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회)
9. 무정세월(1) 당나라의 흐린 항구를 떠나 엿새만에 강화반도로 들어서는 배가 있었다. 넓은 돛폭을 세겹으로 펼친 유난스럽게 큰 배였다. 이런 배는 그즈음 신라에서 쉬이 볼수 없는 큰 배였다. 배군들만 하여도 거의 백여명이 타는 이런 배는 항해가 안전한것으로 하여 먼바다길에 누구나 부러워하는 배였다. 배는 등산곶을 왼편으로 멀리 바라보며 연평도를 지났다. 벌써 앞에 볼음도와 주문도, 석오도가 바라보였다. 이제 교동도만 지나면 패강은 눈앞이다. 물결은 잔잔하고 바람은 알맞춤히 불었다. 사람의 기분을 북돋아주는 더할나위없이 쾌청한 날씨였다. 배를 타고 먼길 갔다가 무사히 돌아오는 때의 맛이란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갈매기가 머리우에서 날아예고있었다. 교동도를 바라고 가는 배우에는 다락집이 있었는데 거기에 두사람이 서서 앞을 보고있었다. 송악 사찬 왕륭과 이 배의 선장 도불이였다. 《무사히 왔군. 그렇지, 도불?》 하고 왕륭이 웃음지으며 물었다. 《아마 그런것 같소이다.》 《바람새 좋다. 이런 때를 보고 순풍에 돛단다고 하겠지?》 《행운이오이다. 한뉘 배를 부리면서 살아오지만 또 이렇게 배길이 편안해보기는 처음이오이다.》 도불은 무뚝뚝하게 말해서 그 얼굴만 봐가지고는 진정 좋다는건지 뭔지 알수가 없었다. 《다 한얼님이 보살펴주신 덕이오이다.》 도불의 말에 왕륭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도불이 구태여 왕륭의 덕이요 어떻소 하며 좋은 말을 개올리지 않고 한얼의 덕에 붙이는걸 왕륭은 탓하지 않았다. 바로 그런 도불이였다. 일체 발라맞추기를 모르는 고지식한 사람이였다. 그래서 더 믿음이 가는 사람이였다. 이런 사람과는 얼마든지 큰일을 해낼수 있었다. 《형님, 이렇게 배길이 좋을줄 알았으면 건이를 데리고 갈걸 그랬소이다.》 《나도 방금 그 생각했네. 하지만…》 《허허, 언제인가 태풍을 만나 죽게 되였던 그때 일을 생각하시오이까?》 《응.》 《하긴 그때 다 죽은줄 알았소이다. 다 한얼의 뜻이겠지요.》 《말도 말게. 내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치네.》 《저 남해섬 어디까지 흘러갔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아 견훤의 사람들에게 구원되였을 때 형님이 그 소식을 듣고…》 《내 그때 십년은 감수했네. 그래서 건이녀석에게 다시 배를 타면 오금을 꺾어놓겠다고 소리쳤지.》 《내 뺨을 치려고 하던건 어떻고요?》 《그랬던가?》 《허허, 그때 보니 형님이 지나치다 할 정도로 건이에게 마음쓰는것 같습디다. 형님이 건이녀석때문에 되게 혼이 났구나 하고 속으로 웃었지요.》 《뭐, 웃었어?》 《그럼요.》 《왜?》 《형님이 나와 같이 배를 타본 사람같지 않소이다. 뭐 그런 일을 한두번 겪었나요. 칠성판을 지고 다니는 배사람인데…》 《하긴 그렇네만 건이는 달라.》 《알고있소이다. 헌데 모를건 바로 건이오이다.》 《건이 어째서?》 《그 나이에 한번 되게 폭풍에 혼났으면 다시는 바다를 보지 않겠다고 들구뛰겠는데 이건 어찌된 일인지 그뒤에도 배타고 물우에서 놀기
좋아하니…》 《그러게 말이야. 걱정일세. 아무래도 그녀석이 바다하고는 무슨 인연이 있는 모양인데 녀석은 그래서는 안될 팔자란 말이야.》 《팔자는 또 무슨… 난 뭐 팔자를 타고나서 배군이 되였소이까?》 《팔자 타고나지 않으면? 그게 팔자지 다른게 팔잔가? 하고싶지 않지만 어쩔수없이 하게 되는 그런 일을 두고 팔자라는거네.》 도불은 왕륭의 말에 그저 허허 웃었다. 도불은 숨을 들이쉬며 물었다. 《벌써 건이가 열일곱이지요, 형님?》 《그래, 세월도 빠르지…》 《사내대장부가 다됐소이다.》 《그저 쓸쓸하지.》 《왜요. 그만하면 한주 송악의 내노라는 형님의 아들답다고 할수 있소이다. 이제 큰일할 재목이 되지 않나 두고보시오이다.》 《오, 그랬으면야 오죽이나 좋을고…》 《건이가 보고싶소이다. 스무날전에 배띄울 때 보았는데…》 《도불, 자네도 건이를 보면 다시 채근하게. 쓸데없이 배부리는 일에 매달리지 말고 무예 배우는데나 전념하라고… 자고로 말타고 나라세운
임금은 있어도 배타고 세운 사람은 없다니…》 《내가 말하지 않아도 건이가 제 할바를 모를가봐서요?》 《그렇지도 않아. 보아하니 녀석이 자네를 몹시 따르는데…》 《좋소이다.》 《아, 참 날씨도 좋다.》 배는 강화도를 오른쪽에 두고 지나 어느덧 패강어귀에 이르렀다. 도불은 강입구로 배머리를 돌리고 돛을 펼쳤다. 《저기 영안성이 보이오이다.》 도불이 가리켰다. 왕륭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다 왔군.》 벌써 보름전 일이다. 왕륭은 특별히 당나라로 가서 그곳 지기들과 장사거래도 트고 당나라형편을 제눈으로 보고싶었다. 그래서 배를 탔다. 일년에 한두번씩 의례히
있는 일이였다. 갈 때에는 장사일, 배길 등으로 해서 걱정이 많았는데 돌아오는 지금은 사뭇 마음이 즐거웠다. 무역거래가 얼음에 박밀듯 순조롭게 풀린데다가
생각밖에 배길이 아주 좋아서 저절로 기쁘기 그지없었다. 왕륭은 별로 자기의 팔자가 그리 궁박하다고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처럼 사나운 배길이 잔잔하고 장사일도 여의주를 얻듯 되여보기는 쉽지 않았다. 어떻게 엿새씩이나 바람새가 그리도 순할수 있었던가, 신기하기만 했다. 이번 장사일의 거래만으로도 한 일년쯤 넉넉히
우려먹을수 있게 되였다. 그러니 기쁠수밖에 없었다. 왕륭은 자못 기분이 좋았다. 배는 어느덧 강을 거슬러오르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영안성부두에 닿았다. 계삭을 늘이고 닻을 내렸다. 그러는 동안 왕륭은 다락집앞을 오락가락했다. 어쩐지 뭍에 빨리 내리고싶은 조바심이 났다. 도불이 왔다. 《형님.》 《왜?》 《뭍에 내리기 전에 할 일이 있소이다.》 《뭔데?》 《제를 지내려고 하오이다.》 《제? 무슨?》 《무사히 배길 갔다오게 해주었다고 한얼님께 제를 올릴가 하오이다.》 《뭍에서 하면 안되나?》 《우리야 배군들이 아니오이까? 뭍은 뭍이고 배는 배지요.》 《그래 제는 올 때 갈 때 다하나?》 《예.》 《다른 배에서도?》 《하백님에게 제를 올리는 배군들도 있소이다만 우리 배에서는 한얼님께 드리지요. 그건 제가…》 《좋네. 제를 올리게. 그 다음 한바탕 놀기도 해야지. 오늘은 내가 한턱 쓰지.》 《뭐, 그렇게까지야…》 《괜찮아. 오늘은 어쩐지 들뜨네구려.》 도불은 씩- 웃었다. 도불은 고물에 제상을 차리게 하고 향불을 붙였다. 배에 탔던 사람들은 모두 갑판에 나와 도불을 따라 제를 올렸다. 왕륭은 배사람들이 하는 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영안성부두에는 여러 사람이 나와있었다. 왕륭은 배에서 내리기 전에 마중나온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아들 건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으로 섭섭한감이 들었다. 녀석의 벌씬 웃는 모습이 몹시 보고싶었었다. 그런데 건의 모습대신에 딴 얼굴이 보였다. 외사정 순기였다. 왕륭은 낯을 찡그렸다. 외사정이라는게 어쨌든 사람을 살피고 잘못을 잡아내는 직업이다. 직업이란 고약한데가 있다. 사람됨됨은 어쨌든 기분부터 잡친다. 전에 없던
일이 되여서 더욱 그런것 같았다. 이때까지 좋던 기분이 찝찔해져 왕륭이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뭍에 내렸다. 밉다니까 깨꼬한다던지 집사보다 먼저 외사정 순기가 뭘 반갑다고 홀랑 나섰다. 《사찬어른, 배길에 편히 다녀오셨소이까?》 왕륭은 비죽이 웃음을 지어보였다. (제상에 청메뚜긴가? 자식, 버릇도 없구나.) 하면서도 왕륭은 《외사정나리, 어찌된 일이요. 뭔가 잘못되지 않았소?》 하고 말을 붙였다. 《제가 마중나온게 싫소이까?》 《지레짐작이시군. 하도 뜻밖이라서… 허허.》 《이 근처에 볼일있어 왔다가 사찬께서 마침 부두에 닿으신다기에… 그래 갔던 일은 잘되였소이까?》 《예, 그저…》 (이 물건짝은 왜 끼여들어가지고…) 왕륭은 입을 다시였다. 《집사!》 순기의 뒤에 서있던 집사가 왕륭의 벼락같은 소리에 와뜰 놀랐다. 《예!》 《내가 떠날 때 말하지 않았나? 가고올 때 마중이요 뭐요 하면서 부잡스럽게 노는게 딱 질색이라고, 응?》 시어미역정에 개배때기 차는 격이라는게 뻔히 알렸다. 《예, 사찬어른. 잘못했소이다.》 집사는 외사정을 흘기며 허리를 굽혔다. 헌데 재미있는건 순기였다. 그쯤하면 알아차리고 하다못해 낯색이라도 변하겠는데 이건 전혀 모르는체 히죽히죽 웃어댔다. 사람 죽이는 놈이다. 그러면서 한수 더 뜬다. 《그런데 무슨 일로 사찬께서 그 먼 당나라에까지 몸소 가셨소이까?》 귀구멍에 말뚝을 박았는가, 아니면 비위가 좋은건가? 《허, 그것 참. 도독께서 말씀 안하십디까요? 내가 당나라에 가는 용무를 도독께 말씀올렸는데요?》 《아, 그렇소이까? 사찬께옵서는 뭔가 오해하시는것 같소이다. 저는 딴게 아니고 그저 사찬어른을 이렇게 뵈오니 기쁘고 또 수고스러우시겠다 해서…》 《예, 알겠소이다. 어쨌든 이렇게 맞아주어 고맙소이다. 외사정나리, 바쁘지 않다면 저녁에 집에 오시지요.》 《워낙 저의 일이라는게 틈이 없긴 하지만요, 예. 사찬께서 몸소 청하시니 어떻게 하든 짬을 내겠소이다. 꼭 가겠소이다.》 《그래주면 고맙겠소. 자, 그럼.》 왕륭은 제가 먼저 집사가 끌고 온 말에 올랐다. 《저, 영안성에 머무르시겠소이까?》 집사가 조용히 물었다. 《아니, 배사람들에게 듬뿍이 먹고 마시게 뭘 좀 가져다 주게.》 《예.》 왕륭은 멀거니 바라보는 순기를 떨구고 말을 재촉했다. 부두에서 멀찍이 와서 왕륭은 집사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건가, 저 외사정은?》 《글쎄 말이오이다. 똥파리새끼처럼 붕 날아들어가지고서는…》 《뭘 트집잡힌 일은 없나?》 《없었소이다. 참, 사찬어른께서 그 사람의 외사촌동생인지 뭔지 하는걸 아시지 않소이까?》 《외사촌? 건 또 뭔가, 모르네.》 《거 왜, 우리 배에 배군으로 있다가 손버릇이 나빠서 쫓아낸 녀석이 있지 않았소이까?》 《오, 그런 녀석이 있었지…》 《그놈이 저 외사정의 사촌동생인데…》 《생각나네. 그랬었지.》 《그런데 며칠전에 외사정이 와서 그놈의 일을 놓고 횡설수설했습죠. 뭐, 다시 배군으로 받아주지 않겠는가 하면서… 그래 제가 사찬어른이 오시면 직접 여쭈어보라 했소이다. 아마 그래서 왔는지…》 사찬과 외사정이면 뭐 그다지 껍데기에 살같이 없어서는 안될 사이는 아니다. 다만 외사정이라는게 어쨌든 도독이하 사찬에 이르기까지 감시하는
놈이니 이때껏 왕륭은 그리 알고 외사정의 일이라면 나쁘다 소리 듣지 않을만큼 해주었다. 그렇다고 그게 칼쥔 망나니라고 여긴건 아니여서 그저
적당히 만질 때는 만지고 내칠 때는 내쳐두었다. 그런데 어째서 난딱 앞발 내밀고 야단이야. 허 참. 《그밖에 딴 일은 없었나?》 하고 왕륭이 순기일을 애써 털며 물었다. 《딴건 별로 없고… 저, 도련님께서…》 왕륭이 고삐를 당겼다. 《건이 말인가?》 《네.》 《참, 그애는 뭘 하느라고 얼굴을 내밀지도 않나. 모르나?》 왕륭이 외사정을 놓고 전에없이 언짢아한게 까닭이 있었다. 뭐니뭐니해도 뭍에 내려 제일 보고싶은게 아들 건이다. 그런데 건이는 보이지 않고 어디서 외사정이라는게 난딱 끼여드니 평시와 달리
찌뿌둥해진것이다. 《무술을 익히느라 바빴소이다. 온다온다 하면서도 무술을 익히느라…》 집사의 입에서 의례히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 여기면서 왕륭은 빙그레 웃음부터 지었다. 그런데 생각이 빗나갔다. 《도련님께서 시방 몸이 말째서…》 《뭐, 무슨 소린가?! 어디가 말째다는건가. 무술하다 어디 다쳤나?》 《아니오이다. 그저 고뿔에 걸려서…》 《고뿔? 시라소니같은게… 고뿔에 걸려 자빠졌단 말인가. 허, 그 참…》 왕륭은 쓴입을 다시였다. 걱정보다 한탄이 앞섰다. 왕륭은 도불에게 말한것처럼 아들 건을 하늘처럼 믿고있다. 도선스님의 말씀이 있은 열일곱해전부터다. 내 아들은 장차
나라의 임금이 된다. 그것도 여느 임금이랴. 고구려를 일떠세울 그런 임금이다. 왕륭은 그 말을 굳게 믿었다. 여느 아들에 대한 아비의 믿음보다
더 큰 믿음이요, 욕심이였다. 조상대대로의 숙망이 풀리는것이다. 왕륭은 그 믿음이 결코 허황한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지어 집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것보다 더 마음이 쓰이는 아들이다. 만사를 아들 건에 대한 일과 련결시켜보는데 버릇이 된 왕륭이다. 그것은 도를 넘어 여느 사람이 볼 때는
마치 갓난 새끼를 둔 까마귀를 보는듯 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는게 큰데 비해서 아들녀석은 도무지 마음 싸지 않는다. 앓는다? 앓는다는게 뭔가? 그저 돌이나 쇠처럼 건강해도 씨원치 않을터인데… 《그래, 의원들에게는 보였나?》 《송악에 이름난 명의들을 청해다보이고 약도 지어 드렸습지요. 제가 영안성으로 떠나올 때는 조금 나았는데… 지금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수도
있소이다.》 《곧장 송악으로 가세!》 《예, 헌데 외사정은?》 《왔다 없으면 가겠지. 아래사람들에게 그저 적당히 처리하라 하게!》 《예.》 왕륭은 서둘러 송악으로 말을 몰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