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 회)
21. 뜻이냐, 패권이냐 여름에 궁예는 동량, 림강 두개 현을 들이쳤다. 야금야금 군사를 들이밀어 포위한 다음 한번 북소리로 벼락처럼 들이친 이 싸움으로 하여
《궁예부대》로 자처하던 무리들은 꼼짝 못하고 사로잡혔다. 《너희들은 누구냐?》 궁예는 잡힌 군사들을 노려보며 따졌다. 《우리들은 궁예장군의 부하들이요.》 《하하.》 궁예는 메마른 웃음을 터쳤다. 《내가 궁예다!》 그 소리에 사로잡힌 군사들은 어리둥절해져 서로 바라보다가 약속이나 한듯 무릎을 꿇었다. 《죽을죄를 졌소이다. 용서해주시오이다.》 《다시 묻는다. 너희들은 누구냐?》 《사실 우리는 한주 도독이 보낸 한산정군사들이오이다.》 궁예의 눈에서 번개불이 일었다. 《모조리 죽여라!》 서리발서린 궁예의 목소리가 무릎꿇은 군사들의 머리우로 지나 메아리되여 울리는듯 하였다. 궁예의 명령으로 하여 한여름의 산천이 얼어붙었다. 순간에 정적이 깃들었다. 모흔이 궁예곁으로 다가가 뭐라고 나직이 말했다. 궁예는 못마땅한듯 입술을 깨물었다. 《좋다. 우두머리가 누구냐? 나서라!》 무릎을 꿇었던 서너사람이 머리를 들었다. 《이놈이 두목이오이다.》 여럿이 소리치며 한사람을 끌어냈다. 《말이발》 순구였다. 궁예는 두무릎을 와들와들 떠는 순구를 노려보다가 턱짓으로 끌고 가라고 하였다. 사로잡힌 군사들이 웅성거렸다. 《장군! 저들을 어떻게 할가요?》 모흔이 한산정군사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때껏 궁예는 싸워이기면 사로잡힌 군사들을 모두 자기편에 받아들였다. 그러니 이들도… 하는 속심이 모흔의 말에 배여있었다. 궁예는 낯을 찡그렸다. 《군사는 필요하다. 그러나 살인악당들은 필요치 않다. 모조리 죽여라!》 궁예의 명령은 단호했다. 궁예는 《말이발》 순구와 또 몇명의 한산정군사들만 따로 왕륭에게 보내여 처리하게 하였다. 별안간 차례진 벼슬감투라는건 아무래도 미타하다. 분수있는 사람이라면 그런걸 피한다. 그러나 대개 어리석은 사람들은 덮어놓고 벼슬이나 권세를 좋아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머리우에 올려놓고 춤춘다. 그런데 그런건 오래 못 간다. 그리고 뒤끝도 좋지 못하다. 바로 그것이 죽는 날로 가는 지름길이라는걸 모른다. 《말이발》이 그러했다. 송악의 왕륭은 잡혀온 순구를 처음에는 몰랐다. 그러나 따져묻는 과정에 그가 자기네 배에서 일하다가 좀도적질하여 쫓겨난 사람이라는걸 알고 입을 하 벌렸다. 순구가 한짓이 놀랍고 한주 도독의 간특한
꾀가 놀라웠다. 부처님을 믿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왕륭이지만 징징 울면서 살려달라고 앞발뒤발 비벼대는 순구를 용서할수 없었다. 하마트면 큰일칠번 했다. 왕륭은 치를 떨었다. 순구는 그날로 목이 잘렸다. 왕륭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첫판부터 한주 도독의 꾀에 빠져 패했다. 그것은 왕륭에게 적지 않은 심리적타격으로 되였다. 《아버님, 적을 속이는건 싸움에서 첫째가는 꾀이오이다. 군사에서는 이기고지는 일이 보통 있는것이니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이다.》 하고 건이 말해서야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단지 속히웠다는 그것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을 두고 생각할 때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이때껏 장사에서 왕륭은 신의를 첫째가는 미덕으로, 재부와 치부의 수단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목숨을 내댄 싸움은 다르다. 그리고 서로 속이고 속히우는것이 인간세상에서 흔한 일이라는걸 새삼스럽게 느꼈다. 왕륭은 첫 싸움에서 패했다. 이것은 고마, 도선스님, 운각스님의 말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였다. 왕륭은 궁예에 대해서 다른 눈으로 보지
않으면 안되였다. 궁예와 힘을 합치자. 이렇게 왕륭의 생각은 천천히 돌아섰다. 《먼저 궁예를 만나보자.》 하고 왕륭은 큰숨을 쉬고 결심했다. 그런데 다음날 패강진을 지키던 보감 두칠이 말을 타고 송악으로 왔다. 《사찬! 궁예를 만나러 가신다는게 사실이오이까?》 하고 그는 미처 숨을 돌리지도 못하고 물었다. 《그렇네.》 보감의 얼굴이 금시 이그러졌다. 《제길, 이건 뭣이오이까?》 《무슨 일이 있었소?》 《사찬께서 궁예에게 간다는 소리를 듣고 염주군사들이 달아났소이다. 다른 사람들도 술렁거리고요. 궁예와 싸우기 위해 패강진에 왔지 궁예와 한짝이 되려고 온건 아니라는거지요.》 왕륭의 이마살이 찌프러졌다. 념불도 몫몫, 소뿔도 각각이라더니 이게 무슨 판인가? 뜻이 없고 다만 싸움열기만 살아있는 무리를 가지고 무슨 큰일을 할수 있단 말인가. 설사 무슨 일을 한다 해도 뭘 오래갈것인가. 그렇다고 일일이 따라다니며 왜 궁예와 어울려야 하는지 설명해줄수도 없지 않는가. … 《그래, 어찌겠다는건가?》 왕륭이 물었다. 《궁예를 만나러 가는건 다시 생각해주시오이다. 저도 그게 별로 좋아보이지 않소이다. 사내대장부가 한번 칼을 뽑았으면 피를 보는거지 싸워보지도 않고 머리를 숙이는건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게 되오이다.》 무엇때문에 싸우려 했는지 이 보감도 모르고있단 말인가? 보감이 이 정도면 아래사람들은 더 말할것도 없다. 옳고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먼저 싸워 상대를 꺼꾸러뜨리는것만이 제일이라는 이런 고집, 무지하고 따라서 어리석기 그지없는것이 바로 세상사란
말인가. 왕륭은 한숨을 쉬였다. 《이것 보게. 우린 고구려의 후손들이네. 우린 고구려를 일떠세우자고 싸우는것이지 그저 이기기 위해 무작정 싸우는게 아니지 않나. 왜 이걸 모르나?》 보감이 코살을 찡그렸다. 《뜻이요 뭐요 하는건 다 맹랑한 허울이오이다. 군사는 그런걸 몰라도 되오이다. 차라리 모르는게 편하오이다. 사느냐 죽느냐, 이기느냐 지느냐
이것만이 군사가 알아야 할것이오이다. 난 날적부터 싸움하는걸 익혀놔서 사찬의 말씀을 잘 모르겠소이다. 혹시 사찬께서는 궁예에게 겁을 자신게 아니시오이까?》 《뭐라구?!》 왕륭은 아연해졌다. 《하여튼 난 사찬께서 궁예에게 머리숙이러 가는건 반대하오이다. 그리 알아주시오이다.》 패강진 보감은 시펄뚱해서 돌아갔다. 왕륭이 믿는 도불도 좋지 않은 투로 말했다. 《형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했소. 형님은 나이가 먹어서 그런지 어지간히 나약해지셨소구려. 이때껏 그런줄 몰랐는데 웬 일이시오? 난
형님을 리해하오. 글쎄 동량, 림강의 일이 궁예가 한것이 아니라 합시다. 그게 어쨌다는거요. 난 궁예가 한산정군사를 잡아보낸걸 달리 보오이다. 궁예가 우릴 숫본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것이오이다. 그만큼 우리가 만만치 않다는게 아니겠소. 그러니 고구려를 위해 힘을 합치자고 한다면 나이로 보나 지체로 보나 궁예가
형님을 찾아오는것이 마땅하지요. 왜 형님이 두손 들고 가겠다는거요? 모르겠소. …》 《이것 보게. 도적질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고 했는데 하물며 큰일을 하자면서… 어찌 그리 속이 좁은가? 큰일을 위해서는 작은 일을 접어야
한다는걸 모르나? 알면서도 엇드레질해보는건가? 도불, 자네까지 그럴줄은 몰랐네.》 왕륭은 기분이 나빴다. 리해하고 따르려는 사람은 없고 저마다 제 뿔을 세운다. 이런 꼴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한다는건가? 실지 싸워이기면
좋겠지만 패한다면 그때는 또 어떻게 나올지… 모름지기 그때 가서는 왕륭을 원망할게 아닌가. 앞을 보지 않고 순 기분으로 해먹으려는 사람들이 흔히 그런 법이다. 《딴소리말고 가서 배군들이나 잘 다스려놓게. 궁예에게 내가 가고 안 가고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힘이 얼마나 센가 약한가 하는게 문제일세.
땅땅 뭉치지 못하고 제 배짱만 내세우는건 벌써 졌다는걸 보여주는거야. 알겠나?》 《알겠소이다.》 그 정도로 도불을 돌려세웠다. 왕륭은 괴로운 숨을 풀었다. 앞은 보려고 하지 않고 눈앞의 일만 가지고 울그락불그락하면서 저마다 제 잘났다고만 하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왕륭이 답답해서 아들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한주 도독과 싸우려고 하고 또 궁예와 싸우려고 했는데 이제 와서 궁예와 힘을 합치자고 하니 사람들이 삐뚤어지는건 탓할게 못되는줄
아오이다.》 《난 궁예 만나러 가는걸 묻는다.》 《저의 생각에는 나쁘지 않을듯 하오이다. 싸우든말든 한번 만나보시는게 좋을듯 하오이다. 이왕 궁예도 동량, 림강의 포로들을 보내왔으니…》 《사람이 이기는것만 좋아하고 지는걸 싫어하는데 난 그걸 탓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인것만큼 이기기 위해서 때로 지기도 하는것인데 그걸
알려고 하지 않으니 코막고 답답하구나. 난 너를 위해서도 궁예를 만나자는것이다. 필요하다면 머리를 숙이고 그의 밑에 들어가기도 하는것이다. 내 말을 알겠느냐? 나는 늙었고 너는 아직
젊다. 네가 군사를 좀 안다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실지 싸움을 해보지 못했다. 난 그게 걱정이다. 궁예는 이랬든저랬든 여러번 큰 싸움을 해본 사람이다. 네가 당장 장군이 되는것도 좋지만 궁예의 밑에서 싸워보는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앞으로를 위해서 말이다.》 《아버님의 뜻을 알겠소이다.》 《명심하거라. 고초를 겪어보지 않고서는 사람구실을 제대로 할수 없다. 난 너를 이때껏 부럼없이 키워왔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서는 큰일을
할수 없다. 너는 세상일에 부대껴보아야 큰일을 할수 있다. 이 며칠새에 난 그걸 느꼈다.》 왕륭은 어째서인지 아들 건에게 자기가 변명하고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털어버릴수 없었다. 아들에게 아비가 잘못하지 않았다는걸 애써 설명하는것
같은 자기의 말이 큰뜻을 이루려는 이때까지의 희망과 어긋나지 않지만 그래도 어쩐지 아들앞에 구차하게 변명하는듯 하여 저절로 이마살이 찌프러졌다. 고마의 말을 듣고 궁예는 눈을 치떴다. 《왕륭이 직접?!》 《그렇소이다.》 궁예는 한동안 굳어졌다. 그러더니 팔짱을 끼고 오락가락했다. 고마는 잠자코 궁예를 지켜보았다. 《왕륭이 온다? 이건 뭔가?》 궁예가 중얼거렸다. 《좋은 일이오이다.》 《너무 쉽게 되는것 같지 않나? 뭔가 이상하지 않아?》 고마는 속으로 웃었다. 왕륭에 대해서 궁예는 어딘가 겁을 먹고있었는가? 왕륭이 올줄 몰랐다는건가? 아니면 왕륭을 돌려세우기가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모르고있는가? 자칫했더라면 고마가 목이 잘릴수도 있었다. 그러나 궁예는 그걸 모른다. 고마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시겠소이까?》 고마가 물었다. 《찾아오면 만나야지. 뜻밖인걸…》 궁예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올랐다. 묘한 웃음이다. 고마가 보건대 그런 웃음은 궁예특유의 웃음이다. 흔히 볼수는 없지만 이따금 떠올리는
웃음인데 그 웃음은 궁예에게 어울리지 않는, 마치 철부지아이의 웃음같은것이였다. 《고마, 왕륭이 정말 오긴 올가?》 《옵니다.》 《나에게 손을 든다는거지?》 《아직은 그렇게 볼수 없소이다. 아마 장군을 만나보고 장군과 힘을 합치겠는지 그렇지 않겠는지 결심하려 할것이오이다. 이를테면 선을
보는셈이오이다.》 궁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륙감으로 그걸 알아. 왕륭은 어쨌든 나에게 항복하는거야. 내 륙감은 틀림없어, 틀림없다니까…》 《왕륭을 어떻게 맞이하겠는지 잘 따져봐야 하오이다.》 하고 고마가 심중하게 말했다. 궁예는 고마의 말을 귀등으로 듣고있었다. 왕륭이 찾아온다는 소식은 궁예의 마음속에 묘한 파도를 일으켰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들뜨기 시작하였다. 이때껏 궁예는 적수들을 많이 만났다. 대개 싸워서 이겨왔다. 그러나 왕륭은 다르다. 《장군, 왕륭을 어떻게 만나시겠소이까?》 고마가 다시 물어서야 궁예는 속을 눅잦혔다. 《뭘 어쩌구저쩌구할게 있나? 오면 만나는거지…》 《그렇지 않소이다. 왕륭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오이다.》 《그건 그래. 자네 생각엔?》 고마는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말했다. 《왕륭을 만나면 고구려 세울 뜻을 특별히 강조하시오이다. 그래야 왕륭을 얻을수 있소이다.》 궁예는 건성 고개를 끄덕이였다. 고마는 미타하게 궁예를 바라보았다. 궁예의 들뜬 마음을 리해하지만 그러고만 있다가 신중한 왕륭을 만나 일을 그르칠가 걱정되기도 하였다. 궁예는 고마가 거의 떠밀다싶이 해서 할수없이 왕륭을 마중나갔다. 생각 같아서는 쇠두레고을 자기 집에 앉아 왕륭을 맞이하고싶었던 궁예였다. 《그래서는 안되오이다.》 하고 고마가 성을 내서 궁예는 마지못해 웃으며 말을 탔다. 호위병들을 엄엄하게 따라세우고싶었지만 고마는 그것마저도 간곡히 말렸다. 《제길.》 궁예는 입을 삐죽이 내밀어보이고 악의없이 웃었다. 왕륭은 례물을 실은 수레 세차와 아들 건, 도불을 거느리고 궁예를 찾아왔다. 그는 궁예가 마중나오는것을 보고 긴장했던 얼굴을 풀었다. 왕륭이 말에서 내려 한무릎을 꿇고 고구려식으로 인사를 했다. 궁예도 얼른 말에서 내려 왕륭과 같이 인사했다. 《어서 일어서시오이다.》 궁예가 주인의 례로 왕륭의 팔을 잡아일으켰다. 《나이많은 어른이 여기까지 오시느라 힘드셨겠소이다.》 《장군을 뵈오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오이다. 이렇게 마중나와주셔서 정말 고맙소이다.》 《별말씀. 자, 어서 말에 오르시오이다.》 궁예와 왕륭은 말에 올라 쇠두레고을로 향했다. 궁예의 얼굴은 환해졌다. 두사람은 첫낯에 서로 좋은 감정을 가졌다. 궁예는 왕륭이 진심으로 자기를 높이 대해주는것이 기분좋았다. 어쨌든 왕륭은 벼슬이 작지 않은 한 고을의 사찬이다. 그것도 여느 사찬이
아니라 송악일대의 명망있고 재부가 있는, 고마의 말대로 바다건너 당나라까지 심심치 않게 다니는 그런 사람이다. 한눈이 병신인것으로 하여 첫낯에
업신여김을 흔히 받아온 궁예로서는 병적일 정도로 상대가 저를 어떻게 대해주는가에 몹시 예민하였다. 왕륭에게는 궁예를 숫보는감이라고는 꼬물만큼도 없었다. 그것으로 하여 궁예는 마음이 즐거워졌고 마음이 즐거워지자 사람됨이 선량해졌다. 왕륭은 왕륭대로 궁예를 좋게 보았다. 어쨌든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조폭하고 막돼먹은 사내로 알고있었는데 만나보니 그렇지 않았다. 한눈이
없는것은 별문제다. 이 사람이 수천 군사와 3주(三州)의 넓은 땅을 차지하고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씩씩하고 상냥한 호남아로 안겨왔다. 얼굴생김이나 체력을 보아도 궁예에게는 왕륭이 싫어하는 그런 구석이 없었다. 게다가 궁예를 더 좋게 생각하게 되는것은 궁예의 부하들이였다. 하나같이 빼여난 사나이들이 궁예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복종했다. 그것은 궁예라는 인간의 됨됨을 보여주는 중요한 측면이였다. 배속에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있는지는 몰라도 첫낯에 이렇게 두사람이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지는걸 보면 이들의 만남이 례사롭지만은 않다. 궁예와 왕륭은 기분이 좋아서 쇠두레고을 이전 관아로 갔다. 거기서 왕륭은 가져온 례물을 궁예에게 넘겨주었다. 소문그대로 송악고을의 호족답게 왕륭은 례물도 남다른것으로 마련했다. 옻칠한 통 몇개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수천금에 못지 않게 값이 나가는것이였다.
고마가 궁예에게 례물의 하나하나를 설명해주었다. 그러지 않아도 궁예는 그것이 궁중에서나 쓰이는 값나가는것들이라는걸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궁예는 그 례물을 보면서 좋아하였지만 왕륭이 보건대 그렇다고 해서 그런 례물에만 눈이 팔린건 아니였다. 궁예는 례물의 하나하나를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그에 대한 욕심보다 그걸 가져온 왕륭에 대하여 더 고맙다는 표정을 잊지 않고 보여주었다. 왕륭에게는 딱히 뭐라고 설명할수 없는 그런 궁예의 태도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례물의
가치를 알아주면서도 그런 례물을 가져온 사람에게 섭섭치 않게 감사를 보낼줄 아는 궁예를 보면서 왕륭은 이 사람이 범상치 않다고 셈을 하였다. 《고맙소이다, 사찬어른!》 《마음에 드시겠는지 모르겠소이다.》 왕륭은 례의에 어긋나지 않게 대답했다. 《나는 사찬어른의 그 성의가 더 고맙소이다.》 《그렇다면 저도 장군에게 감사하오이다.》 두사람은 마주보며 웃었다. 궁예는 왕륭을 잔치상으로 이끌었다. 인간이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한 이른바 외교와 정치는 필수적이다. 이 외교와 정치라는건 대개 말과 음주를 수단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인간생활에 말과 글, 술과 음식이 그 어디든 안 쓰이랴만 특히 외교와 정치란 어쨌든 이 말과 글, 술과 음식에서 그
성패가 왔다갔다한다고 볼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 없다. 말과 글이란 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또 듣고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툭해 다르고 탁해 다른게 말이고 하나의 점, 획에 따라 달라지는게
글인데 이런걸 수단으로 하는 외교에서 좋고나쁘고, 되고 안되는것이 실로 천태만상이라 오묘하다고 볼수 있다. 뻔히 될 일도 안되고 안될 일도 되는 이런 사귐에 재미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는것이다. 궁예와의 첫 만남에서 왕륭이 무엇을 좋게 보았는지, 어째서 궁예에게 호감을 가졌는지 구체적으로 파고드는것은, 그래서 딱히 이것이라고
밝히는건 힘든 일이다. 대체로 동양사람들은 상대를 높여주고 자기를 낮추는것을 겸손이라고 하며 미덕으로 치는데 여기에는 될수록이면 자기의 의도를 숨기려는 엉큼한 꾀도 들어있지 않다고 말하기 어렵다.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보이는것이 서로 사귀는데서 기준이라고 볼 때, 있는
그대로보다 더 낮추어 어리석은체 한다든가 반대로 있는 그대로보다 더 높여 호언장담하여 너털대는것은 그것이 천성이든 아니든지간에 또 알고 그러든
모르고 그러든지간에 다 꾀에 머무른다고 할수 있다. 《궁예장군의 명성은 한주, 삭주에 자자하여 이 왕륭도 들었소이다. 이렇게 뵙게 된것이 영광이고 이번에 장군에게서 싸우는 법과 큰 경륜을 배우고저 하오이다.》 왕륭은 어쨌든 상대를 춰주는 말을 했다. 이것은 일상의 례절이고 왕륭자신이 옳다고 보는 대화였다. 《난 고구려를 다시 일떠세우자고 한몸 일으킨 사람이오이다. 명성이요, 경륜이요 하는건 분에 넘치게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오이다.》 궁예가 실지 그렇게 생각하는지 또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하겠는지는 모르지만 왕륭의 춰주는 말에 타박을 주는듯 한 말이였지만 왕륭으로서는 기분좋은 소리였다. 《나는 원래 한주관아를 치려고 했소이다. 내가 한주를 차지하면 송악 사찬도 어차피 굴복하리라 생각했소이다.》 궁예의 이 말은 술먹고 한 소리가 아니였다. 《그런데 고마가 말려서 다시 생각했소이다. 사찬어른께서 나와 싸우려고 했다는건 모르지 않소이다. 그래서 나도 사찬어른과 싸우려고 했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 둘 다 기세가 꺾이게 될가봐 그만두었소이다. 누가 이기고지는건 문제가 아니오이다.》 궁예는 솔직하게 말했다. 다만 고마가 일깨워준 말을 제 말이라고 했다. 왕륭은 궁예처럼 솔직하게 자기의 속생각을 비치지는 않았다. 그저 엷은 웃음을 짓고 고개를 끄덕이였다. 《란세에 벼슬아치들이란 하나같이 더러운 제 목숨이나 살리려는 돼지같은 놈들이고 거기다 꾀까지 반질반질한 구미여우들이지요. 난 원래 란세의
벼슬아치들을 믿지 않소이다. 그것들을 증오하지요. 어른께서도 사찬벼슬이 있으니 례외가 아니지요.》 술이 몸에서 퍼지기 시작할 때 궁예가 한 말이였다. 왕륭은 궁예의 말을 거절할 생각을 못하고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는 궁예가 순수하고 솔직하다고 좋게 보았다. 비록 자기는 이
사람사는 세상, 더우기 란세에 이르러 그럴사한 의관을 쓰고있는게 나쁘지 않다고 보아 돈주고 사서 벼슬을 하긴 하지만 궁예의 말을 들으니 그것도
보신에 지나지 않았다. 궁예는 젊고 왕륭은 늙었으니 서로의 견해에서 차이가 없을수 없는데 왕륭은 어째서인지 궁예의 말을 좋게만 들었다. 왕륭은
확실히 궁예에게 끌려들고있었다. 갖은 세파를 다 겪으면서 그래도 내노라 하던 왕륭이 궁예를 이렇게 높이 산걸 보면 궁예가 어쨌든 당대의 영웅이라
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이 고마의 말을 듣건대 사찬어른께서는 재산도 있고 명망도 송악과 패강진일대에 뜨르르해서 장차 고구려를 일떠세우시려 한다던데… 그래 이
궁예가 쑤셔놓지 않았다면 앞으로 어찌하실 차비였소이까? 언제까지나 대세가 돼가는걸 구경하시면서 남의 불에 게 구워먹을 생각이였소이까?》 궁예의 말은 왕륭의 기분을 잡쳐놓는 소리였다. 아들 왕건과 도불의 낯색이 변하는것만 봐도 그랬다. 하지만 왕륭은 발끈하는 성미가 아니여서 궁예의 다음 말을 또 들었다. 《고구려를 세우는 일은 뜻이나 말로 가지고는 안되오이다. 누구든 몸을 내대고 싸워야만 되는게 아니겠소이까.》 어지간히 취해서 제 자랑하는 소리였지만 왕륭에게는 또 궁예를 높이 사는 말이였다. 그건 사실이기때문이다. 취중에 객담도 있고 진담도 있다.
왕륭은 궁예의 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왕륭자신이 오래동안 생각해온것이고 또 자기의 약점이라고 스스로 혀를 깨물던것이였기때문이였다.
다만 아들 건이 나서서 하는 조건이 있었지만 그것도 이 자리에서 따져보면 하나의 구실이요, 변명으로 될것이다. 《내가 하다 못하면 아들 대에라도…》라는 말이 원대한 뜻을 실천하는 과정의 장구성과 간고성을 예견하고 기어이 이룩하겠다는 의지도 있지만 자칫하면
바로 내가 할 일을 남에게 떠맡기는 보신과 안일로 내비칠수도 있었다. 《고구려얼이 나라가 있다고 해서 있는것도 아니고 나라가 없다고 해서 없는것도 아니지요. 그렇지 않소이까, 사찬어른! 백성의 뜻은 곧
고구려의 얼이라 이 땅이 비록 신라의 다스림을 받지만 얼은 언제나 고구려의 얼이오이다.》 궁예의 말은 마치 산골짜기에 맑은 물이 흐르듯 하였다. 그것이 고마가 궁예에게 해준 말을 궁예가 되뇌이는것이긴 하지만 왕륭에게는 뜻이 깊은 말이였다. 궁예는 결코 무지한 장수가 아니였다. 그는 아는것도 많고 말도 잘했다. 술이 들어가니 더했다. 어딘가 제 말만 말이라고 떠벌이는감도 없지 않지만 그건 지혜와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서 흔히 볼수 있는 일이여서 구태여 궁예의 약점으로 비쳐지지는 않았다. 《장군께서는 이 신라가 어찌될것 같소이까?》 왕륭이 물었다. 《망하지요. 망하지 않을수 없지요. 이전에 신라가 당나라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망하게 하였기때문에 고구려의 평양이 황페해져 풀만 무성하게 되였소이다. 나는 반드시 그 원쑤를 갚고야말겠소이다. 신라는 그것이 자기를 지켜내기 위한 꾀라고 하지만 고구려사람들에게는 원쑤의짓이지요. 죄는 지은데로 가기마련이니 신라가 망하지
않을수 없소이다.》 《서남쪽의 견훤이 후백제를 세웠는데 그건 어떻게 보시오이까?》 《내가 일전에 백제는 고구려의 한갈래라 나라가 다르더라도 고구려나 같다고 하였지요. 하지만 이 궁예는 신라를 멸망시키고 백제를 눌러 이
땅의 남쪽을 하나의 고구려로 만들 결심이오이다. 나라는 임금과 벼슬아치들의것이라지만 얼은 백성들의것이지요. 고구려의 얼이 있는 한 신라나 후백제 같은 쪼꼬만 땅덩어리들을 하나로 만드는것이 무엇이 그리 어렵겠소이까.》 《과시 장군의 뜻이 크오이다. 이 왕륭은 장군을 돕겠소이다.》 《그러시다면 고구려를 위해서 다행이오이다. 그러나 이 궁예나 왕륭어른이 할 일은 다르오이다. 이 궁예는 신라나 후백제를 평정하는 일을 할수 있겠지만 그걸 다스리는 일은 사찬어른께서 하시오이다.》 궁예는 반쯤 꾀부리는 소리를 했다. 결국 궁예는 군사로 선봉에 서서 뜻을 이루겠으니 왕륭더러 그 열매를 챙기라는 소리였다. 그게 진담일가? 왕륭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무슨 말씀, 저는 그저 장군의 노복이 될가 하오이다.》 하고 왕륭은 웃었다. 《그러지 마시오이다. 난 원래 벼슬아치를 싫어하지만 나라를 다스리자면 어차피 벼슬아치들이 있기마련이니 그런 벼슬아치들을 왕륭어른이
다스렸으면 하오이다.》 듣기에 따라서 군사와 내무를 갈라보자는것인데 어찌 보면 왕륭을 떠보는 말일수도 있다. 권력을 나누어가진다는건 도대체 있을수 없는 일이다.
그건 력사가 가르치는것으로 욕심이 하늘땅같은 인간의 약점이기도 하였다. 《나에게 쓸만 한 아들이 있는데 장군께서 곁에 두고 부리지 않겠소이까? 저는 나이도 많으니 물러나 뒤나 보태겠소이다.》 왕륭의 말에 왕건이 궁예에게 절을 했다. 궁예는 찬찬히 왕건을 살펴보고나서 다시 왕륭에게 말했다. 《송악 사찬의 아들이 뛰여났다는 말은 들었소이다. 이렇게 만나고보니 틀리는 소문이 아니군요. 그러나 아들은 아들이고 아버지야 아버지이지요. 사찬어른께서 익성태수를 맡아주시면 이 궁예는 마음놓고 신라를
멸하는 일을 맡겠소이다. 어떻소이까?》 《익성태수를 말이오이까?》 《그렇소이다.》 《고맙소이다. 힘껏 해보겠소이다. 그런데 한가지 말씀드릴건 장군께서 장차 고구려를 세우려고 한다면 송악에 도읍을 정하심이 어떠하실지…
송악은 저의 터가 되여서가 아니라 나라의 도읍이 설만 한 명당인줄 아오이다.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하시면 큰일을 이룰수 있소이다.》 《사찬어른께서 그렇게 보신다면 좋소이다. 나도 한번 송악에 가보겠소이다.》 잔치는 밤늦게야 끝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