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회)

제 2 장

마중가는 사람

 

8

 

송수만로인이 당과류직장에 들어섰을 때는 금방 현장협의회가 끝난 다음이였다. 열댓명의 직장장들이 게시판에 내붙인 삼일포특산물공장과 같은 생산공정도를 놓고 저마끔 자기가 맡은 일들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그속에는 송수만이 내놓은 기술혁신안도 게시되여있었다. 손녀 송해연이 그 공정도를 보며 지배인에게 무엇인가 열심히 설명하고있었다.

지배인 한경수가 먼발치에서 송수만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송아바이, 나오셨습니까.》

할아버지를 돌아본 송해연이 얼른 지배인에게서 물러났다. 어디론가 뛰여가려는 송해연에게 몇마디 더 강조한 한경수가 솜옷앞섶을 활 열어젖히고 송수만에게 다가왔다.

《아바이, 새 기술혁신안도입에 제기되는건 없습니까?》

《없수다.》

로인은 희뿌연 작은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요즘 별스레 얼굴이 환해진 한경수이다.

《그러니 인차 될수 있을가요?》 한경수가 또 물었다. 《그 물엿만 나오면 당과류도 좀더 생산할수 있겠는데…》

로인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였다.

《헌데 물엿이 나온들 뭘하오? 이미 있던 설비들은 못쓰게 되여 창고에 걷어넣었지, 새로 들여온 드롭프스설비는 암호가 걸려 못쓰지…》

한경수가 팔을 획 내저었다.

《뭐, 걱정할게 없수다. 암호가 걸린 부분만 훌 들어내면 얼마든지 손로동으로 대신할수 있지요. 드롭프스를 생산할 좋은 물엿이 없어서 그러지…》

《그래두… 내 보기엔 일이 썩 잘되는것 같질 않구만.》

《아니 아바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우? 어떻게 하든 공장을 살려야 우리도 장군님을 모실수 있지 않습니까. 인젠 모든 준비가 다 끝났는데. 근심마시우다, 이 지배인이 다 책임질터이니 아바인 그저 물엿이나 꽝꽝 뽑도록 해주시우.》

로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금 현장에서는 송수만이 내놓은 기술혁신안대로 낮은 온도에 의한 당화법을 도입하고 50여메터나 되는 증기수송관을 교체하는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있다. 이제 며칠안으로 얼기설기 그물처럼 뻗어간 수많은 관들을 통해 농마가 나오고 그가 한생을 바친 황금태가, 물엿이 나오게 되는것이다. 하지만 늘 웃고있던 송수만의 자그마한 눈은 수심에 잠겨있었다. 왜 마음이 개운치 않은지? 바라던대로 기술혁신안이 추진되고 물엿의 질도 올라갈텐데 왜 기쁘지 않은지?…

송수만은 괴롭게 숨을 내긋고있었다. 문득 며칠전 집에 찾아왔던 정주선당비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날 당비서는 그에게 조용히 물었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번에 박사아바이가 내놓은 새 기술혁신안을 현대화계획에 넣어달라고 하였다는데…》

송수만로인은 막내며느리가 들여온 뜨거운 감나무잎차를 그에게도 권하며 차잔을 들었다.

《글쎄… 제 자식 미운 부모가 어데 있겠소.》

뜨거운 차를 불며 천천히 한모금 마신 정주선당비서가 자리를 고쳐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내놓은 기술혁신안은 박사아바이가 한생 쌓아오고 축적한 귀중한 경험과 기술이라는걸 잘 압니다. 또 그것이 물엿의 질을 최대로 높일수 있다는것도. 헌데 그렇게 나온 물엿을 효소물엿에 비길수 있겠는지?…》

《…》

그는 아무말없이 점도록 차잔만 들여다보고있었다. 투명한 물엿처럼 맑고 노르스름한 감나무잎차… 그는 당비서가 무엇때문에 자기를 찾아왔는지 이미 짐작하고있었다. 정주선당비서는 오랜 경험을 가지고있는 송수만이 효소물엿을 위해 애쓰고있는 기사장 림성하를 도와주기를 바라고있는것이다.

송수만은 차잔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 좀더 생각해봅시다, 비서동무…》

그는 당비서가 돌아간 다음 밤새껏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째선지 자신에 대한 불만으로 마음이 언짢고 괴로왔다. 새벽이 되도록 끝내 만족한 대답을 찾지 못한 그여서인지 새 기술혁신안을 내붙인 게시판앞에 서있는 지금 이 시각도 마음이 무거워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별안간 한경수지배인이 공정도앞에서 어물거리는 전기직장장에게 소리쳤다.

《이보게 전기, 임자넨 모두 잘난 사람들인데 일을 해놓은걸 보면 모두 박색으로 주물러놓거던. 그래, 감자가공기계의 낡은 전동기는 언제 수리하겠소?》

그를 쳐다보고있던 전기직장장이 훌렁 벗어진 이마를 슬슬 문대였다.

《글쎄… 바꾸어주긴 해야겠는데 어디 자재가 있어야지요? 사실 그만큼 돌아가는것도 다행입니다, 지배인동지.》

《그럼 남은 감자는 모두 전기직장에서 건사하겠나?》

《지배인동지두 참, 우리가 무슨 협동농장이라구.》 그가 투덜거렸다. 《사탕, 과자가 나와야 할 곡산공장에서 감자나 깨잎을 가공하다니? 무슨 판인지…》

《여보,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거요. 직장장두 정신차리구 황새걸음을 하라구. 인제는 온 공장이 장군님을 모실 준비가 다 돼가는데…》

한경수가 송수만에게로 돌아섰다.

《자 아바이, 난 또 다른데 돌아봐야 하니 제기되는것이 있으면 제꺽 알려주시우.》

《그러세.》

송수만은 가늘게 한숨을 내그으며 헐금씨금 문쪽으로 사라지는 그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아바이, 수고합니다.》

돌아보니 당비서 정주선이였다. 로인은 아까부터 그가 자기를 지켜보고있었다는것을 알지 못했었다.

《비서동무, 어서 오시오.》

로인은 게시판에서 물러나며 정주선에게 돌아섰다. 잠시 그를 바라보고나서 입을 열었다.

《물엿기술개조안때문에 왔겠지요?》

《예, 아바이가 좀 생각해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 알고싶어서 그럽니다.》

로인의 작은 두눈이 웃음을 거두었다. 희끗희끗한 턱수염이 제멋대로 나온 얼굴도 탈색된 옛 그림처럼 어둡고 침침해졌다. 말없이 서있던 로인은 지나가는 물엿직장장 리안휘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보게, 한대 주게!》

리안휘가 놀란듯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어떻게 된겁니까, 아바이? 이 년세에 담배를 배우시려고요?》

《한대 달라는데!》

《예, 드리지요! 옛습니다.》

《고맙네…》

정주선이 얼른 라이타불을 켜주었다. 서툴게 담배불을 붙이려던 송수만로인이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여전히 불을 켜들고있는 정주선을 바라본 로인이 담배를 내리웠다.

《됐수다!》

리안휘에게 담배를 되돌려준 로인이 작업반회의실로 정주선을 잡아끌었다.

《비서동무, 좀 들어갑시다.》

정주선은 멀리서 오다가 우뚝 멎어서는 송해연을 얼핏 바라보고나서 로인을 따라들어갔다.

작업반회의실은 추웠다. 하지만 로인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것 같았다. 송수만은 긴 나무의자를 가리키며 자기도 정주선의 옆에 앉았다.

《비서동무, 여든한생을 돌이켜보는데는 하루밤도 짧은것 같구만. 어제 밤엔 왜 자꾸만 옛날 일이 떠오르던지. 그 물엿 한고뿌때문에 가슴터지던 일을 생각하면…》

정주선은 손에 쥐고있는 따뜻한 라이타를 내려다보았다. 물엿 한고뿌에 서린 송수만로인의 원한! 누구보다 그 사연을 잘 알고있는 정주선이였다.

로인의 작은 두눈이 깊은 주름이 패이며 가느스름해졌다. 로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곡산공장과 함께 살다보니 알건 모르건 공장의 생산기술문제를 다 통달하게 됐수다. 물엿이나 포도당을 만드는게 재미나서 이 나이가 되도록 장기쪽을 쥐여본적도 없구 명절날 식구들과 놀러 간적도 없구요. 그러니 〈수만아, 술마시러 가자!〉하고 오는 술친구들도 찾을래야 찾을수 없지요.》

《송박사아바이가 공장밖에 모른다는거야 누구나 다 알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껏 공장의 기술진영을 이끌고오셨구요.》

《비서동무두 이 늙은걸 얼러추시오?… 늙으면 눈치가 무디여진다는데 자꾸 제 자랑만 했구만.》

로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동안 자기를 쳐다보는 정주선을 마주 바라보았다.

《비서동무, 사실 물엿은 나의 한생이우다. 내 한생의 꿈이구 인생말년의 총화이기도 하구요.》

《압니다.》 당비서가 말했다. 《우리가 송아바이의 그 마음을 왜 모르겠습니까.》

《나두 한땐》 로인이 계속했다. 《효소물엿이 부러워서 그 효소균이란 놈을 좀 주물러봤더랬지요. 그러다가 나를 따라다니던 성하 저 사람에게 다 떠넘겨버렸수다. 그가 하는걸 보니 확실히 앞섰기에…》

아직도 손에 쥐고있는 따스한 라이타를 내려다보던 정주선이 고개를 들었다.

《아바이…》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만… 난 한번도 저 기사장의 효소배양을 반대한적이 없수다. 다만 아직 기사장의 효소배양이 성공하지 못했기때문에 내가 하던 낡은 산분해법에 그 무슨 혁신안이라는걸 내놓았을뿐… 하지만 그걸 효소물엿에야 어떻게 비기겠소. 산분해법이야 역시 산분해법이지.》

정주선은 고개를 숙이고 식어버린 라이타를 들여다볼뿐이였다. 로인은 그제야 추위를 느낀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서동무, 그래 내 지금 곰곰히 생각하고있수다. 아무래도 새 기술혁신안을 지배인동무와 다시 토론해봐야겠다구…》

정주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어렸다.

《아바이, 고맙습니다. 꼭… 그렇게 해주십시오!》

송해연이 방에 들어선것은 그때였다. 사실 효소배양연구를 다그치겠다고 당비서에게 말하려고 했지만 좀전에 심각한 표정이였던 할아버지가 더 걱정되였던것이다. 하지만 다음순간 처녀는 아연해지고말았다.

정주선당비서가 웃으며 로인에게 담배를 권하고있었다.

《자 아바이, 한대 태우십시오!》

《허, 당비서동문 자기가 담배를 좋아하니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줄 아는게지?》

정주선이 켜들었던 라이타불을 끄며 이마를 쳤다.

《아, 그렇지…》

그들을 바라보던 송해연은 저도 모르게 호- 하고 가벼운 숨을 내쉬며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방에서 조용히 나가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그냥 서있어야 할지 알수 없었던것이다.

이때 손기척소리가 나며 누군가 얌전하게 들어섰다.

《아 비서동지, 여기 계시는걸 그냥 찾아다녔습니다!》 기사장 림성하였다. 《방금 김책공업종합대학에서 련락이 왔는데 과학부총장선생이 희천에서 볼일을 다 보고서야 평양으로 돌아온답니다. 아마 한주일은 더 걸릴거라구 하는데…》

《아직도 한주일?…》

《할수 없습니다. 그때 가서 조종프로그람문제를 토의하자고 합니다.》

《알겠소, 기사장동무.》

림성하는 들어올 때처럼 조용히 방에서 나갔다. 그제야 정주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해연에게 물었다.

《해연인 어떻게 왔니?》

송해연이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저, 사실 전… 공업시험소에서 하고있는 효소물엿연구를 더 다그쳐서…》

송수만로인이 딱해하는 손녀의 편역을 들어주었다.

《예, 효소연구팀에 들어갔지요. 비서동무, 우리 해연이도 인젠 철이 들었다구 봐야지요? 자기가 서야 할 자리, 앉아야 할 자릴 다 가릴줄 아니.》

《참, 할아버지두…》

송해연은 여전히 웃고있는 정주선당비서를 힐끗 바라보고나서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어서 나가자요. 밖에서 책임기사동지가 할아버지를 기다리고있어요.》

송수만은 자기를 부축하려는 손녀의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 그 누구의 부축도 바라지 않는 그였다. 손녀가 눈이 올롱해서 그를 지켜보고있었다.

《얘 해연아, 넌 네 할일이나 착실히 해라. 알겠냐?》

그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방을 나섰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문을 열고 나서는 송수만로인은 가볍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치 한생 힘들게 지고오던 무거운 짐을 금시 덜어놓은듯 한 모습이였다.…

정주선당비서는 오래동안 로인의 뒤를 바라보고있었다. 과거를 떠난 진보란 있을수 없다. 모든 과학기술적진보는 전세대의 수많은 과학자, 기술자들에게서 넘겨받는 경험과 교훈의 바통으로 이어진다. 전세대가 힘들게 헤쳐온 탐구의 그 바통이 후대들로 하여금 새로운 진보와 비약의 대통로로 달리게 한다. 과거와 현재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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