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회)
23. 솔뫼의 팔관회 송악고을에 성쌓는 일이 크게 벌어지고있었다. 송악고을뿐더러 여러곳에서 모여온 사람들이 아글바글하였다. 젊은 왕건은 흙짐을 지고 머리를 수그린채 걸었다. 얼굴로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누군가 왕건의 앞을 막아섰다. 도불이였다. 《성주님! 그만두시오. 성은 우리가 쌓겠으니 성주님은 그저 보살피기만 하오.》 왕건은 말없이 도불을 보다가 그를 에돌아갔다. 《자, 힘을 냅시다!》 뒤에서 도불이 소리쳤다. 왕건은 발끝만 보며 걸었다. 눈앞에 림종에 이른 아버지의 모습이 안겨왔다. 왕륭은 아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들 왕건은 입술을 깨물며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왕륭은 누운채 아들을 바라보았다. 《건, 넌 이 아비를 원망하느냐?》 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이다, 아버님.》 왕륭은 시선을 아들에게서 떼고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고구려를 위해 왕륭은 궁예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런 큰뜻을 알아주겠는가? 이기고지는데 대해 리유가 없다. 이긴건 이긴거고 진건 진거다. 이것이 세상의 민심이다. 왕륭은 어슷비슷한 실력을 가지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궁예를 복종시킬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예의 밑으로, 부하로 들어간것때문에 늘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뜻을 위해, 겨레를 위해 자리를 양보한것인데도 어째서 마음이 가볍지 않은가. 세상은 이긴자만 알아준다. 그리고 웃자리만 바라본다. 또 옳고그름도 다스리는자들 말과 행동에 따른다. 왕륭은 자기를 그렇게 한심한 필부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그늘이 가셔지지 않았다. 아들 건이 어떻게 생각할것인가. 그는 아직 젊다. 그리고 아비가 보건대 훌륭한 장수다. 알아야 한다. 《건, 너는 천명의 뜻을 알겠지?》 《예.》 왕건은 안다. 그건 고구려의 넋을 살리는것이다. 《뜻을 이루거라.》 《예.》 《권력은…》 왕륭은 숨이 차서 잠시 쉬였다. 그에 대해 뭐라고 말해줄지 몰랐다. 뜻과 권력은 기름과 물같은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뜻과 권력이 같은것도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권력을 바란다. 권력은 인간존재의 필수요소다. 소꼬리보다 닭대가리를!
하는 말이 있다. 누구도 남의 다스림을 받기 좋아하지 않는다. 남을 다스리기를 바란다. 다스리는것은 권력이다. 뜻은 권력에 의지하지 않고서
이룰수 없다. 그러나 권력이 곧 뜻은 아니다. 뜻은 권력을 낳지만 권력은 뜻을 낳지 못한다.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건!》 《예.》 《권력이 없이 살기가 괴롭다. 하지만 뜻이 있으면 괜찮다. 너는 부디 뜻을 이루거라. 권력만을 바래서는 안된다. 권력이 좋기는 하지만 뜻을 저버려서는 안된다. 권력이 너의 뜻이 되여서는 안된다.》 림종에 이른 왕륭은 어떻게 더 아들을 가르쳐야 할지 괴로웠다. 숨이 점점 막혀왔다. 왕륭은 마지막 힘을 짜냈다. 《부디 너는 뜻을…》 왕륭은 아들을 보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였다. 《알겠소이다. 아버님!》 건은 아버지를 영안성 석굴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성쌓는 일에 나섰다. 왕건은 멈춰섰다. 그리고는 흙짐을 춰올렸다. 《알겠소이다, 아버님!》 하고 건은 다시 되뇌였다. 성쌓기로 사람들이 붐비고있었다. 세상사람들은 언제나 제멋대로 말한다. 다 옳은것도 아니고 틀리는것도 아니다. 세상은 그런 속에 흘러간다. 성인은 세상의 이러저러한 여론을
이끌어가고 현자는 그걸 판단하고 리용하지만 필부는 그걸 두려워하며 바보는 그걸 맹목적으로 따른다. 송악 사찬 왕륭은 벼슬로 보나 재산으로 보나, 인격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궁예보다 나은 사람이지만 궁예의 부하가 되여 익성태수가 되였다. 그러고보면 궁예가 왕륭보다 더 세고 더 훌륭한 모양이다. 이것이 세상의 평이였다. 벼슬이나 걸치고 제법 웃놈이라면 무턱대고 옳고 좋은
사람이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그래서 한뉘 노복으로나 살수밖에 없는 무리의 편안한 세상보기이다. 왕건과 궁예의 사이는 어떠했는가? 그들은 친형제와 같았다. 그저 보통 형제가 아니라 보기 드문 형제와 같았다. 스무살소리를 듣는 왕건이 궁예를 대하는걸 보면 단지 형으로서가 아니라 스승으로, 장군으로 숭배하였다. 한편 궁예는 건을 제 팔다리보다 더 귀한 염통이나 허파만큼 여기며 사랑했다. 왕건에게는 형이 없다. 궁예에게는 살붙이가 없어서 그렇다고 보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건은 궁예가 하는 말과 그가 떨치는 전략과 싸움에서의
용기, 지휘능력 같은것에 홀딱 반하였다. 궁예는 그런 젊은 왕건을 그 누구보다 사랑스럽게 여겼다. 왕건과 궁예의 사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하였다. 지어 고마까지도 놀랍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고마는 왕건을 통하여 궁예의 남다른 점을 찾아보게 되였다. 왕건을 혹하게 하는 궁예의 장점은 무엇인가? 고마는 미처 확증은 못하면서도 그런것이 실제로 있음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또 고마에게는 왕건처럼 궁예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런것이 없다. 그걸 고마는 은근히 슬퍼하였다. 《내가 그대보다 나이가 우이니 날 형이라 부르게.》 궁예가 왕건에게 말했다. 《장군은 우리들의 임금과 같은데… 신하는 임금과 롱을 해서는 안되오이다.》 《그것 참 시끄럽구나. 그럼 우리끼리만 있을 때에라도 그렇게 불러라.》 《고맙소이다.》 《이제 당장!》 《그럼… 형!》 어느때인가 술자리가 흥에 겨웠을 때 권능순이 취해서 《우리 궁예장군은 참 보통분이 아니시지. 그… 한눈만 아니라면 천하에…》 하며 비틀거렸다. 권능순으로서는 헐뜯거나 깔보아 그런게 아니고 이를테면 옥에 티격으로 아쉬웁다고 내비친 소리였다. 그 말을 들은 왕건이 성이 나서 권능순의 멱살을 잡았다. 《뭣이 어쩌고 어째? 너 같은 놈 눈깔 천개, 만개보다 귀하다. 별 볼것없는것들이나 두개요 세개요 달고 다니는거야!》 왕건이 술에 취했는가? 물론 취했다. 그러나 취한것하고는 다르다. 고마가 제때에 말렸기망정이지 하마트면 권능순이 얻어맞아 즉사할번 하였다. 뒤날 궁예가 그에 대해 듣고나서 한바탕 웃고 말했다. 《권능순이 사람의 겉을 보지 속을 못 보는구나. 내가 한눈만 가지고있는건 우연한게 아니야. 건이 나타나길 바래서 하늘이 잠시 감추어둔거야.
이제 내 동생 건이 나타났으니 난 바로 잃어버렸던 눈을 찾은거야.》 이를테면 궁예는 왕건을 자기의 한눈으로 생각한다는것이다. 사람이 몸에 조그마한 상처가 나도 참을수 있지만 눈에는 티라도 들어가면 참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이 천냥이면 눈이 팔백냥이라고도 하는것이다. 궁예의 말은 듣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왕건에 대한 궁예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가게 한다. 고마가 왕건에게 지나치듯이 물었다. 《왕건성주는 우리 궁예장군이 그렇게도 좋으시오?》 《예.》 《어째서?》 왕건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느날 나는 궁예장군과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었소이다. 내가 고구려의 옛 도읍이였던 평양에 갔다온 이야기를 하니 장군은 말씀하시였소이다. <이전에 신라는 당나라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다. 그래서 평양이 황페하게 되였다. 내 반드시 그 원쑤를 갚겠다.> 하시더이다. 사람의 눈은 속이지 못하오이다. 나는 그때 궁예장군의 참된 모습을 보았소이다. 그것이 궁예장군을 따르게 하는 저의 마음이라고 할수 있겠소이다.》 젊은이와 늙은이가 다른것은 포부와 혈기이다. 또 순수성에도 있다. 젊은이는 포부와 혈기가 있어 세상에 못할 일이란 없고 또 아름답고 순수한것이 이 세상에 꽉 차있다고 본다. 모든것이 새롭게 되는것이
아름답다고 보게 된다. 그러나 늙은이는 세상에 되는 일보다 안되는 일이 더 많고, 세상은 아름다운것만이 아니라 고달픈것이 더 많으며 순수한것보다 복잡한것이 더
많다고 본다. 왕건이 궁예를 숭배하는것이 이런 젊은이의 특성만은 아니였다. 고마는 왕건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보게 되였다. 그는 보통 젊은이가 아니였다. 뭔가 부족한것을 모르고, 뭔가 고통스러운것을 모르고 자라난 젊은이란 쓸모없는 녀석들이라고 치부해온 고마는
왕건이 남다르게 느껴졌다. 궁예에 대한 왕건의 태도가 그저 새망스러운 계집의 감탄이나 젊은이의 무턱진 숭배만은 아니였다. 무오년(898년) 봄 2월(음력) 왕건은 아버지 왕륭이 죽은 뒤에도 슬픔에만 잠겨있지 않고 성주로서 송악성 쌓는 일에 앞장섰다. 젊은 성주는 솔선 짐을 지고 성을 쌓았다. 마침내 성쌓기가 끝났다. 궁예는 왕건을 정기대감으로 삼았다. 왕건은 정기대감으로 선봉이 되여 양주와 견주를 쳐 빼앗았다. 《장군, 이제는 송악에 도읍을 정하시오이다.》 이미 성도 쌓았고 대궐도 지었다. 그만하면 임금의 거처도, 나라의 도읍으로도 될만 하다. 《건아, 정말 장하다.》 궁예는 왕건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궁예는 송악에 도읍을 옮겼다. 도선스님은 왕건이 궁예를 좋아하는걸 유심히 살폈다. 허파에 바람차는 젊은 시절이였다. 담도 커지고 반대로 겁도 많아진다. 그 젊은 시절에는
무엇이건 다 실제이상으로 커보이기마련이다. 더우기 뜻이 있고 열이 있는 젊은이일수록 더했다. 하늘은 높고 땅은 넓어 이 천하에 우뚝 나 홀로
섰노라 하는 호기가 없다면 그리고 말똥이 굴러가는걸 보고도 제풀에 웃음을 터뜨리는 그런것이 없다면 어찌 젊은 시절이라고 할수 있으랴. 《팔관회를 여시오.》 도선스님이 왕건에게 귀띔하였다. 그런 말은 아버지인 왕륭도 건에게 했다. 《솔뫼에 궁예장군이 도읍을 옮긴건 참 잘한 일이요. 성주는 날을 잡아 팔관회를 열도록 하시오.》 도선스님은 팔관회를 어떻게 하는지 자세히 알려주었다. 하늘과 땅, 산과 강에 제사를 드리는것이요, 아울러 아래우 할것없이 하나로 어울려 삶을 경축하는것이다. 기본은 누구나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백두겨레임을 알게 하고 백두산과 단군선인, 추모성왕을 기리고 선조들의 뜻을 이어 이 땅에서 살아가는 기쁨을 즐기는것이다. 도선스님은 왕건과 궁예가 부디 고구려의 넋을 이어가길 바랬다. 그렇게만 된다면 누가 우두머리노릇을 하든 개의치 않는다. 그건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바라던바이기도 하였다. 사람은 뭘 알아야 움직이지만 안다고 해서 다 움직이는건 아니다. 때가 되고 환경이 주어져야 하였다. 도읍을 송악으로 정한 뒤 궁예의 기분은 둥 떴다. 왕건에 대한 칭찬으로 입이 마를줄 몰랐다. 《장군, 날을 잡아 잔치를 크게 차리는것이 어떻겠소이까?》 건이 궁예에게 물었다. 《좋지!》 《우리의 힘이 뻗치는 고을은 물론이고 그밖의 지경 사람들도 널리 불러들여 잔치를 베풀었으면 하오이다. 그래서 천하에 궁예장군께서 여기에 섰노라 하는것을 알렸으면 좋겠나이다.》 《왜 나만 있다고 그러느냐? 궁예이자 곧 왕건이다. 난 송악의 왕건이 천하의 인물이라는걸 호통치고싶다.》 《그런 말씀 마시오이다. 이 건은 다만 궁예장군의 한낱 부하일뿐이오이다.》 《어쨌든 좋아!》 궁예가 보는 건은 말이나 번지르르하게 하는 꾀바리가 아니다. 꼬집어 그게 누구냐 하면 궁예는 고마를 찍을것이다. 고마는 궁예에게 이것저것 귀띔하느라 하지만 실지 싸움은 해보지 못한 사람이다. 하지만 건은 달랐다. 궁예를 기쁘게 해주는 말도 말이지만 싸움에도 능했다. 그것이 더욱 궁예의 마음에 들었다. 《잔치를 언제 어떻게 하지?》 하고 궁예가 물었다. 《11월에 했으면 하오이다. 준비도 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하자. 무엇이 요구되냐?》 《제가 다 알아서 하겠소이다.》 《그래, 건아! 이 궁예에게 네가 생긴건 하늘이 보살핀것이다.》 궁예는 꽤나 좋아하였다. 집사는 마지막 수판알을 튕겼다. 그는 꼼짝않고 생각에 잠겼다가 한참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다시 무엇인가 멍하니 생각하다가 옷을 여미였다. 그는 도불을 찾아갔다. 《무슨 일이요?》 하고 도불이 집사의 낯빛을 보며 물었다. 집사는 눈을 내리깔고있다가 말했다. 《그저 보고만 있을수 없어 왔네.》 도불은 사리던 바줄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집사에게 다가갔다. 《말해야 알지요? 무슨 일인지…》 《도불, 나와 자네는 왕륭주인의 사람들이였지. 돌아가신 주인이 제일 믿는…》 《그래서?》 《왕륭주인이 애써 마련한 재산이 거덜나게 됐네.》 《무슨 소리인지? …》 《이것 보게. 젊은 주인이 성주로 임명되여 성쌓는 일을 벌리다나니 이럭저럭 재산의 절반나마 써버렸소. 그런데 젊은 주인은 남은것마자 다 써버리려 하오.》 《건이가?》 《그렇소.》 《모를 소리요.》 《전번에 젊은 주인이 나에게 말합디다. 팔관회를 크게 준비하라고…》 《그야 우리 형님도 생전에 한 말씀이였지.》 《그렇소. 헌데 젊은 주인은 그 팔관회를 여느 사람이 생각하는것처럼 그렇게 겉치레로 하려는게 아닌것 같소. 글쎄 제상이나 차리고 몇몇
사람들을 청해다 놀고 하는건 아무것도 아니지. 젊은 주인은 이 송악고을은 물론 패강진일대 사람들을 모두 모여들게 잔치를 벌리자는거요. 그러자면
남은 재산을 몽땅 털어넣어도 될가말가 하는 판이란 말이요. 잔치를 하고나면 전 주인이 남긴 재산은 밑창이 나게 돼있소.》 듣고보니 도불에게 스쳐지낼 일이 아니였다. 왕륭은 도불에게 아들 건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젊은 건이 이제 겨우 성주자리에 올랐는데
재산을 다 써버리면 앞으로 어떻게 한단 말인가. 재물이 없이 사람을 부린다는건 되지도 않을 소리다. 큰일은커녕 제 몸 하나 보존하기 어렵다. 물론 궁예의 부하가 되여서 그럭저럭 생기는것도 없지 않겠지만 그래도 제것이 있어야 하는것이다. 더구나 왕륭의 재산이란게 어떻게 마련된것인가. 몇대를 두고 모아진것이다. 그런 재산을 건이 다 날려버리려는것이다. 과연 옛말 그른데 없다.
3대 모은 재산을 한대에 말아먹는다더니… 강건너 불보듯 할수만 없다. 《나하고 함께 건을 만납시다.》 도불은 걷어올렸던 팔소매를 내리웠다. 건은 집사가 하는 말을 묵묵히 들었다. 《젊은 주인은 미처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같은데 사실 주인이 말씀하는대로 팔관회를 하자면 재산이 하나도 남는것이 없소이다. 빈털터리가 된다 말이오이다. 그러니…》 《걱정이 되신다면 집사어른의 몫을 따로 떼내도록 하시지요. 또 제 몫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몫도…》 건이 조용하게 말했다. 집사는 얼굴을 찌프렸다. 《성주님, 내가 제 생각이나 해서 그런다고 보시오이까?》 도불이 끼여들었다. 《내가 보기에도 건이 잘하는것 같지 않네. 요즘 세월에 제것 하나 없어가지고 대체 어쩔셈인가? 난 건이 큰일을 하리라는걸 의심하지 않네.
그럴수록 더 그렇지. 돈이 없어가지고 사람을 부릴수 없는게고 큰일도 할수 없는 법이지 않나.》 왕건은 크게 한숨을 쉬였다. 《도불아저씨! 집사어른! 어째서 제 마음을 그리도 몰라주시오이까? 저도 조상들이 남기고 아버님이 지키고 가꿔온 재산과 돈이 귀하오이다. 그렇지만 한푼 남지 않는다 해도 팔관회를 크게 해야 하오이다.》 《왜?》 도불이 물었다. 건은 답답한지 미닫이문을 열어놓았다. 그리고는 밖을 내다보다가 도불에게 돌아섰다. 《저는 궁예장군이야말로 고구려를 일떠세울분이라고 믿소이다. 이런분에게 무얼 아끼겠소이까? 저도 아버님의 유언대로 고구려를 다시 세우려
하오이다. 이 일은 궁예장군과 내가 한마음한뜻이 되지 않고서는 힘드오이다. 그리고 팔관회를 크게 하려는건 이 기회에 고구려 세울 뜻을 천하에 더 굳게 알리자는것이오이다. 팔관회는 이름이나 그럴뿐이지 실지는
고구려때의 잔치를 되살리는것이오이다. 그래서 날을 보름으로 잡았소이다. 지금 이 패강진일대의 호족들과 군사들이 신라를 반대해서 일어나긴 했지만 서로 제가끔이오이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세우자면 궁예장군을 크게 내세워야 하오이다. 그러자면 고구려때의 잔치를 열어 고구려를
되살릴 뜻을 굳게 해야 하오이다. 그리고 이건 저의 혼자생각인데 사람이 아끼는것이 있으면 자연히 마음이 거기에 쏠리게 되오이다. 나는 일단 궁예장군을 도와 고구려를 일떠세울 마음을 굳게 한것만큼 미련을 가질것을 싹 버린다는것이오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지지 않고서는 세운 뜻을 이룰수 없소이다. 병법에서 말하자면 배수진을 치자는것이오이다.》 집사는 어두운 얼굴빛을 풀지 못했다. 도불은 숨을 내쉬고 천정에 눈길을 주었다. 《건, 듣고보니 나살이나 먹은 내가 부끄럽구나.》 《절 리해해주시니 고맙소이다.》 《아니, 오히려 건에게 고맙다.》 잔치는 보름에 열렸다. 그날 송악고을은 사람들로 붐비였다. 패강진일대는 물론 멀리 삭주, 하슬라주에서도 모여왔다. 궁예를 따르는 사람들뿐만아니라 엇서나가던
사람들도 모여들었다. 그를 위해 건은 자기의 이름으로 잔치에 와주십사 하고 극진히 청했다. 하여 만조때 바다물 밀려들듯 사람들이 쓸어들었다. 송악고을이 생겨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들기는 처음이였다. 모이는건 사람의 산이요, 이르는 곳은 사람의 바다였다. 사람들도 각양각색이였다. 왕건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모여온 사람들도 있었고 송악고을에 보기 드물게 팔관회를 크게 연다는 바람에 호기심이
나서 구경하러 몰려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생각밖에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것을 보고 궁예는 은근히 걱정했다. 《혹시 이때를 타서 나쁜 놈들이 란을 일으키지 않을가?》 고마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일은 없을것이오이다. 패강진일대에 장군과 맞서 싸우려는 사람이 이제는 없소이다. 서뿔리 장담하는게 아니라 다 알아보았소이다. 그러니 마음을 놓으셔도 되겠소이다.》 그제야 궁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고마의 마음은 어딘가 모르게 야릇해지는것이 있었다. 무엇인가? 고마는 왕건이 자기의 재산과 돈을 다 털어 팔관회를 열 준비하는걸 보고 생각이 많았다. 고마는 그것이 고구려의 《동맹》잔치를 다시 연다는것 그리고 이 잔치에서 첫날 즉 소회(小會)날에 고구려때 하던대로 하늘과 선조, 겨레의 성산과 옛터를 향해 제사를
지내는것을 보고 못내 기뻐했다. 그것은 언제인가는 꼭 치르어야 할 그리고 길이길이 이어가야 할 잔치라는것을 잘 안다. 그런데 그것을 바로 젊은
왕건이 벌리는것이다. 선조가 이룩한 돈과 재물이 있어서만이 아니라 건은 젊은 사람인데도 그 씀씀이 크고 벌리는 일이 또한 웅심깊고 리치에
맞았다. 왕건이란 녀석이 결코 허술히 볼게 못되는구나. 그래서 그의 아비인 왕륭이 그랬구나 하고 고마는 심중히 생각했다. 왕건이 다만 혈기왕성한 때여서 그런가? 아니다. 고마는 자기와 왕건이 어딘가 다른데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고마가 다만 생각에 머무른것에
비해 젊은것이 실천하는것도 그래, 궁예를 대하는것도 고마와 다른데가 있다. 고마가 궁예를 도와준다고 하지만 돌이켜보면 궁예를 이끌어왔다. 그런데 왕건은 궁예에게 매혹되여 궁예를 진심으로 도와주는것이다. 이것이 고마와 왕건의 서로 다른 측면이다. 궁예가 과연 나긴 난 사람이다. 고마는 그런 점들을 다시 돌이켜보게 되였다. 그리하여 고마는 생각 같아서는 신령들과 명산대천에 제사드리는 일을 주관하고싶었지만 짐짓 사양하고 그저 제사를 구경하기만 했다. 마음 한구석은 어쩐지 쓸쓸하기도 하였다. 그는 왕건에
대해서 아무런 의견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기꺼이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주게 되지는 않았다. 팔관회는 옛 고구려의 《동맹》을 이을 잔치이긴 하였지만 따져보면 궁예를 위한것이기도 하였다. 궁예를 따르지 않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왕건이 차린 팔관회에 참가했으면 궁예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게 되였다. 이 팔관회를 총 주관하는 왕건이 바로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궁예를 좋게 보지 않던 사람이라도 형식상으로나마 궁예에게 고구려를 일떠세우기 위한 로고와 건강을 축하하지
않을수 없었다. 손님은 주인이 바라는대로 따라주는것이 도리였다. 고마는 그걸 보면서 자기의 마음이 어쩐지 편안치 않음을 깨닫고 놀랐다. 결코 질투는 아니였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기마련이다. 고마는 자기가 옳은지 그른지 종잡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씁쓸해졌다. 궁예는 팔관회에 참가하면서 기분이 여느때 비할바없이 둥 떴다. 비록 따분하게 뭐라뭐라 세 밝은님이 어쩌고 동명성왕 추모님이 어쩌고 하는것이며 가보지도 못한 불함산(백두산) 성산이 어쩌고 하는데는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왕건이 그래야 한다니 제사 주관하는 늙은이에게 따를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고 미처 얼굴도 모를 숱한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축하하고 건강을 비는것을 보자 으쓱해지고 즐거워졌다. 더우기 대회(大會)날에 하는 떠들썩한 가무들이 재미있었다. 궁예는 원래 가무잡기를 즐기는터인지라 그럴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때부터 불렀다는 《동동》노래가 궁예의 마음에 꼭 들었다. 덕으란 곰배에 받잡고 복으란 림배에 받잡고 덕이여 복이다 호날 나아라 오소이다 아으 동동다리 (덕을랑 높이 괴여드리고 복을랑 줄로 벌려드리고 덕이요 복이라 하기에 노래를 시작하나이다 아으 동동다리) 고구려때부터 내려온다는 칼춤과 활춤도 마음에 들었다. 비단에 수를 놓고 금과 은으로 장식한 화려한 옷차림을 해보기도 처음이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기뻐하며 따르는것도 처음인지라 기분이 좋은데다 가무잡기까지 곁들었으니 사람이 사는것 같았다. 술에 잔뜩 취한 대회날 저녁에 궁예는 왕건을 잡아당겼다. 《건아, 내 너에게 따로 보일게 있다.》 궁예는 품속을 뒤져 언제인가 세달사에 있을 때 주어 건사했던 그 뼈다귀를 꺼내 보여주었다. 궁예에게서 그 뼈다귀이야기를 들은 건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왜 그러느냐, 건?》 궁예가 건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까마귀는 검은 새이니 북쪽을 말하오이다. 그리고 뼈에는 분명 <임금 왕>자가 보이니 이는 하늘의 계시오이다. 이제 신라는 망하고 그 북쪽에 장군께서 나셨으니 마땅히 나라를 세우시고 임금이
되시는것이 하늘의 뜻에 따르는것이라고 보나이다. 이 왕건은 궁예임금님을 받들어 고구려를 세우려 하나이다. 부디 헤아려주시오이다.》 궁예는 아무 말도 안했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정해졌다. 건이 따라준다면 이 세상에 무서울것이 없었다. 《건, 나는 너를 내 눈으로, 내 염통으로 여긴다.》 《고맙소이다.》 왕건은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