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회) 

 

24. 궁예는 왕위에 올라 마음이 변하고 고마는 떠나가다

 

경신년(900년).

견훤은 완산주(전주)를 수도로 정하고 후백제를 세워 그 왕이 되였다. 진성왕 6년(892년)에 벼슬을 버리고 군사를 일으킨지 8년이 되였다.

견훤은 나라의 관제를 제정하는 한편 동쪽 즉 신라 서울을 향하여 령역을 넓혀나갔다.

이 소식은 날개돋친듯 쏜살같이 빨리도 궁예에게 전해졌다.

궁예는 까만 턱수염을 내리쓸며 그 소식을 들었다. 그는 말이 없었다. 궁예의 측근들도 생각에 잠겨 궁예만 지켜보았다. 궁예의 마음속에 무엇이 일고있는지 누구도 몰랐다. 궁예는 이따금 눈시울을 쪼프리기만 할뿐 침묵을 지켰다.

궁예의 측근들은 고마에게 눈길을 돌렸다. 고마 역시 아무말없이 생각에 잠겨있었다.

한식경이 지난 뒤에 권능순이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장군! 장군께서도 보위에 오르시오이다.》

권능순의 말은 좌중에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였다.

궁예는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숭어가 뛰니 망둥어도 뛴다는건가?》

왕건이 일어났다.

《장군, 장군께서는 이미 보위에 오르셔야 하셨소이다. 이건 견훤이 왕이 되였다고 해서가 아니라 저는 다시한번 장군께서 임금이 되셔야 한다고 보오이다.》

궁예의 측근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였다.

궁예는 마음속 눈으로 고마를 지켜보고있었다. 고마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고있었다.

마침내 고마가 일어났다.

《장군, 어서 임금이 되시오이다. 그래서 우리들과 고구려를 바라는 겨레의 뜻을 모아주시오이다.》

고마의 말에 궁예는 야릇한 웃음을 거두었다. 그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있다가 자리에서 느릿이 일어났다.

《과례는 비례라 즉 지나친 례절은 례절이 아니라 했으니… 여러분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마다하지 못하겠군. 그러나 당장 그럴 필요는 없을것 같소.》

《래년 즉 신유년이 어떻소이까?》

고마의 말에 궁예는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게 좋겠소.》

권능순이 다시 벌떡 일어났다.

《이왕 임금이 되신다면 질질 끌게 있소이까. 소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당장 나라를 세우시오이다.》

왕건도 찬성했다.

《옳소이다. 준비는 이미 다 되지 않았소이까.》

궁예와 고마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웃음을 지었다.

두사람은 서로의 생각이 맞아 웃는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몰랐다.

신유란 해는 왜서인지 참위가들속에서 유별히 신기하게 여겨오는 해이다. 그래 그런지 궁예는 오래전부터 이 신유년에 임금의 자리에 오를것을 꿈꾸어왔었다. 낡은것을 쓸어버리고 새것을 만들어내는, 하늘의 명으로 나라의 혈통이 바뀌는것을 궁예는 바랬다. 즉 임금의 자리가 아니라 후세에도 영원할 그런 대업을 궁예는 념원하고있었던것이다.

왕건과 권능순이 임금이 되라고 재촉하는데도 선뜻 나서지 않은것은 어떤 겸손에서 나온것은 아니고 부하들의 뜻이 하나로 합쳐지지 않았기때문도 아니였다.

옳다고 믿는 관습은 이렇게 사람의 생각과 결심, 행동을 몰아간다. 누군들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행동하지 않으며 누군들 나서자란 그때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겠는가. 궁예는 큰꿈을 꾸고있었다.

한편 고마는 궁예의 생각을 얼핏 알아맞혔을뿐이지 궁예와 꼭같이 생각한건 아니였다. 나라를 세우고 임금을 정하는것이 필요하다고 생각은 하였지만 어쩐지 고마는 궁예가 임금이 되는것을 미루게 되였다. 고마는 당장은 고구려세력을 하나로 합치는것이 급하다고 보았다. 그것은 지경을 넓히는것이다. 아직도 궁예에게 복종하기를 원치 않는 호족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어서빨리 그들을 복종시켜야 하였다. 고마는 궁예에게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궁예도 그건 찬성했다. 복종하기를 원치 않는, 만만치 않은 세력들을 남겨놓고 나라를 세운대야 편안치 못하리라는것은 불보듯 뻔하였다.

어쨌든 신유년에 나라를 세우자는 뜻은 하나로 모아졌다.

왕건을 보내여 다시 광주, 충주, 당성, 괴양 등의 고을을 공격하여 평정하였다.

나라를 세우기 위한 일은 착착 진행되였다. 궁예와 측근들은 다 손발이 맞았다. 의논도 별로 궁예의 생각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국호문제에서는 조금 거스름이 일어났다. 별치않은 일같지만 어쨌든 그것은 앞으로 일이 더 크게 벌어질 징조이기도 하였다.

궁예는 군사일은 왕건에게, 신라방면의 일은 권능순에게 맡기고 고마에게는 관직설치와 아울러 국호를 짓도록 하였다.

임금의 즉위식은 팔관회때와 같이 하되 나라를 세우는것만큼 여느때와 조금 달리하도록 하였다. 임금의 즉위식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의 형식이였다. 이전부터 궁예는 후고구려의 임금으로 되여있었다.

국호를 정하는 날이였다.

고마는 나라이름을 어떻게 지었으면 좋겠는가 하는것을 가지고 왕건과 의논한적이 있었다. 그때 왕건은 고구려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고려》로 하자고 하였다. 왕건의 말은 고마의 마음에도 들었다.

《고려라고 하는것이 좋겠소이다.》

고마가 말했다.

《또 다른건 없소?》 하고 궁예가 물었다.

《없소이다.》

고마가 잘라말했다.

궁예는 약간 얼굴을 찡그렸다. 이미 궁예는 고마가 국호를 고려로 하자고 했을 때 조금 더 생각해보자, 몇가지 더 지어보자고 하였다.

그런데 고마는 그때 궁예의 의견을 들은둥마는둥한 꼴이였다.

제 주장만 내세우는가. 그것이 궁예에게는 언짢았다.

《국호를 고려라 하자는데 다들 어떻소?》

궁예가 물었다.

《고려란 고구려라는 뜻인데 좋은 이름이라고 보오이다.》

왕건이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궁예는 힐끔 왕건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이때껏 볼수 없던 불쾌한 빛이 얼핏 스쳐지나갔다. 언제 한번 왕건은 궁예의 뜻을 따르지 않은적이 없었다. 왕건으로서는 국호를 놓고도 궁예가 찬성한것으로 생각하고있었다. 그보다 왕건에게는 그 이름이 썩 좋았다. 그런데 궁예는 별로 달갑지 않은 모양이였다. 왕건은 자기가 너무 덤비지 않았나 하고 생각은 하면서도 국호가 마음에 들어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궁예와 왕건사이에 처음으로 마찰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은 누가 봐도 잘 알리지 않는것이였다. 서로 의견을 서슴없이 말하는것은 이전에 궁예와 그의 측근들사이에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그것때문에 서로 감정이 상하거나 싸우는 일은 없었다. 이때까지 궁예도 그걸 좋아하였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고마가 부득부득 국호를 고려라 한것에 대해 궁예는 딱 맞서 반대는 하지 않으면서도 속으로는 좋아하지 않았다. 한번 궁예가 다른 이름도 지어보라 했으면 그저 겉치레라도 몇개 주어 섬겨볼것이지 그게 무슨 천자의 령이라고 딱 잘라 고집을 세운다.

이것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궁예의 의견을 무시하는것이라고 궁예는 생각하였다. 이전에도 그런 일이 없지 않았고 그때에는 궁예가 고마의 생각을 쉽게 따랐는데 이번에는 좀 다르다.

세월이 흐르면 어차피 사람의 처지도 달라지고 처지가 달라지면 생각도 달라지기마련이다. 그리고 사람은 언제나 제 생각으로 남을 보며 늘 자기가 옳다고 여기기 쉽다.

궁예는 고마가 답답하게 보였다. 게다가 이전에는 그렇게도 자기를 잘 따라주며 가려운데란 가려운데는 빡빡 긁어주던 왕건이 쫄딱 나서서 《옳소!》 하니 더욱 고마가 밉고 왕건이 멀어지는듯 하였다.

《뭘 안다고 젊은 아이가…》 하고 궁예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궁예는 애써 그런 내색을 감추었다.

권능순은 눈을 내리깔고있었지만 이런 궁예의 속을 손금보듯 살피였다.

권능순은 일어났다.

《고려라는게 좋긴 한데…》

권능순이 말꼭지를 떼자 궁예는 기다렸다는듯 그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래서? 어서 말하오.》

궁예는 조금 덤비며 재촉했다.

《새로운 맛이 없소이다. 이전에 고구려가 있었고 또 고구려가 망한 뒤에 발해 후국에 고려국이 또 있었는데 이제 나라이름을 고려라 하면 어딘가 낡은 이름을 듣는것 같소이다. 관직을 설치함에도 신라와 다르게 한것이 많은데 이왕이면 국호도…》

《내 생각도 바로 그래서 그런거야. 이왕 새 나라를 세우면서 하필 옛날것을 따를게 있소? 글쎄 넋은 그래도 잇는다쳐도 이름이야 다를수 있지 않나? 이건 태여난 손자이름을 할애비이름으로 부르는것 같아서… 발해를 세울 때도 그랬지. 고구려를 이은 나라라 하지만 나라이름은 그렇게 짓지 않았거던. 이건 새롭게 시작하려는 투지가 있기때문이 아닌가. 응?》

궁예는 조금 여유를 가지고 허허 웃어보이였다.

일이 그쯤되자 생각지도 않던 의견들이 나왔다.

외교관계에서도 문제가 있다. 당나라가 국호를 두고 좋아하지 않을것이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늘 고구려를 위험하게 보아오기때문이다.

발해와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대외적으로도 고구려계승국이라고 당당히 자부하는 발해가 또 다른 고려가 나온다면 어떻게 나올것인가.

후백제의 견훤도 마찬가지다. 백제는 력대로 고구려의 속국 내지는 동생의 나라였는데 견훤이 고려를 좋아하겠는가.

불필요하게 국호를 가지고 이웃나라와 관계를 상하게 하는것은 삼가해야 한다.

어처구니없는 론거이지만 그렇다고 정 무시해버릴것도 못되였다.

나라이름은 별로 크지 않은듯 하나 실제로는 큰 문제였다.

고마는 이미 그런 생각들을 다 해보았다. 그러나 앞으로를 위해서 국호를 고려라 하는것보다 더 좋은것은 없었다. 이웃나라와의 관계는 둘째다. 뭐니뭐니해도 아낙이다. 제 몸이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말 즉 제 몸부터 수양하고 집을 구제하며 제 나라부터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아직도 반란과 질시와 의심이 잦아들지 않고있는 때에 무력 하나만으로 몰아붙이기에는 힘에 부치다. 이런 때에 사람들을 하나로 묶자면 아무래도 고려라는 국호밖에 더 좋은것이 없다.

새로운 국호도 좋지만 그렇게 되면 겨우 뜻을 같이하기로 한 북쪽 평양지방의 사람들이 머리를 기웃거릴수 있다.

외교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당나라니, 발해니, 후백제니 하는 나라들이 국호에 대해서 신경을 쓸것은 뻔하지만 그 이웃나라들은 지금의 형편에서 언제 남의 나라일에 코를 들이밀 처지가 못된다.

결국 바깥을 보고 국호를 정하느냐, 아낙을 보고 정하느냐 하는 문제인데 어느쪽으로 보나 고려라는 국호가 제일 합당했다.

궁예로서는 거기까지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낙이요, 바깥이요 하는 셈보다 자기가 임금이 되는 나라이름이 이왕이면 더 새롭게, 더 멋지게 짓고싶었을뿐이요 그런 생각을 다들 따라주기만을 바랬을뿐이였다. 그렇다고 그런 주장을 내놓고 소리치게 되지는 않았다.

좋기는 권능순이 나서서 궁예의 속심을 시원하게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고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무리 궁예가 권능순의 주장에 맞장구를 쳐주어도 도무지 소리며 춤가락이 탐탁치 못하다. 그럴수밖에 없는것이 권능순은 단지 궁예의 눈치를 보아 해보는 소리지만 고마는 오래동안 이것저것 다 굴려보고 택한것이기때문이다. 고마는 국호에 대한 심중한 견해와 함께 이제 세울 나라, 그 나라가 발디딜 땅과 백성이 바라는바를 함께 모아 국호를 정했기때문에 왕건을 비롯한 궁예측근들에게서도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것이다.

궁예는 자기의 륙감 즉 즉흥적인 감정의 판단이 늘 옳을 때가 많다고 믿어왔기때문에 어떤 때는 설사 반대가 있어도 제멋대로 내밀군 하였다. 실지 그래서 이긴적이 많았다. 싸움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일이 다 그렇게 되는것은 아니지만 궁예는 그걸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일대일로 싸우거나 소규모무리의 싸움에서 궁예는 늘 우세하였다.

그러나 큰 싸움이나 복잡한 정사의 면에서는 그것이 유일한 수법으로 될수 없음을 궁예는 모르고있었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으나 거기에 익숙되지는 않았다.

비유해 이야기하면 나무의 뿌리나 줄기의 생존방식, 가지나 잎사귀의 생존방식은 다른 법이다. 뿌리나 줄기는 나무자체의 생존과 관련되기때문에 때로는 작은 가지나 잎사귀를 떼여버릴수도 있으며 그렇게 하는것이 옳다. 작은 가지나 잎사귀의 립장에서 보면 때로 원통하겠지만 그건 할수 없는 생존의 절대방식이다.

궁예는 자기의 기분, 자기의 견해가 국호를 놓고 우세하지 못하다는것을 직감했다. 《거, 뭘 그래?》 하며 호통을 쳤으면 좋겠지만 궁예는 스스로 체통을 생각하여 참았다.

《그럼, 그렇게 하지.》

궁예는 입을 다시였다.

궁예의 말을 맺음으로 하여 좌중은 숨을 내쉬며 다시 웃음을 지었지만 어쨌든 국호를 놓고 궁예와 권능순을 한편으로 하고 고마와 왕건을 다른 편으로 하여 묘한 실금이 그어졌다.

고마와 왕건은 이전에도 그런적이 있었던지라 이번에도 인차 잊어버렸지만 궁예는 속에 언짢은감을 품었다. 여느때라면 궁예도 웃어버리고말았겠지만 다들 궁예를 임금으로 내세우는 판에 제 주장이 꺾이는것으로 하여 생겨난, 말하자면 임금으로서의 분노의 금이라고 할수 있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남을 설득시키는데서 제일 어려운것이 류창한 말솜씨도 아니요, 해박한 지식도 아니고 설득시킬 사람의 마음을 아는것이라 했는데 그런쪽에서 보면 고마는 확실히 실수를 했다.

궁예는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듯 웃고있었지만 속은 얼어붙었다. 별치않은 작은 감정의 싹이 과연 큰일을 그르칠수 있을가?

궁예가 즉위하는 날이 왔다.

솔뫼고을은 여느때없이 흥성거렸다.

팔관회의식이 이 몇해동안 진행되여오면서 이맘때쯤 되면 자연히 솔뫼는 물론 이웃사람들도 몰려왔지만 이해에는 궁예의 즉위식이라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왔다.

이날 아침.

궁예는 시종들에게 둘러싸여 화려한 임금의 옷을 차려입었다. 신라임금의 옷 못지 않게 지은데다 원래 소문난 고구려식의 차림새라 더욱 눈부시였다. 옷이 날개라고 임금의 옷차림을 한 궁예는 어제까지 보던 그런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뚝 떨어진것 같았다. 더우기 번쩍거리는 왕관에 특별히 눈언저리를 가리게 옥으로 장식한 줄을 드리워서 왕관을 쓴 사람이 보는데는 지장이 없지만 다른 사람은 이 관을 쓴 사람의 눈을 볼수 없게 만들어 궁예의 유일한 약점인 한눈을 감추게 되니 위풍이 나무랄데 없이 되였다.

가까이에서 보든 멀리서 보든, 아는 사람이 보든 모르는 사람이 보든 하나같이 《어이구, 과시 임금님은 타고나신분이로구나!》 하며 저절로 송구해지는 궁예의 모습이였다.

팔관회때 하듯이 하늘과 신령,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고나서 고구려의 대를 이을 나라의 임금 궁예가 오늘 하늘의 령으로 옥좌에 오름을 아뢰고 세번 절한 다음 이어 기치창검이 나붓기는 의장대를 지나 대궐로 들어갔다. 그래서 궁예는 비로소 임금의 자리에 앉았다.

궁예는 관제설치를 알리고 벼슬등급을 선포하여 옥좌앞에 줄줄이 널려세웠다. 모두들 벼슬에 알맞게 옷차림들을 하고 늘어선 이른바 나라의 골격이라 할 벼슬아치들이 한뜨락 가득 벌려섰으니 그것으로 하여 또한 임금의 위엄을 돋구었다.

벼슬을 주고나서 궁예는 신하들이 올리는 축하를 일일이 받았다. 축하와 함께 례물도 올려졌다.

궁예는 임금으로서 신하들에게 술을 내렸다.

례식이 끝나자 잔치가 벌어졌다.

일생에 한번 볼가말가 하는 임금의 즉위식을 구경하느라고 백성들은 그저 입을 하 벌리고있다가 비로소 잔치가 벌어져서야 놀음으로 돌아왔다. 구경도 좋지만 백성에게는 그것도 한때요, 그저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부르는것이 즐거움이다.

궁예는 례식이 끝나기 바쁘게 편복을 갈아입고 신하들과 마주앉아 술을 마시였다. 마시면 마실수록 궁예의 낯빛은 박속처럼 되여 도무지 술을 마신것 같지 않았다.

술자리는 좀처럼 끝날줄 몰랐다.

《우리는 저 신라의 미움을 받아왔고 신라에게 쫓기우고 눌리워 살아왔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 권리를 위해, 존엄을 위해… 우리는 칼을 들고 일어났다. 십여년세월! 우리는 마침내 우리의 피와 땀으로 우리의 나라를 세웠다. 우리는 이제야 자유롭게 되였다. 권리를 찾았다. 존엄을 찾았다. 누구도 이제는… 우리를 미워하지 못하고 우리를 내쫓지 못할것이며 우리를 억누르지 못할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가! 자, 그러니 술을 마시자! 오늘은 마음껏 마시자!》

궁예가 한 말이였다. 궁예는 먼저 술을 단숨에 마시였다. 꿀꺽꿀꺽하는 소리가 마치 북소리처럼 울렸다.

《마시자!》

이것이 진군명령이였다.

마셨다, 모두들…

술을 좋아하는 사람도 마실줄 모르는 사람도 이때만은 거침없이 입안에, 목구멍에 술을 쏟아부었다.

《고마는 안 마셔?》 하고 궁예가 물었다.

《마셨소이다.》

《또 마셔! 오늘의 이 자리는 고마가 마련한것이야. 아니, 난 알고있어. 다 알고있어.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거야. 자 마셔!》

고마도 술을 쏟아부었다.

《잘해! 또…》

궁예는 연거퍼 술을 내밀었다.

《천천히 하겠소이다.》

《안돼, 이건 임금이 내리는 술이야. 또 마셔!》

롱담인가, 진담인가?

고마는 말없이 또 마셨다.

궁예도 마셨다.

《왜 이 기쁜 날 울적해있지, 고마?》

궁예가 술이 번진 낯빛으로 물었다.

《울적하지 않소이다.》

고마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궁예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난 다 알아. 난 사람의 속을 다 알아!》

《임금님!》

《아니아니, 술자리에선 임금이 아니야. 안 그래?》

《임금님, 신도 기쁘오이다.》

《그런데 뭐가 또 근심인가?》

《앞으로 나라일이…》

《나라일? 하하… 그건 걱정 안해도 돼. 이 나라의 임금은 이 궁예야, 궁예! 걱정이 있으면 내가, 이 궁예가 더하겠지? 다들 기뻐하는데 혼자 울적해있는것도 실례지…》

《옳소이다.》

《그럼 또 마실가?》

권능순이 조심히 궁예쪽으로 다가왔다.

《임금님, 이 권 아무개의 경하를 받아주시오이다.》

술자리는 벌써 란장판으로 되여가고있었다.

《오, 권능순이로구나. 좋아. 자, 함께 마시자구. 그사이 권능순이 수고많았지…》

고마는 궁예와 권능순이 술을 마시는걸 보며 저도 따라 술잔을 비웠다.

어지간히 취기가 돌았다. 그러나 왜서인지 정신은 더 말똥말똥해진다.

밤도 퍼그나 깊은듯싶었다.

벌써 술상에 머리를 찧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도 와하하 웃는 소리, 꽥꽥거리는 소리가 떠들썩하였다.

고마는 머리를 건들건들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이 번쩍 정신들게 하였다.

고마는 비칠거리는 몸을 가누며 발가는대로 걸었다. 정신은 더욱 말짱해졌다.

하늘에는 달이 고요히 떠있었다. 밝고밝은 보름달이였다.

고마는 멍하니 달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기쁜 날이다. 그런데 왜 마음 한구석은 울적할가? 달빛때문인가? 아니다. 울적한 심정은 벌써 생겨났다. 왜?》

고마는 중얼거렸다.

고마는 지나간 일을 돌이켜보았다.

고구려를 일으켜세우자고 나서던 일, 궁예를 만나던 일 그리고 그후의 싸움과 싸움들…

마침내 나라를 세웠다. 고려를 세웠다. 그만하면 사나이의 삶이 성공한셈이 아닌가? 그런데 무엇때문에 이러는가, 무엇때문에? 아, 끝없는 마음의 번뇌! …

어딘가 멀리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백성들도 술을 마시는 날이다. 기쁘다고 마신다. 슬픔과 괴로움을 잊고 기쁘자고 마신다.

이 마당에서 고마가 울적해질 까닭이 뭘가.

고려때문에? 아니다!

궁예때문에? 그래.

고마와 궁예는 한짝이 되여 오늘까지 붙어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러나 그들사이에 아무때나, 아무 일이나 서로 마음이 맞은것은 아니였다. 하지만 서로 리해하고 양보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나라를 세운 오늘, 어찌하여 근심이 뚜렷해지는가?

그래, 바로 그것이다. 그것!

고마는 눈을 쪼프리며 한숨을 내쉬였다.

《고마님은 어이하여 이 경사로운 날에 한숨을 쉬시오이까?》

뒤에서 나는 소리에 고마는 놀랐다.

왕건이였다. 앞뒤로 건들거리는 몸을 다잡고있었으나 목소리만은 또렷하였다.

《달이 참 밝구려…》

고마가 웃으며 말했다.

《소풍하시오이까?》

《응, 그런데 장군은?》

《저도 바람이나 쏘일가 해서 나왔소이다. 고마님이 여기 있는줄 몰랐소이다.》

《달을 벗삼아 술마시는 재미도 있지…》

《무슨 속타는 일이라도 있소이까?》

《아니…》

고마와 왕건사이는 그렇게 가깝지는 않았다. 고마는 그걸 아쉽게 여겼다. 운명은 그들이 서로 가까워지게 만들지 않는 모양이였다.

이 네모진 턱을 가진 젊은이를 보는 순간 고마는 자기의 우려가 결코 헛되지 않음을 다시한번 느꼈다.

《저는 오늘 참 기쁘오이다.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무거운 짐을 덜어놓은 심정이오이다.》

왕건이 말했다.

《새 나라 고려를 세웠으니 하는 말이요?》

《그렇소이다.》

고마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탐나는 젊은이이다. 왜 일찌기 알지 못했던가. 만날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아이였다. 아이가 어떻게 클지 고마는 그때 몰랐다.

왕건의 말은 고마의 속을 조금 후련하게 해주었다.

《그렇지… 선조들이 고구려를 세우길 바랬으니 우리가 큰일한셈이지…》

고마는 달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헌데 고마님의 울적함은 어인 일이오이까?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이 젊은이는 순수한 마음으로 고마에게 관심을 돌리고있다. 고마뿐이 아닐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럴것이다. 마음이 꽤나 넉넉한 젊은이이다.

고마는 시원한 바람을 들이키고나서 여전히 달을 보며 물었다.

《장군은 우리 임금님을 어떻게 보시오?》

그것은 위험한 말이다. 신하된자로서 임금을 론할수는 없는것이다. 그것은 반역의 씨앗이다. 그래도 고마는 하고있다. 고마는 왕건이 궁예를 정신없이 숭배하고있는것을 잘 안다. 만약 이 젊은이가 없었더라면 궁예는 고마 혼자 도와서 결코 오늘과 같은 영광을 얻지 못했을것이다.

왕건에 대해서 고마는 스승에게서 들었다. 장차 큰일할 이 젊은이는 정말 마음이 끌려서 궁예를 따르는것인가?

그런것 같다.

하다면 이것 또한 묘한 운명이 아닌가?

왕건은 묵묵히 고마를 보고있었다.

술이 깨였다.

고마를 보는 왕건의 눈에는 분노가 없었다. 그저 호기심이 내비칠뿐이였다.

고마는 그런 왕건의 눈길을 감촉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당장 요란스럽게 놀았을것이다.

임금님을 모독하는가? 내 충성은 깨끗하다.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그런데 왕건은 조용히 고마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장군이 앞으로 임금님의 제일보필신하가 되여야 하기때문에 하는 말이요. 달리 생각마시오.》 하고 고마가 말했다.

《저는 고마님이 임금님의 제일보필신하라고 아는데요. … 아까도 임금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소이까.》

《물론 이때까지는 그랬는지 모르지. 그러나 앞으로는 당신이요, 왕건장군!》

《무슨 말씀이시오이까?》

《우리 임금께서는 한번 한다 하면 무섭게 파고드시는 성미이시오.》

《그것이 나쁘오이까? 내 보건대는 사나이의 최대장점이라 보는데요?》

《그렇지. 속세를 떠나 도를 닦거나 명장이 되거나, 세상의 어떤 큰일을 하는데는 나무랄데 없소. 그건 보통사람으로서는 념두 못낼 천품이시오.》

그 다음 말을 할가? 고마는 잠시 망설였다.

《말씀하시오이다.》

왕건이 은근히 재촉하였다.

고마는 왕건을 보며 말했다.

《임금은 한사람도 아니고 열, 백, 천도 아닌 만사람의 으뜸이시오. 으뜸이시기에 만사람을 다스려야 하는거요.》

왕건이 만일 철부지라면 《그런데?》 하고 물었을것이다. 그러나 왕건은 묻지 않았다. 그저 덤덤히 생각에 잠겼다.

고마는 그런 왕건을 기특하게 여겼다.

두사람은 생각에 잠겨 오래도록 서있었다.

그들은 임금 궁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있다. 입밖으로 내비친 말은 큰 나무에 하나의 작은 가지였다.

고마는 이렇게 말하고있었다.

《뜻은 높은데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파고드는 기질로 하여 대업을 망칠수 있다. 바로 궁예가, 임금이…》

 

권능순은 틈을 보아 조용히 궁예에게 다가갔다.

궁예는 아직 술이 깨지 않았다. 그는 무심한 눈길로 권능순을 보았다.

《아뢸 말씀이 있소이다.》 하고 권능순은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뭐요?》

능순은 한참 바재이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어제 밤 고마가 임금님을 헐뜯었소이다.》

《무슨 소리요? 난 생각나지 않는데…》

《밖에서 하는 말을 제 귀로 들었소이다.》

《모를 소리… 고마가 무슨 말을 했다는거요?》

남에게서, 그것도 또 다른 남이 자기에 대해 나쁜 말을 했다는걸 듣는 일이란 기분좋은 소리가 아니다.

궁예는 뿌루퉁해졌다.

권능순은 눈을 깜빡거렸다.

간밤 잔뜩 취해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소변을 보러 나갔던 능순은 비칠거리며 돌아오다가 문득 먼발치에 서있는 두사람을 보았다. 술에 취하면 천하의 사람이 모두 형제 아니면 원쑤라 한바탕 걸치고싶은 욕망으로 다가가던 능순은 두사람이 다름아닌 고마와 왕건이라는걸 알아보고는 비칠 멈춰섰다. 처음 능순은 손으로 파리쫓는 시늉을 하고 돌아섰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어 그 자리에 무너져앉으며 두사람이 말하는걸 엿들었다. 임금에 대한 말이 그의 귀를 잡아당겼다. 그것은 별로 나쁜 소리가 아니였다. 능순은 제풀에 버룩버룩 웃고 다시 일어나 술자리로 돌아왔다.

아침에 일어나 어제 밤에 있었던 일을 두루 생각해보던 능순은 고마와 왕건이 하던 말에 이르러 눈살이 꼿꼿해졌다.

분명 고마는 임금에 대해, 그의 약점에 대해 말하였다. 그의 뇌리에는 언제인가 취해서 궁예의 한눈에 대해 잘하느라고 한 소리때문에 왕건에게 봉변당하고 궁예에게 미움을 받던 일이 떠올랐다.

권능순의 눈이 재빠르게 돌았다.

그는 나라의 관직을 정할 때 자기가 고마와 왕건보다 더 높은 벼슬을 받을것은 바라지 않았지만 하다못해 같은 서렬에는 설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나온걸 보니 웬 일인지 권능순은 고마와 왕건보다 서너번째 아래에 놓여있었다. 속으로는 불쾌했지만 내색은 안했다. 그러자니 심통이 편안치 못했다. 차츰차츰 분통이 터지는걸 참지 못했다. 그 분통은 엉뚱하게도 고마에게 뻗어갔다. 그렇게 된것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앞으로 지내면서 따라앞설수 있겠지만 고마는 어쩔수 없다고 생각했기때문일것이다.

자기보다 난 사람에 대한, 그러면서 당장에는 그를 이길 뾰족한 수가 없는 사람에 대한 질투감이였다. 명백히 시기이고 질투임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건 능순자신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것이다.

우연히 엿들은, 그것도 술취한 속에서 한 고마의 말을 임금에게 고해바치는것이 비렬한짓이라고 능순은 생각지 않았다.

신하로서 임금의 어존을 해치는 말을 들었으면 제때에 고해야 한다. 그것은 충신의 자세다.

권능순은 자기가 어떤 사사로운 감정에서 그러는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임금을 위해 천백번 정당한 일을 한다고 자신을 위안했다.

그는 궁예에게 자기가 들은 말을 조금 보태여 수군거렸다. 옮기는 말은 늘 말하는 사람이 신빙성을 돋구기 위해 보태지기마련이다. 때로는 엉뚱하게…

임금은 이런 때에 차라리 어리석으면 더 좋을것이다. 임금은 결코 어리석다고 사람들은 보지 않기때문에 어리석음이 약점으로 되지 않고 거꾸로 너그러운것으로 되는 때도 있다.

그러나 궁예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였다. 그는 고마를 두려워했다. 능순이 옮기는 말이 사실 그대로라고 궁예는 생각했다. 궁예는 고마의 말자체가 아니라 다른것때문에 불쾌해하였다.

그런 말을 왜 왕건이 같은 아이에게 하는가? 이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왜? 고마는 내가 임금이 된걸 싫어하는가? 아니, 다르게 볼수도 있지 않는가.

그렇다. 다르게 보아야 한다. 고마가 진정으로 이 궁예를 걱정해서 그럴수 있는것이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런데 아쉬운것은 그런줄로 알면서도 모욕당했다는 감정이 궁예에게 더 우세하게 자라는것이다.

임금이 되기 전까지라면 그럴수 있지 하고 웃으며 물러설수 있다. 그래서 좋으면 좋았지 나쁜것은 없었기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임금이다 하는 권력의식이 회오리치자 궁예는 고마에 대해서 격분이 치솟았다.

임금은 만사람우에 있는 하늘이 낸 사람이다. 신하된자, 백성된자는 그가 누구든 임금에게 절대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인륜의 도이자 천도이기도 하다. 이 도를 어기면 무슨 도깨비가 나올지 모른다.

무자비하게! 이것이 권력의 생리다.

내가 아니면 네가! 서로의 리익을 위해 웃는 얼굴로 자리를 정해놓은게 임금과 신하이지만 그 자리는 한시도 틈을 줄수 없는 그런것이다. 권력이란 그런것이다. 권력을 위한 길에서 양보나 자비란 있을수 없다. 있다면 그것은 벌써 권력이 아니다.

고마! 고마가 거치장스럽게 노는구나.

궁예는 이미 마음속으로 결심을 내렸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딴소리가 나왔다.

《권능순! 임금을 받드는 신하들이 서로 질투하면 아니되오. 더구나 방금 나라를 세운 때에… 수치를 느끼라!》

궁예는 얼떨떨해진 권능순을 쫓아냈다.

궁예가 만약 일을 바로잡으려는 현명한 임금이였다면 권능순의 말을 듣고 저 혼자 속으로 벼를것이 아니라 고마를 불러 사연을 직접 들어보거나 하다못해 잊어버리기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궁예는 달리 나갔다.

《어디 두고보자! 때가 오면…》 하고 궁예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듯 했다. 그러나 굽어들지 않는 마음속의 앙심은 언제든지 터져나오기마련이다.

3년이 지난 뒤 고마에 대한 궁예의 앙심은 무섭게 폭발하였다.

그사이 고마가 우려하던대로 궁예는 권력의 단맛에 집착해갔다. 궁예에게 권력이란 자기에게 모든것을 복종시키는것이였다. 그것이 그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있었던것이라는것을 고마는 늦게야 깨달았다.

넋! 고구려를 일떠세우려는 넋은 한갖 치장이였다.

임금이 되여 궁예는 권력을 빼앗을수 있는 일체 조건을 없애버리는데 몰두했다. 한곬에 빠져들면 도무지 헤여나오지 못하는 궁예의 성격은 바로 권력에 미쳐들면서 더 삐뚤어져갔다. 그에게서 넋은 갈데로 가버리였다.

고마는 원래부터 궁예에게 바른말을 서슴없이 했기때문에 궁예는 괘씸한대로 참아왔다. 그러나 임금이 되여서부터 달라졌다.

옛날사람들이 이르기를 룡이라는것에는 그 멱에 직경이 한자가량의 역린(逆鱗)이라는것이 있는데 잘못하여 이것을 건드리면 때아닌 해를 입게 된다고 하였다.

룡의 역린, 그것은 임금의 자존심이다.

권력의 최고웃자리에 오른 사람의 자존심이라고 하여 여느 사람의 자존심과 크게 다를바 없지만 그것이 미치는 후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권력이 그 자존심에 더해지기때문이다.

궁예는 이 권력의 맛을 너무 빨리 알았다.

궁예는 고마의 의견을 《임금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소리로 들었다. 임금이 되기 전까지는 똑똑한 아래사람을 두는것이 나쁘지 않지만 일단 임금이 된 다음에는 임금보다 똑똑한 사람이 있는것이 부담스러울수밖에 없다.

궁예는 고마가 미워지기 시작하였다. 자그마한 부스럼이 제때에 치료하지 않으면 온몸에 헌데로 퍼지듯이 마음속에 생겨난 노여움과 미움도 제때에 쏟아놓거나 풀어버리지 않으면 갈수록 커지기마련이다. 미움과 노여움을 푸는 유일한 길은 서로 툭 터놓고 이야기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러나 궁예는 그러지 못했다.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권능순의 고발을 들은 다음부터 궁예가 왕건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이때껏 궁예는 왕건을 그 누구보다 사랑했다. 그런데 따져보지도 않은 고발을 듣고 갑자기 달라질수 있는가. 그것은 특별한 경우였다. 고마가 우려한 편집광적인 궁예에게서 볼수 있는 현상이였다.

사랑과 질투는 쌍둥이이다. 극단한 사랑에서 질투가 나온다. 미적지근한 사랑이라면 사랑하는 상대가 자기를 배반하든 말든 별로 가슴아프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오로지 한곬으로 향한 그리고 자기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친 그런 사랑이라면 그 상대를 잃게 될 때 자기의 모든것을 잃게 된다고 생각하기때문에 극단의 오해, 시기, 질투, 증오가 생긴다.

물론 극단의 사랑이라 하여 다 질투로 이어지는것도 아니고 다만 극단한 리기적인 사랑으로 출발한 극단의 사랑만이 질투를 낳는다. 그리고 질투는 극단의 의심을 낳는다.

궁예가 왕건을 의심하는것이 바로 그래서 생긴것이다. 왕건이 고마와 무슨 소리를 했건, 궁예 자기에 대한 소리를 했다 한들 어쨌단 말인가. 그럴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궁예는 별치않은 일로 하여, 이전에 극단한 자기 리기심에서 왕건을 사랑하였기때문에 무근거한것도 확실한 근거가 있는것으로 받아들여 의심하게 되였다.

어떤 의미에서 궁예는 권능순의 고발을 듣고 고마보다 왕건을 더 의심했는지도 모른다.

궁예는 왕건과 고마를 잘 모르면서 그들에게 사랑을 퍼부어왔다. 고마와 왕건이 다같이 고구려를 일떠세우려는, 큰뜻을 이루려는 열망을 뼈속깊이 간직하고 오래동안 살아온것으로 하여, 그래서 궁예를 따르고있다는것을 알았으면 궁예는 질투까지는 하지 않았을것이다. 아니, 궁예는 그걸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그는 사람은 뜻에서보다 리해관계에서 먼저 변한다고 믿고있었다.

일단 사람에게 의심이 들면 분별력을 잃어버린다. 의심은 오로지 자기만의 자대로 다른 사람을 재는데서 생긴다. 그리고 세상일이란 어떻게 의의를 부여하는데 따라 그 모양이 다르게 안겨오기때문에 의심으로 하여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상대를 깊이 잘 알아야 하며 자기 주관에 지나치게 사로잡히지 말아야 하고 상대를 될수록 리해해주려고 하여야 할것이다.

그런데 궁예에게는 그것이 다 부족하였다.

의심한다고 하여 다 나쁜것은 아니지만 나쁜 의심은 옳고그름을 뒤집어놓는 의심으로 된다.

일단 왕건을 의심하게 되자 왕건의 아버지 왕륭까지도 의심스러워졌다.

의심은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며 움츠리면 움츠릴수록 또 다른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법이다.

사람이 싫으면 그 주위가 다 싫어지기마련이다.

궁예는 송악고을이 마음에 들지 않아졌다.

궁예는 그 리유를 이렇게 풀었다.

첫째, 송악고을이 풍수적으로 좋지 못하다는것이다.

그건 무슨 소린가? 이전에 풍수에 밝은 도선스님은 솔뫼고을의 풍수의 좋은 점에 대해서 두루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솔뫼고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풍수에서 말하면 바람을 얼싸안은 장풍국(藏風局)의 세다. 그로 하여 주산(主山)은 진산(鎭山)과 일치하는바 솔뫼가 바로 그것이다. 백호는 지네산줄기가 되고 청룡은 부홍산-덕암봉 련맥이 되며 자남산과 남쪽끝 룡수산, 천봉산, 덕적산줄기가 안산(安山)과 조산(祖山)이 되여 완벽한 장풍국을 이루었다.

래룡(來龍)의 맥세(脈勢)를 보면 불함산(백두산)을 조산(祖山)으로 오관산을 종산(宗山)으로 삼아 송악을 일으키니 이것이 주산인것이다. 이 래룡은 해방(亥方-풍수 24방위의 하나)인 북서방향에서 들어와 자좌오향(子坐午向)인 정남향으로 내려졌다. 술가(術家)에서는 이를 평하여 청룡과 백호가 좌우를 겹겹이 싸고 앞산이 중첩되게 명당을 호위하여 사방산신은 혈을 철저히 옹위하는, 산속에 우묵하게 숨겨진 좋은 터라 하였다.

이러함에도 궁예가 송악이 좋은 터가 못된다고 하는건 무엇때문인가?

궁예는 풍수를 보는데서 결코 남 못지 않다고 자부했다.

솔뫼가 풍수로 좋다 하나 고구려의 옛 도읍이였던 평양의 량옆에 큰강을 접한 득수국(得水局)의 형세에 비할바가 못된다는것이다. 평양이 확 트이고 장쾌한, 그래서 시원스럽다면 솔뫼는 우중충하여 뭔가 거리껴진다는것이다.

사람은 자기 성격에 어울리는 터를 찾기마련이다. 진취적이고 자기를 내세우기 좋아하는 성격인 궁예로서는 내성적이고 온화한 사람이 좋아하는, 안온하게 사방이 산으로 둘러막힌 명당터를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였다.

둘째로 궁예는 이곳 민심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궁궐에서 잔치를 베풀 때는 궁예에게서 벼슬을 얻은 문무백관들이 앞을 다투어 궁예를 칭송하여 좋았지만 어찌다 한두번 산천을 본다든가 어떤 행사를 위해 순행할 때 자존심이 강한 궁예는 불쾌한감을 숨기지 못한다. 궁예를 불쾌하게 한것은 왕건을 순행의 앞에 세웠을 때 고을사람들이 미칠듯이 환호하는것과 왕건이 없이 순행할 때 사람들의 태도가 사뭇 다른것때문이였다. 왕건이 있어 궁예가 임금으로서 환영받는것과 왕건이 없을 때 궁예가 환영받지 못한다는것은 여느 사람이라도 쉬이 알아볼수 있는것이였다. 더구나 궁예는 눈길이 날카롭고 감정이 예민하기때문에 이것을 정도이상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궁예는 임금이면서도 임금으로서의 백성의 환호를 받지 못하는것이다. 이 《빌어먹을 송악땅》에서는 그랬다. 궁예는 주인인 임금이라기보다 나그네처럼 생각되였다. 남의 집에 찾아든 아무 볼것 없는 나그네인것이다. 궁예는 그것을 참을수 없었다. 하긴 이 땅은 왕건부자와 그 조상들이 고구려이후부터 가꾸어온 땅이니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궁예는 도저히 참을수 없었다.

셋째로는 이런 송악고을에서 받을 찌그러진 자존심을 되살리기 위해 다른 곳 즉 궁예자신이 건설하고 품을 들인 그런 고을터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쇠두레고을이다.

《쇠두레고을로 천도하자!》 하는 궁예 마음은, 그리하여 신하들과 백성들을 철저히 자기에게 복종시키려는 야심과 이번 일로 하여 신하들과 백성들을 검열해보고싶은 엉뚱한 생각이 겹쳐든것이였다.

그리하여 궁예는 벌써 임금이 된지 한해가 되기 바쁘게 천도할 생각을 로골적으로 드러냈다.

이 천도를 심중하게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다. 고마였다. 고마는 자기에 대한 궁예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져간다는것, 그리고 그것은 위험한것이라는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개의치 않고 《고집》을 부렸다.

나라를 세우기 바쁘게 천도한다는것은 안팎으로 좋지 못하다. 백성들은 불안해하고 신하들은 번거로워한다. 아직 고구려위업을 완수하지도 못했는데 이런 좋지 못한 일은 삼가해야 한다. 치국의 요점은 믿음인데 백성은 자주 옮기고 자주 변하는걸 좋아하지 않으며 따라서 믿음이 없어진다. 이것을 어떻게 보상하겠는가. 믿음은 또 그렇다치고 천도를 하려면 막대한 자금과 로력이 드는데 그럴 자금과 로력이 있으면 천도보다 하루빨리 고구려의 옛터를 찾는 일에 돌려야 한다.

이것은 밖에서 볼 때도 좋지 못하다. 치도의 원리를 아는자라면 반드시 우리의 약점을 알아차릴터인데 신라는 아직 망하지 않았고 후백제의 견훤도 한창 세력을 돋구고있으니 어찌할셈인가!

고마의 주장에 대해 궁예는 비웃었다.

《리치란 세우기탓이다. 그리고 천하의 리치란 임금의 뜻이고 결심이다. 결심했으면 행동하는것이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임금의 태도다. 임금을 따르는자 충신이요, 거역하는자 역적이다.》

궁예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천도로 하여 송악고을은 물론 나라가 술렁거렸다.

궁예는 송악고을 백성들을 쇠두레로 끌고 갈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청주 민가 1천호를 쇠두레로 옮겨라!》 하고 궁예는 명령했다.

아연실색한 어명이였다. 청주에서 쇠두레까지 거의 6~7백리길이다. 성한 사람이 맨몸으로도 모르겠는데 가장집물을 떠메고 늙은이 어린이 할것없이 7백여리길을 가라는것이 정신나간 사람이 아니면 엄두 못낼 일이다. 이웃한 군, 현이라도 모르겠는데 그 먼 청주에서 한두집도 아니고 천여호나 옮긴다는게 무슨 말인가?

아무리 임금의 어명이라도 신하들은 모두 눈만 껌벅거렸다.

궁예는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옮기라고 태연하게 명령하였다.

게을러빠진 신하들의 골통을 한번 놀래우려는 심정이신가? 아니다.

궁예는 명령을 내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명령을 집행할것을 강요했다.

사람의 일에는 정도를 벗어난, 상식을 벗어난 결심이나 행동이 아니고서는 쉽게 무슨 업적이라 할것을 남기지 못한다. 누구도 해내지 못하는걸 해낼 때 그를 영웅으로 보는것이다.

궁예는 그리하여 영웅이 되고싶은가?

궁예는 자기의 의지를 시험해보고싶었다. 자기의 본때를 보여주고싶었다.

궁예는 그 일이 엄청난 일이라는걸 잘 안다. 그리고 살던 고장을 쉽게 버리려 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도 알고있다.

그러나 해야 한다.

그리하여 무슨 큰 리득이 없다 하더라도 나라를 다스릴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것을 궁예는 엄청난 일에 걸었다.

궁예는 그걸 주관적으로 생각해냈다.

그는 벌써 현실적인 타산이 아니라 주관적인 타산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그건 알바가 아니였다. 한번 결심하면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해내야 한다. 왜냐면 그것은 궁예임금의 명령이기때문이다. 그렇게 되도록 궁예임금자신이 의지를 굳혀야 하며 또한 다른 사람들도 따르게 해야 한다.

궁예의 명령을 듣고 고마는 썩은 냄새를 맡았다.

《안되오이다, 전하!》

고마는 무릎을 꿇고 말했다.

그럴줄 알았다고 궁예는 고마를 노려보았다.

《고마, 너를 보고 하라는게 아니야. 내가 하자는거야, 이 궁예가…》

궁예는 차디차게 비웃었다.

《전하, 돌이켜보시오이다. 이때껏 십여년 얼마나 힘들게 고려를 세우셨소이까. 고려가 아니라면 모르되 틀림없이 고구려의 고려라면 죄없는 자기의 백성들을 괴롭혀서는 안되오이다. 그러면 고려는 없소이다.》

《너는 내가 백성을 괴롭힌다고 하는데, 그래 괴로움을 피하고 그 무슨 영광이나 행복이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줄 아느냐?》

《괴로움도 어떤 괴로움인가 하는데 있소이다. 백성이 바라는것은 먹고 입고 사는것의 편안함이오이다. 그것마저도 백성은 얻기 괴로워하오이다. 제 살던 터를 떠나 낯선 땅에 강제로 옮겨가는것이 어찌 백성이 바라는것이겠소이까?》

《고마! 너는 백성의 고마냐, 아니면 임금의 고마냐?》

《저는 고려의 고마오이다.》

《닥쳐라!》

궁예의 벼락같은 소리에 대청이 우르릉 떨었다.

허리를 굽히고있던 신하들이 우뚤 놀랐다.

궁예는 이를 꽉 다물었다. 그의 뺨이 푸들거렸다.

《고마! 네가 이때껏 나를 도와준 은공이 없다면 나는 너를 죽였을것이다. 난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야. 그러나 오늘 내 명백히 말한다. 그대는 제 갈데로 가라.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 다시 나타나면 그때는 용서치 않을테다.》

궁예는 가늘게 눈을 쪼프리며 나직이 말했다.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이까?》

고마가 머리를 들고 궁예를 보았다.

《난 할 말을 다했다.》

궁예는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고마는 꿇어앉아 일어날줄 몰랐다.

고마는 궁예가 결김에 그랬으리라고 여겼다. 이제 성이 풀어지면 다시 고마를 부를것이다.

그러나 열흘이 지나도록 궁예는 고마를 찾지 않았다. 나중에는 빨리 궁궐을 떠나라는 독촉이 왔다.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을 타이르는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잘못된 길을 가면서도 굳이 제가 옳다고 우기는 사람을 기어코 타이르겠다는것은 어리석은짓이다. 그런 사람은 잘못된 길을 걸은 대가를 죽음이나 쓰라린 체험으로 당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고치려하지 않는다. 아직 이 운명의 수수께끼를 풀어낸 사람은 없다.

고마는 랭정한 사람이였다. 그는 궁예에게 울고불고하며 애걸하지 않았고 더이상 그에게 미련을 가지지도 않았다.

초불을 마주하고 사흘낮 사흘밤 까딱않던 고마는 해쓱한 낯빛으로 일어났다.

고마는 한번 크게 숨을 들이쉬고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자기의 운명, 궁예의 운명, 이 고려의 운명이 결코 무난하지 못할것이라는것을 내다보았다.

아무리 달콤한 아쉬움이 남아있더라도 제때에 물러서서 떠나가버리는것 또한 아름다운것이 아니겠는가.

나라를 세운지 3년, 겨레의 지향이고 민심인 고구려를 다시 일떠세우려는 큰뜻은 없이 일개인의 야욕으로 들고일어나 옥좌에 오른 궁예는 국호를 마진(摩震)이라고 고치고 년호를 무태라 하였으며 다음해 7월에 도읍을 송악에서 쇠두레로 옮기고 다시 년호를 성책으로 고쳐 정하였다.

고마가 어디로 갔는지 누구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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