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3 회)
제 2 장
마중가는 사람
5
최은경은 잠든 아들애를 내려다보며 까딱하지 않고있었다. 오늘 밤도 남편이 들어오지 못한다는것을 알고있는 그였다. 그러면서도 새벽이 다되도록 이렇게 앉아있다. 다리가 저려나는것도 알지 못했다.
여전히 귀전에 울려오고있는 석우진의 목소리…
《… 내 정국이 어머니를 볼 때마다 성하 그 사람을 잘못 본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군 하네.》
《아니, 무슨 말씀인지?…》
은경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었다. 병원에 찾아온 그를 반갑게 맞아주던 석우진, 어린 정국이가 큰아버지라고 부르고있는 사람, 자기의 남편을 친동생이상으로 위해주던 그가 무엇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지 알수 없었다.
《변했거던. 사람들을 무시하구 깔보구… 은경이만 봐두 그렇지. 남편 뒤바라지를 하느라고 몹시 상했는데 그 사람이 그걸 아는것 같지 않아.》
《…》
석우진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였다.
《더구나 지금은 기사장까지 됐으니 이 석우진이나 황금태로인은 안중에도 없지… 하긴 우리야 낡은 사람들이니까.》
그때 최은경은 입술만 깨물뿐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할말도 없었다.
《국장동지,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말한것은 입원실에 먼저 와있던 강수일이라는 젊은 처장이였다. 그가 계속했다.
《기사장사업을 처음 맡아하다보니 그럴수 있지요. 큰 공장의 기사장이 뭐 쉽겠습니까? 경험두 부족하구 힘에도 부칠텐데… 제가 내려가 잘 돕겠습니다.》
석우진이 그의 한손을 꾹 눌러잡더니 간절한 어조로 부탁하는것이였다.
《그래주오, 강동무. 거기 곡산공장엔 지금 동무같은 지도일군이 필요할 때요. 두팔 걷고나서서 도와주는 그런 일군이…》
《걱정마십시오. 국장동지가 계획한대로 곡산공장의 일을 힘껏 내밀겠습니다.》
《고맙소!…》
석우진이 진정을 담아 말했다. 사실 그것은 은경이 자기가 강수일이라는 그 젊은 처장에게 하고싶던 말이였다. 하지만 얼어붙은듯 입을 열수가 없었다. 자기가 남편의 사업에 대하여, 공장일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수 있단 말인가… 그는 눈먼 사람처럼 들고온 음식그릇을 더듬으며 꼭 매놓은 보자기의 매듭만 풀려고 애썼다. 무엇때문에 노여워하는지 알수 없었지만 진심으로 남편을 걱정해주는 석우진이 고마왔다. 그리고 안해인 자기도 할수 없는 일을, 남편의 기사장사업을 있는 힘껏 돕겠다고 하는 강수일이 고마왔다. 사람들이 이렇게 마음쓰는줄 애아버지는 알고나 있는지?… 그때 은경이의 기대어린 눈길은 점도록 석우진과 강수일에게서 떨어질줄 몰랐다. 집에 돌아온 지금도 그는 진심으로 남편을 걱정해주던 그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하여 또다시 마음이 젖어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아버지…》
아들애가 뒤척이며 잠꼬대를 했다. 은경은 아들애를 다독이며 이마에 내돋은 땀을 닦아주었다. 언제봐야 아버지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질줄 모르는 다섯살잡이 아들애, 남달리 벌차고 장난이 심한 이 애를 두고 사람들이 《정국아, 넌 도대체 누굴 닮았니?》 하고 물으면 아들애는 이렇게 대답하군 했다.
《난 엄마 닮았어요!》 하면서도 먼저 아버지에게로 달려가는 정국이다. 이런 아들에게 깡그리 정을 쏟고있는 남편, 가정의 크고작은 일들은 안해에게 다 맡기면서도 아들애에 대해서만은 너무도 세심히 참견하는 남편… 남편의 그런 눈먼사랑이 아들애의 버릇을 궂힐가봐 속으로 걱정하고있는 은경이였다.
하지만 남편에게 그것을 내놓고 말한적은 없었다. 어째서인지 남편앞에서만은 단 한번도 지청구를 하지 않았고 애써 목소리를 낮추었었다. 그런 최은경을 두고 남들은 정말 모를 일이라고, 그렇듯 호기롭던 돌격대녀성중대장이 결혼한 다음 마음여린 자기 남편앞에서 그리도 공손해진게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수군거리군 했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최은경 자기는 남편의 그 탐구의 열정과 학구적인 자세 그리고 신비의 과학세계를 알게 되면서 그를 더 아껴주기 위해 애썼을뿐… 그것은 단순한 애정이기 전에 간절한 희망이였고 헌신이였다.
아들애가 또 뒤척이며 이불을 차던지였다. 몸을 일으켜 이불을 바로 덮어주려던 은경은 돌연 입술을 깨물며 허리를 부여잡았다. 아!-한순간 온몸을 휩쓰는 무서운 동통…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새여나왔다. 눈앞이 아찔했다. 쓰러지면 안된다. 참자, 참고견디여야 해!…
잠시후 등골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그는 허리에서 손을 내리웠다. 회오리바람처럼 급작스레 들이닥쳤다가 다시 급작스레 사라지는 허리아픔… 돌격대중대장을 하던 때에 상했던 허리였다. 그때는 별일 없던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질줄이야…
제1병원의 나이 지숙한 의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었다.
《이건 변형성척주증이요. 좌골신경통이나 여러가지 증상이 나타날수 있는데… 심해지면 완쾌되기 어렵소.》
《그러니… 불치의 병이라는겁니까?》
《꼭 그렇다고 볼수는 없지만 척추액이 신경을 압박하면 전신마비가 올수 있소. 일생 다른 사람의 간호를 받을수도 있구.》
의사는 그에게 안정하는것이 좋겠다면서 온천치료를 권고하였었다. 은경은 머리를 저었다. 가정주부가 어떻게 몇달씩이나 집을 비우고 떠난단 말인가. 더구나 지금은 기사장이 된 남편에게 안해가 더없이 필요한 때이다. 은경이 자기가 없이 남편이 기사장일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허나 다음순간 무서운 생각이 그의 뇌리를 때렸다. 만약 전신마비가 온다면? 그럼… 그렇게 되면 큰 공장의 기사장이 된 남편이 그의 시중을 들어야 하지 않는가!… 지금껏 남편의 일이 잘되기만을 바라며 모든 고생을 달게 여겨온 그가 남편의 어깨에 무거운 짐이 되고 발목을 잡게 된다면?…
은경은 며칠동안 자기의 얼굴이 몰라보게 축가는것도 알지 못했다. 고민과 동요, 괴로움과 아픔에 두눈이 빛을 잃고 흐려지고있었다. 남편과 아이가 있는 그에게 있어서 이 세상 가장 귀중한것은 가정이였다. 이제 겨우 다섯살잡이 정국이와 어린애같이 돌봐주지 않으면 안되는 남편이였다. 이 가정을 위해서, 이 귀중한 사랑의 보금자리를 위해서 은경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비로소 은경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게 되는것 같았다. 안해로서, 어머니로서 자기가 할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마음속 결심은 점차 날이 지날수록 더 굳어져갔다. 그만큼 아픔과 괴로움도 더욱 커갔다. 하지만 돌격대중대장시절부터 단련된 그의 의지는 끝내 그 모든것을 이겨내게 했었다.
다음날부터 은경은 말없이 집안의 구석구석을 들추어내기 시작했다. 먼저 창고구석에 넣어두었던 세멘트를 찾아내여 귀떨어진 출입문벽을 미장한 다음 당반에 올려놓았던 늄가마며 남비를 끌어내려 윤기나게 닦아내고 이불이며 옷가지들을 빨아 말리웠다. 다림질까지 한 남편과 아이의 옷가지들을 장에 차곡차곡 넣어두고 방안청소까지 말끔히 하고나니 어느새 열흘이 지나갔었다. 오늘은 병원에 입원하고있는 석우진국장에게까지 갔다왔으니 계획한 일은 다 끝낸셈이였다.
《짜르릉!-》
별안간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란 은경은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새벽 5시였다. 그런데 이처럼 이른새벽에 누가 전화를 걸어온단 말인가? 혹시… 얼른 송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
《나요.》
짐작한대로 남편이였다. 헌데 어째선지 성이 난 목소리였다.
《아니, 이 새벽에 무슨 일이예요?》
《방금 기억기에 자료들을 떴는데 뚜껑이 없어졌단 말이요! 그걸 가지구 빨리 현장에 나가봐야겠는데…》
《아이, 어쩌나?…》
은경은 안타까와하는 남편의 얼굴이 눈에 보이는듯 했다. 이 시간이면 늘 집에서나 사무실에서 콤퓨터를 켜고 기술자료를 보군 하는 남편이였다. 은경은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저, 콤퓨터옆에랑 밑에랑 다 찾아봤어요?》
《봤다니까, 바닥은 물론 암만해도 들어갈수 없는 책갈피까지 다 들춰보았단 말이요! 그럴리 없겠지만 문밖에 있는 복도에까지 나가보구…》 그는 화를 냈다. 《그렇다구 이 방에 들어왔던 경비원아바이가 가져갔겠소? 그런덴 관심도 없는 아바이인데…》
은경은 혼자 웃었다. 뚜껑이 없다고 기억기의 자료가 없어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리고 자기가 어데 놓고도 찾지 못하는 물건을 멀리 있는 집사람이 어떻게 알수 있단 말인가.
《그럼 어디 갔을가요? 제발로 달아나는것두 아닌데… 참, 당신 그걸 혹시 기억기와 함께 쥐고있는게 아니예요?》
《뭐, 기억기와 함께?…》
은경은 전화상이라는것도 잊고 고개를 끄덕이였다. 다음순간 수화기로 어린애같은 환성이 흘러나왔다.
《아, 그렇구만! 그게 기억기에 그냥 끼워있는걸 가지구… 인젠 됐소. 그만하기요!》
절컥! 하는 소리… 은경은 맥없이 송수화기를 제자리에 놓았다. 언제보나 늘 안해에게 의탁하는데 습관된 남편, 이런 사람을 두고 정녕 멀리로 사라져가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하는것이 정녕 사랑하는 남편과 가정을 위한 일이란 말인가?…
은경은 저도 모르게 잠든 아들애를 꼭 끌어안았다. 모진 아픔에 가슴이 저려났다. 이제 얼마후이면 그는 어머니로서 그리고 안해로서 귀중한 이 모든것을 다 잃게 될수도 있는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