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회)
16. 술렁이는 송악 외사정 순기가 어이없이 죽었다. 그것은 왕륭에게 뜻밖이였다. 밉다니까 깨꼬한다는데 이건 덜컥 죽어버렸으니… 참으로 사람이 죽고사는건 알수 없다. 그건 그렇고 순기의 죽음으로 일이 너절하게 번질수 있다. 끝내 올게 오는가? 그렇다면… 왕륭은 눈을 쪼프리고 아래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여느 일이라면 몰라도 한주 도독이 가만있지 않을것이다. 한다하는 주의 외사정이면 어딘가. 어느 논판의 개구리가 죽은것과는 다르다. 나라조정에서 가만있지 않을것이다. 그럼 앉아서 죽었소 하고 묶어가길 기다릴것인가? 그럴수는 없다. 마련을 봐야 한다. 왕륭은 결심했다. 이런 때를 타서 의합이 될 사람들을 불러들여야 한다. 송악일대와 나아가서 패강진의 군, 현에서 뜻을 같이할 사람들을 불러와야 한다. 하루사이에 왕륭의 넓은 집에 쉰여라문명의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그들은 적어도 하나가 백여명의 사람들을 거느릴수 있는 사람들이였다. 마치도 이런 때가 오기를 기다린듯 그들은 왕륭이 찾아주는걸 좋아하였다. 아직 일이 어떻게 번질지 모르기때문에 왕륭은 군사를 일으키자고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아들을만큼 준비를 하게 하였다. 왕륭은 그들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내고 몇사람은 남게 하였다. 그들은 그야말로 왕륭이 손발처럼 믿는 사람들이였다. 그들과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다. 어떤 수를 쓰든지 그러지 못하게 막아야겠지만 열에 아홉은 한주 도독이 군사를 보낼것이다. 일단 군사를 들이밀면 싸움은 피할수 없다. 싸움이 일면 한주군사가 언제 어디로 올것인가? 그것이 기본이였다. 대체로는 일단 싸움이 시작되는걸 봐가면서 그에 맞게 계책을 짜자는쪽으로 모아졌다. 왕륭으로서는 소극적인것 같아 조금 불만이였지만 할수 없었다. 왕륭은 아들 건이 입술을 깨물며 골똘히 생각에 파묻힌것을 보았다. 문득 아들의 속을 들어보고싶었다. 아들은 네모진 얼굴에 잠시 주저하는 빛을 띠웠다. 《어서 말해봐라!》 하고 왕륭이 재촉했다. 건은 숨을 돌려쉬고 말했다. 《한주 도독이 송악을 치려 한다면 틀림없이 수군을 보낼것이오이다. 아리수(한강)를 내려 송악으로 덮쳐들것이오이다.》 《그럴수 있다. 본격적인 싸움을 벌리려고 작정했으면 말이다.》 왕륭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건은 가볍게 웃었다. 《그렇게 되면 관군은 우리에게 패하오이다.》 《왜?》 《물싸움이면 우리를 당해내지 못하오이다. 능히 무찌를수 있소이다.》 왕륭은 건이 손가락을 꼽으며 송악의 배와 배군들, 한주군사의 배와 수군에 대해서 말하는것을 흥미있게 들었다.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건의 말은 얼떨결에 하는 소리가 아니였다. 벌써 자세히 알고있는 씨알먹은 소리였다. 마음이 흐뭇해졌다. 《그렇지만…》 하고 건은 이야기를 틀었다. 《한주 도독이나 별가가 싸움을 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것이오이다. 다시말해 아리수를 내려 송악을 공격하려고 하지 않을것이오이다.》 왕륭과 그의 측근들은 귀가 솔깃해졌다. 이제는 건의 말이 어디 들어보자 하고 웃어넘길 말이 아니였다. 그들은 건의 말에 끌려들었다. 《그럼?》 건은 웃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듯 깊이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관군이 칠중하를 건너 공격할수 있소이다.》 그는 칠중하(림진강)에 대해서 말하였다. 칠중하는 력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주요접전지였다. 고구려의 광개토왕 담덕이 백제군을 이 강가에서 대파하여 류역지방을 점령한 일이 있다. 신라 선덕왕때에는 칠중성을 놓고 고구려와 전투를 진행하였고 고구려 말기에는 당나라와 야합하여 칠중성부근에서 이 강을 건너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또 신라, 당나라와의 싸움도 이 연안에서 공방전으로 벌어졌다. 싸움이 자주 일어나는 곳은 그럴만한 요인이 있기때문이다.
전략전술적요인말이다. 그러니 만약 한주관군이 송악을 치자고 하면 이 칠중성쪽에서 서진으로 군사를 내몰수 있다. 건이 말하는 사이에 왕륭, 도불, 왕륭의 측근들은 어느덧 열아홉에 난 이 젊은이가 우두머리가 되여 명령을 내리는것으로 착각될 정도였다. 《관군이 칠중성부근에서 강을 건너온다 하여도 겁날건 없소이다. 우리가 강을 잘 살피고있다가 군사들이 절반 건넜을 때 들이치면 이겨놓은것이나 다름없소이다. 벌써 꾀를 짜놓았소이다. 제일 문제로 되는건 패강진에서 어떻게 나오겠는가 하는것이오이다. 패강진은 어디까지나 나라의 군사진인것만큼 한주관군과 우리가 싸울 때
패강진의 군사가 우리뒤를 치면 큰일이오이다.》 《그건 걱정말아.》 하며 왕륭이 말했다. 《거기엔 믿을만 한 사람들이 있다.》 《외조부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시오이까?》 《그렇다.》 건은 마침내 입을 다물었다. 싸움준비는 다된셈이다. 싸우기 전에 적의 있을수 있는 전술을 파악하고 대치하는것은 이미 이긴 싸움이다. 왕륭은 모여온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것을 기쁘게 바라보았다. 《사찬어른, 건이 괜찮은데요. 우리모두를 합쳐도 건을 당해내기 어렵겠소이다. 허허, 참으로 배심이 다 든든해지는걸… 사찬어른이 큰 산을
두셨소이다.》 풍덕 호족이 감탄했다. 《뭘요, 아직 어린애인데…》 왕륭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겸손하게 말했다. 왕륭은 참으로 기쁘기 그지없었다. 이제 와서 한주관군이 쳐들어오는따위는 문제로도 되지 않았다. 그는 아들 건이 그사이 자기도 모르게 버쩍 컸다는것에 마음이 흐뭇하였다. 《올테면 오라지. 어디 맞서보자꾸나…》 배심이 생겼다. 한주 도독이 서뿔리 덤벼들면 오히려 한주관아를 들이치고말아야겠다. 수세로부터 공세로 넘어가는 마음이 생겼다. 그날로 병쟁기를 감춘 도불의 배들이 칠중하를 오르내리며 감시를 했다. 아직 관군은 까딱 움직이는 기미가 없다. 사흘이 지나도록 마찬가지였다. 왕륭은 일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불안해졌다. (그럴수 없는데… 무슨 꿍꿍이가 있는것일가?) 나흘이 되여 크지 않은 배 한척이 영안성부두에 닿았다. 한주의 주조가 왕륭을 찾아왔다. 전에 없던 일이다. 주조는 무엇때문에 왔을가? 원래 일이 되자면 송악 사찬 왕륭이 한주관아에 불려갔어야 했다. 주조는 무엇때문에 왔는가? 《그간 안녕하셨소이까, 사찬!》 주조는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왕륭은 그가 거짓웃음을 짓는걸 알았다. 《덕분에…》 왕륭도 마주 웃었다. 《말은 많이 들었소만 송악 사찬 왕륭이 사는걸 눈으로 보지는 못했소다.》 주조가 하는 말이였다. 그러니 어쨌다는건가? 사는걸 보러 왔다… 무슨 셈판인가? 《도독께서 보내서 내가 특별히 왔소이다.》 《무슨 일로…》 《외사정때문이오이다.》 주조가 귀속말로 했다. 《외사정?》 왕륭은 시치미를 뗐다. 《아따, 뭘 그러시오? 다 알고 왔는데…》 《어쨌다는건지…》 《도독어른께서는 주의 외사정이 며칠새에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고 하십디다요. 워낙 숨어서 하는 일이 그 사람 직분이라…》 왕륭은 놀랐다. 이게 무슨 말인가? 주조는 빙그레 웃으며 왕륭에게 손짓하였다. 《그렇게 됐다니까요. …》 그러니 도독은 이번 일을 어물쩍해버리려는것이다. 뢰물을 노리는걸가? 《도독께서 다른 말씀이 계셨겠는데요?》 왕륭이 뚝뚝한 낯빛으로 주조를 건너보자 그는 비죽이 웃었다. 《국사가 어려운 때에 언제 외사정 하나 일을 두고 가타부타 할 새가 없소이다. 그보다는 지금 쇠두레고을이 도적들에게 점령되였소이다. 도독께서는 이런 때에 송악 사찬께서 한번 본때를 보이시길 바라오이다.》 왕륭은 그제야 가늠이 갔다. 한주 도독은 왕륭을 시켜 도적을 막자는것이다. 《송악 사찬께서 궁예도적을 쳐물리치면 송악고을은 물론 한주도 편안하게 되오이다. 그렇게만 되면 사찬께선 나라에 큰 공을 세우는것으로 되오이다.》 왕륭은 궁예에 대해서 모르지 않았다. 번개불에 콩닦듯이 하슬라주에서 일어난 그 군사가 쇠두레까지 밀고 내려온것을 놀랍게 바라보던 왕륭이였다. 어찌된 일인지 벙벙할 지경이였다. 차면 넘친다고, 궁예도 어딘가 저 서남쪽의 견훤과 같은데가 있다. 흥미있는것은 그 궁예의 군사들이 움직이는 앞에 불어대는 바람이였다. 왕륭도 격문을 보았다. 그 격문이 일으키는 묘한 바람이 궁예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있었다. 궁예를 어떻게 봐야 하겠는가? 그 격문의 내용이 사실인가? 왕륭에게는 선뜻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조심히 지켜보고있던 참이였다.
그런데 그 바람이 한주를 들이치고 회오리쳐서 왕륭에게까지 닿은것이다. 《좀 생각해보겠소이다.》 하고 왕륭이 말했다. 《그럼 나는 래일 떠날가 하오이다. 한시바삐 도독어른에게 알려서 송악과 한주관아 군사들이 힘을 합쳐 도적을 들이쳤으면 좋을텐데…》 《예, 저녁이면 대답을 드리겠소이다.》 왕륭이 한주 도독이 군사를 들이밀것이라고 생각한것은 잘못이였다. 하지만 그건 도독이 왕륭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거나 한주관아에 군사가 없어서가 아니였다. 궁예가 도독의 기도를 꺾어놓고 반대로 도독이 왕륭에게 억지웃음을 지으며 달래게 하였다는것이 옳을것이다. 그러니 궁예가 왕륭을 살려주었는가? 그렇다고 볼수도 없다. 왕륭은 오히려 한주 도독이 불집을 일으키기를 바라고있었다. 참으로 묘한 일치였다. 어쨌든 도독이 원쑤되여 덤벼드는것이 아니라 손잡자고 찾아드는것은 기막히는 일이였다. 이랬든저랬든 왕륭은 어차피 이제는 조용히 숨어서 때를 기다리게 되지는 않았다는것을 깨달았다. 아들도 클만큼 컸다. 이때를 타서 한주 도독과 결탁을 하든 안하든 궁예가 뛰여드는것으로 하여 군사를 일으켜야 했다. 은밀히 장사를 하며
권력의 동향이나 살피던 때는 지나갔다. 바야흐로 일어날 때가 되였다. 이런 마당에 아들 건이 보여준 정황판단이나 작전은 참으로 감탄하게 되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헛되지 않았다. 하늘이 보살피시는구나!》 하고 왕륭은 웃었다. 도독에게 뭐라고 할것인가? 왕륭에게는 아직 도독을 도와 궁예를 쳐야겠다는 결심이 서지 않았다. 궁예가 어떤지 두고봐야 하기때문이다. 이 기회에 군사를 일으키는것은 놓치지 말아야 했다. 울고싶을 때 도독이 뺨을 쳐준셈이다. 도독의 속심이야 어쨌든… 군사는 일으키되 궁예를 치는가 마는가는 두고보자. 관(관청)을 업고 군사를 일으키는것은 여러모로 유리하다. 왕륭은 주조에게 도독의 령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주조가 만족해서 돌아간 다음부터 왕륭은 이제는 내놓고 군사를 뫃기 시작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은밀히 준비시켰던지라
왕륭의 소식이 가기 바쁘게 군, 현별로 군사들이 모아지기 시작하였다. 하루이틀사이에 벌써 2~3천이 넘는 인원으로 되였다. 할 일이 많아졌다. 생각밖으로 병쟁기가 모자랐다. 아무리 부유한 왕륭이라도 혼자서는 어림없었다. 왕륭은 각 군의 호족들에게 호소하였다. 한창 왕륭이 그 일로 분주한 때에 고마가 찾아왔다. 고마가 나타난것은 왕륭에게 때마침이였다. 일이 착착 맞아돌아간다고 왕륭은 생각했다. 왕륭은 하던 일을 아들과 도불에게 맡기고 고마를 만났다. 고마를 위해 상을 크게 차리게 했다. 고마로서는 이전에 볼수 없던 대접이였다. 왕륭은 고마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묻지 않았다. 그것은 고마를 놀라게 하였다. 고마가 알건대 왕륭은 타산이 밝은 사람이였다. 그는 서뿔리 일을 처리하지 않고 매사에 세심하였다. 다만 아들에 대해서 내놓고는… 《왕경형편이 어떤가?》 하고 지나가듯 묻는 왕륭을 보며 고마는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것을 간파했다. 《녀왕이 오래갈것 같지 못하오이다.》 왕륭은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무슨 일이 있었소이까?》 하며 고마가 넌지시 물었다. 왕륭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였다. 《군사를 뫃고있네.》 《무엇때문이오이까?》 《궁예를 치자는거네.》 고마는 속이 뜨끔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태연한척 하였다. 《그거 잘하는것 같소이다. 그러지 않아도 조정에서는 북원, 하슬라에서 일어난 반역패당때문에 골을 앓고있소이다. 아마 사찬께서 큰 공을
세울것이오이다.》 왕륭은 고마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예.》 《그렇다?》 《그런데 그건 사찬어른이 스스로 하는 일이오이까?》 《난 한주 도독의 령을 받았네.》 《그렇게 됐군요.》 아직 고마는 왕륭의 속을 알수 없었다. 《서라벌이야기나 자세히 해주게. 그래 녀왕이 앓는가?》 《예, 앓기도 하고 이젠 늙기도 했지요. 그리고…》 고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준흥이 하는짓을 말해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말해주기로 하였다. 《시중 준흥이 우아래를 독차지하고 제멋대로 놀고있소이다. 조정은 조정이라 할수 없고 당장 무너질 판이오이다.》 고마는 왕륭의 표정을 살폈다. 이쯤했으면 한주 도독이요 뭐요 하는 벼슬아치들의 추동으로 궁예를 치는것이 어리석은짓이 아니냐 쯤 알게다.
모른다면 왕륭이란 사람은 다시 봐야 한다. 어느때나 별로 볼것 없던것이 막판에 와서 악질로 되는것이 흔히 있는 일이니까. 왕륭도 그런 악질인줄
어찌 알랴! 《힘들었겠는데 푹 쉬게. 래일 만나 이야기를 해보세.》 하고 왕륭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는 잠들지 못했다. 때마침 왕륭에게 왔다. 며칠만 지체했어도 일이 어떻게 될번 하였는가. 고마는 궁예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왕륭을 소홀히 대하는 궁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벌써 우쭐해졌는가? 고마는 처음으로 궁예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보았다. 그건 아주 위험하다. 궁예가 한주를 치겠다고 기세등등해하면서 왕륭을 별치않게 여기는것을 보았을 때 벌써 그렇게 생각들었다. 궁예에게 좋은
점은 일처리를 참대 쪼개듯 하는것이다. 헌데 이것은 자칫하면 한쪽에만 력량을 집중하면서 다른쪽을 보지 못하는 즉 전반적인 정세를 고려하지 못하는 결함을 나타낼수 있다. 어쩔수 없는 일일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고마가 걱정하는것은 궁예가 어느덧 자만도취하지 않는가 하는것이다. 왕륭을 홀시하는것을 보며 고마는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궁예가 하슬라를 떠나 북상하며 저족, 생천 등지를 들이치면서 고구려부활을 웨친것은 마치 마른 풀밭에 불을 붙인 격이였다. 한주, 삭주, 하슬라주는 원래 고구려땅이였다. 고구려가 망한 다음 신라가 그 땅을 차지했으나 사람들은 다 고구려사람들이였다. 이 3개 주에서는 비록 신라의 관료라 해도 옛 고구려관직으로 통하리만치 고구려의 얼이 살아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라의 땅으로 보여도 속은 고구려의 얼이 살아있었다. 만일 이 땅이 신라아닌 당나라의 통치를 받았다면 어찌되였을가? 편안치 못했을것이다. 자고로 옛 박달임금의 땅, 고구려의 땅에는 외적이 깃들지 못했다. 비록 나라이름은
달랐어도 이 땅 3주 즉 한주, 삭주, 하슬라주를 몇백년 다스린것도 허나새나 같은 겨레붙이나라였기때문이였다. 같은 겨레붙이라는 막연한 감정이 3주의 사람들의 반항심을 눅잦혀주고있었다. 그러나 이무렵에 와서 신라의 통치체계는 썩을대로 썩었다. 마치 분재와 같이 억지로 크지 못하게 요리조리 비틀리여 기이하게 자라난 신라의 통치이니 환멸이 생기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궁예가 고구려기발을 들었을 때 천민들은 물론 호족과 신라의 낮은 벼슬아치들까지 호응하여 들고일어나는것을 보아라. 고마는 바로 이것이 고구려의 얼이라고 보았다. 죽어있는것 같으면서도 죽지 않은 얼! 생명은 죽지 않는다. 싹은 다시 튼다. 고마는 감탄하고있었다. 그러나 궁예는 그것을 다르게 보는 모양이다. 이 땅을, 이 겨레를 잘 모르는게 아닐가? 왕륭에 대한 궁예의 태도를 보며 고마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잘못 보았는가? 아직 그렇다 할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저 막연한 불안뿐이다. 고마는 머리를 흔들었다. 누구에게나 잘못은 있는 법이다. 그 잘못만을 따지고 들면 일을 할수 없다. 하지만 왕륭에 대한 궁예의 태도는 좀처럼 묵새길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너 어디 그래 봐라 하고 내쳐둘수는 없다. 왕륭이 한주와 결탁하여 궁예를 치면 큰일이다. 어떻게 하나 막아야 한다. 왕륭을 돌려세워 궁예와 합세하게 해야 한다. 뜻을 합쳐야 힘이 세진다.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있다고 하더라도 뿔뿔이 헤쳐지거나 서로
배척한다면 그것은 자멸의 길이다. 큰일을 위해 작은 일을 희생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땅에 고구려의 얼을 살릴수 있다. 만약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최소한 한주와 패강진, 왕륭을 갈라놓아야 한다. 이른새벽. 왕륭은 말을 타고 고마를 불렀다. 집사가 고마에게 말을 끌어왔다. 《바람이나 쏘이자는거네.》 왕륭이 말했다. 고마는 왕륭이 밤사이에 무엇인가 깊이 생각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두사람은 말을 타고 송악산으로 올랐다. 왕륭은 내내 입을 다물고있었다. 고마는 그가 절대로 먼저 말을 꺼내는 성미가 아니라는것을 알고있었다. 《사찬어른께서는 정말 궁예를 칠 작정이시오이까?》 고마가 먼저 물었다. 《어제 자네는 잘하는 일이라고 했지?》 《신라 조정에 공을 세울 일이라고 했소이다.》 《그래, 또 알겠나? 내가 저주로운 8등급벼슬에서 더 올라갈지?》 고마는 한쪽입귀로 웃었다. 《사찬께서는 저를 떠보시오이까?》 《사찬, 사찬 하지 말게. 자네도 나를 떠보지 않았나…》 두사람은 마주보며 웃었다. 《고마, 자네는 왜 궁예를 치는걸 싫어하나?》 《내가요?》 《그래.》 《난 그렇게 말한적 없소이다.》 《그렇다? 헌데 그렇게 느껴지는데?》 《아마 잘못 보셨겠지요.》 《그럴수도 있겠지. 고마! 자네 날 도와주겠나?》 《글쎄요…》 《난 도선스님이 언제인가 운각스님과 자네가 보기 드문 사람들이라고 한 말씀을 잊지 않고있네.》 고마는 자기가 왕륭을 찾아왔을 때 별로 눈길을 돌리지 않고 아들 건에 대해서만 어쩔줄 모르던 일을 돌이켜보며 소리없이 웃었다. 이제는
오래전의 일이긴 하지만… 《내가 자네를 괜히 한주 번살이로 서라벌에 보낸줄 아나?》 고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른이 궁예를 치는걸 저는 반대하오이다.》 《왜?!》 하고 왕륭이 놀라서 고마를 보았다. 《명분이 없소이다.》 《나라의 뜻을 따라 도적을 치는데도?》 《궁예는 도적이 아니고 고구려를 일으키려는 사람이오이다. 그러니 한주 도독이 궁예를 치는건 신라가 고구려를 치는것이나 같소이다. 어른께서는 그걸 찬동하시오이까?》 왕륭은 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 《가만, 가만. 자네는 궁예와 보통사이같지 않구만. 내 예감이 맞았지. 그래 언제부터 그렇게 됐나?》 《언제인가 개산의 기훤에게 잡혀있을 때 궁예가 절 구원해주었소이다.》 《생각나네. 그랬었군…》 《궁예의 세력이 작지 않소이다. 하슬라주와 삭주, 한주의 거의 모두가 궁예에게 복종하고있소이다.》 《우리 송악, 패강진은 아니야.》 《아직은 아니오이다.》 《난 궁예를 쳐부실수 있네. 그렇게 되면…》 《어른은 궁예의 격문을 보지 못하셨소이까?》 《보았네.》 《사찬께서는 고구려를 세우는걸 반대하시오이까?》 《난 내가 고구려를 세우자는걸세. 우리에겐 힘이 있네. 따르는 사람들도 있고…》 《그럴수도 있소이다. 하지만 어른과 궁예가 싸우면 리득볼것은 한주 도독밖에 없소이다.》 《그건 그래.》 《어른은 진정 고구려를 일떠세우는걸 바라시오이까?》 《우리는 조상대대로 불함산(백두산)에서 내려와 살아가는 가문일세. 난 한시도 고구려를 잊은적이 없네.》 《하다면 고구려가 귀하오이까, 권력이 중하오이까?》 《난 다름아닌 우리야말로 고구려를 일떠세울 사람이라고 보는거야. 궁예가 어떤 사람인지 누가 알겠나?》 《지금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있소이다. 이런 때 궁예를 치면 결국 싸움에서 혹 이길지 몰라도 나중에는 할 말이 없어질것이오이다. 왜냐면 궁예는 이랬든저랬든 고구려를 세우자고 일어났으니까요.》 《그건 더 두고보세.》 《힘을 합치시오이다. 어른께서만 결심하시면 궁예장군은…》 《힘을 합치라?》 《그렇소이다. 이것은 한얼의 가르침이오이다.》 《좋아, 내 우리 사람들과 의논해보지…》 왕륭과 고마가 산을 내리는데 왕건과 도불이 바삐 마주 올라왔다. 《궁예가 우리 송악에 당장 쳐들어온다고 하오이다.》 도불이 말했다. 《거짓말이요.》 고마가 놀라서 소리쳤다. 《우리 사람들이 직접 들었소.》 왕건이 고마를 보며 말했다. 《궁예가 우리를?》 왕륭은 눈을 쪼프리며 중얼거렸다. 《어른! 제가 가서 알아보겠소이다.》 왕륭은 고마를 보며 비웃음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