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회)
13. 헌 울바자 넘어지다 순기는 외사정이라는것을 증명하는 관인을 꺼내보았다. 아뿔싸! 구리도장은 요 며칠새에 퍼렇게 녹이 쓸었다. 매일이다싶이 꺼내 주무르는 구리도장이 어떻게 녹쓸었는지 모를 일이다. 속이 덜컥해난 순기는 그대로 쭈크리고 앉아 헝겊을 꺼내 녹을 닦기 시작했다. 닦고 또 닦아도 웬 일인지 이전처럼 빛이 나지 않는다. 손가락이 아프도록 구리도장을 닦던 순기는 그걸 창문에 비쳐보고나서 입김을 하- 불고 다시 닦았다. 한식경이나 그러고나니 조금 마음이 풀렸다. 《제길!》 내친김에 순기는 그냥 구리도장을 닦았다. 손가락이 아팠지만 속은 시원하게 풀렸다. 《아침부터 쭈크리고 앉아 뭘 하시우?》 하고 녀편네가 쫑알거리는 소리도 귀등으로 흘려보냈다. 알게 뭔가. 녀편네들이란건 그저… 이 구리도장이 순기에게는 눈알이요, 염통이다. 어떻게 얻은거라고… 알기나 해? 돗바늘로 구석구석 파내고 후벼내고 닦은 다음 눈앞에 쳐들어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구리도장은 반짝거렸다. 이건 순기에게 임금님의 옥새처럼 보였다. 《형님 계시우?》 하는 소리에 순기는 손을 멈추고 눈을 올리떴다. 《형님 계시우?》 다시 소리났다. 《누구냐?》 《나요.》 사촌동생의 목소리다. 《어, 왜 그러느냐?》 《왜 그러느냐고요? 날 찾지 않았소?》 《응, 그랬지. 어서 들어오너라.》 순기는 그러면서 팔소매로 구리도장을 살살 문질렀다. 《그게 뭐요?》 하고 문을 열고 들어서던 동생이 물었다. 《이거? 관인이다.》 《오, 그래요? 형님이 귀신단지 보물처럼 건사하는거… 어디 봅시다요.》 《안돼.》 순기는 몸을 돌리며 관인을 감추었다. 그는 마른 헝겊으로 관인을 꼼꼼히 싸서 품에 넣었다. 그리고는 동생에게 돌아섰다. 《왜 이제야 왔니? 언제부터 오랬는데…》 《그저…》 순기는 사촌동생이라는 녀석을 훑어보았다. 녀석에게서는 무슨 발구린내 같은 냄새가 났다. 그건 그렇고 꼴 생긴게 그사이 못 보다 보아서
그런지 영 말이 아니다. 뭔가 못마땅한지 잔뜩 찌프린 눈꼴도 꼴이거니와 뭐가 그리 자랑인지 늘 말이발같이 긴 이발을 드러내고 벙싯거리는게
순기에게는 딱 질색이다. 저절로 이마살이 찌프러졌다. 《너 요새 뭘 하니?》 하고 순기는 냄새나는 동생을 외면하며 물었다. 《에, 그럭저럭 사냥두 하구…》 《자식, 사냥이라구? 누가 그까짓 혀바닥같은 소릴 곧이듣는대?》 《무슨 소리요?》 《네가 도적패들과 휩쓸려 다니는걸 내가 모르는줄 아니?》 《어떤 놈이 그따위 소릴해요?》 《너 그러다 내 손에 걸려들어봐라. 도적잡기가 이 형의 전업인줄 알겠지?》 《흥! 어디 잡아보시우.》 《제법이다. 내 손에 걸리면 네가 아무리 내 사촌이라도 용서없어. 나라법에 사정이 있는줄 아니?》 《무섭지 않수다. 나라법? 흥, 그따위가 지금 어디 있소? 손에 쥐면 내거지 뭘…》 《자식, 그래서 요전번날 청청대낮에 길가에서 날강도질했니?》 《뭘 그래요? 조금 털었는데… 물건엔 임자가 따로 없어요.》 《야 야, 하늘 높은줄 몰라, 이놈!》 《왜 오라말라 했는가 했더니 그따위 훈시나 하자는거요? 이거 시끄럽소.》 순기는 동생의 그 보기 싫은 이발을 쏘아보았다. 《말이발》은 쩝 입다시는 소리를 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겠소, 난.》 순기는 동생의 손을 잽싸게 잡았다. 《앉아!》 《왜 그래요?》 《글쎄 앉으라니까…》 순기는 씩씩거리는 동생의 어깨를 내리누르고 부엌에 대고 소리쳤다. 《여보, 그 술상 좀 들여오우!》 부엌에서 뭐라고 쫑알거리는 소리가 났다. 술소리에 《말이발》이 털이 비죽이 내민 코구멍을 벌름거렸다. 한참 있더니 궁둥이 큰 녀편네가 조그마한 두리밥상을 들고 와서 탁- 놓고 나가버렸다. 순기는 녀편네뒤에 대고 개백정년 소리를 내뱉고 투박한 술잔에 술을 따랐다. 《자, 마시자!》 《말이발》은 좋아라고 술을 쭉 들이켰다. 한참 마시고나서 순기가 물었다. 《너 송악 사찬 배에서 내린지 얼마나 됐니?》 《한 두어달 됐지요.》 《두어달? 그리 멀지 않구나.》 《멀지 않다는게 뭐요. 그새 하루가 백년맞잡이요. 오죽했으면 성질착한 내가 강도질하겠소? 형님, 거 제발 날 다시 그 송악 사찬 배에
넣어주구려.》 《넣어줄수도 있지. 그러지 않아도 어제 만났다.》 《왕륭어른을요?》 《어른? 자식! 어른은 무슨 어른이야?》 《그래 뭐랍디까요. 날 다시 받겠대요?》 《너 어떻게 놀았기에 사찬쪽에서 딱 자르니?》 《어떻게 놀긴요?》 《뭘 도적질했기에 딱지가 붙어다니냐 말이다?》 《별게 아니예요. 숟가락 몇개 주머니에 넣었는데…》 《큰것도 아니구나. 이걸 그저… 그러고도 창피한줄도 몰라?》 《말이발》은 뻔뻔스럽게 순기를 쳐다보기만 하였다. 《됐다.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 정신차리고 대답해! 거기 따라 네 앞일이 결정된다.》 《뭐요?》 《왕륭이 당나라와 물건거래 하는건 아는거고… 대체 뭘 가져오군 하니?》 《몰라요.》 《눈깔로 보고 냄새도 맡았겠는데…》 《헤, 형님이 외사정이라도 그건 모르는군요. 송악 사찬어른의 배군들이 뭘 싣는지 부리는지 아는줄 아시우?》 《넌 도대체 밥 처먹고 뭐나 할줄 아니?》 하고 순기는 버럭 짜증부렸다. 《왕륭이 언제 어디서 뭘 실어들여서 어떻게 하는지 하나도 모른단 말이냐?》 《말이발》은 멀뚱멀뚱해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보고 뭘 언제 어떻게 하라고 말이나 했소? 그랬으면 내가 눈을 밝혔지요. 도리여 고분고분 말 잘 들어야 한다던건 또 누구요?》 《듣기 싫다. 그래서 좀도적질하다 쫓겨났니?》 《거, 뭘 자꾸 도적질 도적질 하면서 그래요? 잠자코 듣고있으려니까 말이야. 이놈의 세상에 도적질 안하는 놈이 몇이나 있어요?》 《말이발》이 눈을 부릅뜨는데 목에는 피줄이 지렁이처럼 일어났다. 순기는 겁이 쑥 났다. 감때사나운 녀석이 지랄을 부리면 랑패다. 《됐다, 됐다. 그만하자!》 순기는 입을 다셨다. 《잘 생각해봐라. 머리칼만 한거라도 짚이는데가 있으면 내게 말해!》 순기는 한발 물러서서 풀어진 소리로 말했다. 《암만 생각해도 왕 뭔지 하는 녀석이 나라법에 걸리는 밀수를 하는게 분명한데…》 《말이발》의 눈이 반짝이였다. 《형님, 그런데 그건 왜 그러시우?》 《몰라도 돼.》 《거 송악 사찬어른을 잡자는거요?》 《쉿! 아무 말이나 쩔쩔…》 《헤에, 마음놓으라구요. 눈치 무디다는 소리는 듣지 않고 살아요, 이래뵈두…》 《알았으면 됐다. 그러니…》 《헌데 형님, 그게 쉽지 않소. 차라리 강도질하는게 낫지.》 《또 그따위 소리야? 난 외사정이다, 외사정! 나에게 덧나서 배겨날 놈 없어!》 《그래도 왕륭어른은 달라요.》 《넌 그저 내가 시키는대로나 해! 그러면 그따위 배군에 대겠니?》 《하면 좋수다. 뭘 해야 되우?》 《왕륭의 배가 어제 들어왔다. 그 배에 뭘 실었는지 알아야겠다. 할수 있지?》 《우리 패거리들을 붙여볼가요?》 《네 마음대로 해봐! 하지만 명심해. 이 일에 날 끼여들이진 말아. 알겠지?》 《알았수다.》 순기에게 왕륭의 집사가 찾아온것은 뜻밖이였다. 여느때라고 오지 않은건 아니지만 한참 왕륭의 뒤를 캐보자고 벼르는데 집사가 왔으니 이게
뭔가? 집사는 왕륭이 급한 일이 있어 외사정을 만나지 못한것을 사과하고 꾸레미에 싼 돈을 내밀었다. 왕륭이 미리 알고 협박하려는가 해서 간이 콩알만 해지던 순기는 돈을 받자 얼떨떨해졌다. 순기는 집사가 돌아간 뒤에도 한동안 얼쳐있었다. 녀편네라는게 어느새 돈을 보았는지 독수리 병아리채듯 한다. 그러는 녀편네를 멍하니 보던 순기는 속에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옳지, 네가 속이 저린게 있는가보구나. 순기는 례물을 받고 물러설것이 아니라 더 악착스레 파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한주 도독이 순기를 불렀다. 웬 일인지 모르겠다. 좀 해서는 될수록 멀리하려고 하던 도독이 갑자기 순기는 왜 부르는걸가? 도독의 얼굴은 잔뜩 흐려있었다. 《부르셨소이까, 도독어른.》 《응, 게 좀 앉게.》 하면서도 너구리생각에 잠겨있는 도독이다. 이상하다고 순기는 도독을 힐끔힐끔 살폈다. 《자네…》 하고 도독이 마침내 쩝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네…》 《자네, 궁예라는 소릴 들었을테지?》 순기는 기러기목을 뽑았다. 들어보지 못했다. 생각 안 났다. 《처음 듣나?》 《네.》 도독이 한숨을 푹 쏟아놓는다. 《이래놓으니 주의 일이 잘될수 있나…》 도독은 혀를 끌끌 찼다. 《저… 궁예라는건 뭣이오이까?》 《저것보지, 자네가 이 한주의 외사정이 맞긴 맞나?》 순기는 입술을 깨물었다. 《북원, 명주에서 들고일어난 도적일세!》 그제서야 순기는 가늠이 갔다. 진작 그럴것이지. 그런 소리는 벌써부터 들어보았다. 하지만 시들한 개방귀소리였다. 나라 어디에 도적이 없는데가 있나 뭐? 도적하면 뭐니뭐니해도 나라 서남쪽의 견훤이 제일 큰 도적인데 궁예라는건 또 뭐야? 《그것들이 우리 한주를 노리고 세력을 뻗치고있네.》 도독의 말에 순기는 놀랐다. 《네?!》 《군들에서 올라오는 소리가 심상치 않아. 이런거야 응당 주의 외사정인 자네가 알아서 내게 알려야 할게 아닌가. 도대체 뭘 하고있나?》 자다가 랭수 끼얹어 맞은 심정이다. 《알아보겠소이다.》 《알아보는게 다 뭔가? 당장 무슨 대책을 세워야겠네. 먼저 그것들의 세력이 어떤지 그리고 언제쯤 우리 한주에 들이닥치겠는지 빨리
알아야겠네.》 그렇게 급하게 됐단 말인가? 하면서 순기는 대답했다. 《알겠소이다. 곧…》 순기는 속이 설퉁해져 도독에게서 물러났다. 그는 욕먹은데 대해 엉뚱하게도 도독을 비웃었다. 도독쯤 되면 말이야, 연자매돌 돌려야지 말이야, 나라면 그렇지 않아! 원 벼락맞았다고 할미새꽁지 촐싹이듯 떠냐 말이야, 떨긴… 제기랄, 범본 개좆인가? 궁예라는건 또 뭐야? 그저 그렇고 그런
놈이겠지. 여름밤에 개똥벌레 성한줄 누가 모르나? … 이런 생각을 하느라 입안의 혀를 우물우물 하는게 신라 9주가운데서도 그중 크다고 하는 한주의 외사정이란 사람이였다. 순기는 주관아에 일보러 간다 하고는 그길로 집에 돌아와 이른 점심밥을 독촉했다. 팥둔 밥을 물에 말아 백하젓을 곁들여 점심을 맛나게 먹었다. 먹은 소 힘쓴다고 입맛이 당겨 워낙 큰 밥사발의 절반을 더 먹어치웠다. 한그릇 반이다. 밥물이 목젖까지 차올라서야 밥상을 밀어놓고 트림을 요란스레 해댔다. 순기는 한참 두팔을 뒤로 뻗치고 새김질을 하였다. 그러고있는데 《말이발》이 기신기신 찾아들었다. 《오, 너구나. 밥먹었니?》 하고 순기가 물었다. 《못 먹었소.》 《말이발》은 배가 고픈지 침을 꿀꺽 삼켰다. 《여보, 그 밥 남은거 좀 없어?》 순기의 물음에 녀편네는 골을 팍 냈다. 《밥이 어떻게 있겠소? 두그릇씩 제껴대는 밥상에… 내가 먹을 솔치도 없어요.》 《아 저걸 그저… 없으면 없달게지 혀때기에 힘을 왜 줘?》 순기는 끄르륵 트림을 시원하게 해대고 동생을 위로했다. 《얘, 거 안됐구나. 조금 빨리 오지? 그랬으면 내 밥 노나먹는걸…》 밥을 더 안치라는 소리를 끝내 안한다. 동생은 입이 한발이나 나와서 씩씩거린다. 《그래, 어떻게 왔니?》 하는 순기의 물음에 발가락만 문질러댔다. 순기는 제 배가 부르니 만사가 태평스러웠다. 동생이라는게 밥을 먹었건 말았건, 뿌루퉁해있건 말건 꿈만했다. 이끔을 쑤시고있노라니 저절로 달콤한 졸음까지 살살 찾아든다. 《난 가겠소!》 《말이발》이 참다못해 와락 일어섰다. 《오, 갈래? 또 오나…》 순기는 그대로 자리에 드러누울 차비였다. 가겠다면 하다못해 말리기라도 할줄 알았는데 이런 꼴을 보니 《말이발》로서는 아무리 동생이래도 약이 올랐다. 《거 형님, 외사정이라는게 말이요. 알긴 잘 압데다요.》 《말이발》이 거칠게 내쏘았다. 《거 무슨 소리가?》 순기는 막 자리에 누우려다가 급히 물었다. 《왕륭어른 말이요.》 《왕륭?! 왕륭이 어쨌어?》 《뭐 그 고간 뒤지면 보물이 산더미같이 있을거라더니…》 《내가 언제 그랬냐?》 《언제긴 언제요?》 《그, 그래서… 너 왕륭의 고간을 뒤졌니?》 《뒤졌수다.》 《그래서?》 하고 순기는 정신이 번쩍 들어 일어났다. 《그래서는 또 뭐요?》 《아니, 어떻게 됐나 말이야? 보물이 없던?》 《보물은 무슨 보물, 쳇…》 《그럼?》 《무슨 병쟁기따위나 있습니다. 그것도 한쪽에…》 《병쟁기?!》 《내 참, 쓰거워서…》 《병쟁기라면… 쓰던거?》 《새거던데요? 당나라건지…》 《뭐?》 순기의 눈이 뱅그르 돌았다. 이게 웬 떡이냐? 왕륭이 당나라와 병쟁기거래를 한다? 반란을 준비하는게 아니고 뭔가? 이놈, 잡았다! 순기는 《말이발》이 투덜거리며 간것도 모르고 가재잡아먹을 왁새 생각만 했다. 순기는 도독에게 뛰여갔다. 순기가 침방울을 튕기며 하는 말을 도독은 돌부처되여 들었다. 한동안 눈을 끔쩍거리던 도독이 나직이 한숨을 풀었다. 《그러니 병쟁기가 있다… 그게 가병들을 무장시키려고 들여온게 아닐가?》 도독이 못 미덥다는듯 물었다. 《그럴리 있소이까? 설사 그렇다 해도 이건 엄중한 문제올시다.》 순기가 조바심내며 말했다. 《하여튼 자상히 알아보게. 건드리지 말고…》 《군령을 내려주시오이다.》 《군령은 왜?》 《왕륭을 뒤지자면 보통일이 아니지 않소이까? 군사를 풀어서 꼼짝 못하게 하구서…》 《자네 사람들은 뭘 하고?》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소이다.》 《난 모르겠네.》 《도독어른, 이건 여느 일과 다르오이다.》 《날 위협하는겐가?》 《그런게 아니라…》 《하여튼 자네 맘대로 하게. 그건 그렇고 궁예일은 어떻게 됐나?》 《왕륭이 궁예와 결탁되여있소이다.》 《뭐?! 증거가 있나?》 《증거가… 증거가 있소이다.》 《어떤건가?》 《그건 저… 확실하게 쥔 다음에…》 도독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물러가라 손짓했다. 순기는 도독을 쏘아보았다. 도독은 순기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다. 사찬을 감싸주려 한다. 모른다. 이 도독이라는게 왕륭과 배때기를 맞추고있는지 어찌 알랴. 란세엔 별일이 다 있으니까… 순기는 입을 사려물었다. 그길로 부하 열댓을 거느리고 왕륭의 고간으로 달려갔다. 고간지기가 순기를 막아섰다. 《이거 대낮에 무슨 일이오이까?》 순기는 외사정의 구리도장을 내보였다. 《도독어른의 명령이다. 고간을 뒤져야겠다!》 《안되오이다.》 고간지기가 만만치 않게 맞섰다. 순기는 고간지기를 묶게 했다. 순기가 막 고간문을 열려는데 난데없이 한패의 사나이들이 달려왔다. 도불의 배사람들이였다. 《날도적들이다. 저놈들을 쳐라!》 험상궂은 배사람들은 사정없이 순기에게 달려들었다. 순기가 소리칠 사이도 없이 싸움이 붙었다. 싸움은 순기에게 불리했다. 말이 외사정의 부하들이지 싸움이라고는 못해보고 기껏 했댔자 관부패를 내세우고 로략질에나 버릇된 외사정의 끄나불들이 사나운 배사람들을 당해낼수가 없었다. 《어이쿠-》 《어이쿠-》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졌다. 외사정의 부하들은 도리깨밑의 콩꼬투리가 되였다. 삼십륙계 줄행랑이다. 순기는 달아나려 했다. 그러는걸 한 사나이가 잽싸게 달려들어 순기의 목덜미를 잡았다. 《이걸 놔라! 난 외사정이다!》 순기가 상대의 손에 매달리며 소리쳤다. 《외사정은 뭐 말라빠진거냐? 남의 고간 대낮에 터는게 외사정이야, 이놈!》 배사람은 순기의 목덜미를 마구 흔들었다. 얼떨결에 구리도장이 땅에 떨어져 발에 밟히였다. 배사람은 정작 때리지는 않고 순기의 목을 계속 흔들어댔다. 마치 가을날 줄기에 매달린 박통처럼 순기의 머리가 흔드는대로 덜렁덜렁했다. 배사람은 순기의 목덜미를 쥐고 흔들다가 콱 밀쳤다. 순기는 얼떨결에 뒤로 자빠졌다. 그런데 신수가 사나우면 엎어져도 소발통에 코 박는다더니 뾰족한 돌부리에 뒤통수를 콱 찧었다. 순기는 어망결에 악- 소리를 질렀다. 순기를 밀쳐버린 배사람은 다시 돌아서며 외사정의 부하들을 때렸다. 모두 눈에 달이 떴다. 한창 싸우고나자 잠잠해졌다. 외사정사람들은 너부러지거나 달아났다. 《별 볼것 없는것들이 대낮에 도적질이야…》 하며 손을 털던 도불이 외사정 순기의 옆으로 다가갔다. 발로 순기를 툭툭 찼다. 아무 기척도 없다. 《이놈, 죽은체 하면 누가 속을줄 알아?》 그래도 순기는 꼼짝않았다. 뒤쳐진 순기를 내려다보니 그의 눈이 뒤집히고 입에는 거품을 문채 이미 숨이 넘어갔다. 《에익, 재수없다. 퉤!》 도불은 침을 뱉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