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2 회)
제 4 장
아침노을
1
지금 몇시인가?… 눈을 뜬 림성하는 손으로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켰다. 가늘게 눈을 쪼프리고 벽시계를 바라보니 시계바늘은 아침 6시 35분을 가리키고있었다. 한순간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곧 그 자리에 굳어져버렸다. 그렇지, 오늘은 보통날이 아니지 않는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따뜻한 축복의 인사말을 나누는 날, 래일을 내다보며 더 큰 기쁨과 행복을 축원하는 날, 미래를 약속하는 날! …
그는 벽에 걸린 새 달력을 번져놓았다. 그리고는 이윽토록 거기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있었다.
주체99(2010)년 1월 1일!
새해의 첫날이다. 희망찬 새해!… 하지만 림성하는 지금 그 어떤 기쁨도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고있다. 처음 사무실에서 맞는 새해의 첫 아침, 지금 여기엔 따뜻한 설인사말을 나눌 사람조차 없다. 설음식을 만들며 어서 일어나라고 지청구를 할 안해도 없고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유치원에서 배운 새 노래를 불러줄 귀여운 아들 정국이도 없다.
문득 친정집에 가있는 안해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떠올랐다.
《…절 용서하세요. 아무래도 전 당신곁에 있을 녀자가 못되는것 같애요. 아무리 애써도 전…》
림성하는 놀라서 물었다.
《여보, 그건 무슨 소리요? 응?… 도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거요?》
송수화기에서 흐느낌소리가 들려왔다.
《전 알고있어요. 학문을 중시하는 당신에겐… 저같은 녀자가 어울리지 않는다는걸… 그리고 제가 아무리 애써도 당신의 그 세계를 따라갈수 없다는걸 말이예요. 하지만 그렇게나마 당신을 더이상 돕지 못하는 저를 용서하세요!…》
림성하는 미처 입을 벌리지 못했다. 마치 결별을 선언하는듯 한 그 목소리… 절커덕! 송수화기를 놓는 소리가 우뢰소리처럼 귀에 울려서야 그는 힘껏 소리쳤다.
《여보!》
그러나 빈 송수화기에서는 전류흐르는 소리만 들릴뿐…
처음에 림성하는 집을 떠난 안해에 대해 별다르게 생각지 않았다. 본가집에 가서 좀 쉬는것도 좋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불안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안해가 하는 일이라면 마음을 푹 놓던 그였지만 어쩐지 보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는것이 이상했었다. 왜 소식이 없는지? 병이 더하지는 않는지?… 떠날 때 당비서와 석우진을 만나고 갔다는 말도 있다. 전화를 해보니 그때마다 가시어머니가 전화를 받군 했다.
《그 앤 읍에 나갔네.》
다음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안해와의 전화는 끝내 이어지지 않았다.
《그 앤… 집에 없네, 갔단 말일세.》
《어디로 말입니까.》
《나도 모르겠네, 이 에미도 모르게 떠났으니…》
림성하는 울음소리로 변하는 안늙은이의 그 목소리에 실신한듯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기만 했었다.
어쩐지 마음이 쓰려났다. 맥없이 울리던 안해의 목소리가 마치 불에 달군 쇠꼬치처럼 그의 가슴을 지지는듯싶었다. 담차고 걸싼 안해, 하면서도 마음여린 이 남편에게만은 공손하던 녀인… 그들은 지금껏 이렇게 살아왔다. 무엇인가 애정프로그람이 잘못 짜진것이나 아닌지? 약자는 집안에서 드세여지고 강자는 반대로 온순해졌다.
림성하 역시 이런 안해에게 습관되여 그에게 모든것을 맡기였고 부탁했고 지어는 호령까지 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돌격대중대장을 하던 안해가 어째서 마음착한 남편에게 그토록 공손했는지 알지 못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혹시 사랑에도 그 어떤 공식이 있는것은 아닌지?… 아니면 강한 사람만이 공손해지고 헌신하는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까지 변함없이, 아무런 이상도 마찰도 없이 고요히 정상적으로 흘러오던 가정의 이러한 리듬이 깨여지고 헝클어져버렸다. 집안의 질서가, 균형이 파괴되였다. 무엇때문인지 근래에 와서 별스레 우울해지고 가끔 신음소리를 내군 하던 안해, 그는 안해가 무엇때문에 그렇게 달라졌는지 아무리해도 그 까닭을 알수 없었다. 그토록 강하고 억세던 녀자… 그런 안해가 무엇때문에 나를 피해갔단 말인가? 무엇때문에 그런 전화 한통 남기고 그렇게 사라져버렸단 말인가? 정국이까지 남기구?…
림성하는 보온병의 물을 세면기에 부어 대충 세면을 했다. 거울앞에 서보니 면도를 한지도 오랬다. 그는 품을 들여 깐깐히 면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밖에 더 할것이 없었다. 면도를 하고나서는 또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지 않으면 안되였다.
방안은 썰렁했다. 몸이 으쓱해날 지경이다.
그때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그는 반갑게 달려가 송수화기를 들었다. 새해의 첫 전화를 누가 걸어온것일가?…
《여보세요.》 맑고 명랑한 녀자목소리이다. 《새해를 축하합니다. 새해에 부디 건강하여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예, 새해에 거기서두…》
그는 말끝을 얼버무렸다. 너무 뜻밖이여서 상대가 누군지 알수가 없었던것이다. 순간 수화기가 쨍쨍 울렸다. 저쪽에서 깔깔거리며 웃어대기 시작했던것이다.
《아니 기사장동지, 아직 잠에서 채 깨여나지 못한게 아닙니까? 나 해연이예요, 송해연!》
《아, 송해연!… 정말 반갑소. 동문 나를 찾아준 이해의 첫 손님이요.》
《손님?… 아니 기사장동지, 이 송해연이 아직두 손님이란 말이예요?》
《아, 됐소, 됐소!》
다시금 깔깔 웃어대는 소리. 림성하는 흥그러워진 마음으로 말하였다.
《해연동무, 이해엔 꼭 우리 해연이의 국수를 먹어야겠소. 절대로 이해를 넘기면 안돼, 응?!…》
《그렇게 되길 정말 바라는가요?》
《그렇지 않구.》
《그럼 약속해요.》
《정말?… 그러니 대상자가 있다는 소린데?…》
《그 이상은 더 묻지 마시구… 자, 그럼 안녕히!》
그때부터 전화가 그칠새 없었다. 7시가 되면서부터는 더 많은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친지들과 벗들, 오래동안 함께 일해온 공장로동자들, 간부들… 옛 대학동창들도 거의나 빠짐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전화로 시작되고 전화로 마음 후더워지는 설날인듯싶다.
그칠새없이 다투듯 울리는 전화종소리가 그를 계속 바쁘게 했다. 짜르릉, 짜르릉… 림성하는 자리에 앉을 새도 없이 또 송수화기를 들지 않으면 안되였다.
《예, 림성하입니다. 새해에 복많이…》
다음순간 그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멀거니 송수화기를 들여다보았다. 다시 울리는 전화종소리… 아니, 이건 또 뭐야?… 머리를 홱 돌렸다. 그제서야 그는 귀여운 아들 정국이가 문가에 서서 장난감시계종을 울리고있는것을 보았다.
《해해해… 나야, 정국이.》
《오, 우리 정국이가 왔구나!》
그는 문가로 달려가 어린 아들을 높이 들어올렸다. 정국이를 데려온것은 정주선당비서의 어머니였다. 흔히 할머니로만 불리우는 90고령의 로인, 늙은이의 주름깊은 눈가엔 눅눅한 웃음이 가득 고여있었다.
《간부가 된다는게 헐치 않지? 설날 아침까지 잠도 제대로 못 잤구만, 눈에 피가 진걸 보니.》
《나두 잘 못 잤어.》 어린 정국이가 종알거렸다. 《아빠가 보구싶어서.》
《오, 그래?!》
림성하는 아들애의 볼에 입술을 대고 문질러댔다. 아들애가 간지럼을 타며 째는듯 한 소리를 질렀다. 그러건말건 림성하는 마치 애정에 주린 사람모양으로 그냥 정신없이 아들애의 볼을 빨았다. 그 모양을 지켜보고있던 할머니가 웃으며 들고온 음식그릇을 탁에 내놓았다.
《에그, 애의 볼이 닳아지겠네. 인젠 그만하구 어서 여기 나앉게. 정월 초하루날 굶으면 그해엔 늘 밥술이 떠진다고 했는데 외비둘기신세에 아침이나 변변히 했겠나?》
림성하는 아들애를 안고 탁으로 다가갔다. 찰떡이며 고기볶음, 도라지무침과 녹두지짐 그리고 아직 김이 오르고있는 더운 떡국도 있었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저희들이 할머니를 찾아가 세배를 드려야 하는데 이렇게…》
《괜찮네. 아직 오륙이 성한데 내 바삐 돌아가는 임자네들을 집에서 기다리겠나? 이렇게 자네들을 찾아 걸음하는게 그저 기쁨이야!》 할머니가 정국이를 받아 무릎에 안으며 그에게 음식그릇을 당겨주었다. 《자, 어서 들게. 이 떡국은 내 손으로 만든거라네.》
초롱초롱한 눈으로 떡국을 들여다보던 정국이가 두손을 하늘높이 쳐들었다.
《할머니 만세!》
할머니가 어처구니없어 웃었다.
《원, 녀석두! 먹기나 할게지 만세는 무슨 만세냐? 사내애치구두 별스레 벌차다니까…》
정국이가 숟가락을 입에 물고 눈을 깜박거렸다.
《할머니, 그전에 우리 엄마두 이런거 해주었다, 한살씩 먹을 때마다 이런 떡국 먹어야 한다구…》
순간 음식그릇으로 가던 림성하의 손이 굳어졌다. 금시 안해가 만들어주던 하얀 떡국이 눈앞에 보이는듯 했다.
아들애가 그를 쳐다보며 또 재잘거렸다.
《정말이지, 아버지? 엄마랑 나랑 아버지랑 이렇게 하얀 떡을 국가마에 넣었댔지?》
그것은 사실이였다. 설날이 오면 안해는 꼭 떡국을 만들군 하였다. 그때면 아들애와 함께 부엌에 내려와 그는 안해가 잘게 썰어놓은 떡을 저마끔 가마에 넣군 했었다. 그럴 때면 어린 아들애가 제일 좋아하였다. 끝없이 깔깔거리고 재잘거리며 《아빠두 하나, 엄마두 하나, 나두 하나.》 하며 줌안에 든 떡을 가마에 넣느라고 극성이였다.
할머니가 정국이의 입에 국을 떠넣어주며 말을 돌렸다.
《에그, 무슨 사또잔치상이라구 구경만 하고있나? 국이 다 식는데…》
《예, 들겠습니다.…》
할머니는 음식을 드는 그를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어서 많이 들게. 많이 들고 일두 많이 해야지. 우리 아들이 늘 말하더구만, 기사장이 수고한다구!…》
이때 또 전화가 왔다. 무릎에서 뛰여내린 정국이가 어느새 전화기앞으로 날쌔게 달려갔다. 앞에 주런이 놓인 전화기를 번갈아보던 그 애가 정확히 어느 한 송수화기를 집어들어 제 귀에 먼저 가져다대였다.
《여보세요!》아들애가 송수화기를 어깨에 메고 장한듯이 아버지를 돌아다보았다.《나 정국이예요. 예?》
다음순간 그 애가 눈을 흡뜨며 송수화기를 떨구었다. 그속에서 어떤 굵은 목소리가 울리였다. 아들애는 어느새 전화기에서 멀찍이 물러났다.
림성하가 바삐 탁으로 다가갔다.
《예, 기사장 림성하입니다.》
림성하의 얼굴이 차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지배인 한경수였다. 그는 새해를 축하하는 인사말을 한 다음 침울한 어조로 이렇게 계속했다.
《기사장동무, 앞으로 일을 잘해주오. 많은 짐을 기사장에게 떠맡기고 가자니 마음이 괴롭소.》
《가다니요?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림성하는 놀란듯 송수화기를 틀어쥐였다. 그러니 지배인이 사표를 냈다는게 사실이란 말인가?…
《미안하오, 기사장동무…》
림성하는 멍하니 송수화기를 귀에 대고있었다. 갑자기 혀가 굳어져 입을 벌릴수 없었다.
한순간 주창운제1부부장이 식료일용공업상과 같이 공장에 찾아와 위대한 장군님께서 공장현대화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전달해주던 일이 떠올랐다.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이 공장을 현대화한다고 하였지만 정보화시대의 현대화에 대한 개념을 잘 모르고있는것 같다고, 공장의 건물들을 희한하게 보수하고 번쩍거리는 불수강으로 관이나 농축기 같은것을 만들어 생산공정을 꾸려놓으면 현대화가 되는게 아니다, 그렇게 하는것은 현대화에 대한 비속화이다, 정보화시대의 현대화는 최첨단기술을 받아들인 자동화된 현대화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
그러시면서 이렇게 건물이나 번듯하게 꾸려놓고 정보화시대에 맞지 않은 설비를 몇대 들여다놓은것밖에 없는 공장을 어떻게 현대화되였다고 할수 있겠는가, 지금형편에서는 현대화하였다는 표현을 빼고 새로 보수한 공장이라고 하여야 할것이라고, 국가적으로 의의가 있는 평양곡산공장에 삼일포특산물공장의 생산공정 같은것을 꾸리게 한것은 품을 들이지 않고 헐한 방법으로 일을 하려고 망탕 내려먹인 관료주의적사업방법이라고 지적하시였습니다.》
그때 림성하는 가슴을 저미는 아픔에 숨조차 쉴수 없었다. 쓰라린 회오에 숨이 꽉 막히는듯 했었다. 그는 비칠거리던 한경수지배인이 신음소리를 깨물며 의자등받이를 움켜쥐는것도 알지 못했었다. 자책에 허덕이며 꿈속에서처럼 들려오는 제1부부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애썼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정보화시대의 요구에 맞게 지금은 무슨 설비나 다 현대화하여야 한다고, 평양곡산공장은 현대화하는데서도 다른 공장들보다 앞서야 할것이라고, 이 공장은 1930년대부터 물엿을 생산하였는데 로동당시대, 정보화시대인 지금에 와서 현대화수준이 얼마나 높이 발전하였는가 하는것을 보여줄수 있게 되여야 한다고 하시였습니다. 그러시면서 사탕, 과자가 폭포처럼 쏟아지게 하자면 우리 기계공장에서 평양곡산공장에 식료설비를 만들어주어 먼저 당과류공정부터 현대화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습니다.》
하늘같은 사랑과 믿음!… 그날부터 위대한 장군님께서 평양곡산공장의 현대화를 위해 보내주신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업종합대학, 한덕수평양경공업대학과 평양기계대학 그리고 평양콤퓨터기술대학과 국가과학원의 수많은 교원, 연구사들로 무어진 강력한 과학연구집단이 공장에서 낮과 밤이 없이 전투를 벌리기 시작했고 당중앙위원회와 내각 그리고 첨단기계제작을 맡은 수많은 공장, 기업소들이 평양곡산공장의 현대화를 위해 달라붙었던것이다. 하여 공장일군들은 물론 웃단위의 책임일군들도 공장에서 밤을 패며 뛰여다니고있다.
헌데 그런 사랑과 믿음을 받은 일군이, 공장을 책임지고 나가야 할 지배인이 사표를 내다니?… 림성하는 무엇인가 목구멍으로 치밀어오르는것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정말 뜻밖입니다. 온 공장이, 숱한 대학이 장군님께서 주신 과업을 관철하자고 떨쳐나섰는데… 어떻게 이럴수가 있습니까! 이럴 때 큰 몫을 맡아안아야 할 지배인동지가…》
《아니, 이 한경수는 그럴 자격도 실력도 없는 사람이요. 오늘에 와서야 자신이 얼마나 뒤떨어졌는가를 깨달았으니…》
한동안 숨소리만 계속되더니 그가 말을 이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 난 결심했소. 제때에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고 말이요. 그러니 기사장동무, 힘들겠지만 이 지배인의 몫까지 맡아주오. 부탁이요!…》
그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지배인동지, 지배인동지!…》
대답이 없었다. 한동안 전화기의 반복건반을 다급히 누르던 그는 맥없이 송수화기를 내리였다. 가슴에 차오르는 야속함… 불시에 숨이 차올랐다. 엄청나게 무거운 짐이 가슴을 짓누르는것 같았다. 자기 혼자로서는 도저히 감당해낼수 없는 그 무게에 허덕이던 그는 아들애가 숟갈을 권총처럼 틀어쥐고 온 방안을 뛰여다니는것도 알지 못했다. 그애는 의자에 숨기도 하고 책상우에 엎드려 입으로 땅- 땅! 총을 쏘기도 했다.
할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에구, 쪼꼬만 녀석이 누굴 닮아 저리 세차누?》
창문에 놓인 화분이며 벽에 걸린 옷가지들을 목표로 총을 쏘던 정국이가 입을 쏙 내밀었다.
《난 엄마 닮았대요.》
림성하는 한순간 숨을 딱 멈추었다. 아들애의 입에서 엄마소리가 나오면 눈물로 번져진다는것을 잘 알고있는것이다. 그의 눈치를 알아차린 할머니가 그냥 책상우에 엎드려있는 그 애를 안아내렸다.
《됐다. 인젠 총놀음은 그만하고 아버지에게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나 불러라.》
《응!》
다행히 정국이는 엄마소리를 더 꺼내지 않고 방 한가운데로 뛰여갔다. 그쪽에서 몸을 돌리더니 유치원에서 배운 그대로 두손을 무릎우에 살짝 벌려들었다. 이어 여물지 못한 어린애의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
내가 고와 뽀뽀
우리 엄마 뽀뽀
우리 엄마 뽀뽀가 제일 좋아
우리 엄마 뽀뽀가 제일 좋아
…
노래를 마친 정국이는 할머니가 칭찬했지만 그냥 방 한가운데 서있었다. 이럴 때면 의례히 손벽을 크게 쳐주던 아버지의 박수소리가 없었던것이다. 그 애는 한손에 이마를 고이고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고있는 아버지를 쳐다보더니 시무룩해서 출입문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 누군가를 찾는듯 한 표정이였다. 금시 울음을 터뜨릴듯 했다. 할머니가 물었다.
《정국아, 너 왜 그러니?》
정국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머니쪽은 보지도 않았다. 입을 삐쭉거리더니 아버지에게 달려와 매달렸다.
《아버지, 나 엄마 보구파!…》
순간 림성하는 눈시울을 떨었다. 숨이 막히는것을 느꼈다. 남모르게 모대기던 심장이 아프게 흐느꼈다.
《응, 엄만 왜 안 오나? 어디 갔나?》
그는 머리를 떨구었다. 속으로는 《나도 모른다. 우릴 두고 어디 가서 헤매고있는지 나도 모른다, 모른다!》 하고 부르짖고있었다.
《이 사람아.》
그를 지켜보고있던 할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애엄마를 너무 나쁘게만 생각지 말게. 애엄마가 집을 나갈 때야 무슨 궁냥이 있었겠지, 워낙 속이 깊은 녀자이니까.…》
림성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남편과 아이 생각은 조금도 안하는 녀자가 무슨 깊은 궁냥이 있겠습니까. 날아가는 새는 잡아도 날아가는 마음은 붙잡지 못한다구 했는데… 난 정말 우리 집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집을 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림성하는 아들애의 야들야들한 볼에 자기의 거친 턱을 꾹 눌러대였다. 안해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괴여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어째서 안해는 남편과 어린 아들에게 이런 괴로움을 주고있는것인지?…
《애를 인주게.》
할머니가 다가와 그에게서 정국이를 받아안았다. 눈물이 가랑가랑 맺혀있는 어린 그 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할머니의 눈가에도 주름이 깊어졌다.
《사람의 마음은 물과 같아서 아무때건 곬을 따라 흐르기마련이라네.》
《?…》
림성하는 머리를 들었다. 그러니 할머니는 무엇인가 알고있는것이 아닌가?… 그가 묻는듯 한 눈길로 찬찬히 쳐다보자 할머니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라는 의미였다. 마치 그의 마음속 생각까지 다 들여다보는듯 했다.
《내 말은 그게 아닐세.》
그럼 무엇인가?… 할머니는 그에 대답하지 않았다. 과일칼을 들더니 아들애에게 줄 사과를 쪼개기 시작했다.
림성하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속이 좋지 않았다. 소리쳐 묻고싶은것이 많고도 많았다. 할머닌 무엇인가 알고있지 않습니까. 아시면서도 왜 말해주지 않습니까?… 하고 소리치고싶어도 그럴수 없는 그였다.
사실 림성하는 지금까지 안해와 거의나 습관적으로 살아왔었다. 연구사업에만 몰두했을뿐… 안해가 언제한번 앓아눕는 일도 없었으므로 다정히 머리를 짚어본적도 없다. 성격이 강직하고 속대가 곧은 안해였기에 그 어떤 살틀하고 다정한 말도 필요없다고 보아왔었다.
그런즉 림성하야말로 사랑의 패배자가 아닌가? 정과 사랑의 가난뱅이가 아닌가?… 이상한것은 지금에 와서야 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그것이였다.
그랬다. 얼마전부터야 그는 안해의 눈빛이 달라지는것을 느꼈었다. 왜서인지 줄곧 초조해하고 불안해하고 무엇인가 망설이는듯 하던 안해였었다. 하지만 그때에도 그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모든것을 혼자서 처리해나가는 안해였으니… 집에 들어가서는 아들애에게만 깡그리 정을 쏟았다. 오직 성공 못한 연구사업을 두고 고민했고 거기에만 전념했었다. 헌데 불시로 안해가 그와 아들애까지 버리고 집을 나갈줄이야…
밖에서 요란하게 불어대는 방송차의 힘찬 노래소리가 창문을 울리며 귀에 들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림성하는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벌써 공장구내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비고있었다. 설날이지만 모두가 떨쳐나섰다. 누가 시킨 사람도 없고 호소한 사람도 없지만 모두가 공장으로 달려나왔다. 그들에게는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새해 첫전투를 벌리는것이 기쁨이고 행복이였던것이다.
림성하가 벽에 걸린 솜옷을 벗겨들었다.
《할머니, 전 나가봐야겠습니다.》
《아이구 이 사람, 이걸 마저 들고 가라구.》
《고마워요, 할머니! 모두가 저렇게 일찍 나오는데 기사장이 늦으면 되겠습니까.》
할머니에게서 뛰여내린 정국이가 그에게 매달렸다.
《아버지!- 나두 갈래.》
림성하는 한쪽무릎을 꿇어앉아 어린 아들애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러면 안돼. 아버진 또 일해야 한단다. 할머니하고 집에 가거라. 알겠니?》
아들애가 몸을 흔들며 칭얼댔다.
《싫어!… 나 아버지하구 같이 있을래, 엄마두 없는데…》
할머니가 정국이에게 떡을 쥐여주며 얼렸다.
《할머니하고 우리 집에 가자꾸나. 거기 가면 이렇게 큰 형들이 있단다. 형들하구 아동영화두 보구 또 콤퓨터에서 전자오락두 하구…》
아이의 두눈이 빛났다.
《정말?…》
《그럼.》
이때 또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송수화기를 드니 석우진국장이였다. 병원에서 나온 그때부터 아예 공장의 현대화지휘부에서 숙식하고있는 그였다.
《아 국장동지, 새해에 부디…》
저쪽에서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어쩐지 무뚝뚝하게 그가 물었다.
《기사장동무, 오늘 인민군군인들이 공장에 온다는걸 알고있소?》
《예?》
《저 소리가 들리지 않소? 군대동무들이 지금 방송차를 앞세우고 공장을 찾아왔단 말이요.》
《그렇습니까?》
《빨리 나오오. 오늘 지배인두 없는데 기사장동무가 주인으로서 군대동무들을 맞아야 할게 아니요.》
《알겠습니다.》
그는 송수화기를 던지다싶이 하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