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회)
17. 메뚜기철 배짱놀음을 하라고 《말이발》을 부추긴것은 번대였다. 《자네 사촌형이 한주 외사정이였던게 사실이지?》 《사실이지.》 《그리고 그가 죽었다는것도 사실이지?》 《사실이지.》 《그럼 그가 관가일 즉 나라일을 하다가 죽은것도 사실이겠지?》 그건 잘 모를 소리지만 《말이발》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였다. 《어, 어… 그래.》 《그럼 책임이 누구에게 있냐 하면 한주 도독에게 있다 이거야, 알겠어?》 《말이발》에게는 번대가 참 똑똑하다고 생각되였다. 어쩌면 그렇게 리치에 밝을가? 하긴 번대들이란 자고로 머슴살이하는게 없다질 않는가! 이 번대가 언제 어디서 뭘 해먹던 놈인지는 몰라도 《말이발》과 마주앉아 술을 마실 때는 한무리 도적이였던것만은 분명했다. 번대가 도적이라?
하긴 도적하면 벌써 여느 상놈이 아니다. 《그러게 도독에게 형님을 살려내라고 배짱을 부리란 말이야.》 《사촌형이야 죽었는데 어떻게 살려내겠나?》 《말이발》은 어정쩡해서 물었다. 《야, 이 바보야! 누가 죽은 사촌형을 살려내라나? 다른거야, 다른거! 죽은 사촌형 턱대고 자네가 한몫 톡톡히 챙기라는 소리야. 알겠어?》 《될가?》 《될가가 뭐야, 되지. 벼슬아치들이란 그것들이 꺼리는 퀴퀴한것이 꼭 있기마련이다. 앞에 나서서는 절절 말 잘하고 무슨 제 혼자 청렴한체, 제 혼자 나라일 하는체 하지만 뒤를 보면 여느 백성 찜쪄먹는, 도적놈들 울고 갈 죄를 남산만큼 쌓아두고있는 새끼들이야. 그런걸 어느 한줄 잡아걸고 늘어지면 세상 겁많은게 벼슬아치, 관료나부랭이들이라 꼼짝 못하고 어자어자하거던. 낚시 삼킨 개새끼들이지 뭐야.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다 그래. 왜 그러냐 하면 무슨 벼슬아치, 관료들이란건 원래 제 재산, 제 권세라는건 하나도 없는
알짜 거렁뱅이인데 남의것, 이를테면 나라님 권세와 나라님 재산을 빌려쓰는 대신 이마빼기에 <충(忠)>자 달고 다니는것들이거던. 그것들이 흠잡히면
무사할것 같은가? 자리는 하나인데 노리는건 많겠다, 그러니… 자넨 벼슬살이를 무슨 능력이 있어 하는가 하지만 아니야. 그건 순 상전에 대한
허리굽히기로 하는거야. 능력이 없어도 발라맞출줄 아는 재간만 조금 있으면 누구나 하는것이란 말이야. 그러니 자리 떼울가봐 겁나서 떨수밖에…》 《말이발》은 제 몫으로 차례진 고기뼈다귀까지 당겨 와작와작 씹어대며 지껄이는 번대의 말을 귀구멍이 항아리만 해서 듣고있었다. 번대의 말을
듣건대 세상물정이 환해졌다. 야, 이 번대가 보통놈이 아니구나. 대단해, 대단해! 《말이발》이 한주관아의 대문을 지나 도독앞에 서기까지는 나흘이 걸렸다. 첫 때 도독이 바빠서 만날수 없다는 소리를 듣자 《말이발》은 얼씨구 좋다 돌아서려 하였다. 한번 만나주십쇼 하는 청을 들이댄것만 해도 《말이발》로서는 난생처음 되는 용기였다. 저는 한갖 도적부랑배요, 도독은 나라의 관리인데 그게 어디 상대나 되는 일인가? 그걸 놓고도 앞으로 도독을 만나뵈온 《말이발》이노라고 얼마든지 뽐낼수
있는것이다. 그러나 그때 번대가 하던 말이 집게처럼 《말이발》의 머리를 꽉 그러쥐였다. 《만나줄 때까지 질큰하게 버티야 돼!》 《말이발》은 속으로 떨면서도 끈질기게 버티였다. 에라, 죽으면 한번 죽지 두번 죽냐. 아닌게아니라 사흘이 지나 하늘같이 보이는 한주 도독이 《말이발》을 만나주겠노라 하였다. 개구리 노리는 뱀눈깔같은 도독앞에 서니 별안간 눈앞이 어지러워지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걸 《말이발》은 가까스로 참았다. 이제라도 달아날가 하고 눈치보는데 도독이 물었다. 《네가 외사정 순기의 동생이 틀림없겠다?》 《네잇.》 하고 《말이발》은 코를 땅에 박았다. 《헌데 무슨 일로 날 만나겠다는거냐?》 《우리 형이 죽었소이다. 원쑤갚아주시오이다.》 여사여사 준비했던 말이 아니라 도적패에서 흔히 하는 무슨 원쑤같은 소리가 튀여나왔다. 하다못해 구실아치노릇이라도 따내야 한다고 번대가 말했다. 그래서 《말이발》은 입안에서 그 말만 뱅뱅 굴렸다. 《원쑤를…》 《원쑤? 원쑤가 누구냐?》 《모르오이다.》 《말이발》은 아차! 하고 혀를 깨물었다. 그는 저의 형이 왕륭의 사람들에게 죽은걸 너무나 잘 알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말하는게 어쩐지 두려워 모른다고 했다. 한주 도독은 이, 어디서 굴러온 말뼉다귀같은 놈과 마지못해 수작을 부리다가 반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틀잡아 말했다. 《너의 형 외사정 순기는 나라에 충실한 관헌이였다.》 《네.》 《그런데…》 《네.》 《그만 잘못됐다.》 《네.》 《누구한테 잘못됐나?》 《네.》 《송악 사찬 왕륭이다.》 《네.》 하고 말끝마다 이마빡을 땅에 찧던 《말이발》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 그건…》 《응?》 도독은 《말이발》을 쏘아보았다. 온다온다 하면서도 설마 오냐 하면서 눈감고 아웅했는데 정말 궁예가 한주를 바라고 쳐들어왔다. 한주 도독은 생각밖으로 발악이 났다. 궁예를 꺼꾸러뜨려야겠다. 헌데 뭘로? 머리가 팽이처럼 돌아 이
기회에 송악 사찬 왕륭을 사냥개로 써먹자고 생각했다. 여느때도 왕륭을 어딘가 말짼 사람으로 보면서 그저 구렝이 담 넘어가는 식으로 대하던 도독이
왕륭에게 나라를 위해 궁예를 치라고, 명령도 아니고 권고도 아닌 어정쩡한 소리를 해댄것도 굉장한 담력이다. 바로 그래서 발악에 가까운
용단이였다. 그런데 왕륭이 생각밖에 선뜻 그러마 하고 나서는게 어쩐지 미타하다. 한주 도독은 그래서 패강진 두상에게 은근히 송악 사찬 왕륭을 경계하여 궁예를 치도록 하라고 련계를 맺을 차비였는데 이런 말뼉다귀가
기여들었다. 순기에 대해서는 에라, 미친개 범 물어간것만 하다 해서 벌써 잊어버린지 오랜 도독이였지만 징징 울다싶이 하는 《말이발》을 보자 불쑥 비상한
꾀가 떠올랐던것이다. 《그래, 송악 사찬 왕륭이 네 원쑤다.》 하고 도독은 입술에 힘주며 새파래서 말했다. 《설마…》 《말이발》은 뻔히 알고있으면서도 어째선지 왕륭이 겁났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괜히 왕륭을 어쩌고저쩌고했다가 그 보복이라도 받는
날에는 곧 그날이 래년 이맘때 제사날 된다는걸 다름아닌 그의 형 순기의 죽음이 말해주고있었다. 그런데 한주 도독이 일깨워주니 마음이 또 돌아선다. 술통에 빠졌던 쥐새끼가 고양이 나서라! 한다더니… 《말이발》은 수닭이 나무우에 앉은 나비를 보듯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웃하고 도독어른을 올려다보았다. 도독은 근엄한 얼굴에 수염을 쓸며 말했다. 《지금 나라에 위험이 닥쳤다. 나라의 원쑤 궁예가 이 한주에 쳐들어오려고 한다. 궁예나 왕륭이나 다 같고같은 나라의 원쑤다. 그리고 네
형과 너에게도 원쑤고… 알아들었느냐?》 《네.》 《음, 그래 알아들었다니 참 용타. 나라에 충실한 백성은 언제나 그래야 하느니라.》 《황송하옵니다요.》 《네가 나라일을 할수 있겠느냐?》 그건 벼슬아치가 될수 있느냐 소리였다. 《맡겨만 주시면…》 주절대는 《말이발》을 내려다보며 한주 도독은 벌써 속궁냥이 환히 섰다. 사람이란 모른다. 잘만 부리면 도적이 또 영웅으로 되기도 하는것이다. 란세에 임금, 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더냐? 그까짓 벼슬이야 실컷 부려먹은 다음 도로 빼앗으면 그만일게고… 토끼를 잡은 다음 사냥개를 삶아먹는다던지… 《좋다! 내 너를 저 동량에 보내련다. 그 현(뉘)이 아주 중요한 모퉁이인데 현령이라는게 못난이가 돼서 궁예가 쇠두레에 오니 도망쳐버렸다.
네가 보아하니 힘깨나 쓰고 용감해보이는데 현령노릇 해보겠느냐?》 《하겠소이다!》 무식하면 씩씩하다. 《좋다. 그럼 지체말고 동량으로 떠나거라. 인수랑 필요한건 내주겠다.》 《말이발》은 이게 웬 떡이냐 했다. 《이봐, 현령이 가서 할 일이 있는데…》 《분부만 하시오이다.》 《가까이 오게! 이건 극비네. 내가 현령을 믿고 나라일의 극비를 말하는것이니 현령만 알고있게. 우린 궁예와 왕륭이 서로 싸우게 해야
하네.》 《네, 그러니 어부지릴…》 도독은 떼꾼해졌다. 이놈이 생각보다 미련하지 않구나. 이런 놈 쓰다 혹시… 도독은 머리를 저었다. 도독은 《말이발》에게 계책을 대주고 그날로 군사를 딸려 동량으로 보냈다. 그리하여 별 보잘것없는 도적이 별안간 현령이 되였다. 란세는 란세였다. 고마가 송악에서 쇠두레(철원)로 급히 왔을 때 궁예는 뜻밖에도 다른 일에 열중하고있었다. 그는 당장 한주관아를 들이칠 준비를 하고있었다. 《갔던 일은 잘됐나?》 하고 묻는 말에도 뭘 긴요하게 알고싶은것이 있어서가 아니고 그저 문안인사격이였다. 《장군께선 송악을 칠 계책을 꾸미셨소이까?》 고마가 대답대신 물었다. 《건 또 무슨 소린가?》 《전혀 없소이까?》 《흥, 별일 다 보는군.》 《혹시 부하들이 장군 모르게 저지른 일이라도 없소이까?》 《이것 보게, 고마! 뭘 자꾸 돌리나? 곧장 말하게.》 《송악에서는 당장 장군이 쳐들어온다고 펄쩍 뛰오이다.》 《어처구니없는 소리! 그것들이 내가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군. 뭘 어쩌지도 않는데 간이 콩알만 해서… 한주를 치려는데 언제 송악 같은걸 볼 새가 있나?》 그것만으로도 고마는 한숨 놓였다. 그러니 궁예가 송악을 친다는건 거짓말이다. 어디서 탈이 생겼다. 그건 그렇고 한주를 당장 치겠다고 하는건 또 뭔가? 《장군, 한주를 당장 들이치려 하시오이까?》 하고 고마가 조금 누그러진 소리로 물었다. 《그렇네.》 이것 또한 고마에게는 골치거리다. 도저히 궁예의 일은 마음을 놓을수 없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송악의 일을 봐가며 한주를 치겠다고 하고서는
그 일이 아직 마무리되지도 않았는데 한주를 치겠다는건 뭔가? 《필요한건 다 알아봤네. 그러니 들이치는것만 남았네.》 궁예가 말했다. 물론 그럴것이다. 그러나 고마에게는 내려가지 않는것이 있었다. 《장군, 송악의 일이 끝난 다음에 한주를 치는것이 어떻소이까?》 《그건 무엇때문에? 치면 얻을수 있는데 질질 끌게 있나?》 《저의 말을 들어보시오이다. 지금 장군은 쇠두레를 점령할 때와 또 달라졌소이다.》 《뭐가?》 《이때까지는 부분적이고 외롭게 널려있던 성들을 쳤소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집중되여있고 서로 련결된 적을 쳐야 하오이다. 장군이
속전속결로 쇠두레까지는 차지할수 있었으나 이제는 달라졌소이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하시오이다. 한주관아는 쳐서 차지할수 있겠지만 송악과 패강진의 군사들이 합해서 달려들면 차지했던것까지 다시 내놓지 않으면 안되오이다.》 궁예는 잔뜩 얼굴을 찡그렸다. 《난 고마가 어째서 한주관아를 치는걸 달가워하지 않는지 통 모르겠네.》 《저는 한주관아를 치는 그자체를 반대하는건 아니오이다.》 《그럼 뭔가?》 《한주를 치기 전에 먼저 송악의 왕륭을 끌어당겨야 한다는것이오이다.》 《또 그 소린가?》 고마는 다시 설명했다. 궁예가 나타나기 전에 한주는 묘한 세력균형을 이루고있었다. 겉으로는 한주 도독이 이 땅을 통치하고있었으나 실제상 주인은 동비홀(송악)의
왕륭이다. 한주의 기본군사가 패강진에 있는데 이 패강진은 왕륭의 외조부의 터다. 그러니 민심으로 보나 군사적으로 보나 왕륭이 보이지 않는 주인일수밖에
없다. 궁예는 좀처럼 고마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왕륭은 어째서 들고일어나서 한주를 차지하지 않았나? 그가 때를 잘 볼줄 모른다든지, 겁쟁이든지 세력이 약하기때문이
아닌가?》 고마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렇지 않소이다. 그는 때를 볼줄도 알고 겁쟁이도 아니며 세력도 약하지 않소이다. 그가 이때껏 숨어지내는건 다른것때문이오이다. 그는
신중한 사람이오이다. 그는 서뿔리 들고일어나 한주를 치기보다 열매가 저절로 익을 때를 기다려왔소이다.》 고마는 왕륭이 자기 아들이 성장할 때를 기다려왔다는걸 말하고싶었지만 웬 일인지 그건 말하게 되지 않았다. 《모르겠네. 왕륭이 세력이 있다는건 도무지 알수 없네. 있으면 얼마나 있겠나. 재물과 배군들뿐이 아닌가?》 궁예가 찌뿌둥해서 말했다. 《한번 들고일어나면 왕륭을 따르는 사람이 잠간사이에 몇천은 될것이오이다.》 《믿어지지 않아.》 《그는 사람들을 잘 사귀여놓았소이다. 그가 크든작든 은혜를 입힌 사람들이 적지 않소이다. 북원의 량길도 왕륭과 무관하지 않소이다.
왕륭에게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끝까지 충성하겠는지는 몰라도 은혜갚음으로 왕륭을 외면하지는 않을것이오이다. 한두번 도와주는건 두말할것 없고요.
만약 왕륭이 량길을 쑤셔 장군의 뒤를 치려 하면 어떻게 될것 같소이까?》 《설마…》 《량길 같은 촌주나 성 우두머리, 호족들이 적지 않소이다. 바로 그것이 왕륭의 세력이오이다. 제가 이번에 가보니 예견했던 그대로였소이다.
왕륭은 한주 도독의 권고로 장군과 싸우려고 이미 군사를 일으키고있었소이다. 장군이 한주를 치면 왕륭이 장군을 친다는건 불보듯 뻔하오이다. 그렇게
되면 장군은 한번에 두셋의 적과 싸워야 하오이다.》 궁예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였다. 《난 다만…》 하고 궁예는 변명삼아 말했다. 《난 다만 한시바삐 한주를 차지하자는것이네. 그러지 않아도 견훤이 세력을 넓혀 북으로 밀고 올라오는데 여기서 어물거리다가는…》 고마는 궁예의 솔직한 말에 다시한번 때가 변했다는걸 느꼈다. 한개 주나 고을을 차지하던 때가 지나갔다. 분명 신라는 세토막 났다. 궁예, 견훤, 녀왕, 이렇게… 궁예의 초조감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궁예는 벌써 자기의 위치를 깨달았다. 그는 앞을 내다보았다. 궁예는 한주까지 차지하고 견훤과 련합하여 신라를 치든가 아니면 서로 다툴 때 적어도 유리한 위치 즉 지역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견훤보다 우세한 립장에 서려는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고마를 기쁘게 하였다. 《장군의 뜻을 알겠소이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루자고 해도 송악의 왕륭을 포섭해야 하오이다.》 궁예는 찬성도 반대도 안하고 잠자코 있었다. 그쯤해두고 고마는 돌아섰다. 복사가 고마를 기다리고있었다. 복사는 아무말없이 생각에 잠긴 고마를 보다가 《권능순이말이오이다.》 하고 말문을 열었다. 《고마님의 말씀보다 궁예장군은 권능순의 말을 더 믿소이다.》 《왜?》 《그야 장군이 고마님의 말을 따르기보다 자기의 생각과 같은 권능순의 말을 듣는것이 더 좋으니까 그러겠지요.》 《권능순이 한주관아를 치자고 했나?》 《그렇소이다. 고마님이 송악으로 가자마자…》 《잘못이라는걸 모를가? 그건 암닭의 생각인데…》 《누구나 제가 다 옳다고 보오이다.》 《권능순이 왜 그럴가?》 《아마 개국공신이 되고싶어 그러겠지요.》 《개국공신?》 《예, 장군이 한주를 점령하면 나라를 세우겠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허, 그랬지…》 《고마님, 제가 보기엔 권능순이 고마님을 질투하는것 같소이다.》 고마는 픽 웃었다. 고마는 질투따위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건 장점이면서도 고마자체를 위해서는 약점이다. 《하여튼 주의하시오이다. 이제 어느때인가는 고마님이 큰 해를 입게 될것이오이다.》 고마는 권능순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고마와 권능순사이에는 일치점이 있었다. 두사람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다같이 궁예에 의하여 살아난 사람들이고 다같이 궁예에게 꾀를 보태주고있었다. 고마가 죽산의 기훤에게 죽게 된것을 궁예가 살려준것과 하슬라주의 별가였던 권능순이 올가미를 썼다가 궁예에게 살아난것은 어쨌든 묘한 일치였다. 따져보면 고마는 구태여 궁예를 반대하지 않다가 구원된것이고 권능순은 궁예와 죽고사는 판가리에서 적수로 있다가 살아났다는 다른 점이 있지만
얼핏 보면 같고 같았다. 이때까지 고마는 궁예가 권능순을 살려주었고 곁에 끼고 그의 꾀를 받아들이는것을 별로 나쁘게 보지 않았다. 어쨌든 쇠두레에 오기까지 권능순이
꾀를 내여 싸움을 헐하게 치른건 사실이였다. 그것도 그렇지만 고마가 권능순에 대해서 별로 색다르게 보지 않은것은 그가 궁예의 위신을 높여주고있기때문이였다. 저를 죽이려고 날뛰던 사람을 용서해주고 그를 받아들여주는건 누구나 할수 있는 아량이 아니였다. 그것으로 하여 궁예의 위신은 확고한것으로 되였다. 무리의 우두머리는 바로 그런 아량을 지니지 않으면 안된다. 적수를 용서하고 그를 믿고 크게 써준다는 이 범상치 않은 사실은 몇개 군, 현을
얻거나 군사들을 얻는것과는 대비도 안되는 우두머리의 권위였다. 고마는 그런 궁예에 대하여 지어 존경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한주를 쳐야 한다고 집요하게 부추기는 권능순에 대해서 고마는 다른것을 발견하게 되였다. 권능순에게는 꾀가 있으나 뜻이 없다. 송악의 왕륭을 쟁취하지 않고 한주를 치려고 하는 권능순을 두고 과연 어떻게 말할수 있을가? 권능순이 패강진일대의 세력과 돌아가는 형편을 잘
모르기때문에 그럴수도 있지 않는가? 그럴수 있다.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는 법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를 나쁜 놈이라고 말할수는 없다. 고마는 뜻이 없는 꾀란 때로 위험하다는것을 모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권능순을 떼버리라고 궁예를 설복할 생각은 없었다. 자칫하면 오해를 받을수 있다. 모르는척 할가? 하지만 그렇게 되면 궁예의 생각이 또 삐뚜로 나갈수 있다. 그건 위험하다. 고마는 싫어도 권능순을 만나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권능순은 바보가 아니여서 고마와 궁예의 관계를 모르지 않았다. 그 관계는 여느 장수들과 달랐다. 고마는 궁예의 책사였다. 궁예의 곁에서 맴돌지는 않지만 모든 일이 고마의 꾀에 의해 벌어지고있다는걸 권능순은 알았다. 그렇기때문에 권능순은 고마에 대해서 궁예에게 한번도 나쁜 말을 안했다. 권능순은 고마가 비록 자기보다 썩 아래지만 고마를 은근히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차츰 지내보면서, 더구나 고마가 없이도 이 쇠두레까지 오면서 전과를 올리게 되자 마음이 달라졌다. 그것은 고마가 별로 남에게 악하게 놀지 않는다고 보는데서 오는, 이를테면 소인의 못된 습성에서 생겨난것이기도 하였다.
권능순은 생각하기를 고마보다 자기가 더 공이 있다고 보았다. 궁예에게 꾀를 대주는 사람으로서 자기만 한 사람이 없었다. 여기까지 뻗어가자
권능순은 고마를 미워하게 되였다. 그것은 궁예의 신임을 받는데서 고마가 권능순을 앞서고있기때문이다. 고마가 찾아왔을 때 권능순은 더럭 겁이 났다. 하지만 인차 마음을 다잡고 무엇때문에 고마가 자기를 찾아왔는가고 곰곰히 따져보았다. 인차
가늠이 안 갔다. 《당신은 송악 사찬 왕륭에 대해서 아시오?》 하고 고마가 물었다. 《모르오.》 《그래요?》 《난 한주에 대해서는 좀 아오.》 하고 권능순은 고마가 대략 왜 왔는지 알아차리고 말했다. 《그래서 한주를 공격해야 한다고 장군을 부추기오?》 하고 고마가 물었다. 《부추기다니? 난 다만 병법에 대해서 장군에게 권고할따름이요.》 《한주의 실제적인 주인은 왕륭이요. 그는 동비홀(송악)의 사찬에 불과하지만 그의 수하에는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 수백이나 되고 그가 련계를 맺고있는 사람도 이 한주 어느 틈에나 없는 사람이 없소. 반대로 한주 도독은 비록 나라의 벼슬은 쥐고있지만 그의 령이 한주
어디나 다 내려먹는건 아니요. 한주관아에도 별로 큰 힘이 없소. 한주관아는 허술한 사립문에 불과하고 왕륭은 한주 큰집의 실제적인 주인이요. 자, 그러니 왕륭을 먼저 얻어야겠소, 아니면
한주관아를 쳐야겠소?》 권능순은 미욱한 사람이 아니였다. 그는 고마의 말이 옳다는걸 인정했다. 《난 그저 우리 궁예장군이 하루빨리 왕이 되였으면 할뿐이요.》 고마는 복사가 권능순이 개국공신이 되고싶어한다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결코 그런것만은 아니라고 보았다. 궁예가 왕이 되고 내외관직을 설치할 때가 되였다. 고구려를 회복하는 일은 이제 와서 작은 규모가 아니라 큰 범위에서 벌어지게 되였다. 그러니 마땅히 왕을 내세우고 내외관직을 설치하여 기틀을 마련해야 하였다. 더구나 옛 백제땅에서는 이미 견훤이 후백제를 일으킬
뜻을 품고 임자년(892년)에 완산주(전주)를 장악하고 무주(광주)를 쳐서 왕이라고 자처하고있다. 큰일을 하자면 어차피 권력이 있어야 하였다. 권력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큰일을 할수 없다. 《당신의 말이 옳소. 당신은 그 일을 맡아주시오.》 하고 고마가 말했다. 권능순은 놀랐다. 그는 고마가 진정으로 하는 말인지 알아보느라고 고마의 얼굴을 보았다. 고마는 심중하게 말하고있었다. 《알겠소.》 권능순은 고마가 자기 생각을 탓하지 않고 리해해주는것이 기뻤다. 《한편으로 궁예장군이 송악을 틀어쥐도록 당신이 노력해주오. 알겠지만 외교란 혼자서 되는 일이 아니요. 앞에 나서서 뛰는 사람이 아무리 애써도 뒤에서 받쳐주지 않으면 제대로 안되는거요.》 《그건 념려마시오이다. 당신이 날 리해해주니 기쁘오이다.》 권능순은 진정을 담아 고마에게 말했다. 고마의 눈빛은 차분하게 빛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