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불멸의 력사》

  장편소설

 

                         석윤기

(제5회)

제 1 편

 

9

 

 선아는 니시자와가 다리를 저는것을 타산하고 일부러 사람이 붐비는 정거장방향으로 걸음을 다우쳤다. 그놈의 눈에 띄이기만 하면 서슴없이 소리를 칠것이기때문에 골목에 나타날 때마다 무작정 꺾어들면서 정거장까지 나갔다가 구시가와는 반대방향인 공대쪽으로 길을 잡았다. 걸으면서도 이 길로 영희를 만나러 가야 할것인가 말것인가 그냥 망설였다.

영희의 뒤에는 틀림없이 무언가 달린듯하다. 시간을 보면 지금쯤 그 등대밑에 나타날 때도 되였다. 그냥 내쳐두면 영희는 틀림없이 체포될것이다. 그러나 내가 약속한 시간에 안나타나면 능히 피할수 있는 위험도 못피하지 않겠는가. 한편 자기뒤에도 인차 뭐가 달릴지 모른다. 그런 몸으로 동지를 만나러 가는것이 옳은가.

어느덧 바다가에 이르렀다. 오늘따라 바람세가 사납다. 하늘은 자욱히 흐려 금시 눈발이 쏟아질것 같은데 바다는 길길이 뛰노는 파도에 뒤덮여 마치 진창이 뒤끓는듯 거칠게 보였다.

이제는 별수없다. 둘 다 로출된이상 내가 죽더라도 영희를 구원해야 한다. 둘 다 여기서 우물거리다가 잡힌다면 나나 영희자신은 그럴 각오를 다지고있었다지만 그 보고가 김일성동지께 어떤 아픈 충격을 주고 동무들의 가슴을 얼마나 슬프게 만들것인가.

나는 살았든죽었든 김혁이가 여기에 있으니 그와 함께 이 거리에 한을 품고 쓰러진다 해도 두려울것이 없다. 그러나 영희야 무엇때문에 희생시킬것인가. 그는 기어이 살아서 김일성동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선아는 급히 반도의 도래굽이를 돌았다.

거치른 해풍이 휘몰아치고 파도가 미친듯이 비말을 뿌려던지는 반도에 사람그림자라고는 얼씬하지 않았다.

선아는 뒤를 따르는자가 없다는것을 확인한 다음 등대쪽으로 급히 걸어갔다. 덮쳐드는 파도의 비말너머로 낯익은 바위가 저만치 바라보인다. 선아는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무엇인가 바위 저편에 쭈그리고 앉아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던것이다. 거기에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영희가 아니면 밀정일것이다.

잔뜩 눈발을 머금고 자욱히 흐린 날씨와 파도의 비말때문에 모상을 똑똑히 가려볼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이 있는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선아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영희가 저기에 나타났다면 응당 그뒤에는 적이 달려있을것이다. 저기에 얼씬거리는것이 적이라면 이미 영희를 체포한 적들이 나를 기다리는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희가 적들에게 그 비밀을 넘겨주기전에는 있을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수 없다. 그렇다면 저것은 영희가 틀림없다. 그리고 이미 우리는 체포되나 다름이 없다.

선아는 주먹을 부르쥐고 달렸다. 한참이나 얼어붙은 모래를 걷어차며 바위가까이 달려가보니 예상했던대로 영희가 바위뒤에 숨어서 정신없이 모래를 파헤치고있었다. 무기와 김혁의 일기책을 꺼내는것이다.

《영희야.

선아는 한달음에 달려가 영희의 손을 잡았다. 언 모래가 달라붙은 손은 꽁꽁 얼어서 얼음덩어리처럼 차고 뻣뻣하였다.

《선아야.

영희는 그 거치른 모래투성이 손으로 선아의 이마우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었다. 영희는 울고있었다.

《왜 그러니? 그 사람을 만났니?

선아는 예상했던 불행이 모두 사실로 확정됐다는것을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영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모래를 파며 별로 서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서 말하자. 이걸 이제는 파내야 할것 같아서 그런다.

선아는 영희에게서 모든 대답을 다 들은듯도 하였으나 아무래도 성차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다가드는 위험을 느낄수록 기어이 알아야겠다는 절박한 생각을 누를수 없었다. 그는 와락와락 모래를 파헤치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영희야 어서 말해라. 우리는 같이 갈수 없게 됐다.

《그건 무슨 소리냐? 시노사끼라는 의사가 말하는데 자기 뒤를 밟는놈이 있다는구나. 그래서 인차 련락을 못취했는데 친구를 시켜서 그놈을 겨우 술집에 끌고가서 잠재운틈에 만날 기회를 만들었다는구나. 그 사람 말을 들으니 우리가 여기에 계속 남아있다는것은 아무 의의도 없고…》

영희는 여기까지 말하다가 선아의 눈치를 살폈다.

선아는 어느새 방수포꾸레미를 꺼내여 와락와락 잡아헤치며 말했다.

《영희야, 누구의 눈치를 보고 눈물을 짜고 할 때가 아니다. 네 뒤에도 내뒤에도 밀정이 달렸다. 지금쯤은 아마 저 도래굽이 초입에 그놈들이 지키고있을지도 모른다. 그놈은 혼자서 너를 덮치기가 두려워서 응원을 기다리고있다. 응원을 올놈들도 나와 거의 같이 떠났다. 그러니 어서 말해라.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헤여져야 한다. 내가 먼저 나갈테니 뒤따라오너라. 여러놈이 지키고있으면 그때는 마지막 탄알만 남겨두고 다 쏘아죽이자. 그러나 한두놈일 때는 내가 그놈들을 쏠테니 그사이 너는 바다가로 해서 빠져나가라.

선아는 권총을 꺼내여 손수건으로 기름을 닦아냈다. 방수포와 유지로 겹겹이 싸고 기름을 되직하게 발라놓은 총은 새것이나 다름없이 반짝거렸다. 탄창의 기름까지 다 훔쳐낸 다음 아예 안전장치를 풀어서 가슴깊이 찔러넣는 선아를 보자 영희도 현실적인 위험을 느낀듯 모래불에 놓인 손가방을 열고 권총을 꺼내서 외투주머니에 찔러넣었다.

《김혁동무는 전사했.

하고 그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선아는 먼바다를 바라보며 그린듯이 앉아서 듣기만 했다. 사나운 바람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날렸으나 까딱도 움직이지 않았다.

《감옥의가 말하는데 니시자와와의 대결과정에 전사했다는거다. 꽉 움켜쥔 주먹을 겨우 펴보니 땅땅 굳어진 찔광이가 한줌 쥐여져있더란다. 김혁동무의 최후는 극비에 붙여져서 간수 몇사람과 감옥의밖에 아는 사람이 없단다. 감옥의가 자기 친구의 부탁도 있고 김혁동무가 자기 령치품을 가족들에게 보내달라는 부탁도 했기에 알아보니 다른것은 아무것도 없어 이걸 가져왔다고 하면서 그가 입고있던 명주바지저고리를 몰래 뭉그려 내왔다는구나. 갈가리 해여지고 찢어진 그 옷을 내가 일일이 헤쳐봤다. 그랬더니 동정 안자락에 이런 혈서가 있지 않겠니. 보아라. <놈들이 녕안현당비서의 뒤를 추격하여 한별을 찾으려 한다. 한별을 지키라. 조선혁명 만세!> 이걸 보니 김혁동무는 어떻게 하나 이 소식을 바깥에 내보내자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것 같다.

선아는 입술을 떨었다. 이제는 천이 낡기도 한데다 악착한 고문에 갈가리 찢어지고 솜까지 다 빠진 명주바지저고리는 다해야 한줌만했지만 그것을 갈피갈피 헤치는 선아는 너무나 힘에 부쳐 숨을 몰아쉬였다. 눈앞이 휘 돌아가는것 같았다. 길길이 파도가 뒤번지는 바다가 곧장 일어서는듯하였다. 그 거치른 파도우에 《한별을 지키라. 조선혁명 만세!》라는 시뻘건 글발이 온 하늘을 다 메우며 황황 불타오르는듯하였다. 어지러움에 더는 견딜수 없어 무엇을 붙잡으려 하였으나 손에 잡히는것은 없고 어느새 비말에 축축히 젖어드는 김혁의 일기책이 접질려 땅을 짚는 무릎밑에 깔렸다. 모래불에 그대로 주저앉는 선아를 영희는 부여잡았다.

《얘, 정신차려. 울더라도 딴데 가서 울어야 해.

《난 울지 않아.

선아는 모래우에 두무릎을 꿇고앉아 머리를 푹 떨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이럴줄 알고있었어. 난 울지 않아. 그는 한별동지가 보내준 그 찔광이와 이 옷에서 한별동지의 사랑을 느끼며 최후를 마쳤어. 나도 그걸 바랐댔어. 난 울지 않아.

《얘, 인젠 일어나. 가서 실컷 이야기하자. .

영희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선아의 등을 다정히 어루만졌다.

선아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에는 눈발머금은 흐린 하늘이 공허하게 비껴있을뿐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가자.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하니?

선아는 한절반 허리를 일으켰다가 도로 주저앉으며 손에 쥐인 일기책과 옷뭉치를 들여다보았다. 영희는 가슴이 뜨끔하였다. 적이 포위하고있다는 길로 저 일기책과 옷을 가지고 빠져나갈수는 없을것이다. 우리 두사람은 만일의 경우에 마지막탄알을 쓸수도 있겠지만 저 책이나 옷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중대한 비밀이 새여나가는것이다.

《아- 당신은 마지막까지 내 가슴을 아프게 해주고 가는군요.

선아는 고개를 하늘로 젖히고 안타깝게 하소하였다. 그러다가 불시에 놀랜 사람처럼 책갈피를 후루루 번지였다.

길길이 뛰노는 파도가 가뜩이나 기울어져가는 흐린 해빛을 가리워버려서 사위는 벌써 어둑어둑하였다. 쩝쩔한 소금기가 느껴지는 파도의 비말이 물안개처럼 흩날리는 어둠침침한 바다가 모래불우에 김혁의 목소리가 울려오는듯 일기장의 글자들은 불꽃처럼 선명하게 타올랐다.

 

우리는 교외까지 그를 바래웠다. 해빛에 검실검실 탄 창걸은 웃었다.

그러나 그의 눈귀에는 이슬이 맺혀있었다.

선아는 사향가를 불렀다. 마지막절을 부를 때 우리는 모두 합창하였다. 선아는 흐느껴 울었다. 우리는 모두 눈물이 헤프다.

한별!

그의 품에서 시작된 우리 혁명은 눈물많고 웃음많은 혁명, 인정에 울고 진리로 굳세여진 랑만으로 충만된 혁명이다.

잠시의 리별도 눈물을 지으며 헤여진다. 그러나 교수대로 갈 때는 웃으며 갈것이다.

선아! 우리 살아서는 동서남북 갈라져있어도 죽어서는 넋이 살아서 기어이 그리운 한별의 품으로 돌아가자!

한별에게 충성다하는것은 곧 우리 조국, 우리 혁명에 충실한것이다.

나도 래일 떠난다. 선아! 그대는 나를 위해서도 노래를 불러주겠는가? 그렇다면 눈물짓지 말고 시들어버린 내 사랑의 움을 틔워준 《황성옛터》를 불러다오. 그러나 그대는 또 울것이다. 선아, 나는 웃는 그대를 더 보고싶은데 어찌하여 눈물로 빚어놓은 처녀처럼 그렇게 잘 우는가? 하기는 나도 잘 운다.

생각하면 그것은 어찌할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정에 헤픈 우리의 한별에게서 혁명을 배우지 않았는가.

 

다음은 시가 있었다. 그러나 차츰 글자가 흐리마리해지면서 가려볼수가 없었다. 하늘에서는 마침내 눈발이 쏟아져내리고 선아의 두눈에는 함빡하니 물기가 어리였다. 려순에 온 이래 단 한번도 울어본적없는 눈물이 왈칵 하고 쏟아지려 하였다. 선아는 책장을 와락 그러당겨 그속에 얼굴을 묻었다. 일기속의 이야기가 어느때 이야긴지, 어떤 교외에서 있었던 리별인지 구체적인 표상은 떠오르지 않았으나 방금 두고 떠나온 생활처럼 낯익은 정경이였다.

한별동지와 함께 어깨겯고 노래부르는 최창걸이며 차광수며 계영춘이며 그리운 얼굴들이 연줄연줄 떠올랐다. 그런데 김혁이만은 아무리 그려보려고 해도 그려지지 않았다.

선아는 흉곽에서 뼈가 이물리도록 가슴을 비틀었다. 울지 않으련다. 한방울 눈물도 보이지 않으련다. 그리운 그 시절, 정다운 전우들속에 있을 때 그리고 김혁이가 지켜볼 때 나는 웃음많고 눈물많은 처녀였다. 그러나 원쑤가 살판치는 쓸쓸하고 각박한 이방지대에 홀로 남은 지금 나는 울지 않을것이다.

영희가 어깨를 떠는 선아의 귀전에 조용히 속삭였다.

《저기 웬 사람이 온다.

선아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피기 한점 없이 질려있었고 어느새 가는 피발이 져서 우묵하게 꺼져들어간 눈에서는 푸른 린광같은것이 번쩍일뿐 눈물은 없었다.

《영희야, 내가 먼저 나가다가 쏠테니 너는 재빨리 빠져나가라. 저놈이 혼자 오는걸 보면 아직 기다리는놈들이 도착 안한것이다. 그사이 어디 새여나가거나 혹시 바다가니까 빠져죽지 않았는가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선아는 이렇게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며 일기책과 명주바지저고리를 방수포우에 올려놓고 그우에 모래를 퍼담았다.

《아니 너 어찌자고 그러니?

《바다에 던져야겠다. 떠오르면 저놈들의 손에 들어갈지 알겠니. 이제 그 사람의 흔적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저 이 가슴에…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노래속에…》

선아는 얼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다가 별안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한별동지는 영원히 그 사람을 잊지 않을거야.

모래와 함께 방수포로 얼추 싼 김혁의 일기장과 옷가지는 첨벙하고 발해해협의 물속으로 던져졌다. 점점 사납게 울부짖는 파도가 기다렸던듯이 모든것을 삼켜버렸다.

《가자!

선아는 앞장서 걸으며 말했다.

《내 권총은 오래 땅속에 묻혀있어서 불발이 날수 있다. 내 옷자락밑에서 격철소리가 나거든 서슴없이 쏘아라. 소리가 덜나게 주머니안에서 쏘아야 해. 여기는 후미지고 파도가 높기때문에 주머니안에서 한두알 쏘아서는 인차 권총소리로 가려듣기 어려울게야.

선아는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모래불을 성큼성큼 걸어가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쯤 그 매점앞에 응원하러 온놈들이 와있을수 있다. 나는 신시가쪽으로 나갈테니 너는 해변으로 해서 동항으로 나가 구시가에 들어서야 한다. 혹시 둘다 살아남거든 여름에 참외를 사먹던 수사영의 그 원두막자리에서 만나자. 만일 내가 나타나지 않거든 한별동지에게… 너는 기어이 한별동지에게 돌아가야 한다.

이때 벌써 두툼한 다부산자에 목도리를 휘감아넘기고 소매속에 두손을 찌른 사나이가 펑펑 쏟아지는 눈발속에 지척까지 다가왔다. 인적드문 해변가인데가 인차 응원대가 뒤따라올것이기때문에 그놈은 점점 굵어지는 눈발속에서도 서두르지 않고 여유있게 다가온다.

영희는 선아를 만난 순간부터 자기는 별로 말도 못해보고 선아의 절박한 기분에 끌려 마침내 원쑤와의 결정적인 대결점에까지 이른것을 보고 이것저것 뉘우쳐지는것이 많았다. 그리고 이 마당에서까지 선아의 과민한 의사에 따라 행동할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기는 그처럼 큰 타격을 받은 선아가 그렇게 침착하고 단호하게 행동할수 있다는것이 놀랍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상상하기 어려운 그만큼 정도가 지나치기때문에 더 위험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이러나저러나 이제는 다시 토론하고 어쩌고 할 시간도 없었다.

여태까지 몸을 감추고 은밀히 미행해다니던 밀정은 갑자기 맞받아오는 두 처녀, 특히 영희를 보고 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러나 잎이 다 진 앙상한 나무들밖에 없는 길주변에는 몸을 감출만한데도 없고 건물이나 인가도 멀리 떨어져있었다. 어물어물하는 사이 두 녀자는 바투 다가왔다.

밀정놈은 결심을 한듯 주머니에서 권총을 뽑아들려 하였다. 그순간 영희가 권총을 발사하였다. 선아도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밀정이 허우적거리다가 길우에 쓰러지는것을 차겁게 지켜보며 선아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영희야, 빨리 가거라. 이쪽 가게방으로 붙어서 동항쪽으로 나가거라.

영희는 그의 말을 듣지도 않고 곧장 통로를 따라 걸어갔다. 만일 큰길에 나서기전에 선아가 말하는 밀정들이나 경찰이 나타나면 무작정 쏘아눕힐 작정이였다. 영희의 의도를 간파한 선아는 눈발을 헤가르며 달려왔다.

《영희야, 너 왜 이러니? 둘 다 죽자니?

《왜 다 죽겠니? 그러나 너를 방패막이로 삼고 내가 빠져나갈수는 없어. 넌 그걸 모르겠니, 넌 어쩌면 그렇게 독한 아이가 됐니?

영희는 점점 걸음을 다우치며 말했다.

선아는 입술을 짓씹으며 이 일을 어찔것인가 하고 안타깝게 사위를 살폈다. 하기는 시내의 큰길까지 무사히 빠져나가기만 하면 굳이 두사람중 한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우길것도 없다.

눈발은 점점 굵어진다. 어느새 날은 저물고 거리에서는 한둘 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그럴바에는 빨리 달리자. 이 함박눈과 차츰 짙어가는 어둠을 잘 리용하면 빠져나갈수도 있지 않는가.

그 순간 꽝 하고 뒤쪽에서 권총소리가 울리였다. 선아가 놀라서 뒤를 돌아보는데 옆에서 신음소리가 울리였다.

영희가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비틀하더니 눈판에 쓰러진다. 다 죽은줄 알았던 밀정놈이 마지막발악을 한것이였다.

선아는 쓰러지는 영희를 안고 눈우에 한쪽무릎을 꿇었다. 뒤쪽을 돌아보니 배를 깔고 엎어져서 머리만 쳐든 밀정이 다시 권총을 내대고 이쪽을 겨눈다.

선아는 한손으로 영희를 무릎우에 끌어당기며 다른 손으로 권총을 꺼내는참 연거퍼 두발을 갈겼다. 밀정놈은 어디를 맞았는지 눈구뎅이에 얼굴을 처박아버렸다.

수북이 쌓이는 눈우에 피가 벌겋게 번졌다. 영희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선아의 가슴을 자꾸만 떠밀쳤다. 어서 가라는것이다.

선아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눈은 하염없이 쏟아진다. 새롭게 쌓이는 눈이 벌겋게 물든 눈을 덮고 그우에 또다시 선혈이 흘러내려 흰눈을 물들이였다.

선아는 쏟아지려는 울음을 혀로 깨물고 짓씹으며 영희의 가슴을 헤쳤다. 그러나 삽으로 마구 파헤친듯한 끔찍한 상처에 기가 질려 얼른 제 속옷자락을 찢어내여 상처를 덮고 그우에 목도리를 덧씌운 다음 속옷을 내리우고 양복과 외투의 단추를 채웠다. 그리고 영희의 권총을 뽑아 제 옆주머니에 찔렀다.

다행히 쏟아지는 눈속에 자욱한 어둠이 덮쳐들었다.

선아는 떼를 쓰는 어린애처럼 발버둥치는 영희를 업고 일어섰다. 반도초입의 간이매점에 이르렀을 때 자동차 한대가 미친듯이 불빛을 휘저으며 달려들었다. 마침 교차로를 건느던 마차가 째지는듯한 자동차경적소리에 놀라 화닥닥 뛰여오르더니 인도에 올라붙어 가까스러 위험을 모면했다. 늙은 마부가 뛰여내려 마차뒤꽁무니가 마사지지나 않았는가 살펴보며 욕설을 퍼붓고있었다.

반도로 접어드는 자동차가 아까 일화양행에 나타났던 구식시보레라는것을 알아본 선아는 제꺽 간이매점뒤로 가붙어서서 영희를 내려놓았다. 자동차는 곧장 특무놈이 쓰러진 장소까지 달려가더니 멎어섰다. 더는 꾸물거릴 사이가 없다. 다시 영희를 둘쳐업고 일어서는데 시꺼먼 제복을 입은 경찰 한떼가 달려들었다. 그앞에 최용필이가 달려온다. 선아는 이제는 마지막이구나 생각하고 영희를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나 최용필은 앞에 니시자와의 자동차가 달려갔기때문에 그쪽에만 관심이 있어서 매점쪽은 눈여겨 살피지 않았다.

시보레는 좁은 길에서 차대가리를 돌리느라고 아릉아릉 소리를 질러댄다.

영희는 혼미해지는 의식속에서도 이 모든 긴박한 정황의 변화를 느끼는듯 다시 업히기를 결정적으로 거절하였다.

선아는 진정으로 화가 났다. 그는 안타깝게 속삭였다.

《영희야, 나는 지쳤어. 제발 성화를 먹이지 말아다오. 넌 나를 위해 허구한날 애를 태우고 자기를 희생시켜왔는데 내가 너를 잠시 업고가겠다는것마저 거절한단말이냐? 네가 정 그러면 난 저놈들을 총알이 있는껏 쏘아눕히고 나도 김혁동무 뒤를 따라가겠다.

영희는 잠잠해졌다.

선아는 그의 얼굴에 내려서 녹아내리는 눈송이를 쓸어주며 이윽히 들여다보았다. 함께 울고웃으며 싸워온 지난날이 한순간에 다 떠올랐다. 영희도 그런 생각을 하는지 벌써 피기가신 얼굴에 그윽한 미소가 떠올랐다. 활짝 핀 함박꽃처럼 화려하던 얼굴이 지금은 소복한 녀인처럼 단아하고 쓸쓸해보인다. 그대신 더 아름답고 더 기품이 있어보였다. 그것이 아마 영희의 참모습인지도 모른다.

선아는 방금 가슴아픈 말을 한것이 뉘우쳐져 영희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갖다대고 비볐다. 영희는 헝클어진 선아의 머리칼을 쓸어넘겨주며 서둘라고 눈짓을 하였다.

선아가 영희를 업고 큰길에 나서니 아까 승용차에 받길번한 마차의 마부령감이 마차를 구석구석 살펴보고 별일이 없다는것을 확인한 다음 말고삐를 잡아끌어 다시 인도로 내려서고있었다. 채찍으로 반도쪽에 사라진 자동차를 가리키며 무엇인가 중얼중얼 욕설을 퍼붓던 늙은 마부는 선아가 영희를 업고 다가오자 처음에는 반가와하였다. 그러나 영희를 마차에 태우는것을 거들어주다가 피비린내를 맡더니 깜짝 놀랐다.

선아는 방금 밀정이 탄 자동차가 돌아서게 되고 경관떼까지 주변에 퍼진 조건에서 정신이 헛갈려 무어라고 꾸며댈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 눈길에 나섰다가 미끄러져서 넘어졌어요. 어서 병원에 가야겠는데 좀 사정 봐주세요. 말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데 삯은 후히 드리겠어요.

마부는 선아의 절절한 사정과 영희의 모습을 번갈아보더니 어떻게 생각했는지 심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젊은 부인들은 이런 날씨에 조심을 해야 합니다.

선아가 영희의 상체를 비스듬히 제가슴에 기대게 하고 앉자 마부는 채찍을 쳐들고 앞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빨리 달려도 일없겠는지요?

《될수록 빨리 가주세요. 그러나… 환자가… 괴롭지 않게…》

힘겨운 주문을 받은 마부는 채찍을 휘둘렀다. 마차는 자욱한 눈발을 헤가르며 저물어가는 밤거리를 쏜살같이 달렸다. 수북이 쌓이는 눈의 완충작용때문인지 마부의 능숙한 솜시때문인지 그렇게 돌개바람을 일으키며 달리는데도 별로 들추지는 않았다.

마부는 무슨 까닭인지 어느 병원으로 가자던가, 혹은 어느 거리로 가자던가 하는것을 묻지 않았다. 선아는 그런것을 대줄 경황이 없어서 말도 못했다. 영희의 가슴은 점점 불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때로는 상체가 다 들고일어나는듯 가슴이 높이 부풀어오르는가 하면 때로는 아예 호흡이 멎어버린듯 잔잔해있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불시에 먼길을 달린 사람처럼 거칠게 급한 숨을 몰아쉬군하였다. 선아의 무릎우도 축축해졌다. 그러나 피를 멈추어세울 방법은 없어 선아는 제 가슴을 동무의 가슴우에 갖다댔다가 그가 숨쉬기 가빠할것 같아 몸을 일으키고 그우에 볼을 대고 안타깝게 비비기만 하였다.

마차가 내목정의 륙군병원앞을 지나칠 때 선아는 긴장되였다. 이 마차부령감이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혹 병원으로 달려들면 어찌나싶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한순간의 일이고 마차는 곧장 내목정을 빠져나와 백옥산밑을 끼고돌더니 려대간 대도로로 접어들었다. 수사영 가까운 한적한 교외에 나왔을 때야 마부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냥 가도 일없겠나요?

선아는 마부가 묻는 말이 무슨 말인가싶어 한참 생각하다가 《예.》 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마부는 옆차기를 더듬어 담배를 붙여물었다. 눈은 이미 수북이 쌓인 길우에 그냥 소리없이 내려서 정갈한 포단처럼 깔렸다. 말도 무슨 기미를 챘는지 뚜벅뚜벅 시름없는 편자소리를 울리며 천천히 달렸다.

《좀더 가면 삼간보라는 동네가 있는데 거기에 침깨나 놓는 사람이 있수다. 입이 무거운 령감인데…》

마부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령감이 있는데 가보지 않겠는가 하고 묻는것이였다. 마부가 어떻게 되여 그런것을 묻게 되였는가? 도대체 이 령감이 어떻게 되여 그처럼 반도부근에서 빨리 떠나야 한다는 사정을 눈치챘으며 또 피를 흘리는 환자를 싣고가면서 병원에 들릴 생각은 안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무작정 시내를 벗어났는지 모를 일이였다. 그러나 선아는 그런것을 따져보지 않았다. 영희는 숨을 모으고있었다.

《아무데나… 어디 좀 눕힐데라도…》

선아는 들렌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영희의 어깨를 안타깝게 잡아흔들었다.

《얘, 영희야, 눈을 떠, 자면 안돼. 눈을 뜨라는데…》

그러나 영희는 흔들면 흔드는대로 몸을 내맡기고있을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세워요. 마차를 좀 세워요.

선아는 부르짖었다. 마차는 슬그머니 멎어서고 마부는 조용히 눈우에 내려서더니 담배대의 재를 털었다.

《영희야, 영희야.

선아는 마침내 목메인 소리를 질렀다.

바람은 잔잔해지고 눈만 소리없이 내리는데 길우에는 구원을 청해볼 행인도 없었다. 마차말만이 갈기에 쌓이는 눈을 흔들 생각도 없이 닥쳐오는 불행앞에 머리숙이듯 고개를 숙이고있었다.

마차부는 마부대 한옆에 매달린 등잔을 벗겨내더니 등피를 제끼고 불을 켜댔다. 로인은 떨리는 손으로 객석의 풍밑에다 등을 매달아주고 잠시 지켜보다가 길가에 내려서서 쭈그리고앉았다.

《저기 뒤쪽에서 자동차가 오는가봅네다.

그는 오금을 꺾고앉은채 역시 중얼거리듯 말하였다. 조심하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선아는 이미 아무것도 조심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다행히 자동차는 화물차였다. 퉁탕거리는 발동소리와 배기가스냄새를 풍기며 자동차가 옆을 스쳐지나자 영희가 눈을 번쩍 떴다. 인정은 아무리 불러도 깨우지 못한 넋이였지만 투쟁정황은 용감한 처녀의 불타는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안타깝게 잡아흔드는 선아의 얼굴을 이윽히 쳐다보더니 알릴듯말듯 속삭였다.

《잘 가… 한별동지에게… 나는 유격대원이 되고싶었다…》

숨소리를 죽이고 귀를 강구고있는 선아의 눈앞에 마지막 경련이 지나갔다. 영희의 고개는 맥없이 기울어졌다. 눈은 저절로 감겨지고 경련이 온몸을 조용히 감싸버렸다.

《영희야-》

선아의 울음섞인 목소리가 터져오르자 마부는 슬그머니 일어났다. 한참후 그는 조용히 말고삐를 잡아끌고 뚜걱뚜걱 걸어서 처음 나타난 달구지길로 들어섰다.

선아는 이미 방심상태에 있었다. 무릎에 안긴 영희의 몸이 점점 식어들어간다는것을 느끼면서도 이것이 죽음이라는 현실적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종말이 느껴지고 절벽끝에 나선것같은 어지럼증이 정신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구불구불 흘러간 달구지길을 한참이나 돌아서 개울을 위태롭게 건넜다.

마차는 어떤 농가앞에 이르렀다. 그것이 바로 삼간보에 있는 침깨나 놓는다는 그 령감의 집이라는것을 후에야 알게 되였다.

마부령감이 문을 두드리자 비슷한 년배의 로인이 나왔다. 마부는 그를 한옆으로 불러 수군거렸다.

《혁명가가 총에 맞고 쓰러졌네. 좀 도와주어야겠네.

《총에 맞은걸 침으로 어떻게 하나?  병원에 데려가야지.

《지금 거리에 경찰이 쫙 덮였어. 가까스로 총을 쏘며 빠져나오는걸 내 눈으로 봤네. 시내는 못들어가. 그리고 이사람.

하고 마부령감은 한층 목소리를 낮추어 총에 맞은 사람은 이미 숨을 거두었다는것과 지금 문제는 함께 온 사람의 기를 돋구어야지 그렇지 않다간 당장 쓰러질것 같다는것을 말하고 덧붙였다.

《이사람, 도와줍세. 새파란 꽃나이 색시들이야.

《뭐, 색시들!

집주인령감은 놀라서 소리치더니 마차로 다가왔다.

한밤중에 마차부령감의 련락을 받고 동아선박수리공장의 조직책임자가 그 마차를 타고 달려왔다.

시내는 삼엄한 경계태세에 들어갔기때문에 한영희의 하숙집에도 겨우 들렸고 자기자신 겨우 시내를 빠져나왔다고 하였다. 거리에서는 벌써 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을 두고 소문이 퍼졌다는것이였다.

이튿날 삼간보의 눈덮인 야산기슭에 무덤을 파고 영희를 묻었다.

깡깡 얼어붙은 땅껍질을 벗겨내니 밑창은 석비레판이였다.

나무 한그루 없는 이 황량한 돌산, 그나마 사람눈을 피하기 위하여 잘 드러나지도 않는 산턱에 아름다운 영희를 묻는다고 생각하니 선아는 너무나 절통하여 기가 멀것만 같았다.

생전에 별로 인연이라고 없었던 마부와 그의 친구되는 침쟁이령감도 같은 심정이 되여 서로 위로하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래서 옛날부터 재사가인이 박명이라는 말이 있질 않나.

《내자식 둘을 땅에 묻었네만 그때는 가슴도 아프더니 이제 이 일을 당하고보니 우리같은 인간들의 죽음이야 벌레죽음이나 뭐가 다르겠나. 이런 꽃같은 처녀들이 나라를 위해 가슴에 총을 품고 싸우다가 이런데 묻히는걸 생각하면 내 머리가 센것이 부끄럽네.

눈은 계속 내렸다. 삼간보의 침쟁이집에 돌아와서 남정들은 간단히 술 한잔씩을 나누었다. 영희의 하숙집에서 가지고 온 물건들가운데서 가져가기 어려운 세간붙이따위들을 두 로인에게 인사삼아 나누어주었다.

동아선박수리공장의 조직책임자와 앞으로 조직해야 할 일들을 의논하고 선아는 려순에서 떠나기로 하였다.

해거름에 길에 나서니 마부령감이 따라왔다. 기차를 타자면 시끄럽겠는데 경비가 비교적 허술한 역까지 태워다주겠다고 나섰다.

《영희야-》

선아는 마차의 풍짬으로 삼간보의 들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 인차 찾아올게, 사실은 내가 여기에 남아야 할걸 네가 남았구나… 내 기어이 여기로 다시 올게.

려대북도로에 눈발은 그냥 희뜩거리고 빤한 등불을 흔들거리며 마차는 단조로운 말발굽소리를 울리며 달렸다. 마부는 곰방대를 뻐금뻐금 빨며 중얼거리듯 말하였다.

《내 자식을 묻을 때도 울기야 했습지요. 허나 지금처럼 가슴이 아팠던것 같지는 않수다. 사람이란 아무래도 한번은 죽는 법인데…》

끼랴- 하고 가볍게 채찍을 한번 두른 마부는 소매속에 두손을 엇갈아끼고 담배연기를 푸실푸실 날리며 말을 이었다.

《내 자주는 못가봐도 가끔 들리겠수다. 그때 총소리를 듣고 나는 굉장한 호걸들인가 했더니 아가씨들인걸 보고 놀랬지요. 그런데 내 마차에서 운명을 하고보니 내 마음도 좋지 않수다.

도성자, 영성자를 지나 고성지에 이르니 밤이 깊었다.

정거장이 저만치 바라보이자 마부는 자기가 먼저 정거장형편을 알아보고 차표를 사가지고 올테니 그때까지 마차에서 기다리라고 하면서 마차를 멈추어세웠다.

바로 그앞에 시꺼먼 그림자가 좌우로 다가왔다. 총대를 둘러맨 왜놈경찰이였다. 그제야 살펴보니 벌판이나 다름없는 갈림길에 차단소를 만들어놓고 세놈이나 지켜서있었다. 워낙 행인이 많지 않은 농촌역이라 세놈씩 지키고있어도 단속할 대상이 없어 심심하던차에 마차가 달려오니 반갑다고 두놈이나 한꺼번에 달려든것이였다.

《어디 가는가?

목에 모자턱걸이를 느직이 걸치고 개털슈바의 깃을 일으켜세운 자가 마차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다른놈은 땅바닥에 뛰여내린 마부주위를 한바퀴 빙 돌면서

《어디서 떠났어? 왜 한밤중에 다니는가?》 하고 새끼를 질끈 동인 마부의 허리에 무엇을 찬것이 없나 깐깐히 살펴본다.

선아는 모든것이 끝장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놈들이 아무 특징도 없는 이런 촌정거장에까지 단속초소를 만들어냈을 때는 려대일대에 비상경계망을 든든히 펼친것이 틀림없는데 혹 여기서 어찌어찌해 빠져나간다 해도 어차피 그 경계망을 벗어나기는 어려울것이였다.

다만 한두놈이라도 쏘아죽이고 나도 영희의 뒤를 따라가자- 이렇게 생각한 선아는 천천히 손가방의 금구를 제꼈다. 그런 눈치를 챈 마부는 울상이 돼서 마차앞에 선 경관의 소매를 잡고 애원했다.

《이 아가씨는 저 삼간보에 사는 아가씬데 신병이 심해서 대련의 큰 병원으로 갑네다.

제발 사정 좀 봐주시우다.

어떻게나 자기를 살려보겠다고 흐느껴 울다싶이 하는 그 로인의 초췌한 모습을 바라보니 문득 마지막 하직을 결심한 이 인간세상에 연연한 정이 샘솟아 코끝이 메워왔다.

그러나 어물어물하다가는 저놈들의 손에 체포될수 있다. 그는 손가방속에서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면서 침착하게 말했다.

《아바이, 물러나요.

《아, , 나으리 제발…》

마부는 경관과 선아사이에 끼여 어쩔줄 모르고 허둥거렸다. 마부를 조사하려던 다른놈도 무언가 이상한 눈치를 챘는지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때 뒤쪽에서 벼락치는것 같은 소리를 내며 또 한대의 마차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왔다.

《야, 저 마차를 세워!

하고 선아앞에 섰던놈이 가운데 나선 마부를 밀치며 소리쳤다.

이쪽으로 다가오던 경관이 길가운데 나섰다.

선아는 막 방아쇠를 당기려다가 주춤했다. 새로운 정황이 불질을 하는데 불리하게 느껴졌기때문이였다. 그런데 무섭게 달려오던 마차는 제먼저 멎어서더니 마차에서 웬 안경쟁이가 뛰여내렸다.

《이건 뭣들인가?

내려서자바람으로 그 사나이는 일본말로 소리쳤다.

단속하러 나섰던 경관이 얼떨떨해서 잠시 어물거리다가 당신은 누구냐고 앞으로 나섰다.

신사외투를 걸치고 중절모를 푹 눌러쓴 그 사나이는 안경을 번쩍거리며 증명서를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하고 권총을 발사하였다. 앞에 선놈이 쓰러지자 선아와 마주선놈을 쏘아눕히고 그달음으로 단속초소로 달려갔다. 림시로 꾸린 판자집초소앞에서 서성거리던 또 한놈의 경관이 총을 내대고 저항하였다.

선아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마차발판에 일어서서 그놈의 가슴팍을 겨누어 연거퍼 두발을 갈겼다.

불시에 닥친 위기가 사라지자 별안간 사위는 더 무시무시한 정적에 묻혀든듯하였다.

선아가 멍하니 서서 지켜보는데 안경쟁이 사나이가 선아의 마부곁으로 다가오더니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바이, 고맙습니다. 정말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이제는 돌아가십시오. 가서 누구한테도 어제부터 본일을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아바이의 신세를 영영 잊지 않겠습니다.

《헌데 이 아가씨는?

마부는 너무나 급격한 사태의 급전에 얼떨떨해서 중얼거렸다.

《괜찮습니다. 걱정 마시고 돌아가십시오.

그러면서 안경쟁이 신사는 선아에게로 다가오더니 좀 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수고했소. 어서 이쪽 마차로 옮아타오. 지금 려대간의 모든 도로는 봉쇄됐소. 젊은 녀자들은 집안에 있는것도 뒤져내는판이요. 이 마차를 타고 들길로 해서 이밤중으로 만철본선까지 나가야 하오. 어서 서두르시오.

선아는 꿈속에서처럼 차광수의 정다운 모습을 어둠속에서 가려보았다. 그제야 보니 그쪽의 마부대에는 동아선박수리공장의 조직책임자가 앉아있었다.

어제 삼간보에서 한영희를 묻고 돌아간 그가 어떻게 차광수를 만났으며 또 바로 이 시각에 응당 간도에 있어야 할 차광수가 여기에 어떻게 나타날수 있었겠는가 하는것은 촉급한 순간에 아무리 생각을 굴려도 알아낼길이 없었다.

그저 눈물이 칵 하고 앞을 막았다.

《광수동무!

《자, 이럴 때가 아니요. 한별동무가 기다리고있소. 한별의 전사도 우는가?

차광수는 조심스럽게 선아의 손을 잡아 저쪽 마차로 이끌었다.

《아, 한별동지!

선아는 휘청거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옮겨놓으며 헛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이윽고 두 마차는 남북으로 갈라져가고 차광수는 길우에 홀로 남아 잠시 서성거리다가 려순방향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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