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회)

제 2 장

마중가는 사람

 

6

 

끝내 일은 시끄럽게 번져지고말았다. 끝없이 몸부림치며 울어대는 전화기에서는 기사장을 찾는 목소리들이 그칠줄 몰랐다. 식료일용공업성과 무역성, 식료련합과 지어는 시당의 담당일군까지도 그를 찾았다.

기업가인 쑤치오가 비행기를 타고 떠나면서 해당 기관에 항의서를 냈다고 한다. 국내와 해외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있는 기업가로서 한시도 더 머무를수 없게 된 사정으로 비행기를 타면서 그는 자기가 제기한 가격이 결심되면 곧 확스로 알려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하지만 림성하는 그 일에 마음쓸새가 없었다. 가공직장의 마쇄작업반에서 관이 메여 금시 시작한 생산이 멎었던것이다. 수리공들과 함께 관을 해체하는 그의 온몸은 아류산수가 섞인 농마물로 하여 화락하니 젖어있었다.

《나사틀개를 인주오.》

수리공이 그의 손을 밀어놓았다.

《기사장동진 그만두라요. 이런거야 우리가 더 낫지요.》

《그렇긴 하지만…》

림성하는 수리공에게 바킹도 섬겨주고 관도 잡아주며 두손에 기름칠을 하고 돌아갔다. 한옆에서는 기능공인 박아바이가 젊은 기대공에게 일장 훈시를 하고있었다.

《마쇄에서 기본은 쇠망이 잘 돌아가야 해, 알겠나? 잘 때에도 관을 베고 자구. 귀를 관에다 대고 자야 한다는 소리일세. 벌써 물이 쫄랑쫄랑 소리를 낼 때에는 타개지는 강냉이가 높은 열에 익는다는거지. 이렇게 되면 따로따로 나와야 할 농마와 강냉이눈, 겉껍질과 단백이한데 섞여나오면서 관이 메는거야. 명심하게! 첫째두 둘째두 이 마쇄에선 쇠망이 잘 돌아가야 해. 그래야 모든게 물이 흘러가듯 편안해지구 농마실수률도 높아져, 알았나?》

《예, 알았어요, 아바이.》

이때 관을 맞추던 수리공이 림성하에게 알려주었다.

《기사장동지, 저기 누가 찾아온것 같습니다.》

관안에 남아있는 농마물이 흘러나오지 못하게 막고있던 림성하가 그에게 재촉했다.

《어서 볼트나 꽉 조이라구. 오긴 누가 왔다는거요?》

별안간 그의 등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울렸다.

《나요, 기사장동무.》

쭈그리고앉았던 림성하가 고개를 돌리며 허리를 폈다. 풍채가 좋은 그 사람은 식료련합 과장이였다.

《과장동지가 어떻게?…》

과장은 온통 옷이 젖은데다가 역한 아류산수냄새까지 풍기는 림성하에게 미간을 찌프렸다.

《이런 일이야 기사장이 손대는게 아니지. 현장기사들은 뭣때문에 있소? 그렇게 아래일까지 다 맡아안으니까 우에서 하는 일에 구멍이 나지 않소.》 그가 좀더 어성을 높였다. 《그래 어떻게 된거요? 무역성에까지 제기되게 하고?…》

로동자들이 놀라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경계하는듯 한 그들의 눈길을 느낀 과장이 림성하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가만, 사무실로 가기요. 료해성원들이 기다리고있는데…》

림성하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또다시 마음이 어수선하고 뒤숭숭해졌다.

너렁청한 방에는 여러 사람들이 와있었다. 그들속에는 식료일용공업성 일군과 식료련합 그리고 언제인가 공장에 나와보았던 시무역관리국 일군의 얼굴도 보였다.

옆탁에 앉은 식료일용공업성 일군이 먼저 그에게 물었다.

《어디 말해보오, 기사장동무. 어떻게 됐다구?》

림성하는 젖은 소매를 쥐여짜며 조용히 말했다.

《저, 사실은… 대방이 공장을 깔보고 당치않은 요구를 내걸기에…》

《그래 동무넨 외국인들과의 거래가 나라의 권위와 관계되는 대외사업이라는걸 모르오?》

림성하는 눈길을 떨구며 입을 다물었다.

《기사장동무!》 시무역관리국 일군이 얄팍한 문건을 내놓았다.

《대방이 이 공장을 무역법에 걸어 소송에 제기했습니다. 곡산공장이 막대한 배상금을 물수도 있다는걸 알고있습니까?》

《예? 배상금이요?》

림성하는 아직 기계기름이 그대로 묻어있는 손가락을 무릎에 비벼대였다. 미처 그것까지 생각해보지 못한 그였다. 다만 쑤치오의 지나친 타산과 리윤추구에 공장이 피해본다는 하나의 생각만을 했었다.

《그렇긴 하지만 대방의 무리한 요구를 그대로 들어줄수야 없지 않습니까.》

시무역관리국의 일군이 점잖게 입을 열었다.

《기사장동문 아직 대외사업이라는걸 잘 모를수 있는데 그렇게 한다구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게 아니요.》

《하지만 외국사람에게 우리 공장의 명줄을 쥐게 할수는 없지 않습니까. 외화를 주고 효소를 계속 수입할수도 없고… 그가 타산이 밝은것만큼 우리도 타산을 가지고 매 건당 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건철을 뒤적이던 성일군이 처음으로 눈길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기사장동무, 동문 마치나 웃기관사람들은 아무 생각없이 앉아 노는것처럼 말하는데… 우의 일군들은 뭐 타산할줄 몰라서 그러는줄 아오?》

시무역관리국 일군도 한마디 했다.

《기사장동무, 물론 우리도 무턱대고 손해를 보면서 거래를 하자는건 아니요.》

여러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옳은 말이요.》

《그렇지 않구.》

그러자 그는 경험많은 무역일군답게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헌데 말이요, 기사장동무. 사실 우리도 쑤치오와 같이 귀신처럼 타산에 밝은 사람들에게는 어쩌지 못할 때가 많소. 현재 우리가 제국주의반동들의 경제제재를 받고있는 조건에서 그런 외국투자가를 끌어들이는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요. 이번에 그가 자기의 사업환경이 잘 보장되는 조건에서 앞으로 더 많은 무역거래의향을 표시했었는데, 참… 기사장때문에 그 일이 글러질것 같소. 그 쑤치오란 사람이 우리와 약속했던 면담도 다 줴버리구 훌쩍 날아가버렸단 말이요. 번창하는 자기네 기업에는 이런것쯤 대수롭지 않다는거지. 이 공장과의 계약 같은건… 좀 우습다는 태도란 말이요.》

림성하는 그 어떤 모욕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 이와 같이 수치를 당한듯 하던 분하고도 아프던 일이 떠올랐다. 그것은 공업시험소장인 림성하가 유네스코에서 조직한 국제학술토론회에 참가했을 때였다.

이웃나라에서 진행한 그 국제학술토론회에는 40여개의 나라들에서 온 식료공업부문의 시험기사들과 전문가들이 참가하고있었다. 발전도상나라들의 과학기술교류와 협력을 목적에 둔 학술토론회여서 각 나라의 이름있는 교수들을 초빙하여 강의도 하였는데 주로 유전자공학과 강냉이가공기술에 대하여 영어로 강의해주군 하였다. 다른 나라 청강생들은 열심히 귀를 기울이였지만 림성하는 그 내용에 그만 실망하고말았다. 이미 다 알고있는 가장 기초적인 강냉이가공기술만을 취급하고있었던것이다.

그가 바라는것은 효소배양기술이였다. 앞선 나라들에서 어떻게 하는지 보고싶었다. 그리하여 지금껏 연구해온 자기의 효소배양기술수준을 가늠해보고싶었다.

교수가 강의를 끝내면서 청강생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질문을 제기하라고 했다. 때를 기다리고있던 림성하가 제일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의를 잘 들었습니다, 교수선생님. 하지만 전 효소배양에 대한 문제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아, 그건 이번학술토론회에 포함되지 않은 문젭니다. 강의내용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시오.》

《교수선생님, 국제학술토론회는 여러 나라들이 과학기술분야에서 달성한 성과와 경험을 호상 교환하는것을 사명으로 하고있지 않습니까. 귀국에선 이미 효소를 공업화하고있다는데 그 효소배양공정을 좀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교수가 한손을 앞으로 내뻗쳤다.

《그건 안됩니다! 유럽과 합작하고있는 그 공장은 마음대로 들어갈수 없습니다. 엄지회사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설사 승인을 받았다 해도 정부는 승인하지 않을겁니다. 나의 권한으로 일부 록화자료는 보여줄수 있지만…》

림성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유럽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액체배양법으로 첫 효소공업화를 실현했다. 그때 당시 액체배양법에 의한 효소공업화의 성공은 하늘의 별을 따온것만큼이나 신비스러운것이였다. 하여 그들은 그 기술을 철저히 비밀에 붙였으며 정부가 개입하여 다른 나라와의 치렬한 과학기술정보경쟁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주고있었다.

그렇다고 림성하는 효소배양에 대한 욕심을 버릴수 없었다. 교수의 도움으로 록화자료를 받은 그는 그것을 수십번이나 반복하여 보고 또 보았다. 현장에서 터득한 경험과 교훈에 비추어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시사받고 암시받을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에서였다. 하지만 허망한 일이였다. 예견했던대로 그것은 내용물을 빼버린 골격과 같은 록화물, 실험실을 장식하는데나 필요한 박제품과도 같은것이였다.…

림성하는 지금도 그때와 같은 아픔과 분노를 느끼며 메여버린 농마관처럼 속에 있는것을 다 뱉어버리고싶은 충동을 어쩔수 없었다. 그는 기계기름이 발린 두손을 꼭 마주잡았다.

《제가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성일군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어서 말해보오.》

《전 우리 공장이 잘못한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설비가 들어오면 그것이 돌아가야 하는것은… 자명한 리치가 아닙니까. 그런데 요진통인 프로그람에 암호를 걸어놓고 엄청난 돈을 물라고 하니…》

《그렇다고 계약문건을 다시 만들자고 할수는 없지 않소.》

림성하는 두손으로 탁자를 꽉 짚었다.

《그럼 왜 처음부터 계약문건을 바로하지 못했습니까? 숱한 사람들이 그 설비수입을 위해 외국출장을 다녀오면서도 말입니다.》

성일군이 그에게로 꼿꼿해진 눈길을 던졌다.

《뭘 말하자는거요?》

《그 숱한 재외출장성원들속에 단 한사람의 식료기계전문가만 끼웠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을게 아닙니까.》

《동무.》 성일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런 식으로 책임을 모면하려는것은 좋지 않소.》

림성하는 고개를 떨구고 한쪽입술을 깨물었다. 웬간해선 큰소리를 모르는 그였지만 옳다고 생각하면 고집스러울만치 완강하게 자기를 주장하는 그였다.

그가 다시 눈길을 들었다.

《그렇습니다. 기왕 나라돈을 쓸바엔 더 좋고 더 쓸모있는걸 사와야 합니다.》 그는 고집스럽게 하던 말을 계속했다. 《현장을 아는 사람이 나갔어야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식료기계를 들여온다면서 식료공학의 물계도 잘 모르는 웃기관사람들이 나가는겁니까?》

불현듯 방안이 조용해졌다. 수군거리던 소리도 모래불에 물이 스며들듯 잦아들고말았다.

《기사장동무.》 식료련합과장이 슬그머니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오? 성일군들도 다 필요해서 따라간건데…》

림성하는 그에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를 보지 않으면서 계속했다.

《아래단위의 전문가들을 외면하고 모르는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 설비를 사들여왔기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고압가마나 멸균설비 같은것들은 이름조차 모르고있습니다. 그래서 오늘과 같은 난문제가 생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무!》 별안간 성일군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니 동문 모든 잘못이 우에 있다는거요?… 사실 우린 어떻게 해서나 이 문제를 더 확산시키지 말자고 했었는데… 안되겠소, 아무래도 기사장동무문젠 래일 따로 봐야겠소.》

그는 펼쳐놓고있던 책장을 소리나게 덮었다. 마치 기사장 림성하의 운명까지 그렇게 덮어버리는듯 했다.

림성하는 얼마후 승용차들이 떠나는것도 알지 못했다. 그를 지켜보고있던 식료련합과장이 측은한 어조로 수군거렸다.

《기사장동무, 래일 나도 함께 가기요. 우리 련합에도 책임이 있으니까…》

그 과장의 말도 림성하는 잘 가려듣지 못했다. 머리속이 혼란되여 있었다. 내가 오늘 또 잘못했는가? 이렇게 복잡해지지 않게 할수도 있지 않았는가?…

밖으로 나오던 림성하는 걸음을 멈추었다. 솜옷에 달린 고깔모자를 푹 내려쓴 두사람이 그를 막아섰던것이다.

《아이구, 우린 기사장을 찾느라 얼음사람이 다 됐소.》

방송원을 본따며 멋을 부리는 목소리, 그는 지운섭이였다.

《아니, 부직장장이 어떻게?…》

지운섭이 웃으며 다가왔다.

《기사장동무, 날 받아주겠다는 그 령산관리국에서 말이요. 하, 글쎄 자기네 예술소조공연을 좀 도와달라질 않겠소. 그래서 막 떠나가던 길이요.》

림성하는 미간을 찡기였다. 물론 그럴수 있는 일이다. 한때 어느 한 예술선전대에서 활약한바 있는 지운섭은 무대우에서의 일이라면 막히는데가 없는 사람이다. 화술과 성악은 물론 손풍금과 가야금 등 갖가지 양악기, 민족악기들도 잘 다루는 그야말로 팔방미인이다. 경축일 때마다 진행하는 곡산공장 예술소조공연도 늘 그가 도맡아 지도하군 했었는데 어떻게 된 셈판인지 그가 손을 댄 작품은 언제나 1등으로 당선되군 했었다. 이러한 지운섭을, 예술공연지도에 뛰여난 재간도 있고 말주변도 좋을뿐아니라 갖가지 상식도 많은 그를 다른 공장, 기업소는 물론 회사들에서 탐내거나 초청해간다는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운섭은 예술소조활동의 재간둥이만이 아니였다. 그는 한덕수평양경공업대학을 졸업한 발효공학기사이며 공장에서 여러가지균을 다루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였다.

림성하가 정색하여 물었다.

《그런데 나한텐 무슨 일로?… 혹시 부직장장을 계속 하고싶어 그러는건 아니요?…》

지운섭이 손을 홱 내저었다.

《원 무슨 말씀! 아니, 난 이미 공장을 뜬것으로 소문난 사람이요. 헌데… 나와 청소년체육학교 친구인 저 사람이 꼭 기사장동물 만나야겠다누만.》

림성하는 그가 가리키는 곳을, 그들에게서 좀 멀찍이 떨어져있던 다른 사람을 눈여겨보았다. 단단한 어깨에 통나무처럼 목이 굵은 사람, 거기에 네모진 얼굴에 주먹코로 인상적인 사람… 그는 놀랐다.

《아니, 처남이 아닌가?!》

그는 기중기차운전사인 처남 최두만이였다. 안해 최은경의 동생인 최두만, 어렸을 때 청소년체육학교를 다녔는데 지금은 자동차양성소를 졸업하고 기중기차를 몰고있다. 안해도 억세고 단단한 녀자이지만 그의 남동생 최두만은 남달리 큰 주먹을 가지고있고 또 그것을 뽐내기 좋아하는 사람이다.

림성하는 찌프렸던 미간을 펴며 그에게 다가갔다.

《참, 약혼녀는 잘있나? 그날 약혼식에 참가하지 못해 미안하네.》

종이에 싼 꾸레미를 든 최두만이 마뜩지 않은 눈길로 림성하를 바라보았다.

《됐수다. 난 그런걸 가지구 말하는 사람이 아니요.》

그가 림성하에게 불쑥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누이가 보내는거요.》

《누이?》

림성하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봉투 한가운데 《정국이 아버지에게》라고 쓴 안해의 활달한 글씨가 먼저 안겨왔다.

《…얼마간 친정집에 가있겠어요. 당신에게 알리지 않고 떠나서 미안해요.》

편지를 읽어내려가던 림성하의 얼굴은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안해구실도 똑똑히 못한 저를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전날 당신을 노엽힌것도… 아마 당신을 리해하는것이 저에겐 힘에 부친가봐요.》

림성하는 뚫어지게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그 어떤 알지 못할 불안이 가슴을 훑어내렸다. 마치 영영 떠나가는것처럼 느껴지는 안해의 편지…

최두만이 그에게 다가서며 들고있던 꾸레미를 내밀었다.

《자, 도루 받으시우. 나한텐 이런게 필요없수다!》

림성하는 그가 던져주다싶이 한 꾸레미를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언젠가 처남이 부러워해서 벗어주었던 고급구두였다. 그때 안해인 최은경은 동생에게 눈을 흘기면서도 하나밖에 없는 고급구두를 서슴없이 처남에게 벗어주는 남편을 고맙게 생각했었다. 헌데 최두만은 얼마 신지 않은 구두를 다시 그에게 가져온것이다.

《매부, 난 누이가 불행해지는걸 바라지 않수.》

최두만은 크고 단단한 자기의 주먹을 내려다보고나서 말없이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곁에서 지켜보고있던 지운섭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니, 이보게. 무슨 일인가, 응?》

얼어붙은듯 굳어진 림성하를 힐끗 쳐다본 최두만이 인사말도 없이 휙 돌아섰다. 어정쩡해있던 지운섭이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 왜 저래? 이보게, 두만이! 여, 같이 가자구!》

림성하는 그의 뒤를 따라가는 지운섭을 바라보며 한자리에 그냥 서있었다. 두사람은 나타날 때처럼 솜옷고깔을 푹 뒤집어쓰고 정문쪽으로 멀어져갔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안해구실? 노여움, 리해… 그러니 별치않은 일로 다툰 그 일이 그렇게도 속에 맺혔단 말인가?… 그날도 밤늦게야 퇴근한 림성하는 안해가 차려주는 밥상을 물리고 그대로 기술서적을 들여다보고있었다. 한동안 정신없이 책에 파묻혀있던 그는 이상한 느낌에 안해를 돌아보았다. 자리를 펴고 누워있던 안해가 신음소리를 내고있었던것이다.

《어디 아프오?》

눈을 감고있던 최은경이 머리를 흔들었다.

《별게 아니예요.》

림성하는 다시 기술서적에 눈길을 박았다. 안해가 일없다면 별로 걱정하지 않는 그였다. 남달리 생활력이 강하고 담찬 안해였기에 그는 안해가 앓는다는것을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도끼모태로 쓰는 통나무같이 아무리 찍어도 자리가 나지 않는 녀자라고만 생각하고있는것이다. 하여 그는 별로 큰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책에만 눈을 팔고있었다.

《이보세요, 정국이 아버지.》

안해가 이상한 목소리로 그를 다시 불렀다.

림성하는 책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건성 대답했다.

《왜 그러오?…》

《저… 우리 정국이를 두만이네 집에 보내는게 어떨가요?》

《그건 무슨 소리요?》

안해의 목소리는 더 가늘어졌다.

《두만이네가 있는 유치원에 조기음악반이 있대요. 다섯살난 아이들을 받는다는데…》

《그건 당신 좋을대루.》

그의 눈길은 여전히 기술서적의 글줄을 더듬고있었다. 바찔리스스브틸리스균, 액체배양, 효소생산의 공업화…

잠시후 안해가 또 말을 꺼냈다.

《이봐요, 정국이 아버지.》

《음?…》

안해가 주저주저하더니 힘들게 말을 이었다.

《나 얼마간… 본가집에 가있었으면 해요.》

여전히 그는 건성 대답했다.

《가보지 뭐.》

《저, 그런데 정국이를 두만이네 집이 아니라 당비서동지네 집에 맡기는게 좋을것 같애서…》

기술서적에 정신이 팔려있던 림성하는 책에서 피끗 머리를 들었다. 아이를 맡긴다? 당비서네 집에?…

《그건 무슨 소리요? 당비서동지 아주머니야 어느 중앙기관 책임부원을 하지 않소. 얼마나 바쁘다구.》

《그런게 아니라 그 집 할머니가 봐주겠다구 해서…》

《오, 할머니가?…》

그는 별로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다. 곡산공장 사람들이라면 정주선당비서의 어머니, 90살을 넘긴 고령의 할머니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림성하는 아직 눈도 귀도 밝은 그 할머니가 공장보이라를 살릴 때마다 집에서 담근 김치를 들고 나오는것을 늘 보아왔고 공장의 많은 일군들과 로동자들을 친자식이나 손자, 손녀처럼 대해준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하지만 안해의 다음말에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저, 그리구 정국이 아버지, 떠나기 전에 당신과 같이 해연기사의 할아버지를 찾아가보았으면 하는데…》

《그건 왜?》

《당신이 그 할아버질 노엽힌게 내려가지 않아서 그래요. 같이 가서 마음을 풀어드리면 떠나는 내 마음도 가볍겠는데…》

림성하는 끝내 책장을 덮고말았다.

《내 이미 말하지 않았소. 그건 순수 과학기술적문제라구. 그래 과학기술적문제를 병문안이나 가는 식으로 해서 풀어질것 같소? 친정집에 갔다오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라구… 정 가겠으면 당신 혼자나 가보오!》

그가 이렇게 성을 내는것은 아주 드문 일이였다. 안해가 계획한것은 아무 군말없이 찬동했고 안해의 의견에는 《당신 생각대로 하기요.》 하는것이 그의 변함없는 대답이였다. 지금까지 안해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반대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때엔 어성을 높이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다시 원서를 펴들었다. 아까 보던 페지를 찾아 들여다보았으나 글줄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문득 가슴을 찌르는 이상한 예감에 머리를 돌렸다. 다음순간 그는 두눈이 꼿꼿해졌다.

《아니, 왜 그러오?》

그는 놀란 눈으로 안해를 바라보았다. 안해는 울고있었다. 어깨를 떨고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던 녀자, 그에겐 눈물이 없다고 여겼던 녀자… 지금껏 그 누구보다 억세다고 믿고있던 녀자, 남편인 자기를 아이보듯 한다고 여겼던 그 안해가 울고있는것이다.

《아니, 내가 뭐 어쨌다구?…》

안해는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먼저 손에 잡히는 목도리를 들어 얼굴을 문지른 안해는 흐느끼며 부엌으로 나갔다.

림성하는 오늘에 와서야 그것이 안해를 무시하는, 가슴에 맺힌 말이였다는것을 깨달았다. 안해 최은경이 친정집에 간다는 편지 한장 남기고 집을 나갔던것이다. 그렇다. 몇줄 안되는 글쪽지만 남긴채…

림성하는 마음이 어수선했다. 일단 결심하면 결코 뒤로 물러서는 일이 없는 안해이지만 그래도 아들애까지 남겨두고 먼길을 가면서 이런 편지 하나만 대충 써놓고 가다니… 과연 무엇때문인가, 이 림성하가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말 한마디가 그렇게 심각한것이였단 말인가?…

겨울의 찬바람이 그의 이마에 흘러내린 고수머리를 헝클어놓았다. 그의 손에는 아직 안해의 편지가 그대로 쥐여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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