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회)
14. 불 씨 허름한 베잠뱅이에 괴나리보짐을 진 사람이 여드레 팔십리걸음 하며 어느 마을에 들어섰다. 그는 아이들에게 물어가며 강무달의 집을 찾았다. 집안에서 베짜는 소리가 가락맞게 울렸다. 《주인님 계시오이까?》 베짜는 소리만 들렸다. 《주인님 계시오이까?》 하고 길손이 거듭 큰소리로 묻자 가락소리가 멎었다. 문이 열리고 처녀가 내다보았다. 《이 집이 강무달어른의 집이 옳소이까?》 《네.》 《아, 그럼 거긴 시내?》 처녀는 얼굴을 붉혔다. 새파란 총각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것이 쑥스러운 모양이였다. 《뉘신지요?》 《난, 저… 누… 누이를 뵈려고 온 사람이오이다.》 《누이?》 시내라는 처녀의 얼굴에 의혹이 비꼈다. 길손은 그러거나말거나 손부채질하며 비위좋게 말했다. 《에, 덥다. 거 물 한바가지 청할가요?》 시내는 한동안 길손의 얼굴이며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부엌으로 내려갔다. 토방에 걸터앉았던 길손은 시내에게서 물을 받아 마셨다. 물 한바가지를 오래도 마셨다. 한모금 마시고 더 마시고싶지 않은게 분명한데 무슨
심사인지 씩씩 숨을 쉬며 바가지에서 입을 떼지 않는다. 바가지에 입이 얼어붙었나? 시내는 우스웠다. 물 한바가지를 한독 마시듯 한다. 《에, 잘 마셨다.》 하는데 그건 듣는 사람에게 정말 달게 마셨다는 소리보다 억지로 겨우 마셨다는것으로 들렸다. 《고맙소이다.》 하는 소리를 잊지 않고 덧붙이며 길손은 바가지를 넘겨주었다. 바가지를 물독우에 얹은 시내는 반쯤 열린 문고리를 쥐고 길손이 어서 갔으면 하는 눈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길손은 갈 차비가 아니였다. 싱겁게 제비가 둥지 튼 처마며 울타리를 기웃기웃거리고있었다. 시내는 딱했다. 외간 길손을 가라 하기도 뭣하고 그냥 지켜보자니 베짜는 일이 바쁘고… 《주인어른은 어디 가셨는가요?》 길손이 무릎을 툭툭 치며 물었다. 그 꼴이 시내에게는 우스웠다. 보매 새파란 총각인데 나이 먹은 늙은이티를 낸다. 《예, 저, 동네일때문에…》 《예에… 삼찌는 일이요??》 말꼬리를 길게 뽑는 소리에 시내의 눈이 머루알처럼 되였다. 여느 길손이 아니다. 시내라고 이름을 딱 짚는것도 그래, 집 내막을 아는것도 그래… 도대체 누굴가? 《어디서 오셨는지요?》 하고 시내는 의혹에 차 물었다. 길손은 시내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울타리너머쪽을 휘 둘러보았다. 길손은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궁예장군한테서 왔소이다. 저는 복사라고 하오이다.》 《아…》 시내는 가벼운 비명을 지르며 손잡이고리를 놓았다. 갑자기 가슴이 콩콩 뛰며 눈앞이 어지러웠다. 어느 한시도 잊은적 없는 사람이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여적 소식 한번 없던 사람이 별안간… 길손에게 물을 떠주고 방안에 들어와있던 시내는 달아오른 뺨을 두손으로 식히느라 애썼다. 이윽하여 시내는 다시 문을 열었다. 《죄송하오이다. 그만…》 하며 시내는 얼굴을 붉혔다. 《뭐, 괜찮소이다.》 길손은 빙긋빙긋 웃었다. 《저, 그이가 살아계셨나이까?》 시내는 들릴락말락 물었다. 《살아계실뿐인줄 아시오이까? 이젠 수천을 거느린 장군이시온데.》 《어쩌면…》 《장군은 누이를 데려오라, 아니 모셔오라 하셨소이다.》 《정말?!》 하고 시내의 입술이 놀라 방글해졌다. 《정말 아니문요.》 얼굴이 가무스름한 복사는 히죽이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멎었다. 눈앞에 고마가 떠올랐다. 《무슨 일인가 하면 장군이 모셔오라 해서 왔다고 하게!》 《예.》 《가만, 처녀가 정말인가 물으면 어쩔텐가?》 《그럴게 뭡니까? 좋아하는 사이라면야 얼싸 좋다고 달려올텐데요, 뭘.》 《아니야. 장군은 사실 시내를 데려오라고 한적이 없네. 그런걸 내가…》 고마님은 괜한 걱정, 오라 했건 안했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 예로부터 싸움은 말리고 혼사는 붙이랬다고… 복사는 이번 일에 제켠에서 흥이 났다. 그런데 《정말?》 하고 묻는 처녀의 말에 어딘가 쑥 찔리운감이 들었다. 정말인가고 묻는 시내의 말투에는 기뻐하는것도 있지만 한편 의혹도 있었다. 궁예장군이 처녀를 데려온것을 좋지 않게 생각할수도 있다? 왜? 고마님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가, 참… 복사는 씩- 웃었다. 《그러니 떠날 차비를 해주시오이다.》 《네.》 하고 눈을 반짝이던 시내가 웬 일인지 시무룩해졌다. 《왜 그러시오이까?》 《저, 아버님이 오신 다음에…》 《지체할수가 없는데… 할수 없지, 기다려보지요. 어련하시겠지만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재미가 없소이다.》 시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때가 되여 무달이 집으로 들어왔다. 뒤짐을 지고 뜨락에 들어서던 무달은 복사를 보자 눈을 찌긋했다. 《편안하시오이까?》 하고 문안인사하는 복사를 언짢게 흘겨보았다. 《웬 사람이요?》 《저는 복사라고 하오이다. 여쭐 말씀이 있어서 주인어른을 찾아왔소이다.》 《날?》 《네.》 하며 복사는 다시 주위를 얼핏 살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하고 무달은 무뚝뚝하게 말하며 토방에 가앉았다. 《저, 우리 궁예장군께서 댁의 따님을 모셔오라 해서…》 무달은 찌프렸던 눈을 흡떴다. 《궁예장군? 난 그런 사람 모르오!》 단마디로 짜른다. 복사는 히죽이 웃었다. 《그러지 마시오이다, 어른!》 무달은 벌컥 성냈다. 《모른다질 않소. 그러니 우리 집에서 썩 나가시오, 얼른!》 무달은 돌아섰다. 《저, 어른! 제 말씀을 들어보시오이다.》 《들어보고말고 할게 없소. 난 아예 모르니 딴데나 가보시오, 딴데나…》 복사는 그냥 웃는 낯으로 서있다가 《그럼, 저녁에 다시 들리겠소이다.》 하고 말하였다. 복사가 문밖에 나서는데 시내가 따라나왔다. 《저…》 복사는 돌아섰다. 토방에서 무달이 소리쳤다. 《썩 들어오지 못할가?》 복사는 무달을 보며 웃다가 시내에게 끄덕 고개를 숙여보이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시내는 그의 뒤를 지켜보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시내는 보리밥에 나물국으로 밥상을 차렸다. 점심을 들면서 두 부녀는 말이 없었다. 점심을 먹고 한잠 달게 자는것이 무달의 건늘수 없는 버릇이였다. 하지만 오늘은 도무지 잠을 잘수가 없었다. 그는 반질반질해진 목침을 앞에
놓고 근심에 싸여있었다. 설겆이를 하고나서 부엌에 쪼크리고 앉아있던 시내는 아버지의 곁으로 다가갔다. 무달은 딸이 오는것이 두려웠다. 《저는 가봐야 하겠나이다.》 시내의 말에 무달은 흠칫 놀랐다. 그는 구름노전바닥을 손가락으로 비벼대는 딸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한숨을 쉬였다. 《어딜?》 하고 무달이 제 목소리 아닌 소리로 물었다. 그 소리는 떨리고있었다. 시내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뻔한 물음이였다. 《이것아, 정신이 있냐 없냐, 도대체 어딜 간다는거냐? 난데없이 오다가다 들린 놈의 말을 듣고 어딜 간다는거냐?》 시내는 입술을 감쳐물고있었다. 《세월이 어수선한 판에 어떤 놈인줄 누가 아냐? 관가에서 중떠보느라고 그러는지…》 그래도 딸은 입술만 깨문다. 무달은 안타까웠다. 《새침데기 골루 빠진다더니, 어휴-》 무달은 혀를 찼다. 시내는 품안에서 접은 종이를 꺼내 무달앞에 내밀었다. 《이거 뭐냐?》 무달은 종이를 펼쳤다. 무달의 낯빛은 놀라움으로 가득찼다. 그것은 궁예의 부대에서 내돌린 격문이였다. 《이게 어떻게… 아까 그 젊은 녀석이 주더냐?》 시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어디서 났냐? 언제?》 시내는 입술을 옥물고있었다. 무달은 기가 막혔다. 그도 나도는 그 격문을 이미 보았다. 그러나 집에 박혀 베나 짜는 딸이 그걸 품고있을줄 어이 꿈이나 꾸었으랴. 물은 흐르다 막히면 에돌아라도 가지, 격문이요, 소문이요 하는건 뭔가? 어떻게 되여 해빛처럼 슴배여들어 딸의 품에까지 들었냐 말이다. 무달은 일나갈 생각도 잊고 우두커니 뜨락만 보고있었다. 저녁무렵에 복사가 왔다. 그가 왔을 때 무달은 어디 가고 없었다. 복사는 마침이라고 생각했다. 《어찌하시겠소이까, 누이?》 《가겠나이다.》 바라던 대답이였지만 너무나 단호하게 하는 소리여서 복사는 제켠에서 놀랐다. 《주인어른의 승낙을 받았소이까?》 시내는 아래입술을 깨물었다. 《여쭈긴 하였나이다. 승낙은 안했지만 며칠이라도 갔다오겠나이다.》 하며 시내는 미리 준비했던 보따리를 꺼냈다. 흔히 얌전데기들은 괄랭이에 비해 마음이 약하다고들 한다. 시내도 곱게 생긴 얌전데기형이여서 마음이 약할것이라고 복사는 생각했다. 아버지란 사람이 무슨 억한 심정인지 궁예라는 말을 꺼내기 바쁘게 짜증내니 열에 아홉은 시내가 궁예에게 가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하며
복사는 만일을 대비해 다른 꾀까지 짜두었다. 그런데 보니 그게 아니였다. 이 누이가 궁예장군을 몹시 사랑한게지? 하여튼 사람이란 모르겠구나… 저녁밥은 미리 지어놓았다. 시내와 복사는 집을 떠났다. 마을은 일없이 빠져나왔다. 복사는 조금 마음이 풀려 앞에서 걸었다. 그들이 산굽이길을 돌아서는데 앞에서 인적이 났다. 여럿이 복사의 앞을 막아나섰다. 《남의 집 처녀를 유괴해가는 녀석이 있다더니 바로 네놈이구나!》 앞에서 팔짱을 끼고있던 사람이 소리쳤다. 《당신들은 누구요?》 하고 복사는 일부러 느릿하게 물었다. 《동리사람들이다!》 《아, 그렇소이까? 이게 무슨 오해가 생긴것 같소그려.》 《오해구 륙해구 때가 어느때라고 뛰여들어?》 《이것 보시오이다. 내…》 《도적놈을 쳐라!》 사나이들은 복사를 빙 둘러싸고 일시에 달려들었다. 《이러지들 말아요!》 시내가 소리쳤다. 누군가가 시내를 잡았다. 무달이였다. 《집안망신, 마을망신 시키지 말고 어서 집으로 가자!》 복사를 때리는 소리가 둔중하게 울렸다. 그러나 복사는 비명 한번 지르지 않고 반항조차 없이 내려지는 매를 고스란히 맞았다. 마침내 복사는 땅에 쓰러졌다. 《가만!》 어둠속에서 소리가 났다. 복사를 때리던 사나이들이 매를 거두었다. 풍채좋은 사람이 복사에게 다가왔다. 그는 쓰러진 복사를 내려다보았다. 《부축해주게!》 복사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입가로 흘러내리는 피를 손바닥으로 닦았다. 《자넨 도대체 누군가?》 하고 풍채좋은 사람이 물었다. 복사는 대답 안했다. 《괜찮아. 사내가 매 맞을줄 알거던. 그래 자네가 궁예의 사람이라는게 맞나?》 《아니라면 어쩔테요?》 《우리 사람들은 비렬한 술책을 꾸미는걸 좋아하지 않아. 그런 놈은 죽여버리지…》 《난 궁예장군의 부하요. 비렬한 술책을 쓰지는 않았소.》 《그걸 어떻게 믿지?》 복사는 한동안 생각하다가 옷섶을 뒤져 무엇인가 꺼냈다. 풍채좋은 사람은 그걸 받아들었다. 《불을 밝히게!》 불아래서 그는 복사에게서 받은 종이를 펼치고 읽었다. 《<천하에 고하노라!> 음, 격문이로군…》 그는 복사를 잠간 보고 소리내여 읽었다. 《이 땅은 고구려의 땅! 우리는 대대로 고구려사람들이다. 허나 신라가 바다건너 당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망하게 하니 어언 2백여년! 우리는 당나라의 수모를 받고 신라의 노예로 되여 개나 돼지, 소나 말처럼 살아왔다. 백성의 보금자리인 나라는 있다 해도 신라는 믿을수 없고 벼슬아치들은 소잔등에 앉은 모기냐 파리냐. 밤낮으로 시기와 질투, 알륵과 음모를 일삼으며 죽기를 재촉하여 백성들의 등껍질을 벗겨내니 이제 우리들의 가마에는 거미줄 쓸고 굶주린 부모처자의 울음소리 산천에 사무쳤다. 하면서도 신라의 임금은 부화타락에 눈이 뒤집히고
벼슬아치들은 오히려 백성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백성의 피땀을 짜내 호의호식을 다툰다. 이제 더는 우리들이 살 곳이 없고 죽어 묻힐 곳이 없어졌다. 아, 아! 여기까지 이르러 돌이켜보니 가슴이 떨리고 머리털이 곤두선다. 정녕 저 씩씩한 고구려의 기상, 고구려의 참된 얼이 영영 사라졌단 말인가! 아니다. 고구려의 얼, 고구려의 기상은 죽지 않았다. 보아라! 바야흐로 고구려의 얼이 살아난다. 고구려의 기상이 봄싹처럼 우리에게서 파릇파릇 살아난다. 이제 신라는 망하고 고구려가 일떠선다. 이는 우로는 천명이요, 아래로는 민심이다. 이때를 맞아 뜻있는 사람이 어찌 얼음아래 벌레처럼 움츠리고만 있을것이며 기개있고 용력있는 사람이 어찌 노예살이멍석우에서 어리석은 꿈만
꾸겠는가. 천명을 받고 민심을 따라 궁예장군이 일어났으니, 뜻있는자여! 기개있고 힘있는자여! 속속 떨쳐나 마음을 합쳐 삶의 도리를 찾으라! 천명과 민심을 따르는자 흥할것이요, 거스르는자 망할것이다.》 격문을 다 읽고나서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러니 자네는 궁예장군의 사람이라, 그런가?》 하고 그가 복사에게 물었다. 《그렇소.》 《그럼…》 하며 풍채좋은 사람은 자기의 품에서 또 다른 격문을 꺼냈다. 《이 격문도 같은것이니 그렇다면 나도 궁예의 사람인가?》 복사는 어리둥절해서 두개의 격문을 번갈아 보았다. 《이 격문은 궁예장군을 돕는 고마님께서 쓰신것이요. 난 고마님의 분부를 받고 시내누이를 모시려 왔을뿐이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풍채좋은 사람이 입을 떨구었다. 《그럼 좋아. 난 자네를 우리 사람들과 함께 궁예에게 보내려고 하네. 물론 시내도 함께… 어떤가, 반대없나?》 복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풍채좋은 사람은 빙긋 웃었다. 《여보게, 천궁! 어쩌자는건가? 내 딸을 왜 거기로 보낸단 말인가?》 하며 뒤켠에서 시내를 잡고있던 무달이 따졌다. 《가만있으시오. 이 사람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할게 아니요?》 《자넨, 그럼…》 《좋은 사람이면 왜 죽이겠소? 관가끄나불인지 아닌지 알아내면 그만이요. 형님이 정 마음이 놓이지 않으면 나도 따라가겠소. 시내의 손가락 하나 다치지 못하게 할테요.》 그는 시내에게 돌아섰다. 《시내야, 네 생각은 어떠냐?》 시내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좋아, 그럼 떠나자!》 천궁과 시내가 나타난것은 궁예에게 천만뜻밖이였다. 《천궁어른이 나를 찾아올줄은 몰랐는데요?》 궁예는 놀랍고 기뻐 어리둥절했다. 천궁은 말없이 격문을 내밀었다. 《시내의 일도 있고 알고싶은것도 있어서 왔소이다.》 《뭣이오이까?》 《이 격문이 장군이 쓴것인가요?》 궁예는 격문을 보고 웃었다. 《그렇소이다. 내가 쓴것은 아니고 이 고마가 쓴것이요. 우리들의 뜻을 담았다고 할수 있지요.》 천궁은 한무릎을 꿇었다. 《장군의 뜻이 그렇다면 나는 장군을 따르겠소.》 《그게 정말이오이까?》 궁예가 놀라며 물었다. 《사내대장부로서 맹세하오.》 《고맙소이다, 천궁어른!》 궁예는 천궁의 손을 부여잡았다. 시내는 두사람이 만나는것을 가만히 지켜보고있었다. 그는 궁예가 자기를 어떻게 맞아주겠는지 생각지 못했다. 그를 만나게 된다는 그 한가지
생각으로 가슴이 걷잡을수 없이 활랑거리고 온통 그 생각만이 꽉 차있었다. 어떻게 그 먼길을 왔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궁예가 시내를 보자 소처럼 웃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가슴이 다 멎는것 같았다. 궁예가 천궁이 온것을 축하해서 술상을 차리게 하고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 동안 시내는 줄곧 궁예를 기다렸다. 그러나 궁예는 날이 새도록 시내에게 오지 않았다. 사흘이 되여 천궁이 떠나간 뒤에도 궁예는 얼핏 얼굴을 보일뿐 시내에게 오래 머물지 않았다. 이제나저제나 느닷없이 활랑거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기다리던 시내는 가슴이 차츰 식어갔다. 이럴줄 알았으면 천궁을 따라 집으로 갈걸 그랬다고 후회하였다. 천궁이 뒤일은 걱정말라면서 시내를 떨구어두게 하였을 때에도 이렇게까지 될줄은 몰랐다. 그의 마음이 변한게 아닐가? 내가 온걸 좋아하지 않을가? 아니야, 바빠서 그러겠지. 그이도 날 만나고싶을거야. 시내는 말괄랭이는 못되였다. 제켠에서 궁예를 찾아보겠다는 생각은 애당초 못하는 성미였다. 시내는 초불처럼 마음을 태우며 궁예를 기다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