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회)
1. 하슬라, 그곳에서는… 명주는 원래 고구려의 하서량(하슬라라고도 한다.)으로서 뒤날 신라에 속하였다. … 선덕왕때 소경을 만들고 관리를 배치하였으나 태종왕 5년(658년)에 하슬라지역이 말갈과 련결되여있다 하여 소경을 페지하여 주를 만들고
군주를 두어 이를 지키게 하였다가 경덕왕 16년(757년)에 명주(溟州)로 개칭하였다. 궁예가 량길의 선봉대격으로 되여 한창 주천, 나성(녕월근방), 울오(평창) 등지를 휩쓸 때까지만 해도 오늘날의 강릉일대를 하슬라주라고 했다. 경덕왕(신라)이 개칭했다는 명주라는 이름은 관리들에게나 쓰이는 말이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신라에서 하슬라주는 나라 동북변의 괴이한 모퉁이였다. 신라의 땅이라고는 해도 어딘가 사람 못살 곳처럼 치부되는것이다. 한때 김주원이라는 사람이 명주군왕으로 책봉되였던적이 있었다. 그는 선덕왕(宣徳王)(780-785년)의 조카벌 되는 인물로서 고관들의 모임에서 다음 왕으로까지 추천되였었다. 하지만 선왕 선덕왕이
그러했던것처럼 상대등 김경신에게 몰리워 명주로 쫓겨났다. 김경신은 선덕왕 김량상이 상대등으로 있을 때 그와 손잡고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정권을
쥔 사람이였다. 이 김경신이라는 사람이 신라력사에서 원성왕인데 왕의 조카를 쫓아내고 제가 왕이 되기는 했어도 그 후손들은 비참한 운명을 당했다.
아비가 죽은 뒤 13살에 임금이 된 애장왕(원성왕의 증손자)은 나이가 어려 삼촌인 병부령 언승이 정사를 대리했다. 언승은 애장왕이 즉위한 이듬해(800년)에 상대등으로 되였다. 그는 상대등이 되여 점차 세력을 키우자 마침내
809년에 군대를 풀어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제가 왕이 되였다. 헌덕왕이 바로 그다. 권력을 잡기 위한 혈육간의 혈투였다. 그에 비하면 김주원의 자손들은 또 다른 길을 걸었다. 김헌창은 김주원의 아들인데 무진주 도독으로 지방에 나가있다가 814년에 왕경에
소환되여 시중이 되였다. 하지만 이태가 지나 시중자리에서 물러나 다시 청주(경상도 진주) 도독을 거쳐 821년 웅천주 도독을 하게 되였는데
1년도 못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세력권안에는 전국 9주가운데서 4개 주와 국원(충주), 서원, 금관(김해) 등 3개 소경과 그 주변의 군,
현들이 포괄되였다. 나라이름을 《장안》, 년호를 《경운》이라고 하였으나 얼마 못 가서 망하고말았다. 그후 3년이 지난 825년에 김헌창의 아들 범문이 고달산(경기도)의 수신과 함께 북한산주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러루한 이야기속에 명주 즉 하슬라주가 나오긴 하지만 별로 자랑할 곳이 못되는 모퉁이였다. 지형으로 볼 때도 하슬라는 다른 곳 즉 왕경이나 하다못해 한주하고도 다르다. 백두대산줄기가 바다로 뻗은 척추처럼 북에서 남으로 뻗어있는데 그 서쪽은 어쨌든 땅이 좀 넓으나 동쪽은 땅도 좁고 인차 바다와 접하고있다. 하슬라주는 그가운데서도 좀 특이한데 그건 아마 경주에서 북으로 뻗은 외통길이 중부와 잇닿은 아흔아홉굽이
재(대관령)를 통해서 열려있기때문일것이다. 이런 하슬라주에 궁예가 일어난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궁예는 정말 하슬라주에 들어가려고 했을가? 그렇다면 무슨 목적으로… 하슬라주 도독 안태는 북원의 도적이 주천, 나성, 울오, 어진 등 고을을 습격했다는 소리를 듣고도 꿈만했다. 어디서 도적이 일어났다는 소리는 그즈음에 와서 철바뀌는 계절의 고뿔만큼, 개방귀만큼이나 시들하게 들렸다. 비상하거나 하다못해 이상한것이 아니라 정상으로 되였다고 해도 지나친 소리가 아닐만큼 도독은 둔해졌다. 그래서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주관아의 골방에서 모아들인 재부를 셈하는걸 구경하였고 어느날에는 대낮에 관청에서 계집을 불러들여 술마시면서 듣기도
하였다. 흔하면 천해진다던지 하여튼 도독 안태는 배심이 여간 아니였다. 나라님도 어쩌지 못하는데 한낱 변방도독인 내가 뭐 어쨌단 말인가. 날
죽여라 하는 방심도 없지 않았을것이다. 그러다 말겠거니 하는게 《도적》이요, 《반란》이요 하는것들에 대한 도독의 타산이다. 메뚜기 성한다고
한겨울 넘기랴! 그러다가 북원의 한 무리가 바로 아흔아홉굽이 재(대관령)를 넘어 이제 곧 이 하슬라를 덮친다는 숨막히는 소리를 듣자 별안간 창에 찔린
돼지가 되였다. 《뭐야? 여기 하슬라로 와?》 이때껏 똥집이 천리라고 생각했나, 뭔가? 하는 소리가… 그때 도독의 둔한 머리에도 피뜩 떠오르는것이 있었으니 처음 북원의 량길이 주천을 들이쳤다는 소리가 났을 때 별가 권능순이 하던 말이였다. 《도독, 그것들은 필경 우리 명주를 노리고있소이다.》 하고 권능순이 잘라말했다. 도독 안태와 주조 구득은 그러는 별가 권능순을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족제비 닭 잡아먹을 생각만 한다더니 별가라는건 제 맡은 일이 싸우는
일이니 지레 겁부터 먹는것이다. 그것들, 북원것들이 뭐 말라빠졌다고 하필 오불랑꼬불랑 아흔아홉굽이 재를 넘어 이 머나먼 하슬라로 온단 말인가.
열에 아홉은 삭주(춘천)를 치든가 서울로 내려갈게다. 그것도 담이 꽤 크다면 말이다. 오지 말았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오지 못한다는 엉뚱한 장담으로 번지는걸 보며 별가는 모주먹은 돼지처럼 씩씩거리기만 할뿐이였다. 그런데 정말 이 하슬라로 와? 끝내 별가의 말대로 된단 말인가? 도독의 왼눈아래 뺨이 후들후들 뛰였다. 이거 안되겠구나. 그제야 도독은 급히 주조 구득을 불렀다. 《북원의 역적들이 한동안 잠잠해있다 했더니 치악산을 넘어 우리 주를 침범하려 날친다 하오. 이를 어쨌으면 좋을고?》 도독이 얼굴에 장마구름을 잔뜩 끼고 물었다. 그런데 구득의 꼴이 얄밉다. 《뭘 그리 놀란 토끼처럼…》 하는 속심이 여우 오줌누듯 짹짹 내밴다. 꼴 좋다 하는 비웃음이 담긴것이라 명색이 주의 도독인 안태에게는 속이
좋을리 없다. (이녀석이 딴 꿍꿍이가 있는게 아니야? 아니면 속통이 하늘소 발통처럼 땅땅하단 말인가?) 눈 껌벅이며 쏘아봐야 알턱이 없다. 구득이란 녀석은 본래 그런 놈이다. 안태가 이 세상이라는걸 제법 헤아리건대 개는 개끼리, 토끼는 토끼끼리 서로 어슷비슷한것들끼리 놀아대기마련이다. 그렇게 봐서 구득은 안태 자기와 별로 차이가 없다. 구태여 차이가 있다면 구득이 주의 주조요, 안태는 도독이다. 도독이면 어딘가? 나라 서울에서 보면 바깥이지만 이 신라라는 손바닥만 한 나라에 주라는게 도대체 열손가락안에도 못 꼽히는 아홉이라, 그
아홉의 한꼭지 대가리이니… 도독이라는 사람이 원래 머리가 둔한지 아니면 세월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당장 발등에 불 떨어지게 됐는데 제 심복을 불러다놓고 한다는 생각이 이런 얼토당토않은 잡생각이다. 《그것들이 무슨 속심으로 그러는지 모르겠소이다. 떠보자는건지 아니면 미친증이 살아나서 그러는지… 만일 우정 떠보자고 그런다면 무슨 대책이
있어야 할줄 아오이다.》 하고 구득이 말했다. 그저 그렇고 그런 소리인데도 도독은 염소수염을 파들파들 떨며 말하는 구득이 낫긴 낫다고 생각한다. 뭐가 난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글쎄 말이요. 죽일놈들 같으니… 지랄 부리겠으면 저희들 북원뜨락이나 하다못해 삭주쯤 쑤실게지 부디부디 우리한테 기여들겠다는건 뭐람. 가만있는 우리한테 말이야. 우리가 뭐 문문한 홀아비좆인가. …》 도독은 아주 억울해죽겠다는 소리다. 《조정에서는 소식이 없소이까?》 구득이 물었다. 《그게 내 소리요. 없소구려… 급보를 보낸지가 언젠데 가타부타 없으니 속타는 일이요.》 실지 급보를 띄웠는지 말았는지 안태로서는 벌써 까리까리한 일이지만 때가 때인지라 안타깝다는 소리를 했다. 모든 일이 바로 그래서 안되는것 같다는거다. 이를테면 책임을 슬쩍 조정에 넘기는것이다. 안태는 꺼지게 한숨을 내쉰다. 구득도 따라서 한숨을 포옥- 하니 내쉰다. 《어쩌면 좋을고, 엥? 말 좀 하소구려, 씨원히… 입이 붙었소?》 하고 도독이 신경질냈다. 그러거나말거나 구득은 염소수염을 살살 쓸며 앉아있다. 《거 이런 때에는…》 구득이 입을 벌렸다. 《뭐요 엥, 뭐요?》 하고 도독은 체면이고 뭐고 내버리고 구득에게 바투 다가붙었다. 《이런 때는 별가가 나서야 하는건데…》 《별가?》 《생각해보시오이다. 별가의 소임이 워낙 주의 군사를 맡았는지라 이런 때엔…》 안태의 낯은 별안간 어두컴컴해진다. 요, 참새 굴레씌울 구득! 하는 얄미운감을 넘어 수돼지같은 별가 권능순의 얼굴이 떠올라 속이 찝찔해졌다. 주도독밑에 행정맡은 주조와 군사맡은 별가가 있는데 평시에
도독 안태는 주조를 끼고 재미를 보면서 별가는 멀리했다. 별가 권능순은 달라는게 없이 미웠다. 그녀석 별가가 평시에 퉁퉁 한다는 소리가 《도독, 군사를 소홀히 해서는 안되오이다.》 하고 저 혼자 아는체 하는게 도독과 주조에게는 딱 질색이였다. 말이 군사라고 하지만 도독과 주조에게는 딴소리로 들린다. 하슬라주가 좁고 구석진 곳이기는 해도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해서 나라에서는 원래 소홀히 하는 곳이 아니였다. 그래서 지방에 주둔시키던 중앙군으로서 6정의 하나인 이른바 《하서정》이라는 부대도 태종 5년(658년)에 배치하였고 이외에 도독의 지휘밑에 있는 지방군으로서 기병위주의 이른바 《5주서》군과 한산, 하슬라주에만 둔 2궁(외궁)부대 그리고 한산, 우수, 하서에 배치한 3변수당의 한 부대도 있었다. 다른 곳에 비하면 적지 않은 부대였다. 6정의 하나인 하서정은 중앙군이라 해서 그렇다 해도 다른 부대들은 도독의 지휘밑에 있다. 군사라는게 주를 지키기 위해 있는것으로서 싸움준비를 평소에도 멈춤없이 하는것이지만 도독 안태는 그걸 엉뚱하게 부려먹었다. 싸움준비를
시키는게 아니라 도독의 사병으로 만들었다. 안태의 재물나오는 구멍이 주의 백성과 벼슬아치를 짜내는것과 아울러 이 군사를 짜내는 2개였다. 그런데 별가 권능순이 삐뚤서해가지고 군사를
무력화시키는 도독에게 만날적마다 시큰둥한 소리만 해대는것이였다. 처음엔 군사맡은 녀석이니 그러겠거니 했는데 그렇지만 않는듯 하다. 이게 저한테 돌아오는 몫이 없어 심술이 나 그러는구나 해서 부스러기도 좀 주어보았다. 하지만 별가는 그따위는 보지도 않는다. 아가리가 큰 놈이구나 하고 생각되자 괘씸해졌다. 너 그러겠으면 그러려무나 하고 배짱부리는게 하루이틀, 한해, 두해가 흘러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야, 별가 나서라!》 하면 워낙 심술바르지 않은 녀석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도독은 속이 좋지 않은것이다. 그런 안태의 속을 꿰뚫어보았는지 구득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앉으며 쏭알거렸다. 《도독, 별가가 어리석고 괘씸한데가 있긴 하지만 어찌겠소이까? 뜨물 줘서 개를 기를 때야 하나는 집을 지키라는것이고 또 하나는 잡아먹자는게
아니겠소이까?》 딴은 그렇다. 해서 도독은 웬만해서는 찾은적이 없는 별가 권능순을 찾아오라 했다. 별가는 신라때 벼슬로서 장사 또는 사마라고도 했다. 장사, 사마라는것은 신라 9주의 우두머리들인 도독밑에 있는 벼슬아치로서 주조(또는 주보)와 함께 주안의 행정 및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아본다. 주조는 주로 행정을 맡아보고 별가는 군사관계 일을 맡아본다. 그러니 하슬라주 별가라 하면 하슬라 도독의 밑에서 군사를 맡아보는 벼슬이였다. 하슬라주 별가 권능순이란 사람은 재미있는 사람이였다. 사람이 미끈하게 잘 생긴데다가 키도 그만하면 작지 않고 때에 따라 애교도 부릴줄 알고 뭘 아는것도 많았다. 그런 사람이 신라 하면 제일 웃구석인 하슬라에서 별가노릇이나 하는것이 조금 이상하다 하면 이상한 일이였다. 그러나 사람의 한살이 즉 운명이라 하는것은 묘한것이여서 권 아무개보다 못한것들도 웬만하면 다 서울로 바라올라가 벼슬을 따서 떵떵거리는데 그만은 도무지 승급하지 못하고 뭉갠다. 그가 하슬라주 별가라는건 알지만 언제부터 별가노릇 했냐 하면 그 웃상관인 주의 도독 안태도 잘 모를 일이다. 그만큼 오래동안 하슬라주에서 별가살이를 했다. 권능순을 놓고보면 첫때는 그자신도 자기만큼의 됨됨에 비추어 인차 조정에 출세해 올라갈줄 알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소불알 떨어질 때를 기다려봐야 도무지 빛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뭔가 잘못됐다 하고 그는 생각해본 때도 있었다. 속이 울울해 세월을 보내면서 어느덧 나이가 마흔에 들면서는 《팔자가 고약해놔서…》 하고 중얼거리군 하였다. 팔자탓으로 돌리는걸 봐서는 이 사람이 뭔가 부족한것이 분명하다. 《뼈다귀가…》 하고 아쉬워하면서 그의 궁박한 팔자를 분석해보려는치들도 있었다. 성골, 진골이 못되여 벼슬에서 출세 못한다는 소린데 그런 때면 권능순은 코방귀를 뀌였다. 왜냐면 그는 자기를 태종무렬왕의 후손이라고 당당히 자부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권능순이 그런
피줄이라는건 다른 사람들도 어느 정도 알고있다. 한때 명주군왕으로 소문난 김주원은 그의 먼 고조할애비다. 물론 외켠으로 말이다. 어머니켠이긴
하지만 그게 어딘가? 도대체 어느 씨알인지도 모를것들이 벼슬감투를 뒤집어쓰고 《여봐라!》 하는 세상 아닌가. 뼈탓이 아니다. 그럼 능력탓인가?
그것도 아니다. 능순은 그 누구보다 세상물정에 밝고 특히 병법에서는 따를 사람이 없다고 속으로 자부하는 사람이였다. 그건 사실이다. 도독 안태도 주조 구득도
그건 알고있다. 그 병법이라는걸 뭘 얼마나 아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렇다는것이다. 《눈깔이 멀어서…》 하고 권능순은 자주 벼룩 씹듯 중얼거리군 했다. 《눈깔이 멀어서》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과 세상을 탓하였다. 도독도 그래, 나리님도 그래, 조정에 득시글거리는 귀족들도 눈깔이 멀어서 권능순이 출세하지 못한다는것이다. 그쯤했으면 세상이 저를 알아보게 뭘 좀 삐여진 일을 해보지 않겠는지 하고 아쉬워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면 권능순은 《모르는 소릴세.》 하고 타이른다. 현명한자는 결코 칼 물고 뜀뛰기하지 않는다는것이다. 그러면서 속으로 벼르었다. 이제 두고봐라, 때가 오지 않나. 그때면… 그러는 사이에 무정한 세월은 물 흐르듯 했다. 권능순은 결코 숙맥같은 사람이 아니였다. 그는 세상을 제법 옳게 보았다. 지금은 란세다. 권능순은 그렇게 보았다. 란세란 뭐냐? 리기에 눈먼것들이 제마끔 제 목숨 건지려고 요리 뛰고 조리 뛰는 어지러운 때다. 능순은 그렇게 보면서 이 란세는 분명 뭔가
옳은것이 태여나기 위한 징조라고 보았다. 이른바 필부들은 란세에 이르러 제 목숨이나 건지려고 콩콩 뛰지만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고 세상을 깊이
들여다보는것이다. 그러고보면 권능순은 란세에 드문 수재이면서 또 그 란세에 좀처럼 출세하지 못하는 불우한 사람이였다. 어떤 때는 잘되는 사람을 보면 《쳇, 그까짓…》 하지만 그러면서도 은근히 부러워하고 밸이 꼴려하는 권능순이였다. 권능순이 만약 처세에 좀더 밝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세상이 《눈깔이 먼》 썩은 세상이라 하더라도 약삭바르게 슬쩍이라도 굽어들었을것이다. 그까짓 대가리, 낯짝 빳빳 쳐들어봤자 무슨 리득나는게 있냐, 정조란 뭐고 절개란 뭐냐, 썩은 닭알이 노란자위, 흰자위
가린다더냐. 그저 그렇게 사는게지… 그런데 워낙 뭘 좀 안다는 족속들의 그 코대 즉 남을 깔보는 그 버릇이 권능순에게도 있는데 그게 도무지 사그라들줄 몰랐다. 주대있는 사람이라면 범상치 않다고 좋아할지 몰라도 속물들의 세상에서는 미운 털만 박히기마련이다. 하슬라주 도독 안태나 주조 구득이 권능순을
은근히 미워하는건 바로 권능순이 알리게 우쭐거리기 좋아한다는데도 있었다. 권능순은 때없이 낮잠을 자다가 도독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찌뿌둥해가지고 도독에게 갔다. 도독 안태는 여느때처럼 별가 권능순을 맞아들였다. 《주가 북원도적들의 발악으로 풍전등화의 신세가 된지라…》, 《때가 때니만치 별가의 의견을 듣고저…》 찾았다고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별가, 이런 일이야 의례히 군사맡은 별가가 알아 할 일이 아니시겠소. 도독께서 이렇듯 애타하시고 또…》 밉다니까 깨꼬한다고 주조 구득이 제가 무슨 구렝이라고 별가를 놀리려 수작을 붙인다. 《뭐, 이러쿵저러쿵할게 있소이까? 이제라도 군사를 모아야 하오이다.》 《군사? 무슨 군사말이요?》 구득이 파리 들어가라고 입을 항 벌리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군사겠소? 당장 궁예가 쳐들어온다는데 막을 군사가 없으니 이게 말이 되오이까?》 《허, 별가의 말씀이 거 가시가 있소구려. 만약시 일이 그르치면 도독이나 나를 욕하고싶어 그러시는건 아닐테지요, 시방?》 웃음은 지짐판에 참기름치듯 자르르 발랐어도 독이 있는 구득의 따짐이였다. 이런 때면 권능순의 속이 벌컥 뒤집힌다. 이렇게 좁쌀, 기장 따지고들면 끝내는 꼼짝 못하는 별가 권능순이다. 서캐잡이하는 놈이 털 빗어주는
놈과 같을수 없는데 서캐잡이가 야, 이 미물아 하면 털 빗어주는 놈이 괜히 욱하지 별수없이 풀떡거리는 꼴이다. 권능순의 생각은 머물지 않고
앞으로 나가면서 곧 형태를 그려 말하는데 구득은 진드기처럼 딱 달라붙어 살살 약을 올리군 한다. 그것도 일대일이 아니고 은근히 도독이나 그우의
나리들을 빗대고 야질거릴 때면 권능순은 요걸 그저 한대 먹이고싶은 생각만 굴뚝같은데 이런 감정을 가지고서는 백번 패하기마련이다. 그런데 오늘만은 권능순이 용케 참는다. 바쁘긴 바빴구나, 너희들이… 하는 배심이 들었기때문이였다. 《일언이페지, 두말말고 군사를 모아야 하오이다.》 권능순이 소리를 누르며 다시 말했다. 도독과 주조는 서로 눈길을 마주쳤다. 주에 군사가 없는건 아니지만 세월이 어수선한 때라 그무렵에는 도독과 주조의 노역들로, 재물불리는 노비들로 돼버렸다는건 하슬라주에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이상한건 도독 안태와 주조 구득만이 그런게 아니라고 수염을 쓰는것인데 한건 주모자인 그들이 자기를 속이느라고 무척 애썼기때문이다. 《누가 군사를 뭘 어쨌다오?》 《뭘 그러우? 훈련이란게 딴게요. 일도 하고 그러는거지…》 일이 있을 때마다 도독이 하는 소리요, 맞장구치는 주조가 하는 소리다. 《군사는 뭐 바람먹고 구름똥 싸나? 먹지 않고 어찌 살아? 먹으려니 벌어야겠지, 벌어야겠으니 일두 해야겠지.》 군사를 노역에 부리는게 당연하다는 소리였다. 별가 권능순은 거기에 대해서 대단히 못마땅해하였다. 사람이 어떻게 돼먹은건지 웃대가리가 먹자는 놈이면 아래놈은 개올리면서 저도 밸에 뭘 좀
챙기는게 눈치있는 놈인데 그래서는 안되오 하는 곧은 막대기다. 권능순으로서는 달리 생각하는것도 있으니 그런 노역에 내몰리는 군사들이나 가지고서는 자기의 진짜 실력을 보여줄수 없기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랬으니 지금 군사를 뫃네 어쩌네 하는 소리에 도독과 주조가 이놈 봐라 하는게 우연치 않다. 《군사를 뫃고 병쟁기도 마련해야 하오이다. 그렇지 않다간 진짜 북원의 도적들이 쳐들어오면 큰일이오이다.》 권능순은 찌프린 낯을 풀지 못하며 말했다. 안태와 구득은 또 마주본다. 이런 메돝(메돼지) 보소 하는 꼴들이다. 평시에도 그런 소리를 안하는건 아니다. 무슨 별일없을 때에는 그게 푸주간에 떠도는 파리소리처럼 들렸지만 일단 위기가 닥쳐왔으니 여느때와 달랐다. 만일 하슬라가 도적들의 손에 들어가면 군사를 훈련시키지 않고 사역화한 도독과 주조가 무사할리 없다. 《그래 별가는 아무 책임없다는 소리시오 뭐요?》 구득이 몸을 흔들흔들거리면서 물었다. 꼬치꼬치 물고넘어지며 놀리려는 초입이다. 늘 써먹는 구득의 수법이다. 구득은 무슨 론리를 캐기
좋아하는데 그자신의 론리가 바르기때문이 아니라 정직하고 뭘 좀 선견이 있다는 놈들은 요런 구질구질한 론리에 곧잘 역증을 내기때문이요, 역증을
내면 낼수록 구득에게 야로할수 있는 구실이 많아지기때문이다. 이를테면 작은 바늘로 콕콕 찔러 큰 몽둥이를 넘어뜨리는 수법이다. 별가 권능순은 하도 이런데 치워놔서 대뜸 그 잔꾀를 알아채고 얼굴이 뻘개졌다. 《이거 왜 이러우? 나도 답답해서 하는 소리웨다. 때가 때라면서 머리카락으로 코구멍 쑤셔 재채기 나오게 하지 못해 야단이시오, 야단이…》 잔 놈의 약점이 상대가 우락부락하면 대뜸 움츠러드는것인데 구득은 속이 덜컥하면서도 주둥이에는 잔 놈의 특기인 뾰족한 치레거리를 제꺽
달아놓는다. 《소리는 징 울리는 소리인데…》 하는 구득의 소리에 별가 권능순의 눈알이 당장 이놈아! 하고 튀여나오려고 한다. 《아, 됐소, 됐소.》 도독 안태가 웃사람답게 달랬다. 《무슨 묘책이 있어야지 이렇게 개, 고양이처럼 다투어서야 쓰겠소?》 《그래얍죠. 지당한 말씀이오이다. 별가어른이 괜히 가만있는 사람 걸고드니 어진 나로서도 좀 지나쳤나 보오이다.》 요런 버릇은 천성이여서 죽지 않으면 고치지 못한다. 구득이 나불거리며 자리를 고쳐잡는걸 보고 권능순의 주먹은 구득의 대가리를 그저 썩은
박치듯 하지 못하는걸 분해하여 후들거렸다. 《어쨌든 당장에는 별가의 뜻대로 따라야 할줄 아오. 군사도 뫃고 병쟁기도 마련하고… 어떠하오, 별가?》 도독이 물었다. 《그래야 하오이다.》 능순은 한결 속이 풀렸다. 하슬라주 별가 권능순이 재미있는 사람이라는건 이런 때에도 드러난다. 누가 좀 저를 알아주는듯 하고 조금만
추어줘도 대뜸 지나간 일을 깨끗이 까먹고 으쓱거린다. 그걸 대범하다고 봐야 할지. 하긴 계집들처럼 맺힌 옹이를 기어이 갚음하려는것보다는 시원한
성격이라 해야 할것이다. 그런데 이런 성격은 천상 가야 남의 밑에서 살아가기 좋은것이다. 《묘책이 없는것도 아니오이다.》 하고 권능순은 벌써 웃음을 담고 말했다. 도독 안태의 눈이 반뜩했다. 구득도 귀바퀴를 능순에게 돌렸다. 《어서 꺼내소, 별가! 별가의 머리야 참기름처럼 반들반들하지 않소. 허허…》 기껏 추어준다는것이 이렇게 신통치도 못한 비유인데도 도독으로서는 사뭇 기쁜 모양이다. 별가 권능순이 묘책을 말했다. 《내 일찌기 듣자니 염통이 아프면 발가락을 주무른다고 하오이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지금 북원의 도적들이 우리 하슬라를 노리고 덤벼드는
때에 그놈들의 뒤통수를 치자는것이오이다.》 《거 묘한 소리요. 뒤통수를 치면야 제까짓것들이 별수있나. 허허… 헌데 어떻게?》 도독은 손가락으로 자기 귀구멍을 후벼내며 이 상통 너 가져라 하듯 능순의 입으로 가져갔다. 《삭주 도독에게 북원을 치게 하자는것이오이다. 그러면 북원의 도적들은 할수없이 물러갈것이오이다.》 《하하!》 도독 안태는 허리를 펴며 웃어제꼈다. 《과시 묘안이요, 묘안!》 하며 무릎을 치던 도독이 구득에게 돌아섰다. 《어떠하오, 주조? 별가의 묘책이, 응?》 《좋긴 한데…》 구득이 염소수염을 살살 내리쓸었다. 요놈이 또? 하는 표정으로 권능순이 구득을 쏘아보았다. 구득은 그에 아랑곳않고 조잘거렸다. 《삭주 도독이 말듣자 하겠소이까? 내 알기에는 그쪽이나 이쪽이나 형편이 도토리 키재보기일텐데… 그리되면 고양이목에 방울달기가 되기 쉽소이다.》 《그러게…》 하고 별가가 주조의 말을 가로챘다. 《삭주 도독이 말듣게 하는거웨다. 그 일은 아마 주조가 맡는게 좋을듯 하오이다. 주조나리야 지략이 있지, 언변좋지, 게다가 사리분별이
명백하지. 그뿐인가요? 또… 하여튼 이번에 주조나리가 그 일을 맡아 잘만 처리하면 하슬라에 옮겨붙으려는 불이 아주 꺼버리게 될것이웨다. 그럼,
그렇다마다. 주조나리가 그 일도 못한다면 말도 되지 않소이다. 그것도 못한다면 차라리 벼슬을 돼지에게 주는게 낫지요.》 미욱한것 같으면서도 일리가 영 없는 소리는 아니다. 주조 구득에게는 억지로 상통에 진흙을 게발리우는 심정이지만 하도 권능순이 이때라듯
억지부리는데 그만 기가 질리고말았다. 고양이 쥐 놀리는건 의례히 그러려니 하는 일이지만 그게 쥐가 아니고 메돼지일 때는 오히려 고양이가
놀리우기마련이다. 《아 좋소, 좋아. 별가의 말씀이 옳소. 내 그 일 맡겠소이다. 헌데 그럼 별가는 할 일이 없어지지 않소이까? 국록을 타자시면서…》 기껏 생각한다는게 이런 트집인데 구득은 이런 면에서 또 약했다. 그럴수 있는 일이다. 권능순은 에 씨원하다고 웃으면서 제꺽 대답했다. 《왜 할 일이 없겠소이까? 설혹 주조나리가 실패하면 이 별가가 나서서 아흔아홉굽이 재를 막아서겠소이다. 다만 되든 안되든 주조나리는 삭주 도독을 꾀여서 시간을 벌게 해달라는거지요. 일단 우리가 군사를 뫃고 그들을 훈련시켜 아흔아홉굽이 재를 막아서면야 북원의 도적이
아니라 할애비래도 념려없소이다. 그럼 도독께서는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지낼수 있소이다.》 아는지 마는지 도독 안태는 말대가리같은 상통을 끄덕끄덕하며 와하하 웃었다. 별가 권능순에게는 오늘이 받은 날이다. 그는 식혜먹은 고양이 낯짝이 된 구득을 힐끔 보고나서 제딴에는 의젓하게 한바탕 병법을 썰썰대였다. 《삭주 도독을 꼬드겨 하슬라의 위험을 덜자는건 묘안이긴 하지만 별로 새로운건 아니고 병법에 있는것이오이다. 헌데 그 묘안이란건 아무때나
성공하는게 아니오이다. 앞으로 달려드는 적의 뒤통수를 쳐서 꺼꾸러뜨리자면 먼저 제힘이 있어야 하오이다. 제가 능히 달려드는 적을 맞설 힘이 있고서야 남의 막대기로 적의 뒤를 찌르는 병법이 상책의 상책으로 되지요. 만일 제힘이 없어가지고 순 남의 힘을 빌어 적을 치자는건 이를테면 궁여지책이라 하지요. 그러니 이러쿵저러쿵 할것없이 우리 하슬라주 군사를 튼튼히 해야 하오이다.》 말은 그럴듯한데 권능순에게 이것이 약점이면 약점이다. 들어봐라 하고 한바탕 뽐을 내지 않았더라면 도독이나 주조도 그런대로 별가를 사주었겠는데 그 한치 틈을 참지 못해서 지껄여대는데 도독과 주조는 겉으로는 아주 잘하웨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어디 보자고
벼르는것이다. 하여튼 북원의 도적들을 막기 위한 도독, 주조, 별가의 토의는 이렇게 망치질해서 마무리지었다. 주조 구득이 삭주 도독에게 가서 그를 설득시켜 북원의 적을 치게 하고 별가 권능순은 군사를 뫃고 군사를 조련시켜 아흔아홉굽이 재를 막기로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