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 회)
제 1 편
용감한 사람
6
요즈음 건설직장장은 기업소 합숙 2층을 보수하느라고 지붕을 헐어내리우고 자재들을 끌어들이느라 분주하게 돌아갔다.
그는 오늘중으로 블로크와 모래를 다 실어들이려 상하차로력을 넉넉히 뽑아놓았다. 기업소 안마당에 세멘트, 모래, 기와들을 발들이밀 틈이 없이 무덕무덕 쌓아놓았다.
갑자기 운수직장장이 합숙앞으로 오더니 오늘은 차조직을 못하겠노라고 했다. 화물차운전사가 몸이 아파 못 나왔다고 했다. 못 나왔다면 단가. 건설직장장은 전에도 드문히 이러군 하는 운수직장장이 괘씸하여 꽥 소리쳤다.
《여보, 당신과는 손발이 맞지 않아 못해먹겠소. 동무는 말 한마디면 다지만 우린 전반적인 일조직이 튄단 말이요. 무책임하오.》
《아파서 못 나온다는 사람을 난들 어떻게 하란 말이요.》
그도 왈칵 신경을 썼다.
《방귀뀐놈이 먼저 성낸다더니 잘못하고도 제편에서 큰소리야? 우린 당신같이 머랑탕한 소리나 하는 사람과는 상대하지 않겠소. 우리가 모래를 등짐으로 져나르겠소. 풀솜에 싸 길렀나, 맥이 없이 어질어질…》
건설직장장은 나이 50을 넘긴지가 오랜 사람인데도 패기있고 정열이 있었다. 늘 상고머리를 깎고다니여 일명 《패기머리직장장》이라고도 했다.
키는 크지 않지만 몸집이 단단하고 무슨 일이나 쇠소리가 나게 해제껴 알차기 이를데 없는 사람이였다. 그런 직장장이여서 오늘 못하면 래일 하는 식으로 일을 질질 끄는 사람은 맞대놓고 쏘아주지 않고는 못 배기였다.
직장장이 《상하차조 모엿, 다들 손달구지를 끌고 나오시오.》 하고 소리치며 진짜 인력으로 모래운반을 할 잡도리를 하자 운수직장장은 바빠서 자기 직장쪽으로 사라졌다.
운수직장쪽에서 최장근지배인의 엄한 목소리가 울렸다.
《자동차를 놔두고 등짐으로 모래를 나른다는게 말이 되오?》
이어 부르릉― 하고 화물차 발동 거는 소리가 들렸다.
운수직장 안마당을 떠난 최장근지배인이 합숙앞으로 돌아나오며 건설직장장에게 물었다.
《2층을 블로크로 몇돌기나 더 쌓을 생각이요?》
《세돌기쯤 더 올리자고 합니다. 워낙 2층이 조금 낮아졌댔습니다.》
《비슷할것 같소. 부지배인은 어디가있소?》
《지붕공사에 필요한 서까래감, 판자들을 해결하려 제재소에 나가있습니다.》
그들이 자재타산을 해보고있을 때 정문으로 승용차 한대가 들어왔다. 최장근은 얼른 그리로 다가갔다.
(조형례국장이 무슨 일로 갑작스레 내려올가? 아무런 기별도 없이.)
최장근은 이런 생각을 하며 조형례를 반갑게 맞이했다. 마주서니 조형례국장은 키가 최장근지배인의 어깨에 와 멎었다.
번쩍 빛을 내는 둥그렇게 큰 대머리와 굵은 목, 뚱뚱한 몸집과 우뚝한 주먹코가 대틀로 보여 남아다와서일가 어쩐지 크게만 느껴졌다.
최장근지배인은 키만 꺽두룩했지 몸집이 없어 별로 훌쭉했다.
그는 국장을 데리고 지배인실로 올라가며 어떻게 미리 알리지도 않고 불쑥 나타났는가고 물었다.
《수풍발전소에 출장을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잠간 들렸소.》
《아니, 수풍엔 뭘하려?》
《거기엔 또 거기대로 볼 일이 있어 윤부상과 같이 갔다가 난 이리로 왔소.》
그들은 지배인실에 들어가 쏘파에 마주앉았다.
조형례는 담배 한대를 꺼내물고 최장근앞으로 밀어놓았다. 그는 이미 보고를 다 받아 알고있었으나 현지에서 다시 물어보는것을 잊지 않았다.
《2호변압기대보수가 끝나간다지?》
《이제는 다 됐소. 시운전단계요. 내 이번에 그것때문에 십년 감수했소.》
《허허허, 최동문 그래도 행운아라는걸 아우. 정준하와 같은 사람을 기사장으로 데리고있으니 이번에 그런 큰일을 했지 지배인 혼자 결심으로는 아마 못했을거요.》
《거야 물론.》
《수고많았소. 좌우간 이번에 최지배인이 혼이 난 모양이구만. 십년 감수했다는걸 보니. 속담에 모진놈 옆에 있다 벼락 맞는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정준하와 같은 실력가가 있어서 마음고생은 했어도 큰일을 제낀줄 아오.》
조형례는 활달하고 청높은 목소리를 좀 낮추어 정준하가 있는가고 물었다.
《오늘 해창군 명산포에 또 나갔소, 당비서와 같이.》
《음― 변압기대보수를 끝냈으니 이젠 가양도송전선공사를 내밀어야지. 그 지칠줄 모르는 공격자세가 얼마나 좋소.》
《분별이 있는것 같지 않소. 좀 심사숙고했으면 좋겠소. 이번에 나가서는 가양도에 건너가 섬안의 지형까지 다 밟아보겠다고 했소.》
《지배인동문 그곳에 나가보지 않소?》
《난 이미전에 가봤소. 바다우를 횡단해서 고압선을 띄우는 일이 어디 말처럼 쉬울것 같소. 그래서 내가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말리는데도 정준하동무는 막무가내요. 한 3년쯤 더 기다렸다 하자는데도 듣지 않소. 도무지 자중할줄을 모르거던.》
최장근은 가양도송전선공사의 난중스러움에 대하여 루루이 이야기했다.
조형례는 신중한 표정을 짓고 새겨들었다. 그는 최장근지배인의 언덕이마에 주름살이 몇줄 늘어난것을 보고 마음고생이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수력발전소에서 기술과장을 할 땐 키꼴이나 뽑은 사람이 쌩쌩하고 혈기에 넘쳤댔지. 전기공학에 대한 리론도 높고 행정실무능력도 높았지. 나와 기술론쟁도 얼마나 많이 했던가.)
이윽고 그는 지배인에게 정준하가 외국어 3개를 능란하게 잘한다는것이 사실인가고 물었다.
《옳소, 아주 능숙하우. 전문 번역원들도 기사장한테 와서 물어보는게 많소.》
《음―》
《그건 왜 갑자기 물어보우?》
《인차 처벌도 해제되겠는데 그때 가서 외국에 1년쯤 보내자고 하오.》
《외국엘?!》
최장근은 어지간히 긴장한 눈길로 국장을 보았다.
《내가 실은 이 심부름때문에 들렸소. 성에서 전기리론에 밝고 경험도 많고 외국어도 잘하는 실력가들을 몇명 골라서 외국에 파견하오. 목적은 기술교류와 합영이요. 동남아시아로부터 유럽까지 돌아오려면 한해쯤 걸린다고 하오. 지금 안을 잡고있는 적임자명단에 정준하동무도 들어가있소.
동의하면 아주 소환이요. 한해동안 가서 일을 잘하고 돌아오면 성에서 국장임무쯤 맡기게 될거라고 하오. 그래서 내 지배인동무의 의향부터 먼저 물어보는거요. 이건 뭐 의무적으로 가야 하는건 아니니까. 사정이 있거나 본인이 희망하지 않는다면 더 권고하지 않소. 우리 당조직에서 이번 출장길에 도송배전부에 가서 의향을 알아보라는 과업을 주어 내가 들렸소.》
《글쎄… 본인이 어떨는지…》
《정준하동무가 이번에 일을 잘하고 성실해서 반영이 아주 좋더구만. 정말 량심적인 일군이요.》
최장근지배인은 입을 다물었다. 긴 허리를 꼿꼿이 펴고 의자등받이에 기대지도 않은채 단정한 몸가짐으로 앉아있었다.
생각에 잠겨든 그는 긴 턱을 버릇처럼 한손으로 자꾸 매만졌다. 누르스름한 언덕이마가 오늘따라 더 길어진것같이 보였다.
사실 최장근에게 있어서 오늘 조형례의 출현은 생각해보지도 못한 일이였다.
가양도공사문제를 놓고 비록 기사장과 의견이 맞지 않아 속은 상하지만 고와도 미워도 내 자식이라는 감정비슷한것이 가슴속에 있는것이여서 놀라움을 금할수가 없었다.
아무리 국가적인 일이라고 해도 국장의 말은 정준하를 자기 품에서 빼앗아가겠다는 소리로밖에는 더 들리지 않아 기분이 상했다. 이러나저러나 정준하가 없는 우리 도송배전부를 생각할수 있는가.
물론 큰 소가 나가면 작은 소가 큰 소노릇을 한다고는 해도 인간적으로도 정준하를 내놓을수 없었다.
그가 외국에 가서 해야 할 일들은 자못 중요한것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전국의 실력있는 전력공업부문 일군들가운데서 정준하만 한 사람들 몇명 고르기는 별로 힘들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우리 도송배전부실정에서는 정준하를 내놓으면 도안에서는 어데 가도 그만한 사람을 찾아볼수가 없다.
성에서 무슨 국장사업을 시킨다 해도 지금의 기사장자리보다 별로 올라가는것도 아니다.
더구나 내가 정준하를 내놓을수 없는것은 그가 앞으로 틀림없는 도송배전부 지배인감이기때문이다. 내 이제 지배인을 하면 얼마나 더 할텐가. 생일 예순번째를 보낸지도 여섯해가 지나고보니 왜서인지 모든 의욕이 감퇴되는것이 나로서도 알린다. 정열도 대담성도 기억력도…
한해가 다르게 로화돼간다는것이 헨둥해진다.
그래서 옛사람들도 나이는 못 속인다는 말을 했는가싶다. 이 생리적인 현상을 막을수는 없지 않는가.
그런것으로 하여 멀지 않은 앞날에 이 지배인이라는 책임적인 자리를 내놓을 때 누구한테 넘겨줄텐가. 정준하밖엔 더 있는가.
전력공업부문의 한개 도단위를 맡긴다는게 얼마나 큰일이게 아무한테나 풋나물 팔듯이 턱턱 넘겨줄수 있는가. 이건 매우 신중한 일이다.
오직 정준하한테 넘겨줘야만 나도 마음이 개운해서 여생을 속편히 보내게 될게다.
그러니 정준하를 놓아주면 팔을 떼여주는 격이 아닌가. 이건 랑패다. 국가적견지에서 봐도 정준하는 이 자리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
한동안 긴 턱만 주무르며 자기 생각에 잠겨있던 최장근은 기다란 상체를 조형례앞으로 내밀며 저으기 웅글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성에서 우리 기사장에 대해 그토록 마음써주는것은 고마운 일이요. 그렇지만 내 의견은 다르오.》
《정준하를 내놓기 아깝다는거겠지.》
최장근은 조형례에게 자기의 속마음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는 또 그렇게 솔직한데가 있는 사람이였다. 누구를 업어넘기거나 에둘러 뚱땅 눈속임을 할줄 모르는 고지식한 인간이였다.
조형례는 그의 절절한 내심의 토로를 다 들어주고나서 입가에 엷은 웃음을 띄웠다.
《최동무도 이제는 늙긴 늙었구만, 후임을 생각하는걸 보니.》
《한개 도의 동력을 책임진다는게 헐한 일이 아니요. 일을 정력있게, 대담하게 내미는 높은 의욕과 실력을 겸비해야 하오.》
《의향을 알만하오. 내 그럼 가서 그렇게 전달하겠소.》
조형례는 헌헌한 목소리로 응수하며 자리에서 성큼 일어섰다.
《가다니? 우리 집에 가 하루밤 쉬지도 않고 간다는거요?》
《준하동무를 데려갈수 있어야 본인도 만나고 당비서동무도 만나겠는데 듣고보니 다 만날 필요가 없구만. 내 바빠서 지체할수가 없소.》
《우리 전력부문 일군들이 언제건 한가한 날이 있소? 모든 부문의 맨 앞에 서야 하니 늘쌍 바쁘지.》
《옳은 말을 했소. 아무리 중요한 경제부문이라도 전기 다음이 아니요. 그래서 전기는 모든 경제의 명맥으로 되는거지. 국토를 넓히는 거대한 일에서도 송전선공사부터 먼저 해야 되지 않소. 기사장을 잘 밑받침해주오. 그는 큰일을 할 사람이요. 실력이 아주 높은데다 기질적으로도 담대한 사람이요. 가양도공사는 그런 사람이 맡아야 제낄수 있소. 지금 성에서도 론의가 많소. 공사를 적극 밀고나가야 한다는 주장들이 우세한가 하면 현조건에서 그런 내밀성은 무모한 객기라고 반기를 드는 편도 있소. 나는 정준하기사장을 적극 지지하고싶소. 그런 의미에서 최지배인이 기사장을 외국출장에 못 내놓겠다고 하는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소. 가양도공사의 주인은 정준하동무요. 그가 빠지면 공사를 밀고나갈만 한 드센 일군이 없소.》
최장근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국장동무는 언제봐도 정열에 넘친 인간이구나. 사업년한이나 나이는 나와 같은데도 아직 청춘이거던.)
조형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장근지배인은 정문밖에까지 나가 바래주었다.
이날 저녁 해창군 명산포에 나갔다가 돌아온 정준하는 안마당가에서 급전부기사장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있던 지배인을 만났다.
《수고많았겠소.》
《차를 타고 편안히 갔다와서 별로 힘든건 없었습니다.》
《그래 감상이 어떻소?》
《나가볼수록 공사가 어렵겠다고 생각됩니다.》
《스산한 날바다에 지레 겁을 먹은건 아니요?》
최장근은 중떠보듯 슬쩍 물었다.
《글쎄요. 그런 송전선공사는 지금껏 해본 경험이 없으니 더 어려워보이는것 같습니다.》
(기사장의 결심이 좀 흔들리는게 아닐가. 하기야 누군들 그런 결심을 서뿔리 할수 있을가. 그런데서의 대담성은 무모한 객기라는걸 이 기사장도 모를수 없지.)
최장근은 위로하듯 은근한 어성으로 말했다.
《기사장, 내 그래서 자꾸 강조하는거요. 들어보면 가양도 송전선공사가 절박한건 사실이지만 지금 형편에서 어떻게 하겠소. 당장 도의 힘만 가지고 붙었다가는 범의 꼬리 잡은 격이 돼서 끝내는 실패를 면치 못하오. 그곳은 국가적인 투자를 해야 할 대상이요. 그러니 좀더 기다리기요.》
(지배인동지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구나. 하지만 내 마음은 왜 이리 가양도로만 달리는가.)
정준하의 눈앞에는 수천정보의 새땅을 어서 가져라 하고 통채로 내밀어주는듯싶은 일망무제한 바다가 보이고 간석지 새 군의 첫 읍으로 소도시가 되여 불야경을 이룰 래일의 가양도가 망막에 어려왔다.
이 엄청난 국토넓히기의 중요과업을 수행하는데서 우리 동력부문이 선뜻 척후병으로 나서야 할 무거운 짐이 나의 어깨에 지워져있는게 아닌가.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기사장이다. 기사장이 응당 자기가 해야 할 일감을 두고 그것이 두려워 물러서다니…
잠시후 정준하는 자기 할바를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지배인동지, 큰 일감을 놓고 바재기만 하면 시간랑비밖에 가져올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가양도공사를 위한 준비로 대형변압기들 대보수도 끝냈으니만큼 지체없이 송전선건설에 들어가자는것입니다. 이제 곧 가양도에 현지조사와 측량조를 파견하겠습니다. 자료선행부터 빨리 해야 설계를 완성해서 공사에 착수할수 있습니다. 이 준비기간만도 몇달이 걸릴겁니다.》
최장근은 놀란 눈길로 기사장을 보았다.
《조사조를 파견한다?》
(음― 말고삐는 벌써 풀렸구나. 우리를 벗어난 말은 내달리는것밖에 모를테지. 가양도에 갔다와서 결심이 좀 흔들리는가 했더니 더 확고해졌군.)
최장근은 맹랑한 표정을 지으며 조사조를 누구한테 책임지우겠는가고 했다.
《부기사장을 파견하겠습니다.》
지배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철문처럼 꾹 닫긴 입술이 쉬이 열릴것 같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제자리걸음을 하며 생각에 잠겼다.
조사조를 파견한다는것은 곧 공사의 서막을 여는것과 같지 않는가.
하다면 어찌하자는것인가. 과연 승산이 보이는 공사인가. 시작했다가 실패하는 날엔 그 막심한 후과를 누가 책임질텐가. 내 이 나이가 되도록 쌓아올린 사업성과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수도 있지 않는가. 끝내 최장근은 조사조를 파견하는데 동의하지 않았다.
정준하는 말없이 돌아서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이윽고 최장근도 지배인실로 가 쏘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퍽 시간이 흘러 감정을 가라앉힌 다음 정준하는 지배인실로 갔다. 다시 돌아섰다. 활짝 열려있는 출입문을 등지고 당비서 장유상이 최장근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가양도공사에 대해 신중한 론의를 하는것 같았다.
정준하는 제 방에 와있다가 또 시간이 지나서야 지배인실로 갔다. 최장근의 인상은 여전히 무거웠다.
가양도공사를 무조건 해야 한다는 장유상당비서의 의견을 접수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려와 불안, 자신의 신상에 미쳐올 두려움이 가시여진것은 아니였다.
《조사조파견때문에 그러오?》
지배인이 먼저 정준하에게 물었다.
《예.》
최장근은 한손으로 이마를 짚고 아무 대답도 안했다. 정준하는 그러는 지배인을 보고 조사조를 즉시 현지로 보내겠다고 했다. 그래도 지배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사조를 책임질 운영부기사장한테 래일 아침 과업을 주겠습니다.》
그래도 반응이 없는 지배인을 보며 기사장은 그것을 대답없는 승인으로 인정했다. 큰 공사를 하기 위한 첫 걸음을 떼기가 여간 힘들지 않구나.
두사람은 자기 생각들에 잠겨 말없이 담배들만 피웠다.
(나이가 들면 어차피 보신의 길로 가기마련인가.)
이런 생각을 하던 정준하는 고개를 들어 최장근을 보았다. 가라앉은 어성으로 조용히 입술을 뗐다.
《지배인동지, 어쩐지 저는 이밤에 지배인동지를 상급으로가 아니라 옛 스승으로 다시 부르고싶습니다. 저는 지금도 지배인동지가 우리 전기전문학교 1학년 학급에 첫 강의를 들어와 해준 그때의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최장근은 정준하의 의미심장한 말에 고개를 버쩍 들었다. 내 그때 무슨 말을 했던가. 새삼스레 지나간 날의 추억을 무엇때문에 불러내는가.
…최장근선생은 당시 정준하학생을 불러일으켰었다.
《새는 깃털로 아름다와지고 사람은 지식으로 아름다와진다고 했습니다. 하다면 준하학생은 그 많은 지식가운데서 왜 굳이 전기공학을 전공하려고 합니까?》
정준하는 생각을 깊이 굴려보고나서 대답했다.
《부강한 조국을 건설하는데서 전기가 첫자리이기때문입니다. 전기가 없이는 어떤 경제건설도 이루어질수 없지 않습니까. 저는 뒤자리에 서는것이 싫습니다. 힘은 들어도 앞자리에만 서고싶습니다.》
《힘은 들어도 앞자리에만 서고싶다.… 인생의 길을 빛나게 걸어가겠단 소리구만. 옳습니다. 그렇게 한생을 값있게 살 결심을 하고 전기공학의 길에 발을 들여놔야 합니다. 전기공학은 과감한 사람들을 요구합니다. 과학탐구와 실천에서 담대한 의지력이 없이는 전기공학의 길을 값있게 걷지 못합니다. 먼 인생의 길을 가노라면 곡절이나 난관이 앞을 막을수 있습니다. 이 길에서 주저앉으면 자기 생의 앞자리를 지킬수 없습니다. 앞자리를 지키려면 한생을 용감하게 살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생의 길을 보람있게 걸어갈수 있습니다.》
《선생님, 있으나마나 하게는 살고싶지 않습니다. 늘쌍 앞자리에 서야 하는 전기공학의 길을 언제나 용감하게 걷겠습니다.》…
정준하는 최장근의 주름진 얼굴을 아픈 눈길로 바라보았다.
《저는 지금도 지배인동지가 가르쳐준 그날의 말씀을 잊지 않고있습니다.》
최장근은 담배 한대를 또 뽑아물며 흐려진 기분으로 응수했다.
《글쎄 내가 그런 말을 했겠지. 그땐 가르치는 사람이였으니까.》
《지배인동지는 지금껏 도안의 전력공업을 지켜선 드센 일군으로 일해왔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그렇지 못하다는거겠지. 옳아, 나이에 정비례하는 정열은 없다는걸 새삼스레 느끼오. 이게 바로 로쇠겠지.》
《지배인동지, 우리 다같이 가양도송전선건설을 또 한번 억세게 내미는 일군이 됩시다. 믿습니다.》
이어 정준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나가려 할 때 지배인이 잊었댔다는듯 서둘러 조형례국장이 왔다갔다고 알려주었다.
《그렇습니까, 무슨 일루?…》
《기사장에 대한 일때문에 우정 들렸다 갔소. 동무가 한해쯤 외국에 다녀왔으면 해서 그러더구만. 물론 이건 국장의 결심이 아니요. 성의 의견이요.》
《그건 무슨 갑자기…》
정준하는 어리둥절한 눈길로 최장근의 언덕이마를 올려다보았다.
지배인은 무표정한 낯빛을 짓고 뒤말을 이었다.
《그런 일은 갑자기 제기되는 법이요. 소문을 내면서 하는 일이 아니니까.》
지배인은 조형례국장이 하고간 말을 그대로 옮겼다.
정준하는 별안간 생각지 않던 일이여서 쓴지 단지도 가늠되지 않아 흥심없는 표정으로 그저 들을만 하고 서있었다.
최장근은 그의 덤덤한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다가 슬쩍 물었다.
《왜 말이 없소? 한해쯤 넓은 세상을 돌아보는것도 누구한테나 다 차례지는 행운은 아니요. 기사장이 전기기술에선 수재로 꼽히는데 리론만이 아니라 실천적경험도 많이 쌓았고 외국어까지 잘해서 뽑힌거지. 다 제 복이요.》
《몇명이나 간답니까?》
《그런건 딱히 찍어말하지 않더구만. 갔다오면 또 수도에서 살게 된다니 그것도 바람직한 일이구. 하여튼 복이 굴러들어온것이니 잘 생각해보오.》
정준하는 문득 지배인은 나를 내놓는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있는지 알고싶어 거기에 은근히 마음이 씌여졌다.
《전 그저 지배인동지가 가라면 가고 말라면 말겠습니다.》
기사장이 넘겨짚는 소리라는걸 알았는지 지배인은 허허 웃고나서 한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그건 그렇게 피동적으로 행동하는게 아니지. 자신의 일인것만큼 자신이 결심해야지. 난 아까 국장동무한테 기사장을 보내지 못하겠다고 딱 잘라 말했소. 그 근거는 몇가지 되오.
정준하가 여길 떠나면 이 도송배전부라는 큰집은 빈집처럼 휑뎅그렁해지겠드란 말이요. 그러면 내 염통을 뽑아준것 같아 어떻게 살아. 그래서 딱 잘랐소. 국장이 간 다음 다시 곰곰히 생각하니 내가 잘못말했다는걸 깨달았소. 이를테면 내 욕심만 부렸거던. 본인의 생각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제 주장대로 했으니 이런 관료주의, 주관주의가 어데 있소.
그래서 나를 되게 탓했지. 그렇지만 이제라도 늦지는 않았으니 기사장이 결심을 잘하오. 내가 조국장한테 전화로 낮에 한 말을 취소한다고 하면 되니까.》
정준하는 지배인의 솔직한 말에 가슴이 찌르르해짐을 느꼈다. 그는 생각해보겠노라고 하고 기사장실로 왔다.
이날 퇴근길에 오른 그는 고개를 수굿하고 터벅터벅 걸었다. 갈래많은 생각의 곬을 헤매다가는 마주오는 사람과 이마를 찧을번 해서야 고개를 들며 《미안합니다.》 하고 비켜가군 했다.
내가 도송배전부를 떠난단 말이지. 하지만 왜 그것이 내것같지 않아 가슴이 무거울가. 영예로운 소환은 누구나 출세라며 부러워한다.
과연 그럴가. 소환이니만큼 내가 여기를 떠난다고 해서 누가 시비할 사람은 없을것이다. 외국에 나가 국가일을 더 잘하고 돌아오면 그것 또한 인생의 가치를 느끼는 락이 아니겠는가.
정준하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외국에 가서건 조국에서건 국가일을 잘하면 그만일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기사장으로서의 할일이 얼마나 더 많은가.
또 지금 얼마나 좋은 사람들속에서 일하는가. 아까 지배인이 하던 말이 다시 고막을 울려주는듯 했다.
내가 떠나면 도송배전부의 큰집이 휑뎅그렁해질거라고 했지. 자기 심장을 떼주는것과 같다고도 했지.
이 떠난다는 사실을 장유상당비서가 알면 또 얼마나 섭섭해할가.
우리 집사람이 앓는다고 지배인, 당비서가 기울여준 그 정성은 얼마인가. 정에 울고 정에 녹고 정으로 사는게 인간이 아닌가. 그런 정을 가른다면 나한테 무엇이 남을게 있는가.
더구나 당비서가 오늘 명산포에 가보고 가양도송전선공사에 대한 결심이 흔들리지 말것을 기대하고있다는것을 알면서도 그 모든것을 팽개치고 훌쩍 가버린단 말인가.
내가 가면 틀림없이 그 공사는 유야무야하게 되고말게다. 아직은 누가 결심할 사람이 없다. 지배인도 그 공사만은 시기상조라고 머리를 젓는다. 그렇다고 훌 줴버리고 시끄러운 일들의 구속에서 벗어나는것을 다행스럽게 여길수 있겠는가.
정준하는 자기의 소환문제를 더는 없었던것으로 생각하자고 마음먹었다.
그가 집에 들어서니 안해 백순옥이 마중나왔다. 가방을 받아주며 왜 늦었는가 다심하게 물었다. 이어 부엌에 가 저녁상을 차려가지고 들어왔다.
열흘전에 퇴원한 안해의 병이 차차 호전단계에 들어가는것이 눈에 띄우게 알리여 정준하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안해도 기분이 피여나 활기로와졌다. 아마도 가막조개치료법과 팥치료법이 은을 내기 시작하는것 같았다.
생각할수록 지배인과 당비서가 고마왔다. 우리 집사람을 위해 그토록 수고를 아끼지 않은 사람들… 나는 일에만 정신이 빠져 돌아가면서 당비서, 지배인이 그렇게 관심해주고있는줄을 꿈에도 몰랐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서도 지배인을 만나 고맙다는 인사를 했지만 참말 생각할수록 내가 좋은 동지들속에 있다는 긍지가 커진다.
오늘 출근하여 가양도로 나가기 전에 당비서를 만나 고맙다는 인사를 했을 때 장유상은 사람좋은 얼굴에 웃음을 지었었다.
《기사장동무야 언제 제 집사람 생각할 형편이 됐소. 앓는 안해를 미처 돌봐주지 못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소.》
《글쎄 어쩌면 두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가지구 그렇게…》
《허― 나도 지배인동무가 그런 생각을 하고있는줄을 몰랐지요. 하긴 같은 의사한테 물었으니 처방도 같을수밖에… 아무튼 뭐 가막조개량은 많을수록 좋다니까 잘된 일이요. 신심을 가지우. 차차 낫게 될게요.》
《집에 오니까 집사람이 너무도 고마와서 눈물을 흘리더군요.》
지난 월요일 최장근지배인이 가막조개 한마대를 마련하여 탁수환이한테 보냈을 때는 점심녘이였다.
장유상당비서가 가막조개 한마대와 또 팥 한자루를 같이 묶어보낸것은 그날 아침이였다. 당비서도 그 며칠전에 백순옥의 병상태를 알아보고 일요일 저녁에 그것을 마련하여 손달구지에 실어보냈다.
아주머니가 직접 손수레를 끌고 기사장집 대문앞에 가서 기다렸으나 밤늦도록 병원에 가있는 경애가 나타나지 않았다. 할수없이 옆집할머니한테 맡기고갔다고 한다.
다음날 경애가 병원정문에서 지배인을 만난 후 집에 오니 할머니가 그것을 전해주더라고 했다. 이어 그날 점심때 탁수환이가 또 지배인이 보내는 가막조개 한마대를 가지고왔었다.
그날부터 경애는 어머니를 병원에서 다시 데려내다가 가막조개치료법을 들이댔다. 한편 팥이 또 간치료에 특효가 있어 그것을 삶아 장복시켰다. 그것이 그토록 크게 은을 낼줄이야.… 정성이면 하늘도 감동한다더니 그래서 정녕 병도 수그러들었는지.…
정준하는 헌헌한 어성으로 안해에게 물었다.
《당신도 저녁을 안 먹었소?》
《혼자 무슨 재미에 밥을 먹어요.》
《경앤 어델 갔게?》
《오후에 탁구경기 떠났어요, 소조원들을 데리구. 이번엔 뭐 함흥에서 한대요.》
소년회관급 탁구소조원들의 경기가 자주 조직되였다. 도에서도 하고 중앙에서도 하고, 특히 전국적인 탁구소조원들의 정일봉상쟁취를 위한 경기는 이만저만 치렬하지 않았다.
경애는 소년회관 탁구소조지도교원으로서의 자질이 전국적으로도 우수한 축이여서 전도유망한 국가선수후비들을 키워내는데 큰몫을 하고있었다.
백순옥은 식사량도 늘어 지성적으로 생긴 얼굴에 화기가 점점 피여나는것 같았다.
정준하는 마음이 가벼워져 밝은 웃음을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