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 회)
제 1 장
꿈은 누구에게나 있다
4
눈이 내리면 사람들의 마음은 그 눈송이들처럼 산뜻하고 부드러워진다고 한다.
궤도전차에서 내린 송해연은 오가는 사람들속을 헤치며 바삐 걸어갔다. 하얀 눈송이들이 머리우에, 어깨우에, 지어 가는 눈섭우에까지 떨어져내렸다. 눈이 내리면 제일 좋아하는것이 아이들과 한창나이 처녀들이라고 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왜 아이들과 처녀들뿐이겠는가? 늙은이들도 저렇게 즐거워하지 않는가? …
진정 뜻깊은 날에 내리는 눈송이들이다. 오늘 11월 25일은 바로 송해연의 할아버지, 흔히 《황금태박사》라고 하는 송수만할아버지의 생일 85돐인것이다. 손녀인 해연이를 제일 끔찍이 사랑하는 할아버지는 그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다 지지하고 찬성해주군 한다. 전번에 송해연이 공장에서 나갈 때만도 그랬다. 곡산공장의 공업시험소 시험기사였던 송해연이 웃단위인 식료연구소에로 옮겨갈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난했지만 할아버지만은 손녀를 리해해주었었다. 리해만 한것이 아니라 많이 배우라고 그의 등을 떠밀어주기까지 했었다.
송해연은 이런 할아버지를 늘 자랑스럽게 여기고있었다. 그래서 연구사업으로 먼 지방에 나가있었지만 그 누구보다 먼저 할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하러 달려온 송해연이다. 그런데 전화로 알아보니 할아버지가 생일을 맞는 오늘도 공장에 나가계신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생 공장과 인연을 맺고 살아오신 할아버지가 아닌가.
해연은 마주오는 사람들모두가 자기에게 흘끔흘끔 곁눈질하는것도 모른척 하고 걸음만을 다우쳤다. 인제는 그런데 습관되여버렸다. 자기의 무엇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지 그는 도무지 알길이 없었다. 오목눈에 남들보다 더 예쁘장한것도 아닌데?… 까짓거, 누가 뭐라든 그런건 알고싶지도 않다. 해연이는 오연히 머리를 쳐들고 곧추 앞만 바라보며 걸어갔다. 시간이 급했다. 할아버지의 85돐생일, 이 뜻깊은 생일에 하나밖에 없는 귀염둥이손녀가 늦어지면 되겠는가!…
그는 량손에 커다란 비닐구럭을 들고있었다. 구럭속에는 모가지가 긴 병들도 있고 울긋불긋한 상표가 붙은 통졸임통들도 들어있었다. 꽤나 무거운 짐이였다. 한숨 돌리지 않고는 더 걸을수 없을것 같다.
무진천을 가로지른 다리에 이르렀을 때였다. 뒤따르던 청년들이 시까슬렀다.
《처녀동무, 우리가 좀 도와드릴가요?》
해연은 못 들은척 했다.
《처녀동무, 그걸 이리 주시오. 내가 들어다주지요.》
《여, 동문 좀 빗서라. 이 처녀동문 내가 도와주길 바란단 말야.》
《허, 이 친구 렴치두!… 동무야 이미 오작교에서 하늘의 선녀를 만나지 않았나.》
《하, 그러니 약혼한 사람은 안된다는건가?!…》
《그렇잖구, 동무는 안돼.》 이렇게 말한것은 좀더 무게있고 굵직한 목소리였다.
《여 경남이, 동무가 저 처녀동무의 짐을 들어다주라구.》
《옛, 알았습니다, 기사동지!》
유쾌한 웃음이 터졌다. 아마 그 총각이 기사라는 젊은이에게 거수경례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연은 은근히 분기가 치밀어오르는것을 느꼈다. 알지도 못하는 처녀들에게 시까스르는 청년들을 올곧지 않게 보아오는 그였던것이다.
홱 돌아섰다.
《뭐예요?》
별안간 웃고 떠들던 청년들이 입을 다물고 멎어섰다. 뜻밖의 일이였다. 언땅에 못이라도 박아넣듯 때깍때깍 구두발소리를 울리던 처녀가 싸늘한 눈초리로 마주보고있는것이다.
《동무들은 어디서 일하는 누구들이예요?》
《아니, 저…》
한 청년이 말을 얼버무렸다. 마주선 처녀가 너무나 도고해보여서인지 다들 우물쭈물했다.
해연이 눈꼬리를 치떴다.
《그럼 내가 알아맞춰보라요?》
《예?-》
해연은 청년들의 차림새를 재빨리 눈여겨보는척 했다.
《동무들은 곡산공장에 있구만요. 맞지요?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참, 동무한테선 아류산수 비슷한 냄새가 나는데… 그건 가공직장에 있다는걸 말해주는거구… 지금 야간교대에 나가는 길이지요? 아니, 왜 놀라세요?…》
《아니, 저…》
《그담 동무, 동문 물엿직장이지요? 그 염산방울이 떨어진 옷자락만 봐도 다 알아요!》
《아, 맞아요. 물엿직장…》
《보세요. 그럼 동무도 알아맞출가요?》
청년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거의나 선망에 가까운 눈길로 해연이를 쳐다보고있었다. 그들의 조금 뒤쪽에 서있던 허우대 큰 청년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처녀동무, 나도 어데서 무슨 일을 하는지 한번 알아맞춰보시오.》
《음, 동문… 제대군인, 아니 제대군관이구만요. 맞지요?》
《그건 맞소. 그리구?》
《그리구 동문 보나마나 열관리직장 아니, 물엿직장의 공정기사같애요. 어때요, 맞지요?》
허우대 큰 젊은이의 두눈도 휘둥그래졌다. 정말 허수히 볼 처녀가 아닌것이다.
《아니, 그런걸 어떻게 다 아오?》
《내가 누군지 아세요?》 송해연은 허우대가 큰 그 청년에게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시인민보안국에서 일을 보는 사람이예요, 책임수사원!》
청년들의 눈이 더 커졌다. 입을 쩍 벌린채 서로 마주보고있는것이 무슨 도깨비에라도 홀리지 않았는가 하는 표정이였다. 그게 과연 정말인가? 이 처녀가 우릴 놀리는건 아닌가?…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반탐영화의 한 장면에 우연히 끼여든것 같은 착각에 머리가 뻥해져있었다.
《그럼 동무들, 안녕히!》
해연은 가던 걸음을 계속했다. 입을 하!- 벌리고 굳어진 청년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곧추 걸어가면서 그는 혼자 몰래 웃었다. 아까부터 뒤따라오는 청년들이 주고받는 말을 귀동냥해듣고있던 해연이였다. 그들이 하는 말에서 곡산공장청년들이라는것을 알고 부쩍 호기심이 동해있던 참이였다.
뒤쪽의 청년들중 누군가 투덜거렸다.
《아니, 공정기사동지, 이거 생각해보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만요.》
《왜?》
《아니, 저 처녀가 도대체 뭐라구… 하, 글쎄 오목눈을 해가지구 원.》
《오목눈이 뭐 어쨌다는건가?》
《아, 자길 도와주겠다는데 뭐라구 했어요. 아니, 저렇게 건방지게 노는걸 그래, 가만놔두어야 합니까?》
묵직한 목소리가 그에 대답했다.
《건방지다니?! 얼마나 매력있는 처녀요. 아주 영민하구 재치있구 또 자존심도 있구. 내가 영화연출가라면 당장 저 처녀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뽑아가겠소.》
《아니, 영화배우요?》
《그것 참 멋있구만요. 공정기사동지, 당장 예술영화촬영소에 전화를 걸어줍시다. 예?》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해연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어떤 영문인지 저도 모르게 뒤돌아보지 않을수 없었다. 아닐세라… 좀전에 한마디 점잖게 묻던 키가 훤칠하고 눈매가 부리부리한 청년이 미소를 머금고 그를 마주보고있었다. 씩씩한 거동은 물론이고 어딘가 모르게 풍겨오는 군인다운 기품으로 보아 제대군관이라고 단정했던 그 청년이다. 그쪽에서 해연이를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한순간의 일이였다. 해연은 다시한번 흥!- 하고 코김을 내불며 돌따섰다. 제대군관에 공정기사이고 또 미끈한 청년이라는거지?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는거야? 아니, 너무 자신만만해. 자기가 제일인것처럼!… 해연은 마치 그 청년이 자기를 모욕이라도 한것처럼 숨을 씩씩거리며 걸어갔다.
처녀는 다시 량손에 들고있는 구럭을 서로 바꾸어쥐느라고 주춤거렸다. 그 두 구럭을 합치면 자기 몸무게보다 더 많이 나갈 정도였다. 어깨가 뻐근하고 두손바닥도 얼얼해났다.
마침 그는 고속으로 달려오던 승용차가 자기곁에 멎어서는것도 알지 못했다. 누군가 그를 찾는듯 했다.
누가 나를 찾는가?… 해연은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 눈길이 마주치는 공정기사, 이것도 우연인가? 또 그와 눈길이 마주치는것은?… 아니다. 그 청년은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들속엔 그를 부른 사람이 없었다.
《해연아!-》
다시 울리는 목소리, 비로소 해연은 저 앞쪽에서 승용차의 문짝을 열고있는 사람을 알아보았다.
《아이 당비서동지, 안녕하십니까!》
급히 그에게로 달음질쳐갔다. 무거운 구럭때문에 걸음이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차문을 열고 몸을 쑥 내밀고있던 평양곡산공장 당비서 정주선이 처녀가 들고있는 커다란 비닐구럭에 눈길을 주었다.
《우리 공장에 오는 길이지? 헌데 무슨 짐이 그리 많아?》
송해연이 긴 속눈섭을 치떴다.
《어마나, 비서동진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릅니까?》
《왜 모르겠나!》
정주선이 차에서 내리더니 해연이의 어깨우에 쌓인 눈을 털어주었다.
《오늘은 해연이 할아버지의 생일!… 헌데 귀여운 손녀 송해연이보다 우리 공장로동계급의 마음이 먼저 왔다는건 아직 모르구있겠지?》
《아니,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공장에서 우리 송박사에게 여든다섯돐생일상을 차렸어.》
《아니, 공장에서요?!》
《빨리 가보라구, 지금 물엿직장에 계셔.》
《아이, 정말!…》 너무도 기뻐 송해연이 두발을 동동 구르며 부르짖었다. 《난 그런것두 모르구, 그런줄 알았으면 좀더 빨리 올걸.》
당비서가 함께 타고가던 옆사람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이보, 아무래도 동무가 저 해연일 좀 도와야겠소. 내 식료련합에 들렸다 인차 갈테니!》
《예, 알겠습니다.》
차안에서 누군가 반대쪽문을 열고 나왔다. 두툼한 솜옷을 껴입고 눈있는데까지 털모자를 푹 눌러쓴 사람이였다.
해연이의 두눈이 싸늘해졌다.
《아니, 소장동지가?!…》
공업시험소장 림성하, 녀자처럼 곱살하게 생긴 얌전데기이지만 고집불통인데다가 자기를 배워준 할아버지까지 배반했다는 말이 돌고있는 사람…
그가 차에서 내리자바람으로 해연이의 구럭을 잡아당겼다.
《어이구, 꽤나 무겁군.》
《됐어요.》
해연이가 그를 뿌리쳤다.
《그 약한 몸으로 누굴 돕는다고 그러세요?》
《아니, 뭐라구?》
《비키세요,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어요! 나에겐…》
처녀가 뒤쪽에 서있는 사람들을 스쳐보며 한 말이였다. 림성하는 얼떠름해졌다. 마침 그들을 지켜보던 정주선당비서가 소리내여 웃으며 차문을 쾅 닫았다.
《자 그럼 해연이, 다시 만나자구.》
차가 떠나자 처녀는 걸음을 빨리 했다. 마치 림성하때문에 지체된 시간을 벌충이라도 하듯…
눈발이 더 굵어졌다. 림성하는 그 자리에 선채 추운듯 솜옷의 목깃을 올렸다. 그때 뒤쪽에서 좀 사이를 두고 멎어서있던 청년들이 그에게 달려와 저저마끔 물었다.
《소장동지, 아는 처녀입니까?》
《그래, 잘 알지.》
아까 맨먼저 퉁을 맞은 청년이 해연이 들으라는듯 좀더 큰소리로 투덜거렸다.
《근데 도대체 어디서 뭘하는 체넵니까. 완전히 쏘가리 한가지입니다. 자기가 뭐 시인민보안국에 있다나요!》
《하, 그래?!》
림성하는 어이가 없어 웃고말았다.
《오히려 거기서 주목하는 처녀인지도 모르지.》
《예?!…》
《도망병이니까.》
《아니, 도망병이라구요?!》
앞서가던 처녀도 그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처녀가 몸을 홱 돌리는데 차거운 눈길이 그들에게 얼음쪼각처럼 날아왔다. 처녀의 옥문입술사이로 신음소리처럼 새여나온 목소리…
《소장동지, 어디 다시한번 말해보세요.》
뒤따르던 청년들은 모두 그 자리에 굳어져버렸다. 갑자기 백지장같이 해쓱해진 저 처녀가 어떻게 나올것인지 걱정스러웠던것이다.
그러건말건 림성하는 처녀에게로 다가가 구럭 하나를 빼앗아들었다.
《해연이, 그렇게 쏘아보면 내가 뭐 무서워할줄 알구? 백번이라도 말할수 있소. 리기분자, 도망병!…》
《뭐라구요?!》
림성하는 처녀를 뒤에 남겨두고 성큼성큼 앞서걸었다. 파란빛이 서리는듯 한 처녀의 오목눈이 그의 뒤모습을 그냥 쏘아보고있었다. 입술을 깨물며 그 자리에 서있는 처녀, 해연은 까딱 움직이지 않았다. 뒤따르던 청년들이 그들을 지켜보며 머리를 기웃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