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회) 

 

20. 솔뫼에 떠오르는 별들

 

왕륭의 무력이 벌써 수천에 이르렀고 시각이 흐를수록 더 커진다는 첩보가 쏜살같이 궁예에게 전해졌다. 궁예는 산사태나듯 하는 왕륭의 세력에 뜨끔했다.

만약 왕륭이 정말 궁예와 싸우려들면 아무리 전승을 자랑하는 궁예로서도 이기기가 쉽지 않을것이다. 아니, 자칫하면 그 산사태에 깔리울수 있다.

고마의 말이 옳았다.

궁예는 황급히 고마에게 갔다.

《어쩌면 좋겠나?》

궁예는 한주 도독이 내돌린 공문을 보다가 고마에게 물었다.

《왕륭이 한주 도독의 공문대로 한다면 우리로서는 랑패이오이다.》

《그래, 참 놀라운걸… 이 땅에는 귀신이 붙었는가?》 하고 궁예는 중얼거렸다.

《장군, 이제라도 늦지 않았소이다. 왕륭에게 좋은 글을 써보내시오이다. 제가 다시 왕륭에게 가겠소이다. 왕륭과 싸우는건 우리에게 불리하오이다.》

《고마의 말이 옳소이다.》

권능순이 뒤에 있다가 궁예에게 말했다.

궁예는 우두커니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이였다.

 

말을 탄 무리가 한가하던 동량현에 들이닥쳤다. 쇠두레고을 남쪽 즉 칠중하(림진강) 동쪽에 자리잡은 동량은 갑자기 살기가 뻗쳤다.

말을 탄 무리들은 칼을 휘두르며 부락을 들이쳐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재물을 략탈하였다. 사방에서 불과 연기가 치솟고 사람들의 아우성이 터졌다.

말을 탄 무리들은 사람들을 한곬에 몰아넣었다.

현의 사람들은 겁에 질려 불한당들을 바라보고있었다.

말탄 무리에서 우두머리가 나섰다. 외사정 순기의 동생 순구였다.

《우리는 궁예장군의 부대다. 너희들가운데 저 송악고을 왕륭의 친척되거나 잘 안다고 하는 놈들은 나서라!》

순구의 호통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몇사람이 영문을 모른채 주저하며 나섰다.

《이게 다야? 숨기고 나서지 않으면 몽땅 죽인다.》

그렇게 되자 또 몇사람이 나섰다.

순구는 이를 사려물고 나온 사람들을 쏘아보았다. 그가 손짓하자 칼을 빼든 군사들이 앞에 나선 사람들을 강기슭으로 몰아갔다.

《여보시오, 우릴 어찌자는거요?》

머리 허연 사람이 소리쳤지만 군사들은 들은체만체 하였다.

순구는 피비린내를 맡고 껑충거리는 말우에서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송악 왕륭이 한주 도독과 짝자꿍이해서 우리 궁예장군의 부대와 맞서려 한다. 우리는 그저 참고있을수 없다. 우린 맞설자 없는 불패의 궁예장군의 군사들이다. 우리와 맞서려는 놈들이 어떻게 되는지 봐라!》

군사들은 강가에 끌려나온 사람들에게 칼과 창을 휘둘러 눈깜빡할 사이에 스무나문명의 사람들을 죽였다. 피가 흘러 강물에 퍼졌다.

순구의 무리는 남은 사람들을 놓아주고 절반인원을 머무르게 한 다음 다시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들은 강을 건너 천광산을 넘었다.

그들은 사미천상류인 림강에 들이닥쳐 동량에서와 같은짓을 벌리고 거기에 진을 쳤다.

이렇게 되자 궁예의 부대가 왕륭과 싸우려고 쇠두레고을에서 남하하여 동량을 빼앗고 송악으로 가는 길의 림강을 차지했다는 소문이 퍼져갔다.

송악으로 가는 길에 자리잡은 마을들은 언제 궁예가 들이닥칠지 몰라 겁을 먹고있었다. 왕륭과 자그마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은 보따리를 싸가지고 송악으로 달아났다.

그런데 웬 일인지 순구의 무리는 더이상 날치지 않았다. 그럴 군사도 없거니와 다른 목적도 없기때문이였다. 순구는 왕륭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과 한주 도독의 얼러춤에 한번 으쓱거려본것만으로도 시원하였다. 그는 이전 한산정부대를 둘로 나누어 동량과 림강에 진치게 하고 거기서 주인노릇 하는것이 만족했다. 그는 세상이 어떻게 가는지 도무지 모르고있었다.

궁예는 송악으로 가려는 고마에게 물었다.

《군사들을 붙여줄가?》

《됐소이다.》

《왕륭이 고마가 어떤 사람이라는걸 아나?》

《아오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 생각을 해서라도 여라문명 호위삼아 데리고 가게.》

《차라리 혼자 가는게 낫소이다.》

《그럼 할수 없지. 부디 잘 갔다오게. 일이 잘되여야겠는데…》

《마음놓으시오이다.》

고마는 궁예와 능순의 바래움을 받으며 길을 떠났다.

도중에 한사람이 기다리고있었다.

복사였다.

《자네가 어떻게?》

《어쩐지 이번 길이 마음에 들지 않소이다. 함께 가게 해주시오이다.》

《걱정말게.》

고마는 복사에게 웃어보이고 말을 몰았다.

산기슭의 길을 가던 고마는 저 멀리 송악산이 바라보이는 곳에 이르러 말을 세웠다.

길가에 서너사람이 지키고있었다.

고마는 그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길을 지키던 사람들이 창과 칼을 뽑았다.

고마는 그들가운데서 낯익은 사람을 보았다. 그를 왕륭의 집에서 보았다.

《서라!》

길을 지키던 사람들속에서 낯익은 사람이 막아섰다.

《무슨 일이요?》

고마가 물었다.

《어디서 오는 사람이요?》

왕륭의 사람이 무표정하게 물었다.

《난 왕륭어른을 만나러 가는 사람이요. 날 모르겠소?》

《모르오.》

뜻밖에도 왕륭의 사람은 모르쇠부렸다.

《그것 참, 왜들 이러우?》

《묻는 말에나 대답하시오. 어디서 오는 사람이요?》

고마는 그를 보며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쇠두레에서 오우.》

길을 지키고있던 사람들이 무슨 신호라도 받은듯 부쩍 긴장해지며 병쟁기를 다잡았다.

《그러니 궁예에게서 온다, 그 소리요?》

《그렇소.》

고마의 대답이 떨어지기 바쁘게 낯익은 사람이 소리쳤다.

《묶어라!》

《여보시오, 뭔가 잘못 아는것 같소. 나는…》

길을 지키던 사람들은 고마의 말은 아랑곳없이 그를 말에서 사정없이 끌어내리고 삼바로 묶었다.

고마는 꼼짝 못하고 왕륭에게 끌려갔다.

왕륭의 덩그런 큰집은 쑤셔놓은 벌둥지같았다.

고마를 개몰듯 하며 왕륭에게 세웠다.

왕륭은 여느때와 달리 허리띠에 칼을 차고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왕륭처럼 칼을 찬 사람들이 둘러서있었다.

《어른! 궁예의 세작을 붙잡았소이다.》

고마를 끌고 온 사람이 말했다.

왕륭의 눈길이 날카로워졌다.

《고마?》

《그렇소이다.》

고마는 왕륭이 이제 자기를 풀어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륭은 고마를 처음 보듯이 아래우를 훑어보았다.

《사찬어른, 저를 모르시겠소이까?》

왕륭은 딴소리를 했다.

《난 자네를 신라의 서울에 번살이로 보냈네. 한주 도독의 번살이라 하지만 그래도 례물과 돈을 내가 주었어. 왜 그랬을것 같나?》

고마는 갑자기 왕륭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수 없었다. 다만 왕륭과 왕륭의 집 그리고 여기에 모여온 사람들이 이전과 달라졌다는것만은 명백했다. 그것은 고마에게 아주 위험하게 느껴졌다.

《난 내 일을 해주길 바랬네. 그런데 자넨 딴 사람의 일을 했지?》

소리치는건 아니지만 서리발이 돋아있는 왕륭의 말이였다.

《은혜를 배반했겠다?》 하고 왕륭이 되뇌였다.

《사찬어른, 뭔가 잘못 아시오이다. 돈과 재물로 일을 시키는건 은혜가 아니오이다.》

《뭐라구?》

왕륭의 뒤에 섰던 날파람있게 생긴 사람이 고마를 후려쳤다.

고마는 욱-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꼬꾸라졌다. 코피가 터지고 입안에 금시 걸죽한 피가 고였다.

《형님, 이런 놈과 수작을 하는게 애당초 잘못이오이다. 당장 죽여버립시다.》

고마를 친 사람이 칼을 빼들었다.

왕륭이 손을 들어 그를 말렸다.

《고마, 자네 말이 옳아. 그럼 말해보게. 자넨 궁예의 끄나불인가?》

《난 궁예장군을 도와주오이다.》

《그렇다?》

《사찬어른, 난 아직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는지 모르겠소이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소이까?》

《이놈이 죽지 못해 악발이냐?》 하고 고마를 때린 사람이 불뚝거리며 나서는걸 왕륭이 막았다.

《모른다면 대주어야지.》 하며 왕륭이 비웃으며 말하고 돌아섰다.

《그 사람을 데려오게!》

인차 방으로 한사람이 들어왔다. 눈이 퀭하고 어깨등어리가 굽은 중늙은이인데 그는 비척거리며 걸었다.

《사찬어른, 절 불렀소이까?》

《그렇소. 이 사람에게 자네가 겪은 일을 다시 말해보게.》

왕륭이 중늙은이에게 고마를 가리키며 일렀다.

중늙은이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에는 공포가 어렸다.

《싫소이다, 싫소이다. 억이 막히는 그 소리를 하고싶지 않소이다.》

《해야 하네.》

왕륭은 눈을 쪼프리며 말했다.

그러자 중늙은이는 왕륭을 놀랍게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며 가슴을 쳤다.

《궁예… 그놈이 군사를 풀어 우리 고을을 치지 않았겠소이까? 재물을 닥치는대로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서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어이구 사람의 피가, 피가… 강, 강물처럼 흘렀소이다.

그놈들은 늑대나 승냥이보다 더한 놈들이오이다. 그것들은 왕륭어른의 친척들이거나 인연이 있는 사람이면 어른, 아이 할것없이 모조리 죽이니…》

그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지며 흐느껴울었다.

방에는 찬서리가 감돌았다. 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자, 이젠 알겠소?》

왕륭이 서슬푸른 낯빛으로 고마에게 물었다.

고마는 쑤시는 아픔이 얼굴에 몰려들어와 뺨을 떨었다.

일이 어찌되였는지 비슷이 알겠다.

너무 뜻밖의 일이였다. 궁예가 고마도 모르게 그런짓을 저질렀단말인가? 고마는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궁예가 동량, 림강 두 고을을 치고 나를 아는 사람들을 무참히 죽이였다. 이 왕륭을 치겠으면 정정당당하게 싸움을 걸것이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면서 만만한 고을을 쳐? 짐승보다 못한 놈들!》

《형님, 이러쿵저러쿵할것 없소이다. 당장 궁예를 칩시다.》

고마를 때린 사람이 목에 피줄을 돋구며 웨쳤다. 방에 몰려온 사람들이 모두 주먹을 흔들었다.

왕륭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이였다.

도불이 나섰다.

《형님, 저 궁예의 끄나불을 죽여버리고 궁예 칠 일이나 맞추어 봅시다.》

그는 고마의 멱살을 잡고 당장 칼을 내려칠 차비였다.

갑자기 젊은 왕건이 도불의 앞을 막아섰다.

《도불아저씨! 그냥 두시오이다.》

《건! 비켜라!》

《사람을 죽이는건 바쁘지 않소이다.》

왕륭과 사람들의 눈길이 왕건에게 쏠렸다.

도불은 못마땅한 눈길로 왕건을 쏘아보았다.

《건! 예로부터 싸우기 전에 무엇보다 싸울 의지를 갖추라 했어. 자비따위는 싸우는데 필요없어. 피를 보지 않고서는 싸워이길 독한 마음을 먹을수 없는거야. 알겠니? 비켜라!》

《이러지 마시오이다. 우리에겐 지금 궁예의 의도를 아는것이 필요하오이다.》

건의 말에 도불은 주춤했다.

왕륭은 아들의 말을 리해했다. 그리고 또 다른것도 고마에게서 알아보고싶었다. 결이 난다고 해서 맨발로 바위를 찰수는 없다. 이번 일은 너와 나 이렇게 일대일의 싸움이 아니고 수천의 군사들과 군사들이 맞붙는 싸움이다.

《도불, 건의 말에 일리가 있네. 내 따로 저 고마와 셈할게 있네.》

왕륭은 고마를 딴 방으로 끌고 가게 하고 다시 제 사람들과 마주앉았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 마음을 맞추고 싸울 준비를 하여야 했다.

패강진의 보감과 여러 군의 태수들, 도불이 서로 제 뜻을 내놓았다.

왕륭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다 듣고나서 건에게 눈길을 돌렸다.

《건, 네 생각은 어떠냐?》

《뭐 별로… 다시한번 말씀드리면 적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는것이오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궁예가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 모르고있소이다.

궁예가 동량, 림강을 쳤다고 하는걸 보면 남하하여 우리 송악을 치려 한다고 볼수 있는데 어째서 시간을 끌고있는가 하는것이오이다.

궁예의 전법은 일단 움츠리고있다가도 한번 일어서면 단숨에 목적을 이루는것인데 동량, 림강을 빼앗고도 그는 아직 다른 기미를 보이지 않고있소이다.

왜 그러는지 알수 없소이다. 그걸 알아야 하오이다. 만약 궁예가 분명 우리 솔뫼 즉 송악을 치려 한다면 그때는 량쪽에서, 앞에서는 우리가 막고 뒤에서는 패강진이 궁예를 쳐서 그를 격파할수 있소이다. 그런데 한다하는 궁예가 그렇게 하겠는지… 궁예가 우리의 눈길을 동량, 림강에 쏠리게 하고 패강진을 공격하려고 하지 않는지 그 속내를 알수 없소이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그 고마라는 사람을 통해서 알아내는것이 제일 좋을듯 하오이다. 한편으로 우리 사람들을 보내서 몰래 궁예의 움직임을 살피게 해야 하오이다.》

《우리 사람들과 패강진군사들을 단단히 준비시키는걸 잊지 말아야 해.》

왕륭이 그루를 박았다.

《우리 패강진은 념려마시오이다.》

패강진 보감이 장담했다.

《궁예가 솔뫼로 오든 우리 패강진으로 오든 본때를 보이겠소이다.》

《군사들이 이전에는 궁예를 좋게 보았는데 갑자기 그와 싸운다면 동요하지 않을가?》

왕륭이 물었다.

《동량, 림강의 소식이 우리한테도 쫙 퍼졌소이다. 그 소릴 듣고서야…》

《그럼 좋네. 다들 돌아가서 각기 맡은 일들에 실수가 없도록 하게. 십리안팎으로 날랜 말 열필씩 준비시켜 제때에 정황을 통지하고 봉화대도 꾸려야겠소. 그 일은 도불이 맡게!》

왕륭은 사람들을 보내고 고마에게 갔다.

장사하는것이나 싸우는것이나 같고같다. 장사가 재물과 돈을 가지고 한다면 싸움은 군사와 병쟁기를 가지고 하는데서 다른것이 있는지 모르나 리득을 얻고 잃는데서는 큰 차이없다. 군사의 전법이 장사의 수법과 통하는데가 있다. 다만 싸움은 장사하는것과 달리 목숨이 왔다갔다하는데 더 가깝다고 할지… 왕륭은 이미 장사물계에 미립이 튼 사람이였으나 싸우는데서는 즉 군사와 병쟁기를 가지고 목숨을 빼앗고 잃는 싸움에는 아직 익숙되지 못했었다. 그래서 아들 건의 말을 많이 받아들였다. 건은 이랬든저랬든 싸움법, 무예는 익혔다.

고마는 왕륭에게 올 때까지만 해도 일이 잘될것이라고 생각했다. 궁예가 왕륭을 칠 생각이 없고 또 이제는 고마의 생각에 기울어졌기때문이였다. 그는 모든 일이 다 그러하듯 이번 일도 얼음에 박 밀듯 되지는 않겠지만 뜻밖에도 이렇게 뒤집힐줄 미처 몰랐다.

사람의 목숨이란 참으로 알수 없다. 더구나 뭐가 뭔지 모르게 뒤죽박죽이 된 이런 란세에는…

고마는 얼굴을 알고있는 왕륭의 사람이 우락부락하며 자기를 끌고 오던 일이며 성이 독같이 난 왕륭의 사람들이 자기를 때려죽이겠다고 펄펄 뛰던것을 생각하며 쓰겁게 웃었다.

얻어맞은 아픔도 아픔이지만 까닭 모르게 번져지는 사태가 더욱 가슴후볐다.

동량, 림강에 궁예의 부대가 들이닥쳐 사람들을 무참하게 살륙했다는건 뭔가?

과연 궁예가 고마 모르게 그런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아니, 그럴수 없다 하면서도 미심쩍은감이 없지 않다.

궁예가 고마를 속였단 말인가? 그럴수 있는가? 아니다, 아니다.

궁예가 한번 떴다 하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일을 저지르고야 마는 구석은 있지만 동량, 림강의 일은 그럴수 없다.

뭔가 잘못되였을것이다.

고마는 궁예쪽보다 왕륭쪽에서 일이 잘못되였다고 보고싶었다. 그러나 동량쪽에서 란을 당하고 왕륭에게 온 그 촌늙은이의 말은 사실이 아닌가?

도대체 이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것인가?

고마는 언제인가 기훤에게 당했던 일이 또다시 되풀이되는 감을 느꼈다. 그때처럼 죽음의 그늘이 고마에게 닥쳐오는것이다. 사람에게 죽음은 이렇게 예측할수 없이 접어드는것인가?

고마는 부어오른 얼굴과 터진 입안의 아픔으로 온몸이 쑤셔대는 바람에 신음소리를 냈다.

궁예를 위한 일, 아니 고구려를 위한 일이 이렇게 억이 막히는 매질과 까닭모를 죽음을 당하고서야 이루어지는것이란 말인가? 고마는 정말 괴로운 팔자를 타고났단 말인가?

이제 어떻게 될가? 겨우 죽음은 늦춰졌지만 물러간것은 아니다. 아직 코밑의 수염도 굳지 않은 새파란 왕건에 의해 고마의 목숨이 늘어났다고 하지만 그것도 잠간일것이다. 저들은 궁예와 싸우기 위해, 궁예의 기도를 알기 위해 고마를 살려놓았다. 고마가 고와서 그런건 아니다. 불쌍한 포로, 혀다.

그런데 동량, 림강의 일을 놓고보더라도 고마는 궁예의 기도를 모르고있다. 고마가 알고있는 궁예의 기도에 대해서 저 왕륭부자는 이 마당에 와서 절대로 믿지 않을것이다. 궁예와 고마가 뜻을 맞춘것은 왕륭과 싸우는것이 아니라 그를 끌어당기는건데 동량, 림강의 일은 그것과 완전히 거꾸로 된 일이다. 동량, 림강의 사실만을 믿고있는 왕륭에게 어떻게 궁예의 진의도를 납득시킬수 있단 말인가. 버선목이라고 뒤집어보이지도 못하고… 이들은 고마를 가차없이 죽일것이다.

고마는 죽음이 두려운것이 아니였다.

고구려를 위한 일이 두려웠다. 안타까웠다. 왕륭과 궁예가 뭉치지 않는다면 고구려를 되살리려는 일은 앞이 없다. 신라는 어느때든 망하겠지만 견훤의 후백제를 놓고볼 때 왕륭과 궁예의 싸움은 도무지 앞일을 예측하지 못하게 할것이다. 과연 일이 어떻게 될것인가?

고마는 괴롭게 숨을 내쉬였다.

왕륭은 두부자루처럼 쓰러져있는 고마를 이윽토록 내려다보았다.

왕륭의 마음속에서는 궁예에 대한 증오가 불길처럼 타올랐다. 그 불길은 이전에 그토록 사리에 밝던 왕륭의 마음을 걷잡을수 없게 만들었다. 궁예에 대한 증오심은 고마에게도 마찬가지로 미쳤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바로 이 고마가 궁예의 앞발노릇을 하기때문이다. 고마를 죽이고싶은, 그래서 속이 시원해지게 하고싶은 마음은 도불 못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이제는 죽느냐 사느냐를 건 싸움의 우두머리라는 자각으로 하여 가까스로 참았다. 아들 건의 말이 옳다고 보면서 왕륭은 증오의 불길 다른켠에 뭔가 알수 없는것이 숨어있는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고마를 막 죽일수는 없다.

궁예의 기도를 알아야겠다는 그것때문만이 아니였다.

고마가 인기척을 느끼고 힘겹게 눈을 떴다.

팔짱낀 왕륭이 내려다보고있었다.

《난 너에게서 알고싶은것이 있다.》 하고 말하고나서 왕륭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고마는 왕륭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죽고사는것, 앞으로의 일이 왕륭의 말에 달려있다. 왕륭은 무엇을 알려고 하는가? 궁예의 기도? 그걸 사실대로 말할가? 그럼 왕륭은 믿지 않을것이고 나를 죽일것이다. 그럼 거짓말? 어떻게 할것인가?

고마에게는 왕륭이 침묵을 지키는 그 몇순간이 천년같이 느껴졌다.

마침내 왕륭이 입을 뗐다.

《하나는 네가 어떻게 궁예와 한짝이 되였는가 하는것이다.》

《그야 이미 말씀드렸는데요.…》

《아니, 난 자세히 그리고 거짓말이 아닌 진실을 알고싶다.》

왕륭은 고마의 대답을 기다렸다.

고마는 지치고 아픈 마음과 몸을 가다듬었다. 살기 위해 거짓말 해서는 안된다. 죽더라도 사실을 말해야 한다. 왕륭이 고마를 죽이겠는지 살리겠는지 하는건 오직 한얼의 뜻에 달려있다.

고마는 운각스님이 솔뫼의 왕륭을 찾아가라고 이르던 말부터 시작하여 왕륭이 자기를 별치않게 대하던 일이며 기훤에게 죽을번 했던것, 궁예가 도와준것, 그후의 일에 대해서 말했다.

고마의 말을 듣는 왕륭의 얼굴은 찌그러졌다. 왕륭은 고마의 말에서 자기의 약점을 아프게 느꼈다. 고마의 말은 사실이다. 왕륭은 그무렵 아들 건에게만 온넋이 흠뻑 쏠려있었다. 그래서 고마가 아무리 재능있고 뜻이 있는 사람이라는걸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를 아끼고 거두어둘 생각은 못했다.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장사일을 빌어 말한다면 너무 자기것을 아끼다가 손해를 보았다. 사람이 귀신이 아닌 이상 그럴수도 있는것이다.

《지금 어른은 궁예를 미워하고 나를 죽이려 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소이다. 궁예는 그저 장군이 아니오이다. 그는 고구려를 일떠세우려고 하오이다. 이건 저의 뜻이기도 하오이다. 그래서 하슬라주를 비롯한 여러 지역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있소이다. 나는 궁예라는 한사람을 도와주는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다시 일떠세우는 일을 도와주고있을뿐이오이다.》

고마는 입술이 터지고 입안이 부어올라 혀가 제대로 놀지 않았지만 애써 똑똑하게 말했다.

왕륭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나는?》

《나는 아직 사찬을 잘 모르겠소이다.》

고마는 몸을 편하게 하며 말했다.

《좋아, 그건 차차 알게 되겠지. 다음 두번째 물음이다. 궁예는 왜 기어코 나와 싸우려고 하지?》

고마는 왕륭이 불쾌하게 여기고있다는걸 느꼈다. 그만큼 죽음의 그늘은 피할수 없이 다가왔다.

그러나 이제는 말곬이 이미 틔이였다.

그대로 흐를수밖에 없다. 왕륭의 비위를 거스르더라도…

《나는 한주 도독의 공문을 보았소이다. 물론 궁예장군도…》

《그게 어쨌다는거냐?》

《사찬은 바꾸어놓고 생각해보시오이다. 사찬이 궁예라면 그래 신라의 앞잡이가 되여 자기를 치려고 하는걸 가만 놔두겠다고 하겠소이까?》

왕륭은 쓰겁게 웃었다.

《난 한주 도독의 앞잡이가 아니야. 그러나 내가 궁예를 치려고 했던건 사실이야. 우리 송악, 패강진의 세력은 궁예만 못지 않아. 싸움이라는건 겨루어봐야 아는거야.》

고마는 한줄기 빛이 새여나오는것을 보았다. 그는 몸을 다시 움직였다.

《사찬, 저는 궁예장군이 사찬께 보내는 글을 가지고 왔소이다.》

왕륭은 조금 놀랐지만 그걸 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꾀를 부리는 글보다 사실을 더 믿어. 동량, 림강의 만행은 글보다 더 진실이야.》 하고 왕륭은 비웃으며 말했다.

《동량, 림강의 일을 저는 모르오이다. 아마 궁예장군도 모를것이오이다. 제가 떠나올 때까지 그런 일은 계획되여있지 않았소이다.》

《그럼 귀신이 그랬다는건가?》

《이건 어떤 모략이오이다. 저는 그렇게 믿소이다. 사찬이 제 말을 정 믿지 못하겠다면 방도가 있소이다. 사람을 보내서 궁예장군에게 그 일을 따져보시오이다. 나를 인질로 잡아놓아도 좋소이다. 그 일이 궁예장군이 한 일이 아니라고 하면 동량, 림강을 궁예장군이 직접 들이쳐 죄를 따지게 할수도 있소이다. 만약 궁예장군이 나도 몰래 동량, 림강의 일을 저질렀다면 무슨 변명이 있을것이오이다. 그렇지 않다면 분명히 궁예장군은 림강, 동량의 일을 해명하려고 할것이오이다. 궁예장군은 루명을 쓰는걸 좋아하지 않소이다. 그 일이 어찌되는가를 보아 나를 죽이든지 살리든지 하시오이다. 나는 나의 목숨이나 살리자고 비는것이 아니오이다. 고구려때문이오이다.》

《그럼 너는 끝까지 궁예가 동량, 림강을 치지 않았고 만행을 하지 않았다는거야?》

《그렇소이다.》

왕륭은 고마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궁예의 기도를 알아보는데도 좋을것이다.

《좋다, 그러나 네 말이 틀린다면 죽더라도 날 원망하지 말라.》

왕륭이 돌아서려는데 집사가 문가에 나타났다. 집사의 뒤로 한사람이 따라들어왔다.

《아니, 도선스님께서…》

집사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도선스님을 보며 왕륭이 놀랐다.

도선스님이 가볍게 합장했다.

《그러지 않아도 도선스님을 찾아 사방에 사람을 띄웠소이다.》

왕륭이 말했다.

《허, 저는 그사이 지리산과 태백산을 두루 다녔소이다.》

《그럼, 남쪽으로…》

《예.》

《그런걸 저는…》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소이까?》

도선스님의 물음에 왕륭은 피뜩 고마쪽을 보고나서 얼버무렸다.

《두루 일이 있어서… 다른 방으로 가시지요.》

왕륭은 도선스님을 자기의 사랑방으로 안내하였다. 그는 도선에게 차를 권하고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였다.

도선스님은 잠자코 듣고있었다.

남쪽을 밟으면서 도선스님은 생각되는것이 있어 운각스님을 찾아가던 길이였는데 왕륭에게 들린것은 우연이였다.

《아까 본 사람은 누구신지요?》 하고 도선스님이 왕륭에게 조용히 물었다.

《궁예의 모사오이다. 원래는 운각스님의 제자인데…》

《그럼 그가 고마란 말이요? 너무 얼굴이 험해서 미처 알아보지 못했군. 어찌다 그렇게 되였소이까?》

왕륭은 고마를 잡은 이야기를 했다.

《운각스님께 알렸소이까?》

《알리지 못했소이다. 거기까진 미처…》

《이제라도 알리시오이다.》

《그럴 필요가 있을가요?》

《실은 내가 운각스님을 만나려고 가던 길인데 일이 이렇게 되였으니 그분이 혹시 여기에 오시지 않겠는지…》

《운각스님이 지금 미륵사에 계실가요?》

《내 예감에는 계실것이오이다. 그분께 알려서 오시면 다행이고 오시지 않는다면 일이 정 잘된다고 볼수 없소이다. 운각스님의 가르치심을 받아보는것이 사찬께는 나쁘지 않을것이오이다. 저 고마에 대해서뿐아니라 앞으로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이오이다. 그분은 나보다 한참 낫소이다.》

왕륭은 도선스님의 겸손에 허리를 숙였지만 말뜻은 다 알수 없었다. 그러나 면악산 미륵사에 사람을 보냈다.

아닌게아니라 이튿날에 운각스님이 나타났다.

운각스님은 말없이 고마를 보고나서 왕륭에게 고마를 풀어달라고 말했다.

왕륭은 주춤거렸다.

운각스님은 조용히 웃었다.

《사찬께서는 궁예와 한바탕 겨루어보자는건데 그러기 위해서도 고마를 풀어주는것이 좋을것이오이다. 도선스님이나 나는 사찬에게 기껏 해줄수 있는 말이 옛일이나 먼 앞날에 대한것이지만 오늘에 대해서는 저 고마에게 듣는것이 나을것이오이다. 왜냐면 고마는 궁예와 솔뫼 사찬어른의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기때문이오이다.》

왕륭은 고마를 풀어주고 그의 상처를 치료해주게 하였다.

그리고나서 왕륭은 운각, 도선스님과 이야기했다.

운각스님이 말했다.

《하나가 갈라져 셋이 된다는것은 한얼이 가르치는바이지만 때가 그렇게 되는것 같소이다. 구태여 비유한다면 지금 이 땅은 창끝처럼 셋으로 갈라지게 되는것 같소이다.…》

《저도 두루 남쪽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앞으로는 어찌 될것 같소이까?》

도선스님이 생각에 잠겨 물었다.

《하나로 되겠지요. 되돌아오기마련이니까요.》

《저도 같은 생각이오이다. 하나가 되면 어데가 모임점이 될것 같소이까?》

《언제인가 도선스님과는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여기 사찬어른께서 있으니 다시 말씀드리지요. 제가 보건대 이 솔뫼가 가운데 토막이 될것이온데 도선스님의 의향은 어떠하신지요?》

도선스님은 왕륭을 얼핏 보고 고개를 끄덕이였다.

《고구려, 아마 그렇게 되겠지요?》

《예, 옳소이다. 이건 누구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한얼이 그렇게 가르치는바이로소이다.》

두 스님은 서로 마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저는 궁예를 치고 한주를 타고앉자고 하는데 어떻소이까?》

왕륭이 운각스님에게 물었다.

《글쎄, 고마에게 물어보는것이 어떻소이까? 아무래도 가까운 일은 그가 잘 알수 있으니까요.》

운각스님이 넌지시 비켜섰다.

왕륭은 한쪽으로 운각스님이 자기의 제자를 내세우고싶어 그러지 않는가고 생각하면서도 고마를 불러오게 하였다.

도선스님이 그간 있은 일을 고마에게 대강 이야기해주고 덧붙였다.

《사찬어른은 고구려의 후손이고 고구려를 다시 일떠세우려고 하는분이시오이다. 그의 아들 건이 한얼의 뜻을 살릴 기상이 있다고 보는데 고마,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오?》

고마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싸운 감정을 잊고 말해주길 바라오.》

도선스님이 재촉하며 말했다.

《송악, 패강진의 세력이 궁예장군의 세력과 어슷비슷한건 사실이오이다. 이런 때에 두 세력이 합치면 고구려는 사는것이고 싸우면 망하는 길이오이다. 나아가서 겨레가 서로 한얼의 뜻을 위해 힘을 합치면 박달임금님의 후손들은 사는것이고 서로 싸우면 망하는 길이오이다.》

고마는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운각스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였다.

도선스님이 고마의 말을 듣고 말했다.

《누구도 지려고 하지 않지요. 지며는 억눌린다고 보는게 속세의 진실이니까요. 더구나 어슷비슷한 세력이 맞선 때에 싸우지도 않고 손을 드는건 수치지요.》

《사람이나 겨레가 바로 그런 속세의 리치때문에 큰일을 못 이루고 망하는것이 력사가 보여준 진실이 아니겠소이까? 뜻이 다른 두 세력이 맞붙어 싸울 때는 누가 패권을 쥐는가가 중요하지만 뜻이 같은 세력이 맞설 때에는 오히려 패권을 양보하는것이 이기는것이라고 저는 보오이다.》

《고마는 사찬어른이 먼저 궁예에게 가야 한다는것이요?》

도선스님이 물었다.

《지는것이 이기는것이라는 말이 있소이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오이다. 작은 사람이 지는건 영원히 지는것이지만 큰사람이 지는건 이기기 위해서이오이다.》

《그럼 왜 궁예가 사찬어른에게 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소? 나이로 보나 혈통으로 보나 사찬어른에게 궁예가 지는것이 리치에 맞지 않소?》

《궁예장군은 빈터에서 일어나 오로지 고구려를 세우자는 한뜻으로 세력을 이루었소이다. 그러나 사찬어른은 다르오이다. 뜻은 같다고 하나 세력이 이루어진 과정이 다르오이다. 사찬어른은 나이도 있고 더우기 아들 왕건에게 큰 기대를 걸고있는데 궁예에게 힘을 합치자고 한다고 해서 손해날것이 없소이다. 오히려 사심이 없이 큰뜻에 따랐다고 사람들은 생각할것이오이다. 그러나 궁예장군은 다르오이다. 지금 북원의 량길과는 기필코 갈라지게 될것이오이다. 이건 궁예장군의 장점이면서도 한편 약점으로도 되오이다. 나는 그를 잘 아오이다. 궁예장군은 고구려를 위해서 살며는 크게 성공하겠지만 고구려를 외면하면 크게 패할 사람이오이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사찬께서 알아들으시리라 보오이다. 알아들으시면 고구려를 위해 다행이겠지만 모르신다면 고구려를 위해서나, 우리모두를 위해 불행이오이다. 앞으로를 위해서도 같다고 보오이다.》

도선스님과 운각스님은 뜻깊게 웃었다.

왕륭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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