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 회)
22. 비뇌성싸움 궁예는 송악으로 갔다. 왕륭의 쇠두레방문에 대한 답례였다. 례물과 호위군사들이 거의 5리에 이르도록 늘어섰다. 왕륭이 룡수산어귀까지 마중나왔다. 궁예는 왕륭과 만나 인사를 나누고 룡수산에 올라 송악일대를 바라보았다. 왕륭은 궁예가 이곳 송악에 도읍을 정하기를 바라고있기때문에 궁예가 유심히 산천을 둘러보는것을 기뻐하였다. 《저 산이 송악이요?》 궁예가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렇소이다. 래룡의 맥세(來龍의 脈勢-명당을 이루기 위해 멀리서부터 내려온 산의 모양새를 이르는 풍수용어)를 보면 저 발해의 불함산(백두산)을 조산(祖山)으로 하여 떠나 오관산을
종산(宗山)으로 삼아 뫼를 일구었으니 송악이 바로 그렇소이다. 도선스님께서 깨우쳐주시였소이다.》 궁예는 솔뫼를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웃으시오이까?》 왕륭이 물었다. 《아 아니오이다. 그저 저 뫼가 어쩐지 임신부가 누워있는 형세라…》 아닌게아니라 송악은 그런 형세였다. 왕륭은 못 들은척 하고 말을 이었다. 《청룡과 백호가 좌우를 둘러싸고 앞산이 중첩되여 명당을 호위하는데다가 사방산신이 혈을 철저히 옹위하는 산속에 으슥하게 숨겨졌으니 장군이 여기에 도읍을 정하오면 좋은 터가 될것이오이다.》 《장풍국(藏風局)이라…》 궁예는 중얼거렸다. 왕륭이 보건대 궁예는 풍수를 좋아하는듯 하나 어쩐지 그늘이 있는듯 하였다. 《장군은 다른 생각이 있으시오이까?》 왕륭이 물었다. 《아니오이다. 그저…》 좀 확-트이였으면 하는 심정으로 궁예는 얼버무렸다. 《그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장군께서 내 아들 건으로 하여금 여기에 성을 쌓게 하고 도읍을 정하시면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것이오이다.》 《그게 좋겠소이다.》 궁예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왕륭은 속으로 가벼이 숨을 내쉬였다. 궁예가 한창 패강진일대를 휩쓸고있을 때 북원의 량길은 또 량길대로 중원경, 서원경, 괴양을 비롯한 10여개 고을과 30여개 성을
차지하였다. 량길은 그러고나서 조심히 서울을 엿보면서 대세를 살피고있었다. 그런데 신라조정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병진년(896년)에 세칭 《붉은바지》농민군이라는 부대가 옛 백제지역인 지리산부근에서 들고일어나 여러 주, 현들을 치면서 신라 왕경서쪽 모서리인 모량리까지 진출하여 홍효사를 비롯한 사찰들을 습격하였는데도 조정에서는 겁에 질려 출병조차 하지 못하였다. 《이게 이제는 다됐다는 수작인가?》 량길은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생각하였다. 그러더니 정사년(897년)에는 녀왕이 선위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게 뭐야?》 량길은 눈을 굴렸다. 《됐다!》 하고 량길은 손벽을 쳤다. 무서운 룡이 죽어가고있다. 룡에게는 여의주가 있다. 그 여의주를 남먼저 손에 넣자. 그러면 이 량길이 세상을 호령하게 될게 아닌가? 량길은 대세가 돌아가는것을 보고 엉뚱하게도 신라조정을 쳐부시리라 생각했다. 당장에는 제노라는 견훤도 그런 엄두를 못 낼것이라고 으쓱했다. 약자의 본성이 강한자를 무서워하고 약자를 숫보는것이라고 하지만 또 병법에는 강적을 피하고 약자들과 싸우라 했으니 도대체 량길을 어떻게 보아야 할것인가? 그는 약자인가, 아니면 뛰여난 병법가인가? 하여튼 십여년동안 나라라는것이 썩을대로 썩어 툭- 하면 넘어질판에 이르러 마침내 녀왕까지 물러난 마당에 와서 량길이 어벌 크게 왕경을
치자고 생각한것은 기발하였다. 《참, 크신 결심이오이다.》 량길의 심복 마노가 감탄하였다. 《그런데 힘에 부치지 않을가? 우리 서른이 될가말가 한 성의 힘으로…》 량길이 눈을 가늘게 뜨며 걱정하였다. 원종, 애노의 반란도 있었고 《붉은바지》농민군의 공격도 있었는데 이번에도 서뿔리 되지 않을가 하는 걱정이다. 《왜 서른개 성의 무력만이겠소이까? 궁예의 무력도 있지 않소이까?》 마노의 소리에 량길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기른 범이란 말이야. 왜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전번 독화살로 그놈을 죽이려다가 실패한 뒤로는…》 《공연한 걱정이십니다. 세상의 리치라는게 은혜를 입은자 목숨으로 보답하게 되여있는 법인데 궁예라고 여기서 벗어날수 있소이까? 제가 그러지 않다가는 필경 죽음밖에 차례질게 없다는걸 모르지
않을텐데요.》 《그럴가? 내가 그에게 은혜를 입힌게 사실은 사실이지?》 《그럼요. 그건 세상이 다 알고있는건데요. 또 지금 궁예의 심복부하들이 다 북원출신들이 아니오이까?》 《그래, 그래.》 량길은 당장 큰일칠것 같았다. 그렇지만 속은 어쩐지 께름하다. 그놈의 외눈깔 궁예가 도무지 내려가지 않는다. 마노가 또 계책을 내놓았다. 《위엄을 돋구어서 궁예더러 신라 서울을 치는데 앞장서라 명령하시오이다. 그래놓고…》 하고 뒤말은 량길의 귀에 대고 수군거렸다. 량길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욕심만 굴뚝같아서 어제만 알고 오늘을 모르는 량길과 마노가 파멸의 첫걸음을 떼기 시작하였다. 궁예는 세번째로 량길이 보낸 글을 읽었다. 《나, 북원의 량길은 하늘이 도와 요즘에 중원경을 비롯한 30여개 성을 차지하였다. 군사는 정예하고 지경이 넓어졌다. 이제 와서 하늘은 나, 량길로 하여금 신라를 멸하게 하려 함이 불보듯 뻔해졌다. 하늘의 뜻이 이러함에 무엇을 또 주저하겠는가. 량길은 궁예에게 명령한다. 수하군사를 이끌고 북원에 합류하여 신라 서울을 멸하는 선봉장이 될지어다. 이는 우로는 천명에 복종하고 아래로는 인륜에 부합되는것이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 하겠는가. 신라 서울을 멸하게 되며는 그 공의 으뜸은 량길의 부하 궁예에게 내릴지어다. 알아서 받들지어다.》 궁예는 눈을 쪼프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볼 때마다 밸이 울컥울컥 나는 글이였다. 《같지않은게 제법 해라하는걸…》 30여개 성이 어쩌고 지경이 어쩌고 하지만 궁예가 차지한 땅에 비하면 새발의 피요, 보리의 껍질이다. 그 주제에 속은 살아서 뭐라뭐라 하니
이건 꼭 아래목 차지하고 채수염 떨며 가래소리 톺는 늙은이 그대로다. 너는 구새먹은 고목이요, 나는 햇잎나는 푸른 솔이다. 어찌 내가 너에게 이래라저래라하는 소리를 듣는단 말인가. 빌어먹을! 궁예는 주먹을 틀어쥐고 발을 굴렀다. 그럼, 량길을 뿌리치고 내 멋대로 할가? 뭔가 께름한것이 있어 궁예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거미줄이 온몸을 뒤덮었다. 그건 이른바 도덕이요, 례의요
하는 세상의 눈이였다. 생각 같아서는 량길이요 뭐요 당장 차버리고싶지만 세상의 눈이 은근히 두려웠다. 어쨌든 궁예는 량길의 군사를 빌어 몸을
일으킨 처지였다. 그것에 매여 밸을 부리고싶지만 그러지 못하는것이다. 궁예는 스스로 안타까웠다. 궁예는 세상의 눈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안다. 신라가 이 지경이 된것은 세상민심이 돌아섰기때문이다. 낱낱의 저주는 보잘것없지만
그것이 뭉치면 그때는 하늘도 어쩌지 못하는 불가항력이 돼버린다. 궁예는 알짜무식한 장수가 아니였다. 그것이 그의 장점이면서 약점이다. 물론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냅다 밀수도 있다. 일이 되고 안되는건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궁예는 그 결과를 하늘에만 맡길수 없었다. 될수록이면 제 뜻대로 일이 되게
하고싶었다. 세상의 눈도 눈이지만 당장 사상(부대장)들로 있는 부하들도 문제다. 그들은 다 량길의 북원태생들이다. 이때껏 궁예를 따르기는 하지만 그건 궁예가 량길의 선봉장이기때문이다. 만약 궁예가 량길에게 반기를 들면 모흔, 장귀평, 대검을 비롯한 사상들이 거꾸로 궁예에게서 돌아설수도 있다. 누가 알겠는가? 그것이 두려운것이다. 량길의 명령에 따를것인가 말것인가? 따르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치 않고 안하자니 부하들과 세상민심이 두려웠다. 궁예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고마는 처음부터 궁예를 살피고있었다. 궁예가 량길의 령을 어떻게 받겠는지 궁금하였다. 고마는 궁예가 내던지다싶이 한 량길의 글을 읽었다. 《어떻게 하시겠소이까?》 고마가 물었다. 궁예는 팔짱을 끼고 두서너걸음 걷다가 멈춰섰다. 《가야지.》 궁예는 입술을 내밀었다. 고마는 놀란 눈길로 궁예를 보았다. 《장군께서는 북원의 무력으로 서울을 공격하는게 옳다고 보시오이까?》 궁예는 거기까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가는가 마는가, 복종하는가 마는가만을 생각하고있었다. 《장군, 큰집이 무너져도 십년 간다고 했소이다. 신라가 멸망할건 뻔하지만 아직 이릅니다. 한다하는 견훤도 아마 그래서 결심하지
못하고있을것이오이다.》 《난 그렇게 보지 않네. 신라는 이제 다됐어. 량길의 판단이 설긴 했지만 때가 되였네. 다 익기를 기다려 떨어지는 감을 먹으려다가는 딴 놈에게 떼울수 있어. 신라를 멸망시키려는건 내 뜻이기도 하네.》 《그건 저도 반대없소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시오이다. 옛 고구려땅이 다 하나로 평정되였다 해도 또 모르겠는데 아직 우리는 그렇지 못하오이다. 민심이 아직 그렇게 되지 못했소이다. 그러니 우리는 하루빨리
옛 고구려땅을 차지하고 고구려의 얼을 불러일으켜야 하오이다.》 《고마는 량길의 명령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건가?》 《그렇소이다.》 《그럼 반기를?》 《량길과 갈라질 때가 되였소이다. 장군, 이제는 따로 우뚝 서시오이다.》 궁예는 고마를 쳐다보았다. 《배은망덕하라는건가?》 《장군, 큰것과 작은걸 가려보시오이다. 장군은 고구려를 다시 일떠세울 천명을 지니고있소이다. 례의요, 도덕이요, 인륜이요 하는게 사람
살아가는데 필요하지만 큰일을 하자면 때로 그것들을 무시하기도 해야 하오이다.》 고마는 진정으로 궁예가 그렇게 되기를 바랬다. 큰걸 이루자면 큰마음을 먹어야 한다. 큰마음을 먹으면서도 낱낱의 사건에 얽매여 어쩔줄
모른다는건 말도 되지 않는다. 이것은 궁예가 세상에 나가는가 마는가 하는 마지막굴레다. 그것을 잘 알기에 고마는 궁예의 태도가 어쩐지 근심되였다. 어차피 량길을 떼버리든가 아니면 깔고앉지 않으면 안된다. 설사 세상이 어쩌구저쩌구하는 도덕에 걸린다 하더라도… 그런데 궁예는 제 한몸만을 생각하는가? 체면, 위신, 도덕, 인륜… 거기에만 빠지면 결코 큰뜻을 이룰수 없다. 《량길이 괘씸하지만 그렇다고 반기를 들면 부하들이 나를 배반할거네.》 하고 궁예가 맥없이 중얼거렸다. 《그건 잘못 생각하고있소이다. 정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 부하들을 모아놓고 물어보시오이다.》 궁예는 고마를 한참 바라보다가 미심쩍은 빛을 버리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오래지 않아 김대검, 모흔, 장귀평, 장일 등 사상들이 모여왔다. 궁예는 그들에게 량길의 명령을 읽게 하였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궁예가 물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장군을 따르겠소이다.》 모흔이 말했다. 궁예는 부하장수들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북원으로 떠날 준비를 하게.》 고마는 한숨을 내쉬였다. 《정말 가시겠소이까?》 고마가 조심히 물었다. 궁예는 까딱않고 눈길을 내리깔았다. 《차비하는데 며칠이나 걸릴가?》 하고 궁예는 되물었다. 《한 사흘은 걸릴것이오이다.》 고마가 보건대 궁예는 별로 거기에 속을 쓰지 않는것 같았다. 고마는 궁예의 속궁냥을 알수 없었다. 어째서 량길의 거만한 명령을 선뜻 따르려 하는가. 아직도 궁예는 량길에게 어떤 미련이 있는가? 시내가 온 후 궁예는 그와 함께 잤다. 그러나 눈치를 보면 별로 좋아하는것도 아닌듯 하다. 《북원으로 군사를 돌리는건 아무래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겠소이까?》 고마가 지나치는듯 하며 슬쩍 비쳤다. 《왜?》 궁예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장군이 군사를 일으켜 지금껏 싸워온것이 무엇때문이오이까? 고구려를 다시 일으키자는 뜻이 아니오이까?》 《그렇네.》 《헌데 북원으로 군사를 돌리는것이 거기에 맞는것이오이까?》 《에돌아가는것도 있지…》 《내가 보기엔 그때문이 아닌듯 하오이다. 장군은 하슬라를 얻고 이제는 저족, 생천 등 여러 고을을 복종시켰소이다. 하지만 이것은
고구려부흥이라는 큰일을 위해 첫걸음에 불과하오이다. 지금 한창 우리의 힘이 한주의 서북부로 뻗어가는 판에 북원으로 군사를 돌리면 그건 마치
하늘로 날아오르던 새가 갑자기 날개를 접고 땅으로 떨어지는것과 같소이다. 기회는 얻기 힘든 법인데 장군은 어째서 큰일과 작은 일을 분별하지
못하시오이까?》 《량길의 령을 따르는것이 작은 일이란 말인가?》 《그렇소이다. 일단 전장에 나온 장수는 때로 임금의 명령일지라도 정황에 따라 듣지 않는 법이오이다. 하물며… 보건대 장군은 량길에게 빚진 심정을 이길수 없어 아직도 그의 명령을 따르는것 같은데…》 《그건 맞네. 고마의 눈은 속일수 없구만.》 궁예는 괴롭게 한숨을 쉬였다. 《난 누구에게 빚지고 사는걸 좋아하지 않네. 이제 힘이 좀 있다고 량길을 배반하는건 아무래도 꺼린단 말이야…》 해보는 소리인가? 아니면… 고마는 궁예를 유심히 훑어보았다. 《고구려를 일으키는 일은 큰일이고 지금 인정에 매인 장군의 심정은 작은것이오이다. 큰일을 위해서는 때로 남들의 손가락질 받는것도 각오해야
하오이다.》 《량길이 정말 신라 서울로 공격할 결심이라면?》 《그건 잘 알수 없는 일이오이다. 신라에 망조가 들었다 하나 북원에서 일어난 그들이 나라 서울을 공격한다는건 아무래도 무리입니다. 사벌주폭동도 그래, 또 견훤의 형세를 보아도 그렇소이다. 북원의 량길이 30여개 성을 쥐였다고 하나 그런 세력이나 가지고서는 왕경을 공격할수 없소이다. 한다고 해도 제가 보기엔 실패를
면할수 없소이다. 장군은 그런 일에 속을 쓸게 아니라 하루빨리 고구려의 옛터를 차지하고 힘을 키워야 할것이오이다.》 《고마의 말이 크게는 맞아. 헌데 량길이 신라 왕경을 공격하겠다는것도 그렇고 또…》 《또 무엇이오이까?》 하고 고마가 웃으며 물었다. 《내 부하장수가 거의 량길의 군사들이 아닌가?》 《그건 장군의 공연한 근심이오이다. 그들은 고구려얼을 일으키자고 장군을 따르는것이지 다른것은 없소이다.》 《그랬으면 좋지만…》 《전번 독화살사건도 생각해보시오이다. 그것도 량길의짓이라고 아니할 근거도 없소이다. 제가 알아본데 의하면…》 《독화살? 그래, 량길이 독화살을 쏘았다는 근거가 있나?》 《아직 확정할 근거는 잡지 못했소이다. 그러나 여러가지로 따져보아…》 《그렇다니까, 그래.》 궁예는 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들었다. 《어쨌든 이번엔 명령이니 가봐야겠네.》 궁예는 명령이라는데 힘을 넣었다. 그건 명령자체보다 앞으로 자기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를 즉 궁예의 명령을 어떻게 받아
집행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고마는 궁예를 돌려세우기가 어렵다는걸 깨달았다. 《그럼 척후를 보내여 경계를 강화하시오이다.》 《그러지. 고마도 같이 가야지?》 《예.》 고마가 간 뒤 궁예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파묻혔다가 권능순을 불렀다. 《능순, 난 군사를 북원으로 돌리려 하네. 량길은 신라 서울을 치자고 하는데 날 선봉장으로 삼겠다는거야. 자네 생각은 어떤가?》 능순은 심중하게 생각했다. 무딘 칼날 세울만큼 해서 능순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량길이 서울로 진격하는건 잘 모르겠소이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장군이 잘만 하면 량길의 군사를 그러쥘수 있겠소이다.》 능순은 찬웃음을 지으며 궁예를 보았다. 궁예는 눈을 끔벅거리며 능순의 말을 헤아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될 소리. 난 량길의 부하인데 어떻게…》 《그야 장군이 결심할탓이오이다. 까놓고 말해서 지금의 천하에 장군만 한분이 없는줄 아오이다. 장군이 북원경, 중원경까지 거느리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소이까?》 《자네 아첨하는구만.》 《군사일에 무슨 아첨이 있겠소이까?》 《좋지 않네.》 《장군, 북원으로 남하하면 량길이 쳐놓은 떡을 먹을수 있소이다.》 궁예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능순의 궁리는 궁예와 잘 맞아들어갔다. 그런데 고마의 말은 궁예가 쉽게 받아들일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그렇다고 고마의 말이 틀리는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래서인지
궁예는 권능순의 말에 귀기울일 때가 많았다. 궁예가 모흔, 장귀평과 같은 장수들을 믿지만 그들과 권능순을 대비할 때면 능순에게 더 기울어졌다. 모흔, 장귀평, 김대검들이 용맹한 장수들이긴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배우지 못한 무장들이고 권능순은 비록 신라의 벼슬아치이긴 하였지만 물계가 환한 인물이였다. 게다가 권능순은 궁예가 살려준 사람이였다. 궁예는 량길의 세력을 제 손탁에 그러쥐여야 하겠다고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그 세력에 영향을 미쳐 능순의 말마따나 잘하면 그렇게
되기도 하겠다고 생각이 미치자 은근히 기분좋았다. 《모레 북원으로 출발한다.》 하고 궁예가 선포하였다. 궁예의 5천 군사가 북원을 바라고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에 대해 궁예의 장수들이 얼떠름해있었다. 적이 없는 싸움이라 할가? 패강진을 누빈것은 신라세력을 때려눕히고 고구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한 싸움이였다면 이번은 어딘가 목적이 아리숭했다. 신라 서울로 진격한다는것이 군사행동의 목적이면 목적인데 그것에 대해 장수들은 별로 실감있게 느껴오지 않았다. 꼭 된다는 담보가 없는, 오로지 궁예가 말하지 않는 륙감을 위한 행군이라 할가… 모흔이 앞장에 섰는데 사실 궁예는 선봉척후에 별로 의의를 두지 않았다. 궁예는 이 남하자체가 위험이 있다고 꼬물만큼도 생각지 않았다. 궁예의 생애에서 이때만큼 막연하고 아리숭한 행동을 하게 된적은 일찌기 없었다. 떠난지 이틀째 되는 날이였다. 모흔이 궁예에게 달려왔다. 《이상한 군사를 잡았소이다.》 《관군인가?》 《아니오이다. 저희들은 량길의 군사들이라고 하는데…》 《우리 편이로구만, 뭘.》 《그런데 노는 꼴이 이상하오이다.》 《뭐가?》 《그들은 우리를 보자 달아나려고 했소이다.》 《우릴 관군으로 안게지?》 《우릴 알면서도 그랬소이다.》 《뭔가 잘못 알았겠지. 데려오게.》 모흔에게 잡힌 군사들은 량길의 군사가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하는 말은 궁예를 깜짝 놀래웠다. 《우리는 궁예의 부대가 지나간 다음 그뒤를 막으라는 령을 받았소이다.》 하고 붙잡힌 군사는 우물우물하며 말했다. 《뒤를 막는다?》 《그렇소이다.》 《그건 왜?》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는것이오이다.》 《무슨 소리냐?》 《우리 두령님은 궁예를 잡아죽여야 한다고 했소이다.》 《허튼소리!》 《아니오이다. 우리는 다른 부대와 합쳐서 비뇌성에서 북으로 가는 길을 막게 되였소이다.》 궁예는 코웃음쳤다. 량길이 정신나갔는가? 《그럴수 없다. 량길이 뭣때문에 나를 죽이려 한단 말이냐?》 고마는 미련해보이는 궁예를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고지식한가, 아니면 미련한가? 이튿날 아침에 신훤이 궁예를 찾아왔다. 그는 고마의 말을 듣고 량길의 동태를 알아가지고 왔다. 신훤이 하는 말을 듣고 궁예는 이마살을 찌프렸다. 《뭐, 뭐라구? 그게 사실이냐?》 《예.》 량길이 비뇌성에 무력을 집결시키고있었다. 신라 서울을 친다고 하지만 그보다 먼저 꾀하는것이 있었다. 다름아닌 궁예를 치자는것이다. 궁예가 제발로 찾아오면 더 좋고 오지 않는다 해도 궁예를 쳐서 제멋대로 날치는 기를 꺾어놓자는것이였다. 신훤은 그것을 국원성 성주에게서 알아냈다고 하였다. 《어찌하시겠소이까?》 고마가 물었다. 궁예는 차츰 선불맞은 범처럼 되여갔다. 얼굴이 검붉게 되고 이마에 피줄이 살아올랐다. 궁예는 고마를 돌아보았다. 《고마! 설마 량길이? …》 고마는 잠자코 있었다. 궁예는 성이 나서 오락가락하였다. 《장군, 이제라도 사람을 보내 그의 죄를 따지는것이 어떻겠소이까? 그게…》 궁예는 능순을 쏘아보았다. 《닥쳐라!》 《빨리 결심하시오이다. 우물쭈물하다가는…》 고마가 말했다. 궁예는 눈을 쪼프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량길! 네가 나를?》 하며 궁예는 칼을 빼들었다. 《량길을 치자!》 권능순이 나섰다. 《우리 군사들이 멀리 와서 지쳤소이다. 오늘 밤은 쉬게 하고 래일 아침 비뇌성을 치는것이 어떻소이까?》 궁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싸움이 길어진다. 량길의 속을 안 이상 속전속결해야 한다. 군사를 둘로 나누어 본대는 내가 이끌고 오늘 밤에 비뇌성을 치겠다.
다른 대는 고마가 이끌고 비뇌성을 우회하여 중원경, 북원쪽에서 오는 적을 막으라!》 《알겠소이다.》 고마와 능순이 명령을 받고 나갔다. 그날 밤에 비뇌성 성문에 궁예가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다. 《우리는 량길두령님의 령을 받고 오는 중원경의 부대다. 문을 열어라!》 성문을 지키던 군사들은 깊은 밤중이여서 미처 알아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었다. 궁예는 군사들의 앞장에서 돌격했다. 《량길을 잡아라!》 성안에는 아우성이 일었다. 싸움은 밤깊도록 벌어졌다. 새벽녘이 되여 량길의 군사들은 궁예에게 사로잡혔다. 궁예는 량길과 그의 아들, 측근들의 목을 베고 군사들은 자기 부대에 편입시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