 진한정이네 시골집이 있는 진가등판까지는 여기저기 동네도 있고 산재부락도 적지 않았으나 지금은 눈보라가 다 삼켜버려서 길우에는 인적도 없고 사위를 둘러보아야 인가를 찾을수 없었다. 혹 길가에 객주집같은것이 있다 하더라도 이 눈보라속을 내처 걸으시지 않을수 없는 그이의 급한 걸음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한팔을 이마우에 가로 비껴드시고 사정없이 휘몰려오는 눈보라를 맞받아나가시였다. 비껴드신 팔때문에 시야가 가려져서 허망에 쌓인 눈구뎅이에 빠지기도 하시였다. 밋밋한 등성이에 올라서시니 무연한 눈벌을 넘어 저쪽에 진가등판이 어슴푸레 바라보였다. 그뒤로 큰 산줄기의 륜곽이 비껴갔다. 여기는 벌써 동만땅초입이라 일망무제한 지평선이 몇천리씩 뻗어있는 길서지구와는 겉보기부터 다르다. 앞은 내림받이가 되여 한결 걷기가 헐할것 같았으나 눈보라가 기승을 부리니 숨가쁘기는 매일반이였다. 돈화역을 떠나 내내 눈보라와 싸우시며 걷는사이 온몸은 훗훗 달아오르고 이마엔 땀발이 섰다. 숨가쁘다고 쉬였다가 몸이 식어들면 오히려 재미없겠다고 생각하신 그이께서는 반달음을 놓다싶이 급한 걸음으로 언덕을 내리시였다. 뒤에서 마차의 워낭소리가 따라왔다. 얼핏 뒤를 돌아보시니 이런 살풍경한 눈벌에 나다닐것 같지 않은 호화로운 승용마차였다. 보나마나 비단으로 온몸을 휘감은 비게덩어리들이 앉아있겠거니 생각하신 김일성동지께서는 마차가 옆을 지나칠 때도 눈길 한번 돌리지 않으시고 걸음만 다우치시였다. 그런데 고무테바퀴로 눈가루를 휘뿌려던지며 맹렬히 달려가던 마차가 얼마를 못가서 멎어섰다. 그것은 아무 특징도 없는 눈에 덮인 언덕길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속으로 긴장되시였다. 혹시 저안에 경찰이나 특무같은것이 타고있는것은 아닌가, 그러나 그이께서는 태연히 걸음을 다그치시였다. 설사 경찰이 앉아있다가 시비를 걸고든다 해도 진가등판의 주인인 진대감을 찾아간다면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할것이다. 진대감이란 바로 공청원 진한정의 아버지이다. 돈화굴지의 갑부로서 언제 한번 벼슬길에 오른적이 없었지만 가병만 해도 백여명을 거느리고있는 그 위세에 눌린 사람들은 모두 그를 대감으로 모시였다. 아무리 세상이 험하게 변해도 아직은 돈화땅에서 진대감의 권위를 함부로 짓밟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하신 그이께서는 돈화에 오실적마다 진한정의 집을 중요한 활동거점으로 삼으시였다. 원래 본집은 돈화서문안에 있었으나 요즘은 세상이 너무 소란스러우니 시골집에 가있는데 그편이 비밀사업을 하는데는 유리하였다. 돈화중학교에 다니던 진한정은 그이께서 길림에 계실 때부터 친교를 맺고 영향을 주신 사람으로서 큰 부자집자식이지만 공산주의리념에 열렬히 공명하고 특히 반공에 눈이 어두워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는것이 뻔한데도 문을 열고 도적을 맞아들이면서 인민들만 못살게 구는 부패무능한 국민당상층부와 반동군벌이 빚어놓은 추악한 현실때문에 몸살을 앓는다는 청년이였다. 올봄에 오가자에서 나오시여 들리셨을 때는 한심하게 변해가는 이 나라의 운명을 어떻게 하면 건질것인가 하고 그이의 손을 잡고 흔들며 눈물짓기도 하였다. 그이께서 다가가시자 마차문이 열리였다. 두툼한 비단다부산자에 납작한 수달피털모자를 쓴 중년사나이가 고개를 기웃하고 내다본다. 《옳구만, 서향이 눈이 밝은데…》 이런 말을 마차안에 대고 하더니 차림새와는 어울리지 않게 가벼운 동작으로 눈길우에 뛰여내렸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주춤하고 멎어서시였다. 이게 웬일인가. 육문중학교 한문교원을 하던 류충제선생이다. 《성주군.》 하고 류충제는 두팔을 벌리고 달려왔다. 김일성동지께서도 눈을 걷어차며 달려가시였다. 《선생님, 오래간만입니다. 그새 편안하셨습니까?》 손을 맞잡았을 때 그이께서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시였다. 《나야 잘 있지. 내 진한정군한테서 성주소식을 종종 듣군하네. 봄에도 돈화에 들려갔다더군. 그런데 그렇게 무심히 지나칠수가 있는가?》 《선생님, 량해하십시오. 제가 돈화에 오지 않았다면 몰라도 온이상에야 왜 선생님생각을 안했겠습니까. 때로는 신세를 지고싶을 때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매번 일이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음, 내가 공연히 해본 소리지. 성주걸음이 얼마나 바쁘리라는것을 내 다 짐작하네. 진한정군한테서 대강 소식을 들었네. 내 한때 군과 사제간의 인연을 맺었던 사람으로서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어깨가 으쓱해지군하네. 내 친지들가운데도 김일성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형편일세.》 《과한 말씀입니다.》 《과하다구? 허허허, 내가 길림에 있을 때부터 교장 리광한선생이랑 상월선생이랑 성주군에 대해 하던 말이 있네. 아무튼 반갑네.》 류충제가 그사이 더 몰라보게 장성하신 김일성동지의 모습을 경탄해서 바라보는데 다시 마차문이 빠끔히 열리더니 《선생님, 추운데…》 하는 젊은 녀자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참, 내 이 정신 좀 보게. 옛글에 먼곳에서 친구가 찾아오니 이 아니 좋은 일인가 하더니 내가 그만 반가움에 취해서 때를 잊었네. 어서 타게. 성주군도 아마 진가등판으로 갈테지?》 《그렇습니다. 선생님도 그리로 가십니까?》 《그렇네. 타라구, 성주군도 주서향아가씨를 안다던데…》 《그럼, 이게 주하림댁의 마차입니까?》 《그렇네, 이제도 오다가 나는 몰라보았는데 서향이가 성주군을 알아보더군. 둘이 한참 싱갱이를 하던중일세.》 김일성동지께서는 마차문옆에 가서 안을 들여다보시였다. 마차한쪽구석에 옹송그리고앉았던 주서향이가 얼굴이 새빨개서 허리를 일으킨다. 《서향씨 오래간만입니다.》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서향은 꺼져들어가는듯한 목소리로 인사를 받았다. 방금 마차밖을 내다보며 류충제에게 귀띔하던 말을 봐도 그렇고 봄에 진한정의 집에서 만나봤을 때도 그렇고 여간 활발한 처녀가 아니였다. 그때는 함께 정구까지 치던 녀자였다. 그러던게 이처럼 수집음을 타며 쩔쩔매는것을 보면 그때부터 말이 있던 혼담이 무르익어가는모양이다. 《이사람 어서 타게.》 류충제가 뒤에서 등을 밀었다. 그이께서 맞은편 자리에 앉자 서향은 무릎에 덮었던 담요를 펴서 류충제와 같이 덮고 류충제가 덮고있던 담요를 그이께 올리라고 눈짓을 했다. 《나는 일없습니다. 눈보라속을 걸어가던 사람이 마차를 탄것만 해도 호강이 아닙니까. 어서 두분께서 덮으십시오.》 그이께서 사양하시자 서향은 좀 새침해질사하며 류충제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아따, 나는 왜 자꾸 건드리면서 이래?》 하고 류충제는 서향을 흘겨보며 말했다. 《권하고싶으면 제가 직접 권할것이지. 오늘은 별로 얌전한체 구는군, 천하에 둘도 없을 괄량이가…》 《어마, 선생님도》 서향은 귀밑까지 새빨개져서 두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발을 동동 굴렀다. 《허허허, 어쨌거나 성주군, 이걸 덮으라구. 그렇지 않다간 내가 이 서향이한테 단단히 봉변을 당할것 같네. 요즘은 아버지가 집에 없다보니 어찌나 갈개는지 당해내는수가 없네.》 《주선생께서는 어디 나갔습니까?》 《통화에 나갔네. 당취오네 자위군에 참가해서 항일을 한번 해보겠다고 갔는데 벌써 몇달째 소식이 없군.》 류충제는 별로 시답잖아하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얼마나 장한 일입니까? 왜놈군대 불과 만여명이 공격을 들이대자 봉천대도독은 내뛰고 장개석은 <절대로 저항하지 말것>을 명령하여 수십만 동북군이 하루아침에 붕괴되여버렸는데 그런 속에 글이나 읽던 선비로서 항일구국의 길에 분연히 떨쳐나선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고 봐야 할것입니다. 만일 이런 기개와 애국심만 견지한다면 이 광활한 땅에 사람이 모자라 저런 좀상스런 침략자들에게 나라를 짓밟히겠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진심으로 열을 올려 말씀하시였다. 서향이는 방금까지 수집어만 하던 얼굴을 들고 그이의 말씀에 신중히 귀를 기울였으며 류충제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나도 이 나라의 뜻있는 선비로서 자네들보기가 창피하네. 나라가 작은가, 사람이 적은가, 순전히 무지몽매한 토호, 군벌들의 더러운 욕심때문에 나라와 백성을 이처럼 욕보이니 왜놈들을 치기전에 바로 이 마적떼부터 쳐없애야 되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네.》 《선생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실상 뒤를 캐고보면 왜놈들과 그 마적무리들은 한피줄에 련결된 족속들입니다. 그러나 인민들을 단합시키고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도 반일의 기치를 전면에 내세워야 합니다.》 《성주군의 말이 옳네. 나도 너무 속이 상하니 해보는 소리지 10년동안이나 군벌전쟁을 벌린 끝에 또 공산당잡이를 한다고 싸움판을 벌리고있는 때에 무슨 국내싸움을 또 벌리겠나. 참자니 속이 비틀려서 견딜수가 없네.》 《다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하기때문이지요.》 김일성동지께서는 류충제의 손을 잡고 은근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만일 선생님같은 생각을 가진분들이 생각만 하지 않고 직접 항일의 길에 나서신다면 이런 혼탁된 시국에 옳고 그른것을 가려보지 못하고 갈길을 찾지 못해 헤매이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줄것입니다.》 류충제는 이윽히 그이를 마주바라보았다. 《나더러 뭔가 하라는 말인데… 나는 본시 선비야.》 한참이나 동안이 지난 다음 류충제는 중얼거리듯 말하였다. 《선비도 나라의 백성입니다. 선비가 나라의 땅을 디디고 살며 직접 부를 생산하는 로동자, 농민과 더불어 나라의 록을 먹고 사는것은 사람들에게 바른 길을 가리키고 의로운 일에 목숨을 바치는 떳떳한 리치를 밝히기때문이 아닙니까. 이런 어지러운 때에 입을 다물고있다면 천하가 아무리 넓다 해도 선비가 발붙이고 설 땅은 없을줄 압니다.》 《음-》 류충제는 신음소리 비슷한 소리를 내며 잠시 침묵에 잠겨있더니 껄껄 웃었다. 《이사람, 너무 강박하지 말게. 대기만성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 류충제도 때늦게 창의문이라도 하나 들고나올지 알겠나. 내 성주군의 말을 깊이 가슴에 새기네. 그러나 지금은 국사보다 혼사가 더 바쁘군.》 하고 류충제는 한옆에 쪼그리고 앉아가지고도 오고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눈을 반짝거리고있는 서향을 슬쩍 곁눈질해보았다. 서향은 두볼이 발깃해지더니 엉성하게 발가벗은 버드나무가 주런이 늘어서서 흘러가는 도로연선의 풍경을 내다보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충성스러운 장수는 싸움터에서 죽고 어진 선비는 간하다가 죽는 법이라는데 우리 선생님은 잔치상앞에서 일생을 마치시겠군요.》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는 서향의 말을 듣자 류충제도 껄껄 웃고 김일성동지께서도 빙그레 웃으시였다. 호강스럽게 자란 돈화에서 이름있는 명문가의 딸이지만 맵짜기가 후추알같다. 그러는사이 마차는 진가등판으로 올라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본시 진대감네 장지는 경영이 능하고 법도가 엄해서 소출도 괜찮게 냈지만 동네의 외모부터가 기름이 돌았다. 동네 한복판에 토성으로 둘러막은 어마어마하게 큰 진대감의 집이 솟아있었다. 그 집으로 통하는 큰길은 눈을 반반 쓸어놓았다. 아마 오늘 진대감댁에 귀한 손님이 온다는것을 동네가 다 알고있는 모양이다. 김일성동지께서도 진한정네 집에서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그 야단스럽고 으리으리한 모양을 머리속에 그리자 온몸이 오싹해지시였다. 만일 이 아가씨와 함께 가는 날이면 큰 대문앞에서부터 가병들, 하인들이 부산을 피우고 중문에 들어서면 마님, 로마님, 숙모, 제수, 고모, 이모, 4촌, 5촌 하는 숱한 늙고 젊은 아낙네들이 쓸어나와 반갑다고 울고불고하겠는데 그걸 어떻게 겪으랴 하는 생각이 나시였다. 전에 무심히 진한정의 집에 들리셨다가 몇번 그런 장면에 부딪친적이 계시는 김일성동지께서는 마침 마차가 방금 손질한 도랑창을 넘느라고 걸음을 주춤거리는 틈에 아예 마차를 세워달라고 말씀하시였다. 《왜 그러나?》 류충제가 물었다. 《선생님, 전 여기 농막에 동무가 있는데 먼저 만나보고 가겠습니다.》 《그래?》 류충제는 의심쩍은 눈매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흠, 알만해. 성주군이 반일전쟁을 하려고 한다지만 역시 그 마님, 로마님, 이모, 고모들한테는 못견디겠지? 그것 보라구. 세상에 힘드는것이 의를 밝히는것뿐이 아니란말일세.》 김일성동지께서는 류충제의 활달한 말에 마음이 후련해지시며 빙그레 웃으시였다. 《서향씨 실례합니다. 제 인차 찾아가겠습니다.》 《기다리겠어요.》 서향이는 일부러 마차밖에까지 나와 그이께 인사를 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 내리시자 마차는 인차 진대감네 그 어마어마한 대문을 향하여 곧장 달려갔다.
14
마차는 굳게 닫긴 3간대문을 지나 서쪽으로 난 각문으로 해서 바깥마당으로 들어섰다. 대문가에도 각문가에도 총을 든 가병들이 대령하고있다가 마차가 지나치는데 따라 깊숙이 절들을 하였다. 서향이와 류충제가 마차에서 내리니 남녀사환이 우루루 쓸어들어서 부축을 하며 시중을 들었다. 앞뜰로 통하는 안대문에서 점잖게 차려입은 중년의 사나이가 안에다 대고 길게 목을 뽑아 소리쳤다. 《주대감님댁아씨와 류충제선생님께서 래림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두사람에게 오늘 대감님께서는 평소 거처하시는 사랑채에 계시지 않고 안채에 들어가서 손님들을 기다리신다고 귀띔해주었다. 깊은 안마당쪽에서 사람들이 설레이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였다. 서향과 류충제는 앙증스럽게 다듬어진 향나무가 눈을 하얗게 쓰고있는 정원수의 사이를 바른편으로 돌아 수화문을 들어섰다. 커다란 대리석병풍으로 앞을 막아놓은 드넓은 안마당에서는 신발을 끌며 달려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였다. 서향이가 서쪽사랑앞으로 난 돌판길에 나서니 과연 과부가 된 진대감의 누이와 누이동생, 두 딸과 그앞에 숱한 안식구들이 달려나와 번갈아 손을 잡고 흔들며 반갑다고 저마다 목청을 돋구었다. 그리고도 정방의 문가에는 진대감과 그의 숙모, 부인이 나와섰고 그들에게 딸린 몸종들이 수선을 떨고있었다. 류충제는 방금 김일성동지와 나눈 이야기를 상기하고 혼자 빙그레 미소를 짓고있었다. 《얘들아, 누가 동쪽사랑에 달려가거라, 거기선 누가 오지 않았느냐?》 진대감의 누이가 이렇게 소리치자, 《예 갑니다.》 하고 한 처녀가 옷자락을 휩싸쥐고 바람처럼 달려갔다. 동쪽사랑채에는 진한정이가 거처한다. 그에게 손님이 왔다는것을 알리러 가는것이다. 그러나 웬 까닭인지 서향이가 몸채정방에 가서 대감의 숙모인 로마님과 대감부부에게 번갈아 무릎을 꿇고 복잡한 인사를 다하고 류충제 또한 짧지 않는 인사수작을 나누는 동안까지도 진한정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작은나리님은 어디로 갔느냐?》 얼핏 보매도 몸이 너무 나서 숨가빠보이는 마님이 몸종들을 흘겨보며 역증스럽게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찾으러 보냈는데 동쪽사랑에는 없다질 않아요.》 진한정의 누이동생이 입을 비쭉 내밀며 말했다. 《아니 그럼 이 애가 또 성안집으로 나간게 아니냐?》 마님은 랑패라는듯이 무릎을 철썩 쳤다. 《허허― 당신은 뭘 그리 소란을 피우며 야단이요. 이제 나타나겠지… 덤비지 말고 대문을 지키는 녀석들에게 똑똑히 알아보라고 하오.》 진대감이 이처럼 점잖게 타이르며 류충제의 손을 잡고 팔선탁앞의 커다란 팔걸이의자로 이끌었다. 그제야 로마님과 마님들도 진정이 되여 각각 긴 걸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 집에서는 벌써 서향이를 맏며느리로 다 정해놓은 기분이였다. 이보다 좀 앞서 진한정은 바깥사랑채에 있는 맨구석의 각방에서 김정삼이, 계영춘이들과 함께 길떠날 차비를 하고있었다. 길떠날 차비라고 해도 김정삼이나 계영춘이는 본시 아침저녁으로 먼길을 다니는 사람들이고 진한정이의 행장은 그의 거처인 동쪽사랑채에 옷가지며 세간붙이가 다 있는것만큼 여기서 따로 할것이 별로 없었다. 지금 세사람이 목소리를 죽여가며 유지로 감고 방수포에 싸서 짚마대밑에 꿍져넣느라고 덤벼치는것은 계영춘이네가 고유수에서 가지고온 모제르권총 여섯정과 돈화에서 공작한 두자루의 보총을 안도로 날라가기 위한 짐을 꾸리는것이였다. 《이건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데 무슨 밀수품처럼 요란스레 하는군. 내가 우리 집 마차를 한대 내서 실어가겠단말이요.》 진한정이가 두툼하게 떠입은 털세타의 목깃사이로 흘러들어가는 땀을 훔치며 말했다. 구들에 불을 얼마나 지폈는지 기름쩌는 냄새같은 단내가 훅훅 풍긴다. 진한정은 미끈하게 잘 자란 몸매에 성미 또한 참배맛 같아서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사람이였지만 오늘따라 말투며 몸짓에 신경질이 풍기였다. 마대속에 짐을 다져넣던 계영춘은 멍하니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어이 함께 가겠단말이요?》 《가겠다는데… 몇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소?》 진한정은 짐을 다 채운 마대를 한발로 지겨디디고 새끼를 잡아채며 되물었다. 계영춘은 다시 한참 지켜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이제 차광수만 도착하면 곧 떠나오. 그때까지 차비가 다 되겠소? 너무 덤비지 마오.》 《동무는 왜 나를 믿지 못해서 그러오? 나한테 무슨 특별한 차비가 따로 필요하단말이요?》 《억지를 가지고는 사실을 뒤집을수 없소. 동무가 나나 설복하고 납득시켜서 무슨 소용이 있겠소. 글쎄 진동무가 이 집의 상속자자리는 쉽게 내던질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자식으로서의 도리도 있는것이고 또 서향씨와의 관계도 있지 않소. 이런것들이 그렇게 쉽게 없어질수 있겠소. 난 믿음이 잘 안가는군.》 《여보 너무 년장자연해서 그러지 마오. 부모에 대한 의리나 정이 나한테만 있고 동무한테는 없소? 동무는 마음에 든 녀자가 하나도 없소? 그런데 계영춘이는 쉽게 내던질수 있는것을 나는 왜 못내던진단말이요? 이것도 내가 부르죠아자식이 돼서 그렇소?》 《허허, 이 도련님이 오늘은 기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혁명을 하고싶어서 그렇게 안달이 났는데 조선혁명군대원 계영춘이가 무엇때문에 반대하겠소. 그러나 우리 나라 속담에 받는 소는 소리를 치지 않는다는 말이 있소.》 《흥. 우리 나라 속담에는 그런 말이 없는줄 아오.》 진한정이가 막 이렇게 흰목을 뽑으며 나섰을 때 바로 대문을 들어서는 마차소리가 나고 이어 서향이가 왔다는 전갈소리가 울리여왔다. 방금 큰소리를 땅땅 치던 진한정은 삽시에 낯빛이 긴장되였다. 《계동무, 왔소.》 그는 저도 모르는사이 계영춘의 손을 잡고 구원이라도 청하듯 속삭였다. 《사람두 참.》 계영춘은 진한정의 어깨우에 한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나가보오. 동무가 서향씨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사랑을 하면서 혁명과 사랑간의 문제를 훌쩍 떠나버리는 방법으로 해결하려 한다는것은 그야말로 눈가리고 아웅하는식이요.》 《야 참, 좀 이러지 마오. 내가 언제 그 녀자를 사랑했다고 이 야단이요?》 《그럼 순전히 부모들과 집안의 압력에 눌려서만 진동무가 이렇게 갈팡질팡하오? 그렇다면 그까짓것은 문제도 아니요. 조국과 인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총을 잡고 일본제국주의와 싸우자고 나선 이 마당에 그까짓 봉건적인 억압에 눌려 허덕거릴게 뭐 있소?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요. 문제는 어디까지나 진동무자신이 서향이를 사랑한다는데 있소.》 《내 계영춘이가 무정한 사람이라는것을 이제야 알았구만.》 진한정은 섭섭한듯이 이렇게 말하며 초조한 표정으로 안마당쪽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무정한 사람이라?… 허허 계영춘이가 혁명하러 돌아다니다가 나중에는 별소리 다 듣는군. 여보, 그따위 소리 작작하고 어서 나가보오.》 계영춘은 어처구니없어 웃다가 진한정의 어깨를 밀쳤다. 진한정은 숱많은 굽실굽실한 머리카락을 한웅큼이나 움켜쥐고 생각하더니 불쑥 문밖으로 나섰다. 《여보 진동무, 서향씨를 만나거든 여기서처럼 신경질적으로 대하지 말고 순하게 말하오. 아무 일이나 생나무꺾듯해서 될일이 아니요.》 계영춘은 그가 서향이와의 관계문제때문에 아버지와 공연한 마찰을 일으킬가봐 훈수를 하였다. 《아니요, 난 만나지 않겠소. 참 공교롭게도 이런 때 찾아올건 뭐람.》 《그럼 어디로 가오?》 《농막에 나가겠소. 안에서 날 찾아나오거든 어디 갔는지 모른다고 하오.》 그러나 그는 대문을 나서서 첫 골목을 꺾어돌다가 허둥지둥 달려나온 사환에게 붙잡혀 어쩔수없이 되돌아섰다. 진한정이가 더는 타협할수 없다는 확고한 결심을 다지며 안마당을 돌아서 토방우에 서니 정방의 문이 열리였다. 향내가 떠도는 방안에서 울긋불긋한 비단옷가지들이 얼른거리고 랑랑한 웃음소리가 울리여나왔다. 진한정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저런 분위기속에서 자기를 고수하기 위하여서는 자기넋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몸부림쳐야 하리라는것을 각오하였다. 그는 결전장에 나서는 전사처럼 눈을 똑바로 뜨고 적진에 육박하듯 그 사치와 환락의 전당을 향하여 큰걸음을 내짚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리우로 거대한 철퇴가 떨어져내리는것 같은 타격이 가해졌다. 서향이의 아름다운 얼굴이 자기를 바라보고있었다. 저속한 취미와 공허한 웃음과 낯간지러운 아양이 범람하는 세계에서 자라면서 자기를 고수하자니 그 녀자의 말투나 표정은 어느정도 쌀쌀하고 거만한것을 풍기고있었으나 자기를 향해서만은 언제나 순진한 어린애와 같이 타고난 성품 그대로 부드럽고 천진스럽게 대해주군하던 서향이였다. 그 녀자의 륜곽이 선명한 입가에 그윽하게 떠도는 따뜻한 미소를 보았을 때 진한정은 피어린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이 안온하고 사치한 세계에서 빠져나간다는것이 얼마나 힘드리라는것을 통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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