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회)
10. 두 나그네 신훤의 련락을 받은 고마는 어쩐지 불안하였다. 도저히 그대로 있을수 없어 그날로 길을 떠났다. 하루 반이 걸려 하슬라주에 닿으니 아닐세라 궁예가 어디서 날아온지도 모를 화살에 맞았다는것이다. 독화살에 맞은 상처는 자주빛으로 물들어 번져가고있었다. 《장군, 이게 어찌된 일이오이까?》 고통에 지쳐있던 궁예는 고마를 알아보고 눈물이 글썽했다. 《고마인가?》 그럴 때 보면 궁예는 계집애처럼 또 감정도 많았다. 펄펄 뛰던 때는 모르겠더니 한번 쓰러지자 엄살도 많았다. 궁예는 마치 앓는 아이가
엄마를 알아본듯 어리광부렸다. 《뻐근하구만. 아파 죽겠어.》 당장 급한건 궁예의 상처였다. 《어떻게 의원을 불러보였나?》 하고 고마가 신훤에게 물었다. 신훤은 이마살을 찌프렸다. 《글쎄, 더러 보이긴 했는데 워낙 독화살이라서…》 《고마, 난 아마 죽겠지?》 하고 궁예가 애처로운 소리를 냈다. 《원, 장군답지 않소이다. 그까짓 화살에 죽겠소이까? 내가 왔으니 마음을 놓으시오이다.》 고마는 눈짓으로 신훤을 밖으로 불러냈다. 《소문을 내서 독화살맞은걸 치료하는 사람을 찾아야겠네. 지체하다가는 큰일나네. 조금이라도 독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다 데려오도록 하게!》 하고 고마가 말했다. 그리하여 소문이 퍼졌다. 독화살맞은걸 치료해주는 사람에게 큰 상을 준다는 소리에 여러 사람이 찾아왔다. 고마는 그들을 만나보았다. 상처를 보여 무슨 독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적당히 사례해서 보냈다. 무슨 독인지 모르고 독을 치료한다는게 말이 되지 않았다. 딱히 상처를 보고 무슨 독이라고 찍는 사람은 없었다. 저녁이 되자 고마는 은근히 조바심이 났다. 그러는 사이에 독이 더욱 퍼져갔다. 궁예는 신음소리를 냈다. 어슬무렵에 웬 스님이 고마앞에 나타났다. 그는 자기를 파계승이라고 소개하고 하슬라주 시니지가 가보라고 해서 왔다고 하였다. 고마는 스님을 궁예에게 데려갔다. 상처를 보고난 스님은 소리없이 웃었다. 《스님, 무슨 독이오이까?》 《전갈독이오이다. 아주 독한것이지요. 참, 사람이 지독하기는…》 《고칠수 있소이까?》 《딴 나라에서 들여온 전갈독이 아니라면 고칠수 있소이다. 내게 독풀이하는 약이 있는데 오대산에 가서 가져와야 하오이다.》 고마는 스님에게 사람을 붙여 약을 가져오게 하고 한편으로는 시니지를 찾아가 스님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시니지는 그 스님은 믿을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파계승이 독풀이약을 가져왔다. 그 약을 쓰자 궁예는 신음소리를 거두고 잠이 들었다. 《아마 화살의 독이 이 근처 어디서 나는것이로군요.》 하고 스님이 조용히 말했다. 《스님, 큰일하셨소이다.》 《뭘요. 독풀이가 되니 오히려 제가 기쁘오이다. 독이 풀리면 상처를 치료해도 되겠소이다. 그에 쓸 약은 따로 드릴테니 쓰도록 하시오이다.
인차 나을것이오이다.》 《고맙소이다.》 고마는 스님을 안내하며 그에게 사례를 하게 하였다. 스님은 마다했다. 《사례라니요?! 그건 거두시오이다.》 《그래도…》 《저는 인명을 살리는 무슨 의원도 아니고 다만 독에 대해서 알아보느라고 이것저것 해보는노릇이라 사례까지 받을건 없소이다.》 《하여튼 목숨을 살려주셨으니 응당 사례를 받으셔야 하오이다.》 《이러지 마시오이다. 오늘 우연히 시니지어른을 만났는데 그 어른이 하는 말씀을 듣고 찾아왔소이다. 독화살맞은 사람이 여느 사람이 아니고
고구려를 다시 세울 웅지를 품은 사람이라니 내 마음도 동한것이지요.》 스님은 그 말을 남기고 나타났을 때처럼 소리없이 사라졌다. 궁예의 병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나았다. 이제는 걷기까지 되자 또 달라졌다. 《고마가 아니였으면 난 죽었을거야.》 하고 궁예는 말했다. 《내가 아니라 스님덕분이오이다. 쾌차해지면 스님을 보내주신 시니지어른께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소이다.》 《그야 물론이지. 그 어른이 결국 나를 두번씩이나 살려주시는군.》 《그런데 북원으로 가신다던 일은 어찌된것이오이까?》 《거참, 재수없게 되였네. 량길이 선심써서 나에게 제 딸을 주겠다고 해서 가댔는데 이렇게 될줄이야…》 《어떤 놈이 독화살을 날렸는지 알고있소이까?》 《모르네. 이 하슬라에서 굴러먹던 벼슬아치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이까?》 《내가 그놈들을 내쫓았으니까…》 《앞으로 어찌하실 결심이시오이까?》 《병이 나면 북원에 가야지.》 《북원에? 왜요?》 《왜라니, 나도 장가들면 좋지 않겠나?》 《정말 장가들고싶소이까?》 《응.》 《제가 보기엔 장군이 북원에 가겠다는게 딴데 있는것 같소이다.》 《그건 무슨 말인가?》 《이 궁예가 어떤 사람인지 봐라, 그것이 아니오이까? 북원사람들앞에서…》 《자넨 참 귀신같구만. 그런 마음도 없지 않네. 량길 그 늙은이가 이 궁예를 어딘가 숫보는것 같은게 괘씸하거던…》 《아니, 정말 장군은 그렇게 생각하시오이까?》 《응.》 고마는 속으로 한숨을 쉬였다. 량길이 무슨 속심으로 궁예를 불렀는지도 모르거니와 설사 사위로 삼으려 한다 해도 어디 그럴 짬이 있는가.
그보다 지금은 더 큰일을 해야 할 궁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이 보잘것없는 일에 팔려있으니 이래서는 안된다. 한번 사나이가 뜻을 세웠으면 그 뜻을
이룰 때까지 잡념이 없어야 한다. 그리 해도 뜻을 이루기가 어려운데… 《북원에 가시는건 좀더 두고보시오이다. 장군이 인차 회복되기 힘드니 대신 제가 가서 알아보고나서…》 《아니, 난 다 나았네.》 《이번 일은 저의 말을 들어주시오이다.》 《좋아, 그럼 자네가 대신 가주게.》 고마는 다음날 북원으로 떠났다. 량길은 고마가 온것을 아주 좋아하였다. 《번살이어른이시군.》 하며 량길은 반갑게 고마를 맞이하였다. 《그래, 서라벌에서 오시는 길이요?》 《예.》 《거기 형편은 어떠하오?》 지나치는 인사말이 아니였다. 고마는 량길이 무척 궁금해한다는것을 느꼈다. 흥미있는 일이다. 그런즉 량길은 두 길중 하나를 택한 사람이다. 뭔가 서울쯤과 겨루는 사람이던지 아니면 거기 눈치를 보는 그런 사람이다. 《글쎄, 뭐라고 말씀드릴지… 한마디로 오늘래일 하는 다 된 집이라 해야 할지요.》 그 말에 량길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렇소?! 참, 우리 북원에 대해서 뭐라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셨소?》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곁집 생각할 겨를이 없지요.》 《그래요?》 량길은 희미하게 웃었다. 《참, 오면서 듣자니 량길어른의 선봉장 궁예가 하슬라를 차지했다던데요?》 《발없는 말이 천리 간다더니… 에, 그랬지요.》 《참 기쁘시겠소이다. 그러니 이제는 량길어른의 세력이 하슬라까지 뻗은셈이겠소이다.》 《글쎄…》 량길은 시쁘둥했다. 고마가 궁예와 련결되여있다는걸 모르는 량길이고보면 그의 표정에 딴속이 있어보이지 않았다. 량길은 궁예가 하슬라를 차지한걸 별로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였다. 《어른, 그 선봉장 궁예를 한번 만나봐도 좋겠소이까?》 량길은 눈을 번쩍 떴다. 《뭣때문이오?》 《소문 자자하니 한번 만나보는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소이다.》 《뭐, 안될것도 없지만 그 사람이 독화살에 맞아 죽었소이다.》 《죽었다고요? 독화살에?》 고마는 뭔가 짚이는데가 있었다. 고마가 알건대 궁예쪽에서 사연을 알리지도 않았는데 량길이 어떻게 독화살에 맞은걸 알며 어떻게 죽었다고 하는가? 궁예가까이에 첩자라도 두었단 말인가? 독화살에 맞은 사람을 치료하는 의원을 찾는다고 소문낼 때도 고마는 만일을 생각하여 궁예라고는 하지 못하게 했던것이다. 《량길어른께서 가보시였소이까?》 《내가 불러서 오다가 그렇게 됐소. 한번 가봐야겠는데 하두 일이 바빠나서…》 《나도 어른이 북원일을 맡아보시느라 몹시 바빠한다는 소리를 들었소이다.》 《말도 마시오. 북원처럼 작은 소경이라도 맡아서해보니 그게 또 간단치 않소구려. 그저 심부름이나 할 때는 몰랐는데 정작 맡아해보니 무슨
놈의 자질구레한게 그렇게 많은지. 원…》 이 사람은 알만 한 사람이다. 자질구레한 일이 많다는건 제가 자질구레한 사람이기때문이다. 이 사람 가지고는 무슨 일도 못해본다. 그저 촌주로 있는편이 날걸 그랬다. 고마는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궁예를 죽이려 한것이 어쩌면 량길인지도 모른다. 량길은 그저 우물안의 개구리일뿐이다. 그런 소갈머리를 가지고 고구려를 다시 일떠세우는
큰일은 할수 없다. 고마는 며칠 묵어가라고 붙잡는 량길을 뿌리치고 길을 떠났다. 한주로 가는 길을 잡아들었다가 에돌아 하슬라로 향했다. 고마를 보자 궁예는 대뜸 《그래 촌주령감태기가 나에게 딸을 주겠다던가?》 하고 물었다. 고마는 그 소리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나왔다. 《장군은 량길의 딸을 보았소이까?》 《못 봤네.》 《보지도 못하고 사위되는걸 그리 좋아하시오이까?》 《외동딸이라니 보나마나겠지. 그까짓 계집이야 생겼으면 어떻고 못생겼으면 또 어떤가? 배꼽아래야 다 같고같지. 난 그저 량길이 나를
사위삼으려고 한다는 그것이 좋은거야. 그걸 책략쯤으로 하는 결혼이라고 생각할수 있으니까. 이를테면 량길이 싫든좋든 나를 인정해준다는 그것이
말이야.》 솔직한 말이였다. 고마는 이 하슬라로 제때에 왔다고 생각했다. 궁예는 잘 이끌어주지 않으면 어느 도적의 두령으로나 떨어지기 쉬웠다. 《장군은 량길을 어떻게 보시오이까?》 《어떻게 보다니?》 《장군과 량길을 비겨볼 때 누가 낫다고 보시오이까?》 《난 아직 그런 생각해본 일이 없는데…》 《생각해야 하오이다. 그럴 때가 되였소이다. 장군은 량길을 좋게 보시오이까?》 《어딘가 막힌 사람이야.》 《그럼 장군은?》 《나? 나야 뭘…》 《장군은 사람들이 장군과 량길이 같고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좋겠소이까?》 그 소리에 궁예는 심중해졌다. 《량길이야 늙었고 나야 젊었지.》 《바로 그것이오이다. 장군은 량길과 견주어 크기를 재려고 해서는 안되오이다. 제가 보건대 그는 그저 촌주로나 있을 사람이오이다.》 《뭘 말하자는건가?》 《장군은 벌써 제가 무얼 하자고 일떠섰는가를 잊은것 같소이다.》 《그럴리 있나.》 《지금 견훤은 서남쪽을 휩쓸어 후백제를 세웠소이다. 그런데 장군은 이제 겨우 하슬라 한개 주를 차지하고서 장가들 생각이나 하시오이까?》 궁예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난 또 그렇게까지 생각해보지 못했지.》 《장군은 지금 뜻을 이룰 절호의 기회라는걸 잊어서는 안되오이다. 한갖 촌주인 량길까지도 벌써 대세를 살피는데 하물며 뜻을 품은
장군임에야…》 《량길이 대세를 살핀다!》 《그렇소이다. 그 늙은이가 대뜸 서라벌형세를 나에게 물었는데 그게 뭐겠소이까? 그 늙은이는 물론 자기의 안전을 꺼려서 그랬을수 있다고 할수 있지만 그것만도 아닌듯 하오이다. 모든걸
미루어보건대 그 늙은이가 이제 중원쪽으로 남하할것이오이다.》 《량길이 설마? …》 《이왕 신라라는 나라가 될대로 되였는데 그런 기회를 제때에 본 사람이면 주인없는 땅에서 낟알거두기를 마다하지 않을것이오이다.》 《아, 참! 고마가 아니였다면 큰일날번 했군.》 하고 궁예는 제 머리를 툭툭 쳤다. 《고마, 그래 어쨌으면 좋겠나?》 《장군은 빨리 북상해야 하오이다. 북상해서 하슬라 이북지역을 차지하고 나아가 패강진일대를 쥐여야 하오이다. 그것은 한시도 미룰수 없는
일이오이다.》 《알았네.》 궁예는 달라졌다. 그의 한눈이 번쩍 빛을 뿌렸다. 다음날부터 궁예는 아직 낫지 않은 팔을 걷어매고 군사들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궁예는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여 저족(린제), 생천(화천), 부약(김화) 등지를 차지해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