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2 회)
제 2 장
마중가는 사람
4
이날따라 기사장 림성하는 속이 편치 않았다. 현장을 돌아보고 밤이 퍼그나 깊어서야 사무실에 들어선 그는 잠시 방안을 빙 둘러보며 자기 자리에 앉을념을 하지 못했다.
아직도 남의 방처럼 느껴지는 방, 량수책상우의 전화기가 갑자기 따르릉거리고있다. 누굴 찾고있는가? 분명 나를, 이 림성하를 찾는것인가?…
천천히 손을 내밀어 송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받습니다.》
《여보시오, 기사장동무요?》
쩡쩡 울리는 목소리, 틀지고 권위있는 간부풍의 엄엄한 목소리이다.
《예, 제 기사장입니다.》
《아, 기사장동무. 헌데 목소리가 왜 그렇소?》
《제 목소리가 뭐… 어떻습니까?》
《가만, 가만…》 저쪽에서 급해하는것이 알렸다. 《거긴 뉘기요? 홍진수기사장이 맞긴 맞소?》
《저… 전 림성하라고 합니다.》
《뭐?… 그러니 홍기사장이 집에 들어갔다던 말이 사실이였구만. 아, 이거 안됐소. 내가 그만…》
저쪽은 말끝도 맺지 않고 급히 전화를 끊었다.
림성하는 송수화기를 놓고 무너지듯 털썩 자리에 앉았다. 비로소 오늘 두끼씩이나 건넸다는 생각이 났다. 몹시 시장기를 느꼈지만 별로 먹고싶은 생각도 없다.
그는 눈을 감고있다가 전화기를 끄당기였다. 송수화기를 들었으나 잠시 망설이지 않을수 없었다.
지금 그는 당과류직장에 전개한 특산물생산공정때문에 속을 앓고있다. 현장에 올망졸망하게 놓은 설비들, 아오먼의 기업가 쑤치오에게서 납입해들인 그것들은 비록 단능설비이고 손로동이 많긴 했어도 원래 있던 공장의 낡은 설비들에 비하면 모두 번쩍거리는 식료기계들이였다.
하지만… 그는 또 꺼지게 한숨을 쉬였다. 이전에는 하루 몇십톤의 당과류를 생산하던 덩지 큰 직장의 생산량과는 대비조차 안되는 작은 규모의 특산물생산공정을 꾸려놓고 이렇게 해서나마 공장을 살리자는것이 그들의 생각이였다. 그런데 막상 보이라까지 살리고 생산에 진입한 오늘 그 아오먼의 기업가 쑤치오가 왼새끼를 꼬기 시작했다. 드롭프스설비의 일부 조종프로그람을 공장에 넘겨주지 않은것이다. 설비를 운영하자면 외국어로 되여있는 조작판대면부를 조선어로 바꾸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프로그람을 수정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수정보충하지 못하도록 프로그람내부에 암호를 걸어놓았던것이다. 쑤치오는 그 암호에 엄청난 값을 부르면서 자기 기업이 사들인 효소물엿을 비싼 값으로 평양곡산공장이 장기간 수입해야 한다는 조건부까지 내대고있었다.
림성하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턱을 고이고 한숨을 내쉬였다. 그러니 지금껏 커다란 기대를 걸고있던 드롭프스설비운영은 한갖 꿈에 불과하단 말인가?…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구에게 전화를 걸고 누구와 어떻게 상의해야 하는가? 전 기사장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가?…
그때 전화종소리가 또 울렸다. 이 깊은 밤에 누가 기사장을 찾는단 말인가. 현장에서?… 아니, 이번에도 전 기사장을 찾는 전화일지 모른다.
그는 마지못해 송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받습니다.》
《여보시오, 기사장동무요?》
아까와 같이 쩡쩡 울리는 엄엄한 목소리이다.
림성하는 속이 좋지 않았으므로 조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기사장입니다.》
《아니, 기사장동무가 맞긴 맞소?》
《예, 제가…》
《헌데 목소리가 왜 그렇소?》
《목소리요?》
그는 뜨아하여 송수화기를 들여다보기까지 했다. 오늘은 어떻게 된 셈판인가? 모든 사람들이 꼭같은 하나의 프로그람에 따라 전화하기로 약속이라도 했단 말인가?…
《여보시오. 아, 여보시오!》
저쪽의 어성이 더 높아졌다. 그도 조금 어성을 높이지 않을수 없었다.
《예, 무슨 일인지 어서 말씀하시오.》
《여보, 기사장. 아니, 성하동무! 동무 정말 내가 누군지 모르겠소?》
순간 림성하는 저으기 긴장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저… 누구신지?…》
《하- 이거 세상에 드문 수재라구 소문났던 림성하가 오늘은 어떻게 된 일이요, 응?! 나 거기 있던 김윤걸이요, 김윤걸이란 말이요!》
《예?!》
비로소 그는 상대의 목소리가 몹시 귀에 익다는것을 느꼈다. 김윤걸?!… 얼마전까지 곡산공장에서 생산부기사장을 하다가 웃단위인 식료련합의 부기사장으로 간 사람이다. 보통키에 어깨가 쩍 바라진, 한눈에 보기에도 틀지고 위엄있고 자존심이 매우 강한 사나이다.
《하!- 여보, 기사장.》그가 소리내여 웃으며 말했다. 《동무 지금 쑤치오인지 뭔지 하는 아오먼기업가때문에 얼이 나간게 아니요?》
《아니, 그걸… 어떻게 다 압니까?》
《왜 모르겠소. 내 아까 시당에 갔다가 당비서동물 만나서 얘길 다 들었소. 오늘 밤 쑤치오와 면담한다는것도 말이요.》
《그럼 우리 비서동지가…》
《그렇소. 지배인동무가 석탄문제때문에 출장을 나간새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구 하더구만. 그러면서 아직 외국인들과의 사업경험이 없는 기사장동무가 혼자서 속을 썩이구있는데 좀 도와줄 방도가 없겠는가구 하지 않겠소.》
《예- 그랬댔군요.》
《내 그래서 우정 시간을 내여 여기 와있소.》
림성하는 놀랐다.
《아니, 공장에요?》
《그럼, 지금 당과류직장에 있소.》
그제서야 김윤걸의 손전화기에서 들려오는 현장의 잡다한 소음들이 분간되였다.
《참 미안합니다. 우리 공장때문에…》
《어쩌겠소. 한경수지배인이 그 쑤치오와 거래할 때 나도 좀 관여했댔으니 같이 걸린 문제를 푸는게 옳지, 안 그렇소?》
《고맙습니다.》
《무슨 소릴. 빨리 여기로 오우. 우리 같이 쑤치오와 담판해보기요.》
…티베트족출신인 아오먼의 쑤치오는 이제 30대 중반에 이른 젊고 지혜로운 신흥기업가이다. 개인자산으로 보면 세계적인 1류급기업가들과 대비도 되지 않지만 타산이 밝고 엄격하다 할만치 절약정신이 강하며 다문 얼마간의 리윤이라도 내다보면 극단적인 모험까지 주저하지 않는것으로 하여 단 몇해어간에 기업을 번창하게 하고있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다. 그만큼 자존심도 강하였다.
가까운 양각도호텔에 들어있다는 쑤치오는 인차 나타나지 않았다.
밤에 면담을 조직했다고 전화로 증을 내더라고 한다.
김윤걸이 통역에게 소리쳤다.
《우린 뭐 할일이 없어 여기 와있는줄 아오? 당장 그에게 말해주오. 이제 10분내로 나오지 않으면 우린 앞으로 면담요구를 다 거절하겠다고 말이요.》
언제 보나 김윤걸은 자신만만한 사람이다. 림성하에게는 그것이 제일 부러웠다. 일부 사람들은 그를 두고 눈찌가 곱지 않다느니, 좀 거만하다느니 하며 뒤소리도 없지 않지만 그것이 무슨 대수이랴? 그가 일을 제끼는것이 제일 중요하지 않겠는가!…
드디여 쑤치오가 나타났다. 그는 크지 않은 몸에 두툼한 털솜옷을 껴입고 커다란 가죽신발에 눈이 보이지 않을 지경으로 털모자까지 푹 눌러쓰고있었다. 자기가 프로그람암호의 가격을 올린것때문에 공장에서 폭풍같은 반발이 일리라는것을 예견하고 나온것 같다. 돌발적인 시위자들의 거센 흐름에 대비하기 위해 미리 방탄복과 방탄모까지 갖추고 나온 중무장한 경찰을 련상케 하는 모습이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김선생!》
쑤치오는 자기가 맞다들 면담자가 다름아닌 안면있는 식료련합의 부기사장 김윤걸이라는것을 알아보자 반갑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김윤걸은 웃지 않았다. 례절을 차려 악수를 하고나서 실무적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쑤치오선생, 선생은 지금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신용을 잃고있습니다.》
함께 나온 통역이 그의 말을 옮겼다.
《아, 그 프로그람때문에 말입니까?…》 쑤치오는 뜻밖에도 소리없이 웃고있었다. 《그렇다면 내 김선생께 한가지 상기시켜드릴가 합니다. 기억나시겠지만 우린 그 설비를 계약할 때 기계설비들만 명세에 밝혔을뿐 원천프로그람까지 넘겨준다는 계약은 하지 않았습니다. 김선생, 그 계약문건을 다시 보여드릴가요?》
《아니, 그럴 필욘 없습니다.》
《그러니 인정하신단 말씀입니까?》
《예, 인정합니다.》
김윤걸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렇다면 왜 이 밤중에 급히 면담을…》
쑤치오는 김윤걸이 아니라 말없이 옆에 서있는 림성하를 쳐다보았다. 통역이 김윤걸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선생의 그 기계설비들이 우리한텐 더이상 필요없을것 같아 그럽니다.》
《아니, 뭐라구요? 김선생, 이자 뭐라구 했지요?》
김윤걸이 히쭉 웃었다.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열쇠가 없어 들어가지 못하는 집이 필요할가요?》
《아, 알만 합니다. 하지만…》 쑤치오가 차츰 열을 내기 시작했다. 《그 프로그람은 최첨단과학기술의 산물로서 그것을 개발하는데 든 자금만 해도 엄청난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그 원천프로그람에 돈을 지불할 리유가 있고 우린 반대로 그걸 당신들한테 공짜로 넘겨줄 리유가 없습니다. 그렇기때문에 난 이 문제에 대해서 귀공장의 실권이 있는 주인들과만 말해볼 생각입니다.》
김윤걸이 쾌히 동의했다.
《쑤치오선생, 그럼 우리 공장의 실권있는 주인과 직접 말해보십시오. 여기 서있는 이분이 새로 공장기사장으로 임명된 림성하선생입니다.》
림성하가 그를 향해 말없이 눈인사를 하자 그는 결이 난듯 손을 홱 내저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난 나와 직접 계약을 한 사람들과만 상대합니다.》
비로소 림성하는 자기가 입을 열 때가 왔다는것을 느꼈다. 자신만만한 김윤걸로 하여 어언 배짱이 생긴 그였으므로 쑤치오를 면바로 눈여겨보며 마디마디를 또박또박 찍어가며 말했다.
《당신과 계약을 한건 어떤 일개인이 아니라 국영기업인 우리 평양곡산공장입니다. 이걸 잊지 마십시오.》
그것은 미리 준비해둔 말이 아니였다. 부지불식간에 머리에 떠오른 말이였다.
《그건… 옳습니다. 그렇지만 계약문건에 수표를 한건…》
쑤치오가 당황하여 말을 떠듬거렸다. 눈두덩우에 눌러썼던 털모자를 조금 들어올리기까지 했다. 마침 림성하가 때를 놓칠세라 제때에 한마디 더 오금을 박았다.
《때문에 선생은 어떤 개인과의 약속이 아니라 존엄높은 우리 공화국과의 약속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알고 우리와 성실하게 거래해야 합니다.》
《옳습니다. 응당 그래야지요, 예.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모든것을 귀국의 법적절차대로만 해오지 않았습니까.》
당황해하는 그를 여겨보고있던 김윤걸이 도리머리를 저었다.
《법적절차대로라?… 아니, 선생은 지금 가장 중요한 신용을 지키지 않고있습니다. 따라서 우린 필요에 따라 계약을 파기할수도 있다는것을…》
그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두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통역이 말을 채 번지기도 전에 쑤치오의 두눈에서 불빛이 펀뜩하는것을 알아보았던것이다. 김윤걸이 입술을 깨물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한번 내뱉은 말은 쏟드린 물과 같이 다시 주어담을수 없는것이다.
쑤치오가 모자를 벗어들었다. 수세에 몰리던 그가 때를 만났다고 본것 같다. 대뜸 싸늘해진 눈빛으로 그들 두사람을 휘둘러보며 쑤치오는 버럭 성을 내였다.
《당신들은 지금 나를 위협하고있습니다. 이것은 귀국의 무역법에도 명백히 위반되는것입니다. 당신들은 이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게 될것입니다.》
말을 마치자 쑤치오는 털외투의 깃을 올리고 벗어들었던 모자도 다시 눌러썼다. 기세가 등등했다. 그야말로 전혀 뜻하지 않던 일이였다.
김윤걸도 그가 이렇듯 단숨에 사태를 뒤집어놓으리라고는 예견치 못했으므로 입을 벌린채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있었다.
《두고봅시다.》
쑤치오는 이 한마디를 내뱉고나서 홱 돌따서더니 승용차가 대기하고있는 직장정문쪽으로 곧추 걸어나갔다. 현장에서 조립작업을 하던 로동자들이 모두 일시에 이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런줄도 모르고 림성하는 물론 늘 자신만만하던 김윤걸이까지 쑤치오의 뒤모습만 멀거니 바라볼뿐이였다.
잠시후 차가 부릉거리며 떠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일두 참!》 김윤걸이 투덜거렸다. 《기사장을 돕는다는게 오히려 일을 그르친것 같군.》
림성하는 말을 못했다. 할말이 없었다. 1급기업소 기사장의 직책이 얼마나 힘든것인가를 다시금 절감하게 된 하나의 계기였다고 할가…
김윤걸이 그를 위안하듯 또 말했다.
《어쩌겠소. 우에다가 벌어진 일을 미리 말해두는게 좋지 않겠소? 일이 시끄럽게 번져질수도 있으니 말이요.》
림성하가 아무말없이 반쯤 눈을 감고있는것을 바라보며 김윤걸이 또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할건 없소. 우리가 그따위 장사군한테 얼리워넘어가 나라의 돈을 엄청나게 떼울수야 없지 않소, 응?!》
차츰 눈시울이 무겁게 내리드리우는것을 느낀다. 삽시에 지금껏 쌓이고쌓인 모든 피로가 단번에 몰려드는듯 했다.
《그럼 난 가겠소.》
김윤걸이 하는 말이다. 이번에도 그는 겨우 머리만 끄덕이였다. 눈이 내려감기는것을 참으며 가까스로 입술을 놀렸다.
《안됐습니다, 우정 이렇게 찾아왔는데…》
《무슨 소릴… 참, 이럴 때 석우진국장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 량반 같으면 쑤치오인지 뭔지 하는 사람을 우리보다 더 호되게 다불러댔을지 몰라. 그렇지 않소, 기사장?》
《…》
여전히 림성하는 입을 다물고있었다. 석국장은 지금 병원에 있다. 수술후의 안정치료때문에 까딱 움직이지 못한다고 한다. 안해인 최은경도 벌써 몇번이나 그에게 면회를 갔다왔었다. 차도는 있는지?… 하긴 심장수술을 이겨낸것만도 기적인것이다. 헌데 김윤걸은 뭐라 했더라? 그가 있었으면 어떻게 한다구?…
김윤걸을 바래준 그는 비칠거리며 자기 방으로 향했다. 두눈은 이미 무겁게 감겨지고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