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회)
18. 반 란 급한 때를 만나면 누구나 여느때와 달라지기마련이다. 한주 도독과 주조사이는 평소에 별로 좋은 사이가 아니였지만 궁예가 오자 주조의 생각이
달라졌다. 주조는 도독을 도와 궁예 칠 꾀를 내놓았다. 《도독께서 뭘 해먹던 놈인지도 잘 모르는 외사정의 동생따위를 너무 크게 믿으실게 못되오이다.》 《그럼 묘한 꾀가 있소?》 《있소이다. 도독께서는 제 말을 들어주시겠소이까?》 《듣겠소.》 《궁예도적이 하슬라, 삭주를 먹고 우리 한주로 진격해온것은 어차피 예견했던바 그대로오이다. 이제 와서 궁예와 싸우지 않을수 없는데
우리에게는 힘이 없소이다.》 주조의 늘어놓는 소리를 찌뿌둥하게 듣던 도독은 힘이 없다는 소리에 더욱 낯을 찡그리며 수염을 잡아뜯었다. 그 소리는 주의 도독인 자기를
탓하는 소리로 들렸다. 《우리에게 한산정(지방에 주둔시킨 중앙군)이 있지 않소?》 《그걸 가지고도 궁예를 막을수 없소이다.》 《그래서 어쨌다는거요?》 주조는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힘은 없어도 꾀만 잘 쓰면 이길수 있소이다. 적어도 궁예가 우리 한주로 쳐들어오지 않고 딴데 쏠리게 하여 시간을 얻을수 있소이다. 례컨대
궁예가 패강진과 싸우게 하는것이오이다. 이건 이미 도독께서 계책을 세운것이오이다.》 도독은 그제야 찡그렸던 얼굴을 폈다. 《난 왕륭이 늘 속에 걸려. 그 사람이 늘 께름하거던. 꼭 바늘을 삼킨것 같은게… 이건 무슨 꿍꿍이를 품고있는게 뻔한데 그런 티를 내지 않거던.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짜낼수도 없고… 알겠지만 이 한주에
그만큼 세력이 있는 사람이 드물지 않나. 그래서… 난 그를 써먹으려는거네.》 《저도 도독의 그 의도를 찬성하오이다. 그러되…》 《뭔가?》 《송악고을 사찬 왕륭이 나라가 위험에 처한 이때에 궁예도적을 치려 나섰다고 공문으로 널리 알리시오이다. 소리가 크면 클수록 좋소이다.
그리하면 왕륭이 설사 딴마음을 먹었다 해도 궁예를 치지 않을수 없고 또 다른 고을에서도 나라의 뜻이 그런가 해서 거기에 합세할것이오이다.
어떻소이까? 이것이 병법으로 말하면 남의 칼로 적을 치는것이요, 정사로 말하면 다스림의 기본이라는것이오이다. 백성들이라는건 어리석어서 일단 관에서 하는 일은 다 나라의 뜻이요, 나라의 뜻이면 무작정 옳다고 믿기마련이오이다. 설사 뜻대로 되지 않아서 왕륭이 궁예를 치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사이에 쐐기를 박을수 있소이다. 왕륭이 궁예를 친다는 공문이 나돌면 궁예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을수 없으니 궁예가 의심할건 뻔하지 않겠소이까?》 《묘한 계책이요! 음.》 도독은 제 무릎을 깨져라고 내리쳤다. 《그리고…》 하고 주조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또 뭐요?》 《도독께서는 어떻게 하나 패강진을 쥐여야 하오이다. 우리 한주 관아의 군사보다 패강진의 군사가 더 많고 세다는건 세살 난 아이도
알고있소이다.》 《그야 그렇지. 헌데 그 패강진것들이 코대를 높이고있으니…》 《잘 어루만져 꽉 줴야 하오이다. 으르기도 하고요.… 일단 꼬드겨 쥐기만 하면 그야말로 우리에겐 큰 힘이오이다.》 《나도 그 생각을 하긴 했소. 그런데 이때껏 개와 고양이처럼 아웅다웅해왔는데 이제 와서…》 《그건 지나간 일이오이다. 승냥이도 서로 싸우다가도 범이 오면 서로 뭉친다고 하지 않소이까? 도독께서는 한편으로는 좋은 말로 어루만지고
한편으로는 나라의 어명을 내대고 패강진 두상을 누르시오이다.》 《그렇게 될가?》 《될것이오이다. 패강진군사들을 왕륭과 함께 궁예를 공격하게 하면 우린 팔짱을 끼고 이 한주를 지켜낼수 있소이다.》 《그럼 오죽이나 좋겠나?》 《패강진에는 제가 가겠소이다.》 《그래주오. 그래주오, 주조!》 도독은 성급하게 주조의 손을 잡았다. 패강진이 자리잡은 대곡성은 고구려때 대곡군(大谷郡)이라고 하였고 신라때에는 영풍군(永豊郡)이라고 하였다. 676년 반당항전(反唐抗戰)이 끝난 이후까지만 해도 신라는 이곳을 통치하지 못하였다. 거의 70년이 지난 신라 경덕왕 7년(748년)에
와서 대곡성을 비롯하여 평산, 신계, 봉산, 서흥, 곡산, 수안, 연안, 배천, 재령, 해주일대에 군, 현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762년에는 오곡(서흥), 휴암(봉산), 한성(재령), 장새(수안),
덕곡(곡산), 지성(해주)에 성을 쌓고 태수를 배치하였다. 신라가 아직 대동강이남은 물론 평안도일대에도 군, 현을 설치하지 못하고 황해도일대에만 머무르고만것은 이 지방에 남아있는 옛 고구려주민들의
만만치 않은 반항심과 수도(경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에 대한 통치의 곤난, 급속히 장성한 발해와의 대결을 피하려 하였기때문이기도 하였다. 한편 발해는 동방의 번성하는 강국으로 되여 함경도일대를 완전히 자기의 령역으로 만들었고 대동강이북지역을 차지하였다. 732년 발해는
당나라의 등주(산동)를 공격하여 그 자사를 죽이는것으로 시작되여 733년까지 벌어진 발해-당전쟁에서 당나라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 그의 침략기도를
좌절시켰다. 당나라에 아부하는 신라로서는 발해의 남방진출을 소홀히 할수 없었다. 신라는 781년에 관리들을 보내여 대동강이남의 고을백성들을 얼리였고 그 이듬해에 대곡성에 패강진을 설치하였다. 패강진은 보통 군사요새가 아니라 상당한 병력을 장악하고있는 군사조직이였다. 장관으로서 군주가 배치되였는데 그를 대곡성 두상이라고 했다.
또는 두상대감, 군주라고도 했는데 그의 벼슬등급이 제9위 급찬과 제6위 아찬사이에 있었다. 군주를 도독, 총관이라고도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군대를 거느리는 무관의 관직이였다.
두상대감외에도 대감, 두상제감, 제감, 보감, 소감 등 벼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군관직은 6정, 9서당의 골간을 이루고있던
지휘관들이였다. 패강진은 든든한 성이 있고 일정한 상비무력이 배치된 대곡성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군, 현의 군대까지 포괄하는 일종의 군관구라고
말할수 있을 정도였다. 대곡성에는 많은 군관과 정예한 군사들이 주둔하였고 주변의 여러 고을들에도 적지 않은 군사들이 머물러있었다. 궁예가 쇠두레를 차지하고 한주 도독과 왕륭의 사이가 미묘해진 그무렵에 패강진의 두상대감은 박웅이라는 사람인데 아래사람들이 그의 앞에서는 《패강진의 호랑이》라 했고 뒤에서는 《메돼지귀신》이라 했다. 한사람이 두 이름을 가진셈인데 그것도 판판 다른 이름이여서 사람됨이 어떤지 알만 했다. 한주 도독이 보낸 주조가 박웅을 찾아왔다. 원래는 한주 도독을 우습게 알며 잔뜩 코를 세우고있었지만 때가 때인지라 주조를 외면할수도 없었다.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고 패강진에 호랑이가 있는걸 모르고 궁예도적이 달려드니 이제 궁예는 쥐신세를 면치 못하게 될것이요.
두상대감의 이름이 또다시 천하에 뜨르르 날리게 되였소이다.》 이건 뭐 임금님행차에 주라소리 울리는건가? 한주 주조는 패강진 두상과 인사도 나누기 전부터 나발을 불어대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의기양양한지 주인인 패강진사람들도 어리벙벙해질 지경이였다. 사람의 무리란 재미있어서 어느때나 까닭없이 떠들어대는 말재간군이 있기마련이다. 패강진 두상 박웅은 주조의 떠벌이가 영 마음에 없는것은 아니여서 헛기침을 돋구었다. 저 잘났다고 추어주는 놈을 에끼, 이놈 하고 욕하는 인간이란 없는 법이다. 《한주 도독께 걱정말라고 하시오.》 박웅은 으쓱거렸다. 《그러실테지요. 패강진 두상대감이 어떤분이라고요…》 주조는 조개 입벌리듯 웃으며 도독이 한 말을 전했다. 《두상께서는 패강진의 군사를 정비하여 궁예 칠 준비를 하시면서 이 일에 왕륭을 앞세우시오이다. 그러되 한주 도독께옵서는 만일을 대비하여
왕륭을 잘 살피라고 하셨나이다. 왕륭이 딴마음을 먹으면 제때에 두상대감의 군사와 한주 군사가 힘을 합쳐 가위로 장마철 박순 자르듯 해야 한다는것이옵지요.》 왕륭을 믿을수 없다는 소리를 하는건 그만큼 한주 도독이 패강진 두상을 믿는다는 소리였다. 《음, 그럴수도 있소. 왕륭이 그럴수 있소.》 박웅은 왕륭이 외사정 순기를 죽이였다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였다. 《하되 두상대감께서는 일체 그 일을 모르시는척 하시면서 다만 비밀리에 준비를 하셔야 하오이다.》 주조가 박웅의 귀에 대고 마지막말을 속살거렸다. 《알겠소.》 두상대감은 바위처럼 믿음직하게 턱을 끄덕이였다. 박웅이란 사람은 상급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미덕으로 삼는 사람이였다. 무인으로서는 나무랄데 없는 깍두기라 할수 있는 사람이다. 아쉬운것은 그것밖에, 말하자면 우에 대한 아래의 철저한 복종밖에는 다른 무엇도 모른다는데 있다. 자기가 우선 그랬고 남에 대해서도 그랬다. 옳고그름의 가름도, 좋고나쁘고, 곱고미운것의 가름도 그것으로 이루어졌다. 어찌 보면 답답한 사람인것이다. 하지만 군사일에서는 그것이 첫째가는 미덕이요, 매력이다. 패강진의 두상 박웅이 한주 도독의 밀령을 군말없이 받아문것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급은 같으나 어쨌든 한주 도독은 상급이였다. 웃사람,
더우기는 관직으로서의 웃사람은 항상 옳으며 따라서 그의 말은 절대적으로 집행해야 한다고 보는 이 무인의 약점은 누가 누구를 하는 싸움판에서는
곧잘 나타났다. 조금 융통성있는 사람이라면 패강진의 두상정도에서 자기 심복을 두었으련만 상급에 대한 절대복종만 아는 두상 박웅은 여직껏 자기 아래사람들도
그래야 하며 그럴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왕륭에 대한 한주 도독의 밀령에 대해서도 박웅은 별로 곰곰히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부하라 할수 있는 보감에게 말하였는데 이것이 탈이였다.
오, 크나큰 믿음이여! 얄미운 배반이여! 패강진의 보감은 왕륭의 처가집과 먼 친척이였다. 하긴 패강진의 웬만한 벼슬아치치고 왕륭과 이렇게저렇게 련결되여있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보감이 아니라도 마찬가지였다. 패강진은 다름아닌 왕륭의 외가가 오래전부터 터를 닦고있는 곳이였다. 패강진 두상이 기껏 잘하느라고 보감 두칠에게 송악의 왕륭이 궁예를 치는데서 딴맘이 없는가를 알아보고 만일 조금이라도 눈치가 이상하면
가차없이 쳐버릴 준비를 하게 한 그날 밤에 보감은 왕륭앞에 가있었다. 왕륭은 보감의 말을 듣고 아무말없이 생각에 잠겼다가 《고맙네!》 하고 말했다. 《그래, 어찔셈인가?》 하고 왕륭이 보감에게 물었다. 《메돼지귀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 안되오이다. 우리 사람들과 의견을 모아봤는데 메돼지귀신을 갈아치우고 사찬께서 패강진에 왔으면
하오이다.》 《실수없이 해야겠네.》 《알겠소이다.》 보감은 밤도와 패강진으로 달려갔다. 다음날 패강진 두상은 아무것도 모르고 군사를 점고하러 나섰다. 점고를 끝내고 두상은 군사들에게 령을 내렸다. 《이 시각부터 패강진의 군사들은 훈련에 참가하라! 궁예도적이 지금 쇠두레고을에 와서 우리 한주를 덮치려 하니 일단 령을 내리면 군사들은 나라를 위해 도적을 쳐야 한다!》 렬을 지어선 군사들을 훑어보던 박웅의 눈길이 찌프러졌다. 군렬뒤에서 술렁거림이 일어났던것이다. 박웅으로서는 도저히 스쳐보낼 일이 아니였다. 《뭔가?》 박웅은 단우에서 내려 말을 타고 그쪽으로 갔다. 《누가 군률을 어기고 쑤군덕거리는가?》 박웅이 멈춰서서 소리쳤다. 군사 하나가 나섰다. 《접니다.》 박웅이 보니 애티를 갓 벗은 젊은 군사였다. 《넌 누구냐?》 박웅이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물었다. 《유금필이라 하오이다.》 《무슨 소릴 했느냐?》 《궁예는 도적이 아니라 장군이라고 했소이다.》 뜻밖에도 젊은 군사가 똑똑하게 말했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 박웅의 이마에 피줄이 동아줄처럼 솟아올랐다. 그런데도 젊은이는 겁도 없다. 《궁예장군은 고구려를 일떠세우려는 뜻이 있는 장군이라 했소이다.》 박웅의 입술이 푸들푸들 떨었다. 《꼭뒤에 피도 마르지 않은게… 이놈이 미쳤구나.》 《난 미치지 않았소이다. 미친건 두상이오이다.》 《이놈을 끌어내라!》 박웅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고구려가 어쩌고저쩌고 하는것보다 젊은 놈이 숱한 군사들앞에서 두상대감에게 딱딱 맞서는것이 더욱 기찼다. 유금필을 끌어내려고 군사들이 몰려들었다. 유금필은 잡혀 끌려나가기를 기다리지 않고 제발로 대렬앞으로 나갔다. 《목을 쳐라!》 박웅이 성이 독같이 나서 소리쳤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대렬의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네댓명의 군사가 소리쳤다. 《저도 목을 치시오이다.》 《저도 유금필과 같소이다.》 《금필의 말이 맞소이다.》 젊은 군사들은 유금필의 곁에 나가섰다. 박웅의 말이 껑충 뛰였다. 박웅은 놀라서 하마트면 말에서 떨어질번 하였다. 《이게 무슨짓이냐?》 박웅은 칼집에 손을 가져갔다. 보감이 박웅의 곁으로 다가왔다. 《두상대감, 령을 거두시기를 바라오이다.》 박웅은 보감을 쏘아보았다. 군사들이 눈에 띄우게 술렁거렸다. 이게 군사인가 뭔가? 장군이 령을 내렸는데 군졸이 반항하고 게다가 보감까지 합세하다니… 박웅은 온몸의 피가 머리우로 치받쳤다. 《반란이다! 역적들이다!》 박웅은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훈련장에 모여선 대오가 조용해진것이였다. 다치면 터질듯 한 긴장이 깃들었다. 박웅은 이런 광경에 더욱 놀랐다. 박웅은 이 패강진의 우두머리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낯선 사람처럼 군사들이 박웅을 쏘아보고있었다. 박웅은 칼을 빼들었다. 보감 두칠이 맞받아 칼을 뽑았다. 보감의 뒤를 따라 군사들이 칼과 창을 꼬나들었다. 다른 군사들은 영문을 몰라
벙벙해서 박웅과 보감을 바라보고있었다. 어느새에 보감과 유금필에게 합세하는 군사들이 불어났다. 두상대감은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는 보감에게 달려들었다. 보감이 맞섰다. 말을 탄 두사람이 서로 칼을 겨누고 맞서 여러번 부딪쳤다. 갑자기 활시위소리가 나더니 박웅이 가슴에 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군사들이 박웅을 에워쌌다. 《군사들! 내 말을 들으라!》 보감이 단우로 뛰여올라 소리쳤다. 《우리는 패강진군사들이지만 고구려의 후손들이다. 우리는 결코 신라의 군사가 아니다. 고구려를 되찾자. 고구려에 영광이 있으라.》 보감의 소리에 대렬이 따라했다. 얼결에 따라하는 군사들도 있었지만 대개 군사들은 열이 올라있었다. 《보감! 우리들을 이끌어주시오이다.》 유금필이 소리쳤다. 보감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보감의 령을 따라 박웅의 패거리들을 죽이기 시작하였다. 보감은 군사들을 다시 정비하였다. 그리고는 송악으로 사람을 보냈다. 패강진의 반란은 생각밖으로 쉽게 성공하였다. 이제 더는 패강진의 군사들은 신라의 군사가 아니였다. 패강진은 송악의 왕륭휘하에 들어갔다. 왕륭의 무력이 갑자기 불어났다. 주변의 여러 군, 현, 성이 왕륭에게 들어오고 그밖에도 송악일대의 여러 군이 왕륭을 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