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불멸의 력사》

  장편소설

 

                         석윤기

(제4회)

제 1 편

 

7

 

《만일에 김일성이 안도에서 아주 종적을 감춘것이 사실이라면…》

하고 후꾸다는 말끝을 흐렸다. 눈을 가느스름히 쪼프리고 상체를 가볍게 흔들며 생각에 잠겨있는 그 모습은 어디를 봐도 손에 피칠갑을 하고다니는 특무두목같은데는 없고 오히려 인심 무던한 농촌의 중늙은이같다. 솜을 두툼하게 둔 일본실내옷소매속에 한손을 찌르고 다른 한손에 권연을 붙여든채 아까부터 생담배만 태우고있다. 후꾸다의 사색이 깊어짐에 따라 권연끝의 재가 누에기장만큼이나 길어져서 중둥이 구붓하게 휘여든다.

니시자와는 생담배 타는 냄새가 몹시 역하면서도 그 재가 언제 어떤 모양으로 두사람사이에 놓여있는 커다란 일본식사기화로의 차관우에 흩어질것인가 하는데 관심을 집중하고있었다. 아니, 그렇게 방심상태에 있는척해보이는것이다.

봉천에서 돌아온 후꾸다는 이 야마도호텔 별장에 니시자와를 불러들이자마자 그간 사업형편에 대한것은 대충 몇마디 스치고 인차 김일성의 행처문제를 꺼내놓았다. 김일성이 안도에서 사라졌다는것은 지금 돈화쪽에 나가있는 기도대위가 보낸 소식인데 틀림이 없다는것이다. 니시자와는 그에 대해 별로 아는것이 없으니 후꾸다의 말을 잠자코 들을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니시자와로서는 다행스러웠다. 만일 후꾸다가 김혁의 동태에 대해 꼬치꼬치 캐여묻는다면 자기 립장이 얼마나 딱해질것인가. 김혁은 마침내 죽었다. 병감에서 숨을 거둘 때 말라서 땅땅 굳어진 한줌의 찔광이열매를 꽉 움켜쥐고있었다. 감옥의의 보고를 받고 허둥지둥 달려갔을 때 아직 시신에는 온기가 있었고 항용 심장병환자의 최후에서 볼수 있는 그런 육체적고통의 흔적대신 가벼운 미소가 떠돌고있는듯한 입술은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반쯤 벌어져있었다. 그러나 찔광이를 움켜쥔 손은 강억지로 비틀어도 벌려지지 않았다.

니시자와는 그것이 명주바지저고리와 함께 선아가 차입한것임을 인차 알아보았다.

김혁을 무조건 신중히 다루라는 후꾸다의 지시를 어기고 고문끝에 죽여버리고나니 니시자와로서 빠져나갈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김혁이가 죽을 때 당신이 들여보낼것을 승인한 그 찔광이를 움켜쥐고 미소를 지으며 죽었다는 말을 강조함으로써 후꾸다로 하여금 자기 실책을 깨닫게 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 찔광이가 선아의 차입품이고 선아가 고유수나 오가자와 련결되여있은 이상 그 찔광이 역시 김일성과 관련되여있으리라는것은 쉽게 추리할수 있는것이였다.

후꾸다는 이번에도 안도에서 김일성을 놓치고 헤덤비며 달려왔다. 그는 또다시 김혁의 선에 기대를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혁은 이미 죽었고 유선아와 한영희의 행방도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한영희에 대해서는 막연하지만 무엇인가 실마리가 잡힐듯한 징조도 없지 않다. 대련부두가에 있는 시노사끼외과라는 개인병원에서 한영희가 나오는것을 발견하고 즉시 추격했으나 려순행차간에서 혼잡바람에 그만 놓쳤다는 밀정의 보고가 있었다. 알고보니 시노사끼는 김혁이를 담당한 감옥의와 규슈의대 동창생이였다. 감옥의에게 특별히 의심스러운것은 없었다. 그러나 니시자와의 사냥개같은 후각은 벌써 여기에 무엇인가 있다는 냄새를 맡았다. 그는 밀정을 시노사끼에게도 붙이고 감옥의에게도 붙였다. 그들은 자주 래왕하였다. 밤새 바둑을 두기도 하고 때로는 해안통을 거닐기도 하였다. 아무런 의심스러운 징조도 보이지 않았다. 같은 대학을 다닌 동창생끼리 만주와 같은 외지에 와서 만났는데 자주 래왕하는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그러나 니시자와는 그 밀정에게 한영희를 본것이 사실이냐고 한번 따져물었을뿐 아무런 동요도 없이 뒤를 밟게 했다. 언젠가는 그 줄에 한영희가 걸려들리라는것을 그는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일것인가 하는것은 장담할수 없었다. 그런데 김혁이가 죽었다. 한영희가 나타난다면 이때가 가장 적당한 계기일것이다. 이 계기가 지나고보면 한영희를 그 선에서 만나리라고 기대할 근거가 전혀 없었다. 니시자와는 이 며칠째 속을 조이며 시노사끼의 동태를 주목하고있었다. 그런데 한영희가 걸려들었다는 보고는 없고 뚱딴지같이 후꾸다가 나타난것이였다.

《그렇다면 김일성이 딴곳으로 피해갔는가?

하고 후꾸다는 소매속에 찌른 손을 뽑아 청자색화로의 매끈한 술가리를 애무하듯 쓸었다. 구붓하게 휘여든 화로의 곡선은 따뜻한 불기운을 풍기고있어서 쾌감을 주었다.

《아니다. 그들이 카륜에서 무장투쟁을 결심하고 간도로 나왔을 때 벌써 안도지방이 무장투쟁에 제일 적합한곳이라고 보고 김일성이 직접 그리로 간것이 틀림없는데 그네들이 바야흐로 총을 들어야 할 지금에 와서 그가 까닭없이 다른곳으로 옮아갔다고 볼수는 없다. 나는 여기서 김일성의 지도자로서의 특성을 고려할 때보다 대담한 가설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보는것이다.

후꾸다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비로소 담배재를 털고 부저가락으로 담배꽁초를 깊숙이 재속에 밀어넣었다.

《니시자와.

하고 그는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으며 가느스름히 뜬 눈으로 주의깊이 상대를 바라보았다.

《스미에의 말을 듣자니 자네는 요즘 매우 거치른 생활을 한다는데 그래서야 쓰겠는가, 사람이 일을 하다가 일시 실수를 할수도 있는건데 그걸 가지고 오밀쪼밀할 필요가 없다. 물론 김혁이가 살아있다면 우리로서는 없는것보다 낫겠지만 있었다고 해도 결정적인것은 못될것이다.

니시자와는 번쩍 머리를 쳐들었다. 이마빡을 사정없이 내질린듯하였다. 자기뒤에 스미에가 있다는 생각을 왜 못했던가, 그 녀자의 끄나불이 자기 주변에도 칭칭 감겨돌리라는 생각을 진작 했어야 할것이 아닌가, 후꾸다가 점잖게 차리고 다니니 진짜 마음씨 어진 채마전주인쯤으로 알았던가, 전이나 다름없이 아무리 먼곳에 가있어도 자기는 후꾸다라는 왕거미의 그물에 걸려든 하나의 부나비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깨달았을 때 감히 후꾸다에게 어떤 대결감정을 가지고있었던 자기에 대한 환멸때문에 니시자와의 목대는 부러진듯이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화로우에 깊이 수그러졌다.

《용기를 내라.

하고 후꾸다는 말을 이었다.

《지난날 우리는 보다 많이 생각하고 무엇인가 추리해내는데 급급했다. 이제 그들은 행동을 시작했다. 우리도 끝없이 생각만 하고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군수뇌부에서는 조선과 만주의 인심을 수습하고 소연한 세계의 여론을 어루만지기 위하여 동북행정위원회를 내오는것을 급선무로 내세우고있다. 이것은 구경 중국으로부터의 만주국의 독립이라는 코스로 직결될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김일성이 우리의 앞길에 장애를 조성하고있다. 인심이 지금 그에게 쏠리고있다. 만일 그에게로 기울어지는 인심을 잡아헤치지 못한다면 이 대륙을 위하여 우리 선배들이 흘린 피와 로심초사가 다 한장 휴지로 돌아가고말것이다. 나는 안도에서 그의 숨통을 조이자고 백방의 수를 다 썼다. 우리가 조선인정치범들을 석방해놓고보니 우리가 예산한대로 전향하거나 타락한자들을 제외하고는 태반이 김일성을 찾아갔다. 그들을 우리 사람들이 추격하고있고 특히 우리가 제일 주목하는 녕안현당비서 김책은 직접 기도대위가 따르고있으니 틀림이 없겠지만 과연 그가 김일성과 련계를 지어내겠는가 하는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다. 특히 김일성의 행적자체를 모르고있는 조건에서말이다.

여기서 나는 김일성이 반드시 나타나리라는곳에 미리 함정을 파두어야 한다고본다.

《그건 어떻게 하시는 말씀인지요?

《니시자와, 이번에 오가자에서 나오던 리경락의 일행을 체포했는데 그들은 안도로 김일성을 찾아가는길이라고 했다. 나는 김일성이 사람들을 안도로 불러놓고 자기는 딴곳으로 가버릴 그런 신의없는 위인이 아니라고 본다. 김일성은 일시 안도를 떠났을뿐 반드시 힘을 더 그러모아 안도로 되돌아올것이다.

《그건 너무나 추상적인 예측이 아닐가요?

《그럴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대답이 나오기전에는 이 가설에 근거해서 행동해야겠다. 니시자와, 생각해보라. 지금 우리로서 어떤 군대가 우리를 반대하여 일어났을 때 어디를 찔리는것이 제일 아프고 제일 위험하겠는가? 그것은 두말할것없이 조선과 련결된 국경지대이다. 그중에서도 아직 우리 군대가 들어가기 힘든 산간오지, 거기에 제국을 반대하는 세력기반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23중의 난관을 조성할것이다. 안도가 바로 그러한 고장이다. 김일성이 바로 그 점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이미 몇해째 지반을 닦아놓는다. 그런 가위에 처음에는 남호두에서 반일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우사령이란자까지 자기 부대를 끌고 안도에 웅거했다. 이런 형편인데 우리 군대는 아직 철도연선과 멀리 떨어진 그곳까지 손을 뻗칠 힘이 없다. 그러한곳에 김일성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내 손바닥에 장을 지져라. 그는 틀림없이 그곳에 다시 나타날것이다. 설사 당장에 김일성그곳에서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들의 활동중심지는 안도지방인만큼 자네가 그쪽으로 간다고 해서 무익한 일로는 되지 않을것이다.

《예, 제가말입니까?

니시자와는 놀라서 부르짖었다. 자기같이 어디에 내다놓아도 유표한 다리병신을 특무놀음에 또 끌어내다니, 이건 사람을 죽이자는것이 아닌가. 그러고보면 김혁이를 질거죽인것이 결국은 자기자신을 죽음길로 내모는 결과로 되지 않았는가, 어찌 보면 김혁의 문제처리에서 자기와 엇나가는 니시자와를 느끼고 그런 시도가 얼마나 위험한것인가를 깨우치자는 후꾸다의 악착한 계책이 여기에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니시자와의 과민한 추리를 다 넘겨다짚은듯이 후꾸다는 타이르는조로 말을 이었다.

《복잡하게 생각할것은 없다. 물론 9.18사변전이였다면 인상의 특징이 너무나 뚜렷한 사람을 비밀사업에 내세우는것과 같은 무리한 일을 하지 않았을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도 그들도 결정적대결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구상을 짓부셔버리고 만주국을 안정된 분위기에서 세울수 있다면 제국의 미래는 양양할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이 마침내 무장도당을 무어가지고 광활한 만주대륙을 무대로 싸움을 벌리게 된다면 그 불길우에 일어서는 만주국은 말할것 없고 그 여파로 조선까지도 불을 입게 될것이다. 그렇다. 그렇게 되는것은 시간문제일것이다. 그렇기때문에 군사가들이 지도를 펼쳐놓고 점령지가 확대되는데 따라 기발을 꽂아나가는 순진한 자기도취에 빠져있는사이 우리는 제국의 장래를 위하여 지금부터 장작단우에 자고 쓸개를 씹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다행히 지금 이 땅, 특히 간도일대는 형형색색의 사상조류와 군대가 몰려들어 아직 어느 한쪽도 결정적인 우세를 차지하지 못하고있다. 제국군대는 도시는 다 장악하였지만 농촌에는 아직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고 안도일대와 쏘만국경지대에는 구국군이 득실거린다. 여기에 아직 소수이기는 하나 벌써부터 공산주의자들이 무장활동을 하고있다. 이런 틈바구니에 끼여들면 그 누가 다리병신을 유심히 보지도 않을것이고 설사 의심을 산다 해도 놀랄것이 없다. 끝까지 비밀만을 지켜야 할 지난날과는 다르다. 내가 제국의 장래를 놓고 우려했지만 어쨌든 지금의 만주는 대국적으로 보아 우리 세상인것은 사실이다. 내가 자네를 안도로 보내자는 의도를 알만한가?

《그런데 대상이 김일성이라면…》

하고 니시자와는 대답을 피하면서 다른 문제를 꺼냈다.

《그들은 저를 직접 알고있겠는데요.

《그 수가 그리 많은것은 아니지 않는가? 나도 그 점을 타산해보았다. 그러나 큰것이 없다. 자네가 직접 대상으로 삼아야 할 인물은 조선혁명군이 아니라 독립군퇴물이다. 량강구에 지대현이라는 참의부시절에 중대장을 하던 인물이 있다. 그는 반공사상이 투철한 인물이고 그들의 민족주의자들속에서는 일정한 지반도 있다. 그가 바로 안도에 있는 우사령의 뒤에 붙어서 여태 우리 일을 해주었다. 그러나 의식적인것은 아니였다. 우리 사람이 아편과 돈으로 꼬여서 이러저러한 정보를 얻어내기도 하고 우리의 의도대로 우사령을 꼬드기기도 하였다. 그들 역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만큼 여태까지는 안도일대에 반공지반을 구축하자는 우리의 청을 고분고분 들어주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좀더 복잡하고 구체적인 사업을 해야겠다. 만일 김일성이 안도에 웅거하게 된다면 그는 불가불 광활한 만주땅 각지와 련계를 취하지 않을수 없을것이다.

그런데 안도는 화룡, 무송 방향으로는 강에 막히고 산에 막혀 이렇다할 길이 없다. 오직 통하는것은 돈화와 명월구 방향으로만 길이 나있는데 안도, 돈화, 명월구를 련결하는 삼각점에 함정을 만들어야겠다. 그러되 그것을 우사령과 조선인유지들의 손으로 만들게끔 해야겠다. 간접적인 조작으로써 이러한 일을 한다는것은 거의 교예나 다름없는 묘한 점이 없지 않다. 머리를 써야 하고 기지가 있어야 하며 대담한 행동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자네를 그곳으로 보내자는것이다.

《그러니까 한사람이 관문을 지킴에 만명을 당한다는 격이군요.

니시자와는 흥분해서 부르짖었다.

《옳다. 이제는 내 구상을 알겠는가? 그런데 니시자와, 자네의 난점은 그 관문을 다리병신인 자네가 직접 지키는것이 아니라 례컨데 지대현이나 우사령, 혹은 안도에 아직 남아있는 구동북경찰을 통해 해야 한다는것이다. 자네는 인형조종사와 같이 뒤에서 그들을 조종해야 한다. 안도라는데는 아직 제국의 힘이 미치지 않는곳이다. 따라서 자네가 일본인이라는것이 드러나면 김일성이 보다 먼저 자네를 잡아죽일것이다. 다행히 그곳에 이미 일정하게 터전을 닦놓은곳이 있다. 이리 와서 지도를 보라.

하고 후꾸다는 책상우에서 미리 준비해놓은듯한 보통려행용 지도첩을 집어들어 한군데를 펼쳤다.

《여기가 명월구고 여기가 돈화이다. 보는바와 같이 안도는 철도연선과 멀리 떨어져서 길이라고는 이 도목구, 황구령으로 해서 명월구로 넘어가는 길과 돈화에서 마호를 거쳐 푸르허쪽으로 빠지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 이 삼각점 바로 푸르허마을에서 좀 떨어진곳에 부강촌이라는 동네가 있다. 여기에 우리가 박아놓은 쐐기가 있다.

니시자와는 담담하게 전개되는 후꾸다의 설명을 한귀로 들으며 활랑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어금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후꾸다의 추리는 벌써 그의 눈앞에 생동한 현실처럼 떠올랐다. 후꾸다의 대담한 추리가 아직은 허황한 느낌을 주는 점이 없지 않다고 그자신의 리성도 랭각작용을 하고있었으나 그의 가슴은 무조건적으로 달아올랐다. 만일 후꾸다의 추리가 틀림없다면 한쪽다리가 마저 잘리울지 모른다. 아니 이번에 김일성과 맞다들면 아예 목숨이 송두리채 없어질수도 있다. 이런 무시무시한 예감이 가슴을 답답하게 압박하였다. 그러나 자기는 어차피 후꾸다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수 없을것이라고 니시자와는 자신을 저주하며 생각을 다쫓았다. 왜냐하면 그자신 무엇보다도 김일성을 다시한번 보고싶다는 열망때문에 벌써 가슴이 터져나갈 지경이였기때문이다.

이때 방구석에 놓인 전화기가 찌르릉찌르릉 다급하게 종소리를 울렸다.

후꾸다는 입가에 차거운 미소를 띄우고 괴롭게 몸부림치는듯한 니시자와를 가로 훑어보며 조용히 수화기를 들었다.

《나다.

침착하게 울리던 후꾸다의 목소리는 삽시에 거칠어졌다.

《웬일이냐? 함부로 전화질을 하면서?… 거기는 어디냐? , 일화양행? 그런데? …려순역에서 내렸다구? 역인가? 어딘가? … 좋다, 체포하라구 해! 가만, 너는 움직이지 말아라. 니시자와를 보내겠다.

수화기를 꾹 하고 눌러놓은 후꾸다는 지도를 차곡차곡 접어서 책상우에 올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량쪽 엄지손가락밑으로 눈확을 비비더니 천천히 니시자와를 향해 돌아앉았다. 그러고도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니시자와, 자네가 늘인 그물에 고기가 걸렸다.

《예?

《한영희가 시노사끼외과에 나타났다는군.

《그래서요?

니시자와도 후꾸다가 시노사끼병원에 그물을 늘인것자체를 어떻게 아는지 의문스러웠지만 그것은 묻지 않았다. 그런것은 물어봐야 대주지도 않을것이였다.

그런데 후꾸다는 자진해서 그것을 다 터놓았다.

《스미에가 일화양행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지금 한영희는 려순역에서 내려 교장구쪽으로 급히 걸어가고있다는군. 다 체포해야겠. 여기서의 작전은 일단 결속해야겠다. 시노사끼는 아직 건드리지 않는것이 좋겠다. 어서 가보라. 될수만 있으면 자네 수하사람들로써 이 일을 결속짓도록 하라. 정하는수 없으면 경찰이나 헌병의 조력을 빌수도 있겠지만 자네가 인차 떠나야 할 형편이니 여러 사람이 관련되는것이 재미가 적다.

《저 최용필을 어떻게 할가요?

《지금 스미에가 그자와 함께 있는것 같다. 어차피 드러난판이니 일에 끌어넣어라. 나는 그자를 자네와 함께 안도로 보낼 생각인데… 그 점을 잘 타산해서 정황을 처리하라.

《알았습니다.

니시자와는 여태 품고있던 반감을 싹 가셔버리고 절도있게 대답하였다.

 

 

8

 

 

일화양행지사의 응접실에서 뜻밖에도 일본녀자의 전화질하는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몹시 조심을 두고 하는 전화였으나 감도가 좋지 않아서 어떤 말마디들은 곱씹다가 청을 높이군하였다. 그런 말마디들이 가끔 복도에까지 울려나왔다.

선아는 이미 몇번이나 쓸어낸 복도를 가며오며 쓸고 또 쓸면서 한마디라도 더 전화내용을 얻어듣자고 귀를 강구었다.

그 녀자가 새까만 돈피털외투자락을 여미고 귀걸이를 하늘거리며 인력거에서 내려섰을 때 선아는 장사거래를 하는 중국녀자로 생각하고 별로 주의해보지도 않았었다. 중국말로 주인을 찾고 이어 마중나온 지사장과 인사를 건네고 하는 말마디들은 어딘가 딱딱하게 느껴졌지만 낯빛이 몹시 긴장된것을 보면 속이 편치 않아서 그러는것이라고 심상히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 녀자가 응접실에 사라진지 얼마 안되여 할빈지사의 송달원이라는 명색으로 몇번 나타난적이 있는 최용필이가 숨을 헐썩거리며 나타났다. 그자가 사무실에 들어서자바람으로 그 응접실로 사라지자 선아는 긴장되였다. 그러니 그 녀자도 밀정이였던가? 선아는 그지간에 최용필이가 니시자와라는 절뚝발이와 련계된 밀정이며 그들이 김혁이를 비롯한 조선혁명군의 뒤를 캐고있는 후꾸다의 심복들이라는것을 알아내였다. 그런데 중국녀자가 나타나기는 처음이였고 더구나 그 녀자가 류창한 일본말을 한다는것은 보통일이 아니였다.

귀를 강구고 들으니 아니나다를가 방안에서는 일본말로 다급히 전화질을 하는 그 녀자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그러나 설마하니 그속에서 영희의 이름이 튀여나오고 체포며 니시자와며 하는 말마디까지 섞여나올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무 맥락도 없이 김혁이가 잘못되였구나 하는 섬찍한 생각이 떠올랐다. 무서운 짐승앞에서 사지가 가드라드는듯한 마비감이 온몸을 엄습하였다. 몸뿐아니라 사색까지 굳어져버린듯하였다. 다만 이렇게 서있어서는 안된다, 어떻게 하든 손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가슴을 초조하게 볶았다. 이놈들이 영희를 어떻게 하자는것인가. 체포한다면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손을 쓰자는것인가.

오늘은 수요일, 다섯시 퇴근시간에 그와 만나게 되여있다. 그와 만나는 시간을 선아는 얼마나 가슴조이며 기다리는지 모른다. 영희는 오늘쯤 대련에 갔을지 모른다. 감옥의 소식을 안타까이 기다려오던 선아는 정작 영희가 시노사끼를 만나러 가겠다고 말한 그때부터 가슴이 한줌만하게 조여들면서 걷잡을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좋은 소식이 올리는 만무하다. 끝이 빤히 내다보이는 결말이지만 미지의 너울을 씌워놓고 가냘픈 한가닥 희망이나마 가져보는 지금의 이 사태가 오래 끌리기를 애타게 빌었다. 그러나 어차피 영희는 대련으로 갈것이며 간절한 마음을 거미줄같은 어설픈 희망에 걸어놓고 이어가는 이 생활은 끝장이 날것이다. 이제 퇴근시간도 30분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늦어도 한시간이면 자기는 그 반도의 바위앞에서 영희를 만날것이며 마침내 절벽을 마주하듯 무서운 진실앞에 서게 될것이다. 이런 서글픈 기대와 초조감 속에 안절부절못해 서성거리는 선아의 귀에 바로 그 전화소리가 울려온것이였다.

바깥에서 승용차 멎는 소리가 나서 무의식중에 성에가 내불린 출입문의 한귀를 비집고 내다보니 구식시보레가 발동을 끄지 않은채 서있는데 절뚝발이 니시자와가 뛰여내리며 운전사를 향하여 뭐라고 소리친다. 운전사는 그자리에서 후진을 하더니 차를 오던 방향으로 돌리는 모양이고 절뚝발이는 곧장 출입문으로 달려들었다. 순간 가면같이 창백한 그 얼굴을 본 선아는 뒤걸음질쳤다.

선아의 얼어붙은듯하던 사색과 운동기관들은 한순간에 마비가 풀렸다. 위험을 느끼자마자 행동이 시작되였다. 선아는 서둘러 비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뒤마당으로 난 출입문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니시자와의 비수같은 눈길이 선아를 겨누었다.

《서라!

째지는것 같은 니시자와의 목소리가 울리자 응접실에서 중국녀자로 변장한 스미에와 최용필이 튀여나왔다. 옆방에서 지사장도 눈이 둥그래서 얼굴을 내밀었다.

《저 녀자가 누구야? 저년을 붙잡아라!

최용필이가 누구를 말하는것인지 영문을 몰라서 두리번거리는데 때마침 살림집에서 사무실로 나오던 지사장의 녀편네가 니시자와의 웨치는 소리와 손가락질을 제꺽 가려보고 선아의 덜미를 잡으려 하였다. 절구통같은 둔자가 어떤 복수심리에 다쫓기여 격에 맞지도 않는 용맹을 발휘하였으나 이미 최악의 경우를 각오한 선아가 너무나 날카롭게 쏘아보는바람에 기겁해서 뒤걸음치기 시작했다. 비자루와 탄재며 먼지가 수북이 담긴 쓰레받기가 회되박을 쓴것 같은 그 계집의 상통에 들씌워졌다. 계집은 좁은 통로에 풍덩 무너져앉으며 울음소리를 내였다. 니시자와가 절뚝거리며 쫓아나오다가 함박같은 엉치를 뭉기적거리는 지사장 녀편네때문에 가뜩이나 불편한 다리가 걸채여 하마트면 넘어질번하였다.

《쌍 빌어먹을!

니시자와는 일부러 지팽이끝에 걸린 지사장 녀편네의 옷자락을 거칠게 잡아헤치며 상욕을 퍼부었다.

《어떻게 된겁니까?

최용필이 달려와서 물었다.

《이제 그 계집 누구야?

《누구를 말하는것인지… 소제부말입니까?

《소제부?

니시자와는 선아가 사라진 골목길쪽을 쏘아보며 이를 앙다물었다. 언젠가 후꾸다와 함께 려순감옥에 갔다가 수녀처럼 얼굴을 감싼 그 녀자를 본 인상이 선명히 되살아났다.

《반편같은것들! 저게 바로 유선아다!

《예?

최용필이 놀라서 되물었으나 니시자와는 이미 침착성을 회복하였다. 소란을 피워서는 재미없다. 선아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것이다. 선아를 추격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자의 말을 듣고 한영희를 잡으러 나가야 하는가? 일이란 매번 이렇게 꼬이기 마련이다. 두 녀자를 잡겠다고 몇달씩 그물을 늘여놓고 기다려도 소식이 없더니 걸려들자니까 한날 한시에 한꺼번에 나타났다.

불편한대로 얼굴을 띠여본 선아를 자기가 직접 따를수밖에 없다고 결심하고 무작정 길에 뛰여나온 니시자와는 최용필을 소리쳐불렀다. 큰길에 나서보니 선아의 모습은 흔적도 없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일본교로 해서 수로를 건너 정거장으로 나가는 길을 잡았다. 불의의 조우때문에 다급했을 선아가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방향은 틀림없이 정거장방향일것이라고 판단한것이였다.

《한영희는 어데 있어?

니시자와는 지팽이로 행인들을 후려칠것처럼 반달음을 놓으며 물었다.

《오까모도라고 소홍아가씨가 봉천에서 데려온자가 따르고있답니다. 대련에서 려순행렬차를 타면서 전화를 했다니까 벌써 려순거리에 들어섰겠는데 전화를 걸 여유가 없는것 같습니다.

《오까모도가 혼자서 따른단말인가? 그럼 장가는 어데 갔어?

《모르겠는데요. 아마 어디서 한잔 하겠지요.

《개같은 자식!

장가란 니시자와가 시노사끼병원에 붙여놓은 끄나불이였다.

한영희를 따르고있는것이 자기는 알지도 못하는 스미에의 끄나불 한사람인이상 남의 일처럼 그냥 내쳐둘수도 없었다.

니시자와는 걸음을 멈추었다.

《너는 이 길로 정거장으로 곧장 나가면서 그 소제부를 찾아내서 묶어라. 대단히 위험한 녀자니까 조심해야 한다. 역에서 뒤져보고 없으면 구시가쪽으로 넘어가거라. 학대까지 가서는 경찰서에 들려 후원을 청해라. 내가 일화양행에 가서 전화를 걸어놓겠다. 그년을 못잡으면 내앞에 다시 나타나지 말아라.

최용필은 아직 무슨 영문인지 똑똑히 모르면서도 니시자와의 위협이 빈말이 아니라는것을 깨달았다. 창백한 그 얼굴에는 살기가 번뜩거리고있었다.

최용필은 등줄기로 소름이 끼치는것을 느끼며 미처 대답을 못하고 마른침만 삼켰다.

니시자와는 절뚝거리며 오던 길을 되짚어 반달음을 놓기 시작하였다.

 

Twitter로 보내기 Facebook으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네이버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Google+로 보내기 Evernote로 보내기 Reddit로 보내기
우리민족끼리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E-mail) : urimanager@silibank.com 홈페지내용에 관한 문의(E-mail) : uriminzok@silibank.com
Copyright © 2003 - 2013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gotop
기사종합
 
도서, 잡지
 
영화, 음악
 
독자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