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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 장편소설
석윤기 (제2회) 제 1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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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길에 나설 때까지도 차광수의 노염은 풀리지 않았다. 그는 요즘같이 복잡한 때 김일성동지를 호위할 생각은 않고 혼자 훌쩍 떠나가버린 허재률이를 단단히 문제를 세우겠다고 별렀다. 《그러지 말라는데… 한시바삐 회의를 하자니 허재률이 걸음이 아니고 누가 그 길을 감당해내겠소. 그리고 나혼자 오는바람에 리익도 적지 않았단말이요. 길을 헛드는바람에 보고의 줄거리가 다 됐소. 어서 가서 예비회의를 합시다. 그래 누구누구가 왔소?》 김일성동지께서는 차광수의 마음을 돌려세우자면 사업에 끌어들일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시고 실무적인 어조로 물으시였다. 차광수는 심드렁해서 말했다. 《박훈동무는 벌써 도착한지 나흘째나 되오. 성미가 급해서 한별동무를 찾아 떠나겠다는걸 겨우 붙잡아두고있는 형편이요. 안도에서는 김정룡동무가 오고… 계영춘동무도 같이 온걸 내가 돈화에 내보냈소. 길림쪽에서 오는 무기와 사람들을 안도에 먼저 내보내라고말이요.》 《그럼 허재률동무가 간도땅을 한바퀴 돌고 오면 회의를 할수 있겠구만. 그사이 우리는 준비를 빈틈없이 갖추어놓아야 하겠소. 아무래도 하루이틀에 끝날 회의는 아니니까…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소? 왜 안색이 좋지 않소?》 김일성동지께서는 차광수의 밝지 못한 표정이 단순히 자기가 길을 잘못들어 고생한것이 가슴에 맺혀서만 그럴수 없다고 생각하시였다. 길림, 고유수 시절부터 《덜렁광창》이라고 별명을 얻어들은 그가 그쯤한 일을 가지고 이렇게 꽁할수는 없는것이다. 생각탓인지 앞뒤에 거리를 두고 옹위해 걷는 옹구당비서 리상진이나 고유수에서 차광수와 함께 간도로 넘어온 김정삼이의 기분도 무겁다는것이 육감적으로 알려졌다. 차광수는 대답을 피하듯 학생복우에 껴입은 달구지저고리의 깃을 여미며 외면하더니 한참이나 지나서야 쥐여짜는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효열동무가 희생됐소.》 《뭐, 최효열동무가?》 김일성동지께서는 반사적으로 받아외우시고 걸음을 멈추시였다. 최효열은 작년 5월 삼촌이 인솔하는 조선혁명군 국내무장소조성원으로 홍원에서 체포된후 여태 소식이 묘연하였다. 놈들은 김형권동지를 비롯한 조선혁명군 국내무장소조가 풍산일대에 나타났을 때 개미집을 들쑤셔놓은것처럼 신문지상을 통해 법석 떠들어대더니 변절자의 밀고로 소조성원들이 체포되자 일체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지간 조직을 통해 간신히 알게 된것은 함흥감옥에서 서대문형무소로 넘어갔다는것과 고등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사형이 확정되였다는것뿐인데 이처럼 처형을 서두를줄은 몰랐다. 《그건 확실한 소식이요? 어디서 온 정보요?》 김일성동지께서는 다그쳐 물으시였다. 차광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으며 뜨직뜨직 입을 열었다. 《한영희동무가 려순에서 그런 소식을 가지고 왔소.》 《한영희동무가 어떻게? 대체 려순에 있는 그들이 그걸 어떻게 안다는거요?》 김일성동지께서는 전혀 예상외의 소식이라고는 할수 없지만 최효열을 비롯한 혁명전우의 피값을 받아낼 무장투쟁준비가 바야흐로 완성단계에 오른 지금 그런 비통한 소식을 듣는것이 너무나 가슴아프시여 어떻게나 그 소식의 정확성을 부인해보려고 부르짖으시였다. 《우리 혁명이 하도 복잡하니 그가운데 별 우연이 다 생기는것 같소.》 차광수는 될수록 김일성동지의 괴로와하시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으스레한 숲 정수리쪽으로 고개를 돌린채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별안간 유선아동무와 한영희동무도 체포하려고 들었다오. 그런 눈치를 미리 채고 유선아동무는 제꺽 동아선박수리공장에서 몸을 피해가지고 중국녀자로 가장하고 일화양행이라는 무역회사에 일자리를 옮겼는데 알고보니 그게 바로 왜놈들의 특무소굴이였다오. 관동군의 우두머리들이 무시로 드나들어서 별 공론을 다 한다는거요. 그속에서 우리에 대한 음모도 적지 않게 드러났다오. 조선혁명군과 관련된 사람들은 무조건 신중하게 취급하는것이 여태까지 놈들이 견지해온 방침인데 9.18사변을 도발하고 공개적인 침략의 길에 나서면서 그 방침에도 적잖게 변동이 생긴것 같다는것이 선아동무와 한영희동무의 견해요. 그래서 김혁동무의 신상에 대해서도 비관적인 추측을 하고있소.》 이번에는 김일성동지께서 침묵에 잠기신채 묵묵히 걸으시였다. 차광수도 입을 다물었다. 될수만 있으면 이 소식을 늦게 전해드리자고 거듭 속다짐한 그였다. 그러지 않아도 무장투쟁의 준비를 무르익히시며 적수공권의 인민들을 무장시켜 강대한 일본제국주의를 쳐물리칠 이 세상 그 누구도 엄두를 못낼 사상최초의 전략전술을 찾아 추수투쟁의 불길속을 헤쳐오시는 그이께 좋은 소식은 못전해드릴망정 가장 가슴아파하실 소식부터 이런 로상에서 안겨드린다는것이 그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였다. 차광수의 눈앞에는 최효열이 국내무장소조성원으로 고유수를 떠나갈 때 그이께서 연연한 정을 끊지 못하시여 리가툰앞벌의 버들숲을 따라걸으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국내무장소조가 체포되였다는 소식에 접하시고는 한영희를 그길로 려순감옥에 있는 김혁이와 그 옥바라지를 하는 애인 유선아를 위해 떠나보내시고 자신께서는 분연 국내로 들어가시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시면서도 최효열의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 옥섬의 일이 걱정되시여 그 총총한중에도 자기네를 공주령에 보내여 그 녀자를 구원해내게 하시지 않았던가. 별안간 김일성동지께서 걸음을 비틀비틀하시더니 길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웅크리시였다. 《웬일이요?》 차광수는 급히 그이의 한쪽 어깨를 부축해드리며 숨가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요, 돌부리에 발이 걸렸소. 발목을 좀 접질린것 같구만. 잠시 숨을 톺아서 가기요.》 그이께서는 길가의 풀덤불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으시였다. 차광수는 말없이 어깨를 놓아드리고 돌아섰다. 약에 쓰재도 찾아볼수 없는 돌이 만주의 황토길에 어디서 나졌단말인가. 불의에 닥친 슬픔에 몸부림치는 김일성동지를 볼 때 차광수는 어찌할바를 몰라 제 머리카락을 한줌이나 움켜쥐고 뜯었다. 《그러니까, 그 동무들의 견해는…》 김일성동지께서는 어둠속에 발목을 주무르는척하시며 심상한 어조로 물으시였다. 그것이 단지 슬픔을 가리기 위한 방편이라는것을 너무나 잘 아는 차광수는 될수록 자신도 그런데 무딘척하는것이 례의라고 생각하고 일부러 그이의 미세한 움직임을 느끼기 어려울만한 거리까지 걸어나갔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갈린 목소리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김혁동무의 생사도 가늠할수 없다는것이구만.》 《그렇지요. 그놈들이 정체가 뻔한 선아동무와 영희동무를 모른체하고 면회를 허락해주다가 별안간 체포하자고 들었을 때는 그들을 통해 김혁이를 전향시킨다든가 그 어떤 비밀을 탐지해낼 기도를 포기했다는것인데 그렇다면 그게 뭐겠는가, 최효열동무의 처형을 그렇게 서두른데서 그 해답을 찾을수 있지 않겠는가, 그 동무들의 생각은 그런것인데 내 생각에도 녀자들의 지나친 불안같지 않단말이요.》 《그래, 그렇소. 지나칠만큼 락관주의자들이였는데…》 김일성동지께서는 왜놈들의 감옥중에서도 제일 무시무시한 감옥이라는 려순감옥에 사랑하는 애인을 보내놓고 생사여부를 알수 없는 그 소식을 안타까이 기다리면서 적의 소굴에까지 접근해갔다는 유선아와 혁명동지를 위하여 녀자의 몸으로 삼엄한 적들의 경계속을 웃으며 넘나드는 아름다운 녀공청원 한영희의 정상을 생각하시니 더 가슴이 아프시였다. 《가만!》 김일성동지께서는 벌떡 일어서시였다. 《지금 한영희동무가 어디 있소?》 《왜 그러오? 려순으로 돌려보냈소.》 차광수는 김일성동지의 돌변한 어조에 놀라 급히 다가왔다. 《려순으로 보내다니, 언제 왔기에?》 《내가 돈화에서 그 소식을 받았으니까 이제는 닷새째 되오.》 《그날로 갔단말이요?》 김일성동지의 어조는 방금 슬픔에 짓눌린 흔적도 없이 강하게 울려왔다. 차광수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내보기에 려순의 정세는 좋지 못하오. 유선아동무가 알아낸 정보가 그것만이 아니요. 일본에서 또 한개사단이 려순에 상륙했는데 심양으로 게바라나갔던 관동군의 우두머리들이 려순에 다시 모여들어 금주로 쳐들어갈 모의를 꾸미고있다오. 이제 조선에서도 새 부대가 더 건너온다는거요. 그러면 일제히 금주방향으로 쳐나갈 모양이요.》 《그건 아마 장학량이 자기 아버지 복수를 하겠다고 반일의 기치를 들고 금주에다 가정부를 세우고있으니 그걸 쳐없애야 만주를 완전히 제것으로 만들수 있겠다는 꿍꿍이겠지.》 김일성동지께서는 복잡하게 엉켜드는 정세를 온몸으로 느끼시며 차광수의 다음 말을 기다리시였다. 《그럴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내가 보건대 유선아동무가 그런 정보를 알아낼수 있는곳까지 침투해들어갔다는것은 위험하다고 생각되오. 놈들의 모략을 알아서 나쁠것은 없겠지만 이젠 놈들앞에 다 로출되나 다름없는 선아동무를 그곳에 더 머물러있게 할수는 없다고 생각했소. 그래 즉시 선아동무를 소환하기로 결심했소. 한별동무의 결론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자니 위험이 촉박한것 같아서…》 《고맙소.》 김일성동지께서는 차광수의 손을 더듬어잡고 억세게 틀어쥐시였다. 《참 잘했소. 그러니 선아동무가 지금쯤 돌아올수도 있겠구만. 물론 김혁동무 소식에 대해서는 곧 다른 대책을 세워야 하겠지만 그 동무들이 그런 위험속에 있어가지고는 아무런 대책도 세울수가 없지 않소. 한영희동무가 갔다니 그 문제는 일단 마음을 놓을수 있는데… 그런데 옥섬동무도 오빠소식을 알고있소?》 김일성동지께서는 한시름 놓았다는듯이 걸음을 옮겨놓으시다가 또 새로운 슬픔을 발견하고 걸음발을 늦추시였다. 차광수는 다시 그런 말을 하기가 괴로운듯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내키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한영희동무가 나를 찾아온곳이 바로 옥섬동무네 그 련락소니까… 이야기를 다 해주었소.》 《좀더 여유를 줄걸 그러지 않았소? 아직 혁명적단련도 부족한 처녀가 이런 객지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오빠를 잃었다는것을 알면 어떻게 그 슬픔을 견디겠소.》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러나 녀자들 마음이란 독한것인가 보오. 선아동무의 경우를 봐도 그렇지만 일견 연약해보이는 옥섬이도 그 소식을 듣고 눈물 한방울 없이 하루종일 강가에 나가 삽디다. 그러더니 한별동무를 따라가겠다고… 무장투쟁을 안도에서 한다면 자기도 안도에 가겠다고 졸라대는것이였소.》 《녀자들의 마음이라…》 김일성동지께서는 무심히 받아외우시며 하늘을 쳐다보시였다. 락엽진 이깔나무숲의 앙상한 정수리우에 초생달이 걸려 바르르 떨고있다. 날씨가 청청치 못한때문인지 창백한 달빛은 눈물에 얼룩진듯 륜곽이 흐리마리한것이 금시 녹아없어질것만 같이 불안하게 보이였다. 5년전 6월 무송 양지촌에 아버님의 상여가 나갈 때 산천도 슬픔에 잠기고 온 나라가 눈물지었다. 죽음의 고비를 무수히 넘어온 혁명가도 독립군대장들도 가슴을 치며 울었다. 오직 아버님을 하늘처럼 믿고 온 심혼을 다 기울여 받들어오신 어머님만이 강잉히 슬픔을 참고 눈물 한방울 보이지 않으시였다. 자식들에게조차 눈물을 보이지 않으시려고 산소에도 혼자 다니시였다. 그러한것이 나라를 빼앗긴 이 나라 녀인들의 모진 마음인가? 김일성동지께서는 문득 걸음을 멈추시였다. 《차광수동무, 안되겠소. 동무자신이 려순에 가야겠소. 한영희의 힘으로는 선아동무를 데려올것 같지 못하오.》 《글쎄. 나도 그런 생각을 안한것은 아닌데…》 《물론 회의준비때문에 그사이는 몸을 뺄수 없었지. 그러나 이제는 내가 오지 않았소. 나머지 일은 내가 다 할테니 제꺽 갔다와야겠소. 예비회의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선아동무가 고유수에서 려순으로 떠날 때 나한테 한 말이 있소. 김혁의 생사를 모르고 려순을 떠날 녀자가 아니요. 그러니 그 동무를 조직의 이름으로 회의에 부르시오. 그대신 차광수동무가 그곳 당조직의 도움을 받아서 김혁의 안부를 알아보시오. 언젠가 우리 선아동무에게 방조를 준 동씨라는 사람이 대련당조직의 책임자인 모양이니 그 사람들과 련계를 잘 취해보시오.》 차광수는 한동안 대답을 못하고 걷다가 결단성있게 걸음을 멈추었다. 《그럼 김정삼동무와 함께 곧장 옹석라자로 나가주오. 난 이제 상진동무와 함께 명월구에 나가서 옷을 좀 갈아입고 새벽차로 떠나겠소. 여기 형편은 상진동무가 다 알고있고 안도형편은 김정룡동무가 장악하고있소. 한별동무의 보고가 될 때쯤이면 내가 돌아오겠으니 그사이 한가지만 약속해주오.》 김일성동지께서는 이처럼 한마디 하면 열마디이상으로 자기 의도를 알아주는 혁명동지가 새삼스럽게 미더우시여 그의 어깨를 꽉 그러안고 속삭이듯 말씀하시였다. 《나한테 또 외출금지령같은걸 하나 처방하자는게 아니요? 동무의 마음은 내 다 아니 마음놓고 떠나가오. 그대신 차광수동무도 왜놈들이 결코 고와하지 않는다는걸 명심하오. 려순은 관동군사령부의 소재지란말이요. 난 당신의 그 유난스런 안경이 늘 미타하다니까…》 그러나 차광수는 김일성동지의 롱조에 끌려들지 않았다. 그는 그이의 사랑에 목메여오르는 격정을 감추기 위하여 그 미타하다는 안경을 꼭 코등에 눌러붙이며 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차광수를 여라문개 합쳐서 한사람의 한별을 만들수만 있다면 내속이 왜 이리 타겠소. 한별동무, 내 돌아올 때까지 절대 어디 나다니지 말아주오. 나머지 일은 내가 다 조직해놓겠으니…》 《알겠다니까. 그러지 않아도 보고를 다 쓰자면 시간이 넉넉하지 못하오.》 김일성동지께서는 차광수의 어깨를 툭툭 쳐서 그의 마음을 눙쳐주시였다. 어느새 명월구거리의 불빛이 눈앞에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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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쉐비크》주필 김혁의 생명에 위험이 닥쳐온것은 후꾸다의 신복 니시자와가 병원생활을 마치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려순에 나타난후부터였다. 김혁이가 할빈련락소의 3층건물에서 뛰여내렸을 때 의식을 잃은 그를 천신만고끝에 살려내여 려순감옥에까지 끌어온 니시자와는 그후 오가자에서 김일성동지를 매복하다가 혁명군의 총을 맞은 후로는 내내 그 다리를 고치는데 시간을 바쳤다. 복잡한 수술을 거쳐 무릎뼈밑에 박힌 권총탄알을 가까스로 뽑아내기는 하였으나 관절조직에 손상이 생겨서 아무리 깁고 맞추어도 원상대로는 되지 않았다. 결국 지팽이를 짚고 병원문을 나선 그는 어떤 복수심리에 다쫓기여 얼굴이 새파래서 상전 후꾸다를 찾아갔다. 봉천에서 후꾸다를 만난 니시자와는 그를 도꾜헌병대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신경질적으로 접어들었다. 자기의 청춘과 희망을 짓밟고 마침내는 다리병신으로 만들어준것이 바로 당신이라고 들이댔다. 후꾸다는 그의 발작을 참을성있게 지켜보더니 소서변문가에 있는 중국료정 《행화촌》에 가서 소홍이라는 계집을 만나라는 짤막한 지시를 주고 떠나갔다. 소서변문가의 뒤골목에 있는 《행화촌》은 이름있는 료정으로서 그런 세계에 어두운 니시자와의 눈이 뒤집힐 지경으로 추잡한곳이였다. 소홍은 그를 친절하게 맞이하였으며 아낌없이 교태를 부려서 그의 곤두선 신경을 잠재워주었다. 니시자와는 인생의 막다른골목에 다 왔다는 절망감속에서 끊임없이 넉두리를 하며 량껏 술을 들이키였다. 그리고 소홍이가 제공해주는 하루밤의 환락속에서 자기가 바친 너무나 값비싼 희생의 대가를 다 받아내자고 들었다. 이튿날 소홍의 침대에서 뒤골이 욱씬욱씬하는 머리를 가까스로 쳐드는데 화장대에서 머리단장을 하던 소홍이가 딴사람처럼 쌀쌀한 눈길로 돌아보더니 《앞으로는 술을 삼가야 하겠어요. 말이 많군요.》 하고 말했다. 니시자와는 벌떡 일어났다. 그것은 발음이 정확한 도꾜말씨였다. 그러고보니 어디선가 본듯한 인상이였다. 니시자와의 놀란 표정같은것은 아랑곳없이 소홍은 말을 이었다. 《려순에 가서 당분간 쉬면서 다음 지시를 기다려요. 때가 되면 부르겠어요. 그 별장에 기도대위가 기다리고있는데 그 사람을 곧 돈화의 나고야려관으로 가라고 하세요. 그렇게 말하면 다 알거예요.》 니시자와는 말의 내용보다는 소홍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느라고 주의를 집중하고있었다. 그는 후꾸다가 가서 만나라니 필경 보통 녀자는 아닐것이라고 짐작은 했었다. 그러나 이런투로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알고보니 소홍은 그의 상관이였다. 잠시후 그의 머리속에 현상액속에 들어간 인화지처럼 선명한 화폭이 그려졌다. 도꾜 이께부꾸로의 한적한 주택거리-헌병소좌 엔도유끼오의 사택에서 술에 취한 좌익대학생 니시자와의 거치른 말투에 놀라 쩔쩔매던 순진한 녀학생 스미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후꾸다는 자기 누이동생이 불쌍하다는 뜻의 인간적인 말을 했었다. 암살당했다는 자기 안해에 대해서도 구슬픈 음조로 말했다. 자기는 그때 헌병도 역시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을 머리 한구석에 가졌었다. 그때로부터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제대의 수재라고 하던 자기가 후꾸다의 손아귀에 잡혀 가장 추악한 밥벌이로 생각해온 간첩이 되여 결국 조선혁명군의 총에 맞고 다리병신이 된것처럼 스미에도 제 오래비의 독묻은 손아귀에 쥐여 그 순진하던 허울을 다 벗기우고 거치른 만주땅의 료정에서 몸을 팔며 제 오래비의 끄나불노릇을 하고있는것이다. 《다리가 어떻다고 그렇게 징징거려요?》 하고 소홍은 살이 오른 볼에다 분첩을 두드리며 여전히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도 보상은커녕 오히려 비적취급을 당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어요. 사나이답게 처신해요.》 니시자와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마른침을 꿀꺽 삼키였다. 아무리 진저리가 나도 직시하지 않을수 없는 소름끼치는 현실이였다. 그는 어금이를 짓씹으며 《행화촌》을 나왔다. 온몸에 피가 역류하는것 같았다. 려순에 내려와서 기도대위를 돈화로 보내고나니 이따금 날아오는 무전문을 해독하고 그것을 련락원에게 전하는 일밖에는 할일이 없었다. 미칠것만 같은 공허감과 풀길없는 복수심리를 몽땅 김혁이에게 쏟아부었다. 니시자와는 김혁에 대한 후꾸다의 계획을 구체적으로는 몰랐다. 다만 새롭게 등장한 조선공산주의세력에 대해 몹시 불안한 예감을 가지고있었으며 특히 김일성의 동향을 제국의 운명과 결부시키면서까지 중시하였다. 그러기때문에 김일성과 관련된 사람에 한해서는 무조건 신중하게 다룰것을 요구하였다. 체포된 조선혁명군 국내무장소조의 중요성원인 최효열을 벌써 처형했다고 해서 총독부관리들을 돼지같이 미련한것들이라고 상욕을 퍼붓기도 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김혁을 어떻게 하나 구슬려서 전향시키며 당장 전향시키지 못하면 후날을 위하여 그대로 끼고라도 있자는 방향이였다. 선아나 한영희를 인차 체포하지 않고 계속 감시만 붙여놓고있는것도 그 줄을 통해 김일성의 활동을 더 깊이 탐문하자는 타산이 숨어있었다. 니시자와는 후꾸다의 로회한 수법에 싫증이 나고 지긋지긋하였다. 그는 늘 입버릇처럼 들고나오는 신중성이라든가 공부를 하고 준비를 착실히 갖추어야 한다든가 하는 주장들에 반발심이 생겼다. 후꾸다는 말하기를 호랑이가 쥐를 잡자고 해도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쥐가 호랑이를 만나면 제먼저 기절해서 넘어질지 어떻게 아는가. 그래 설사 그의 주장대로 호랑이가 쥐를 잡는데 날카로운 이발로 물어뜯고 쇠몽둥이같은 꼬리로 후려치고 칼날같은 발톱으로 할퀴고 그밖에 산악을 허물어뜨릴것 같은 울부짖음과 번개같은 눈빛, 빛살같은 날파람 등 모든 무기를 다 동원해야 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제 순진한 누이동생까지 스파이놀음에 끌어내여 몸을 팔게 해야 한단말인가. 후꾸다의 사고방식에 대한 반발은 기실 그런 사고방식의 희생물인 자기자신의 운명에 대한 걷잡을수 없는 절망감에 기초하고있었다. 그는 김혁이를 자기식으로 다루어 후꾸다가 이룩하지 못한 결과를 얻어내리라 결심했다. 절망과 허무감이 인간정신에 미치는 무서운 파괴력은 니시자와가 수많은 실례에서 목격하였고 그자신이 뼈저리도록 체험한바 있다. 그것은 후꾸다도 인정하였다. 니시자와는 어떻게 하면 김혁에게 절망을 안겨주며 자기가 한일에 대한 허무감에 사로잡히도록 할것인가에 대해 여러가지로 연구하였다. 김혁은 체포될 때 자결하려고 3층집에서 뛰여내린것만큼 처음부터 자기 생명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단념한 사람이였다. 따라서 그에게 절망을 안겨준다는것은 쉽지 않았다. 자칫하면 철쇄에 얽매인 김혁의 자세가 훨씬 여유있고 그에게 고통을 준다는 니시자와쪽이 초조감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니시자와는 후꾸다같은 자제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자리에서 육체적고통을 가하는 방법으로 보복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김혁의 건강을 급속도로 악화시켰다. 니시자와는 초조하였다. 언제 후꾸다가 나타나겠는지 모르지만 자기외에도 끄나불이 사처에 박혀있을것은 뻔한데 분명 그 어떤 반발적기도가 느껴지는 자기의 수법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김혁의 생명만 단축해버린다면 일이 무사히 끝나지 않을것이였다. 더구나 무심히 볼수 없는것은 스미에가 소홍이라는 중국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대련에 나타난것이였다. 니시자와는 초조감에 사로잡혀 손에 잡힐듯잡힐듯하면서도 쉬 걷어쥘수 없는 그 결과를 위하여 더 서둘렀다. 선아나 영희가 정기적으로 면회를 오는것은 김혁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유해로운 심리적작용을 논다고 인정하고 면회를 금지시켜버렸다. 그래놓고보니 그 녀자들을 바깥에 그냥 둬두는것자체가 무의미하였다. 그래서 체포하라고 경찰서에 지시했는데 어느새 그물에서 빠져나가버렸다. 이것 또한 니시자와의 처지를 어렵게 만들었다. 분명 감옥이나 경찰 혹은 그보다 더 자기 신변가까이에 공산당의 눈초리도 박혀있다는것을 느끼자 후꾸다가 말하듯이 상대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만큼 그 후과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서둘러 김혁의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고 결심한 니시자와는 선아를 체포하기 위한 물샐틈없는 수배를 해놓은 다음 미칠듯한 열정을 가지고 심문에 달라붙었다. 《허허허 주필선생, 몹시 춥겠구만, 바깥에는 바람이 심하오.》 니시자와는 오늘따라 재빛 국민당군대제복을 입고 나타나서 김혁을 취조실로 끌어내자바람으로 덜썩 크게 소리쳤다. 김혁은 힐끔하고 눈을 치떠보았을뿐 아무 대척도 안했다. 두어달전에도 니시자와는 그런 모양을 하고 나타나서 자기가 방금 동북군고문 이마다대위와 함께 이런 봉천군제복을 입은 일본군한개 중대를 끌고가서 복천북쪽 륙조구의 철길을 폭파하고 일본군이 동북군을 전면공격할 계기와 구실을 만들어놓고왔다고 뽐냈었다. 니시자와의 말투는 그의 기분에 따라 변덕스럽게 달라졌다. 때로는 《개자식!》, 《협잡군!》 하고 상욕을 퍼붓는가 하면 형구를 가지고 위협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선생》이요 뭐요 하면서 신사태를 내기도 한다. 니시자와는 자기의 초조한 마음속을 감추기 위하여 기분이나 좋은듯이 취조실안을 몇바퀴 돌아가다가 지팽이를 한쪽벽에 기대여세우고 넌지시 김혁을 돌아보았다. 《여보 김혁선생, 우리는 머지 않아 당신의 요청을 들어주게 될것 같소.》 김혁은 여전히 눈을 치떠볼뿐 말을 안했다. 김혁이도 무엇인가 짐작하는바가 있었다. 니시자와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타난 그때부터 김혁의 생활은 그자와의 힘겨운 싸움에 송두리채 바쳐졌다. 선아의 면회가 중단되고 후꾸다는 벌써 그 몇달전부터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니 김혁의 생활에 충격을 주고 파문을 일으킬수 있는것은 니시자와뿐이였다. 김혁이도 날자는 몰랐지만 철이 바뀌는것을 느낄수 있었고 급변하는 정세를 온몸으로 감득하고있었다. 두텁게 앉았던 감방의 성에가 녹아내리고 어디선가 뭉클하고 풍겨오는 꽃향기가 감옥의 악취에 중독된 가슴에 눈물겨운 자극을 줄 때 면회구에 나타난 선아는 그의 손바닥에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겼었다. 《한별동지를 김일성동지로 부르기로 결정했어요.》 고생물의 하악골 파편 한쪼박을 가지고 먼 지질시대의 전모를 재생시키는 과정과 같이 어려운 추리과정을 거쳐 김혁은 김일성동지께서 카륜회의의 방침대로 무장을 들기 위하여 동만으로 나가시였다는것을 짐작하였다. 니시자와는 그의 추리에 적지 않은 자료를 제공하였다. 그자는 자기 다리가 오가자에서 조선혁명군의 총알에 맞아 그렇게 됐다는것도 숨기지 않았다. 때로는 극비에 속하는것까지 꺼리낌없이 지껄였다. 9.18사변의 추이까지도 큰 륜곽은 짐작할수 있었다. 후꾸다가 없어진것, 선아의 면회가 중단된것, 니시자와가 극비내용을 함부로 지껄이는것, 이 모든것은 무엇인가를 시사하고있었다. 자기의 앞날이 멀지 않았다는것을 의식할수록 김혁은 침착해졌다. 궁금하고 안타까운것은 선아가 그후 어떻게 되였는지, 아직 려순에 배겨있는지 혹은 자기가 그처럼 절절히 바란대로 이 무시무시한곳을 떠나갔는지 알길이 없는것이였다. 김일성동지와 자기 삶을 련결하는 오직 하나의 연줄을 선아가 이어주고있었기때문에 그가 다시는 면회구에 나타나지 않게 되자 허전한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그러나 선아가 려순에 있다는것은 선아자체만 위험한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김일성동지의 뒤를 따르자는 적들의 음모가 명백한 조건에서 혁명전반에 큰 후과를 미칠수 있다는것을 뚜렷이 느끼는 김혁은 일단 선아가 나타나지 않는데 대해 마음을 놓을수 있었다. 바깥에서 무슨 실수만 없다면 자기 혼자 니시자와나 후꾸다따위가 제아무리 독을 품고 접어들어도 두려울것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세상사를 다 초탈해버린듯 어딘가 쓸쓸한 미소가 비끼였다. 그것이 니시자와의 약을 올려주었다. 《우리의 제2보사는 마침내 앙앙개, 극산을 점령하고 치치하르에 들어갔소. 그리고 금주로 진격을 개시하였단말이요. 당신은 빨리 재판을 해달라고 했지? 재판을 하게 되면 당신의 요설을 한번 휘둘러볼 생각이 있는 모양인데 다 틀렸소. 이제 전만주땅이 일본것으로 될 날은 며칠 남지 않았소. 흥,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면 온 중국이 일어난다고? 꿈같은 소리, 지금 일본군이 광활한 만주를 거의다 먹게 됐는데 총소리 한방 울리는게 없고 장개석은 일본이 만주를 다 먹어도 좋으니 공산당을 치는 뒤받침만 해달라고 한단말이요.》 김혁은 너무나 엄청난 말에 귀가 멍멍해지는것을 느끼며 니시자와의 얼굴을 지켜볼뿐이였다. 니시자와는 지금 간도천지가 추수투쟁으로 들끓고있다는 중대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김혁이도 니시자와가 그쯤한 롱간을 부리리라고 짐작했지만 가슴을 떠박지르는것 같은 충격을 다 감출수는 없었다. 《왜 놀랍소? 놀랐겠지. 이게 현실이란말이요. 일이 어떻게 꾸며지고있는지 아오?》 하고 니시자와는 신이 나서 미구에 있게 될 군사작전의 전모와 군부의 실권자들이 만주와 남경에서 꾸미고있는 음모에 대해 낱낱이 이야기하였다. 김혁을 아예 죽은 인간으로 치부하고 자기의 내면독백을 들어줄 대상쯤으로 취급하는것이다. 《가령 우리에게는 이런 계획도 있소. 우리가 군사적으로 점령한 지역에서 조선인정치범들을 다 석방한단말이요. 조선인들은 일본제국의 국민이기때문에 일본군대가 진주한 땅에서 정치범으로 갇혀있을수야 없지 않소. 그렇게 되면 중국사람들은 조선사람들과 손을 잡아서는 안된다는것을 똑똑히 알게 될거란말이요. 그런데 흥미있는것은 그렇게 석방한 정치범들을 다 어떻게 하는가 하는데 있소. 그들중 이미 일본제국에 충성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나 무익한 저항을 그만두기로 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당분간 내버려두겠지만 그렇지 못한자들에 대해서는 다 뒤를 밟아서 되잡아들이거나 암살해치운단말이요. 나처럼 이렇게 조선옷이나 중국옷을 입고 뒤골목으로 돌아다니며 그런 스산한 밥벌이를 하는 친구들이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그렇게 서두르지는 않겠단말이요. 만주에 있는 큰 감옥들에서 한꺼번에 풀려나온 수많은 조선인정치범들가운데 혹 김일성을 찾아가는자가 있을수도 있지 않소. 그런자가 단 한사람만 있다 해도 우리는 당신에게까지 수고를 끼치지 않고 조선혁명군과의 대결을 끝장낼수 있을게란말이요. 가령말이요, 녕안현당비서쯤 되면 어떨것 같소? 후꾸다상이 봉천감옥에서 방금 그 김책이라는 사람을 석방했다오.》 하고 니시자와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신중한 어조로 내비쳤다. 김혁은 니시자와의 말이 허황한 말이 아니라는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억눌러도 치받치는 분노를 삭일길이 없었다. 《강도같은놈들! 천하에 악독하고 교활한놈들!》 《허허허, 주필선생, 흥분하지 마오. 의사의 말을 들어보니 당신의 심장은 이미 3기를 넘어섰다는데 조심해야지.》 니시자와는 김혁이가 격분하자 속이 좀 풀리여 몸가짐에 여유가 생겼다. 《내 그러기에 당신을 이제는 공개적으로 재판하겠다는것 아니요. 개가 달을 보고 짖듯이 실컷 짖어보오, 제국의 땅이 된 이 만주에서 제국의 법정을 차려놓을테니 실컷 떠들어보란말이요. 당신이 요청한다면 국제련맹대표도 방청을 시키겠소. 변호도 시킬수 있소. 그러나 당신은 구원될수 없소. 내가 당신을 취급하는데서 벌써 무엇인가 느낀것이 있겠는데… 나는 당신에게 별소리를 다 했소.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땅속에 들어갈게요.》 김혁은 기진한듯 성에가 내불린 콩크리트벽에 뒤골을 기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무슨 생각을 하오?》 니시자와는 김혁이가 악에 받쳐 소리치기를 기다리다가 참을성을 잃고 제먼저 물었다. 《뭐 특별히 생각하는게 없소. 한번 소리쳤더니 심장이 활랑거리는게 좋지 않소. 조심하라는 당신의 충고를 듣기로 했을뿐이요.》 《타격을 받았을게요. 당신의 건강으로 감옥생활을 이렇게 오래 끈다는것은 무모한짓이요.》 《그래도 나는 당신같은 다리병신이 되지는 않았으니 그만하면 다행이요.》 《뭐야!》 니시자와는 와락 지팽이를 거머쥐고 살을 떨었다. 《허허허, 당신은 내 약을 올려주려다가 제먼저 약이 오르는구만. 그러지 말고 앉소. 침착하게 앉아서 이야기를 해보오. 미리 말해두지만 당신이 나를 전향시킨다든가 혹은 고분고분하게라도 만들고싶다면 그런 생각은 아예 버리오. 당신같은 다리병신이 조선혁명군대원을 사상적으로 굴복시키기는 불가능할거요. 그대신 당신은 여기서 나를 죽일수는 있을거요. 나도 살아서 여기를 나서리라고는 생각지 않소. 나는 나자신을 육체적으로 이미 죽은 사람으로 보고있소. 그대신 당신은 정신적으로 죽은 사람이요. 당신하고 나하고 마주앉았다는것은 죽은 송장과 산 정신이 마주 대하고있는것이나 같소. 그러니 어떤 고통을 주어서 나를 굴복시키려니 생각지 마오. 당신이 피곤할뿐이요.》 《흥, 어느 시집에서 베껴온것 같군. 절개? 놀랍지 않소. 나는 당신에게 고통을 줄수 있소. 당신은 무엇인가 믿고있는데 그게 허황하다는것이 명백해질 때 당신의 그 살아있다는 정신두 발광해서 죽어버릴게요.》 《그럼 어디 그런 고문을 한번 들이대여보오.》 《당신은 이미 우리 계획의 한끄트머리만 듣고도 발광증세를 나타냈소. 그러한 자료가 나한테는 얼마든지 있소.》 《큰소리를 치지 마오, 당신들의 그런 간교한 음모는 결국 인민들을 각성시키고 더 굳게 단결시킬뿐이요.》 김혁은 오연하게 머리를 쳐들고 말하였다. 《단결? 여보 시인선생.》 하고 니시자와는 어처구니없다는듯이 말하였다. 《당신은 입만 벌리면 단결이지, 세계혁명도 전세계 무산자가 단결해서 승리한다고 하고 조선과 만주를 침략한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것도 조선사람과 중국사람이 단결해서 승리한다고 하고 당신네 나라가 독립하는것도 인민들이 다 단결해서 승리한다는건데 그게 탁상공론이 아니고 뭐요. 당신네 국내투쟁은 말해볼 여지도 없소. 도대체 당신네 나라가 망한것도 파벌때문이요. 독립운동이나 공산주의운동이 사분오렬된것도 그 파벌때문이 아니요? 가만 내버려둬도 서로 물고뜯고 싸우는 주제에 우리가 쐐기까지 자꾸 치는데 단결을 어떻게 한단말이요. 꿈같은 소리요. 당신네 운동은 영원히 승리할수 없소. 당신의 죽음은 헛된 죽음이란말이요.》 김혁은 가볍게 몸을 떨며 옷섶을 여미였다. 몸이 너무 수척해져서 가뜩이나 좀 클사하던 바지저고리가 후렁후렁하여 찬바람이 깃사이로 섶으로 마구 스며들었다. 배불뚜기난로가 벌겋게 달아있건만 감방쪽으로 난 출입문을 열어놓아서 찬바람이 거침없이 씽씽 쓸어들었다. 《왜 그러오? 내 말이 고통스럽소?》 《아니 견딜만하오. 계속하오.》 《흥, 견딜만하다? 너무 허세를 부리지 말란말이야. 여기는 나하고 당신뿐인데 뭐 체면차릴게 있어? 당신은 아이들의 불장난같은 놀음에 자기의 일생을 탕진하고 후세에 그 누가 당신의 비석이라도 세워줄가 해서 허황한 꿈을 꾸고있지만 그 후세란 누구겠소? 완전히 일본화된 조선사람이 있을뿐이요.》 《당신은 그걸 믿소? 그래 당신자신의 말을 들어보면 당신도 한때 맑스주의공부를 했다는데 맑스의 학설보다 당신이 지금 여기서 떠벌인 그 개수작이 더 진리에 가깝다고 생각하오?》 《진리? 여보 시인선생, 진리가 어데 있소? 도대체 진리라는게 뭐요? 물론 당신은 사람이 죽어도 진리는 살아있다고 말할수 있겠지. 그까짓 진리가 살아있겠으면 살아있고 마음대로 하라지. 그래 살아있으니 어쨌단말이요? 이 세상은 진리에 의해 지배되는것이 아니라 힘에 의해서, 진리자체도 힘에 의해서 규정된단말이요. 그래 당신은 아직 이런 초보적인 진리도 모르고 죽음앞에 서있단말이요?》 니시자와는 김혁에게 정신적타격을 주자는 당초의 목적은 어느덧 잊어버리고 제 기분에 흥분하여 웨쳐댔다. 김혁은 듣기가 괴로운듯 또다시 성에불린 벽에 머리를 기대고있다가 눈을 감은채 조용히 말했다. 《과연 당신의 말을 듣는다는것은 가장 혹독한 고문이요. 내 보건대 당신은 언젠가 맑스의 책을 읽다가 변절한 모양인데 만일 당신과 같은 변절자의 궤변이 당신네 후세들을 지배하게 된다면 전 인류가 달라붙어 화염소독을 들이댈거요. 그런 짐승만도 못한 무리들이 당신의 후손이고 그런것들이 당신네 나라에 살게 될 때 당신의 나라를 과연 인간이 사는 나라라고 할수 있을것 같소?》 《개수작 말아!》 니시자와는 악에 받쳐 울부짖었다. 그러나 김혁은 눈섭 하나 까딱 않고 말을 계속하였다. 《나는 피곤해서 다 말할래야 맥이 없소. 확실히 내 심장은 나빠졌소. 숨이 가쁘오. 그러나 한가지만은 말해야겠소. 당신은 우리 인민들이 단결하지 못하고 조중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고 전세계 무산자가 단결하지 못한다고 장담했소. 몇가지 현상은 당신의 말에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듯한 인상을 주고있는것도 사실이요. 아닌게아니라 우리는 그때문에 고통도 겪었소. 그러나 이제는 분렬되지 않을거요. 이제는 온 겨레가 하나로 뭉쳐 싸워나갈수 있는 투쟁의 기치가 있고 단결의 중심이 있단말이요. 당신네가 아무리 쐐기를 쳐보오. 그건 하나의 흐름을 이루어 바다로 흘러가는 장강에 칼질을 하는것과 같을거요. 아무리 내리치고 헤쳐놓아도 그냥 모여들기만 하는 그 힘을 막아낼 힘은 이미 없소. 우리에게는 그 물과 같이 한곬으로 흘러갈 뚜렷한 지향이 있고 중심이 있단말이요.》 《그게 뭐야? 그 중심이라는게 뭐야?》 니시자와는 지팽이를 움켜쥔 주먹을 떨며 바싹 다가들었다. 《그건 당신들이 알아보오. 그게 당신들의 직업이니까… 나는 더는 할 말이 없소.》 《말 안할테야? 어디 말 안하고 견디나 보자. 불갈구리로 구멍을 내놓겠다.》 니시자와는 약이 오를대로 올라서 시뻘겋게 단 배불뚜기난로의 뚜껑을 열고 불갈구리를 찔러넣었다. 《참 고마운 생각을 했구만. 그러지 않아도 나는 추워죽겠는데 불갈구리를 달굴것도 없이 내가 통채로 이 난로를 그러안으면 어떻겠소?》 김혁은 성에불린 벽에 기대고있던 머리를 번쩍 들고 니시자와를 차겁게 바라보더니 시뻘겋게 단 난로를 와락 그러안으며 소리쳤다. 《이 유치한놈아, 네따위가 감히 한별의 전사를 어째보겠다고!》 삽시에 옷자락에서 연기가 피여오르고 천타는 냄새와 살타는 누린내가 풍겼다. 니시자와는 당황망조하여 김혁의 등덜미를 잡아채여 난로에서 떼여내려고 덤벼쳤다. 그러나 김혁은 난로를 꽉 그러안고 놓지 않았다. 잘못하다가는 난로가 굴뚝채 넘어질 형세라 니시자와는 이를 앙다물고 사정없이 지팽이로 김혁의 팔을 후려쳤다. 《미친 자식! 이런 인간이 어데 있어!》 악이 날대로 난 니시자와는 김혁이가 난로에서 떨어진 다음에도 그냥 지팽이를 휘둘렀다.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 김혁의 몸은 강철처럼 단단한 그 봇나무지팽이를 몇대 못맞아서 콩크리트바닥에 나가쓰러졌다. 《너절한놈.》 김혁이 정신을 잃는 마지막순간에 차거운 랭소를 띠우며 중얼거린 한마디 말이 니시자와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그는 이미 의식을 잃어버린 김혁에게 어떻게 하면 분풀이를 할지 몰라 피유-피유- 바람소리를 일구며 지팽이질을 하다가 제풀에 지쳐 걸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소스라쳐 일어났다. 정말 숨을 아주 거두어버리지나 않았는가 해서 헤덤비며 화상투성이가 된 김혁의 가슴에 귀를 갖다댔다. 심장이 뛰는지 어떤지 발광적인 흥분에 헐썩거리는 그의 감각으로써는 판단할길이 없었다. 《간수, 간수!》 니시자와는 취조실문을 열어젖히며 소리쳐불렀다. 검은 제복에 중비슷한 인상을 한 간수가 달려와서 대령하였다. 《의사를 불러!》 니시자와가 이마의 땀방울을 훔치며 소리치자 간수는 침착하게 김혁의 몸을 흔들어보더니 고개를 기웃하였다. 《이미 때가 늦지 않았을가요?》 《건방진 수작 말고 빨리 달려가!》 《예, 달려갑지요.》 재판도 받기전에 미결감이나 벌방에서 죽어나가는 죄수를 무수히 보아온 간수는 중범들가운데서도 특별히 엄중하게 취급하는 죄수가 기절했다고 해서 그처럼 덤빌 필요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듯 다시한번 고개를 기웃하더니 열쇠묶음을 절컥절컥 흔들며 천천히 복도 저쪽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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