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 회) 

48. 불을 놓아 익은 밤알을 줏다

 

궁예는 복잡한것을 싫어하고 단순한것을 좋아하였다. 젊은 혈기탓이기도 하려니와 기질적으로 그러했다. 단순한것을 좋아하는만큼 한번 새롭게 알게 된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웬만큼 그럴듯해보이면 그대로 믿어버렸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이란 있을수 없다고 여겼으며 자기 아닌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는것조차 미워하였다. 좋은 말로 하면 대가 있는것이요, 나쁜 말로 하면 고집이 센것이다. 《하슬라쪽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고 고마가 말했을 때 궁예가 옳다고 생각한것은 고마의 속심을 다 헤아리기때문이 아니였다. 거꾸로 그때 궁예는 엉뚱하게 고마와 다른것을 생각했다. 고마가 바로 하슬라쪽이 옛 고구려사람들의 기질이 다른 곳보다 더 강건하게 살아있기때문에 신라에 반역하는 경우 쉽게 세력을 모을수 있다고 타산하였다면 궁예는 하슬라쪽이 동쪽이라는 그 한가지만을 생각하였다.

동쪽은 사내, 임금, 밝은것을 대변하며 반대로 서쪽은 녀자, 신하, 어두운것을 대변하기때문에 동쪽인 하슬라쪽으로 가는것이 궁예에게 마음이 들었다. 임금이 되여 신하를 다스린다는 속심이 진하게 내보이는 판단이다. 이런 궁예에게 고마와 신통히 비슷한 소리를 하는 석남사 주지의 말은 큰 충격이였다.

짜고 하는 소리인가? 그런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리치란 아무쪽에서 보든 한곬으로 흐른단 말인가. 아, 그렇단 말인가. 하슬라를 쥐기 위해서는 주천을 먼저 타고앉아야 한다. 북원에서 진산 치악산너머 코를 맞댄것이 바로 주천이다. 하슬라를 궁성에 비한다면 결국 주천은 궁성의 대문이다. 이 대문을 뚫고 들어가지 않으면 궁성의 핵심인 명주(강릉)로 가는 길을 열수 없다. 설사 에돌아간다 해도 그것은 몰래 담장넘어가는 격으로 된다는것을 궁예는 타산하였다. 들어가기는 쉬워도 일단 일이 틀리면 빠져나오기 힘든것이다.

궁예는 고마와 석남사 주지의 말이 이런 맥으로 흐르고있다는것을 안다. 하지만 앞으로 일이 어떻게 번지겠는지 확신하지 못하고있었다. 고마와 석남사 주지가 동쪽 하슬라를 얻는데서 고구려부활이라는 불씨만 뿌리면 불길은 저절로 번지리라는것을, 그래서 궁예가 화전민이 그러듯 새땅을 쉽게 얻게 될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반면 궁예는 아직 자기 하나만의 운수를 믿는 어정쩡한 태도였다. 주천을 얻기 위해 그답지 않게 심사숙고하는것은 바로 그때문이였다.

생각 같아서는 쓸어버리고싶지만 정작 주천을 엿보니 꼭 그렇게만 될것도 같지 않다. 다 삭은 나무개비인줄 알았더니 뜻밖에도 생나무였다. 아직은 운수가 좋아서 량길과 북원의 젊은 패들이 자기를 믿어주고 따르지만 첫 싸움에서 실패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손해를 입는다면 차라리 안한것보다 못하다.

궁예는 될수록이면 가시에 찔리는 수고를 하지 않고 익은 밤알을 줏고싶었다. 그리하여 궁예는 치악산 석남사 주지를 찾아갔던것이다. 석남사 주지나 고마의 말이 옳다 하면서도 궁예는 엇드레질해본다. 일종의 심술이다. 이 심술로 하여 우둔하게 보였다.

주지는 이틀간의 말미를 두고 산을 내리였다. 무엇을 어떻게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디 한번 힘껏 해봅시다 하는 태도였다. 만일 주지의 노력으로 주천을 쉽게 얻을수 있다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힘으로 쓸어버리는것이다. 하긴 피흘리고 힘겨운 싸움을 해서 군사들의 신망을 얻는것도 괜찮다. 될려면 그렇게 되는것이 좋다. 앞으로는 그래야 할것이다. 어차피 너 죽고 나 죽고 하는 전쟁인 이상 피할수 없는 일이다. 다만 첫 싸움만은 멋있게 하고싶었다. 궁예는 그렇게 자기를 달래고있었다.

궁예는 량길에게 사람을 보내여 주지의 말대로 기발만들 천을 구해오게 하였다. 홍지초로 물들인 빨간 비단으로 기발을 만드는것을 보면서 궁예는 시답지 않아했다. 군사의 체모를 갖추는데는 그럴듯해도 천쪼박에 무슨 글이나 써붙이고 내건다고 해서 바라는걸 그렇게 쉽게 이룰가. 역시 글개나 들었다고 하는 주지나 고마는 그들대로 어리석은데가 있는것이다. 속세에는 오로지 힘만이, 팔다리로 울구어내는 힘만이 통하는 법인데…

그런 생각은 궁예를 으쓱하게 만들었다. 모를 때는 《배워줍쇼!》 하고 꺾어지는것이 궁예요, 일단 배우고나며는 제멋대로 고집을 세워 때로는 심술까지 부리는것도 역시 궁예였다.

궁예는 주지를 기다리며 치악산을 톺아올랐다. 동북, 서, 동남으로 뻗어간 산줄기를 보며 궁예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진산 치악산을 타고앉으면 이 주변을 마음대로 주무를수 있겠구나. 설사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신라 9서당 10정이 다 쓸어들어온대도 무서울것이 없겠다.

궁예는 또 서북쪽으로 바라보이는 북원을 내려다보며 묘하게 웃었다. 량길나으리는 치악산을 몰랐다. 알았다고 해도 오르지 못했을것이다. 이 치악산에 오른것은 궁예다 하고 외통눈이젊은이는 생각했다.

산은 사람을 굳세게 해주는 기운이 있었다.

이틀이 되는 저녁에 주지스님이 약속대로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다음날 궁예를 바래주었다.

《어디 한번 잘해보시오, 놀음이 아니라면…》

주지스님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궁예가 거느린 기마군사 백여명은 낮때가 되여 주천동구에 이르렀다. 붉은색바탕에 누런색으로 고구려란 글을 새겨넣은 기발이 앞에서 날리는데 먼곳에서도 뚜렷이 보였다. 궁예는 주천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들어 부대를 세웠다.

과연 주지스님의 말이 사실인가?

《백성들은 궁예와 싸우려 하지 않을것이다. 맞서는것이 있다면 멋모르는 벼슬아치들뿐이다.》

이랬든저랬든 거칠것 없다.

궁예는 명령했다.

《첫째, 무기를 들고 반항하지 않는 한 죽이지 말것! 둘째, 함부로 략탈하지 말것! 셋째, 백성을 다치지 말것!》

궁예는 칼을 뽑았다.

《나가자!》

주천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궁예가 거느린 기마부대의 요란한 말발굽소리로 드륵드륵 울렸다. 부딪치는 바람은 싸움의 기세를 돋구어주었다.

《쳐라!》 하는 웨침소리와 휘파람소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마치 창이 날아가듯 기마군사들이 주천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벌써 부락의 절반나마 돌입했는데도 막아서는자가 없었다. 놀란 닭들과 개들만이 소리지르며 달아날뿐이였다.

이상하다. 함정인가?

궁예는 말고삐를 채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함정같지는 않았다.

《싱거운데요, 대장?》

모흔이 투덜댔다.

《부락을 뒤져라!》 하고 궁예가 칼을 내리며 말했다.

《에이!》 하는 소리에 궁예는 고개를 쳐들었다.

낡은 까치둥지가 있는 나무에 아이가 앉아서 소리쳤다.

《좌상 할배랑 촌주집에 갔어요!》

궁예는 아이에게 씩 웃어보이고 촌주집쪽으로 말을 몰았다. 며칠전에 보았던 마을의 좌상이 젊은이들과 함께 궁예를 맞아주었다.

《어서 오시오. 석남사 주지스님이 다녀간 뒤로 당신이 오기를 기다렸소.》

좌상이 말했다.

《촌주는 어디 있소이까?》

《우리가 잡아놓았지요.》

좌상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궁예는 좌상의 안내를 받으며 촌주가 잡혀있는 곳으로 갔다. 동네 계수나무밑에는 촌주뿐아니라 여럿이 묶이여있었다. 촌주와 그 떨거지들이였다.

《선손을 쓰셨소이까?》 하고 궁예가 묻자 《이를테면 그렇지요. 어쨌든 주인은 우리니까요.》 하고 좌상은 수염을 쓸었다.

《이전에는 주인이 아니였소이까.》

《허, 꼬투리 달았다고 아무때나 사내구실 한답니까. 다 때가 있는 법이지요. 백성이란 그저 그런것이지요.》

궁예는 재미나 껄껄 웃었다. 좀 싱겁긴 하지만 하여튼 일은 잘된셈이다.

《촌주는 어떻게 하시겠소이까?》 하고 궁예가 물었다.

《젊은이들이 죽여치우려는걸 겨우 말렸소. 못되게 놀았으니까…》

궁예는 좌상의 말을 들으며 촌주를 내려다보았다.

사람이란 얼마나 가련한가. 권력에 붙어있을 때에는 벼락을 물었다고 으르딱딱거리더니 그게 우습게 달아나버리자 짚오래기만도 못한 물건짝으로 되여버렸다.

풍만난들 저다지 떨랴.

《놓아주시지요.》

궁예의 말에 좌상은 놀란 눈길을 들었다.

《살려두자는거요?! 저것들은 살려놔야 말썽이요. 차라리 죽여버리는게 낫소.》

《나라면 놓아주겠소이다.》

《저것들을 살려놓으면 래일 당장 자기 떨거지들을 끌고 와서 우릴죽이자고 할거요.》

《어디 그럴것 같소이까? 보시오이다. 다 늙고 맥이 없는걸!》

좌상은 한동안 궁예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였다.

《동네밖으로 쫓아내겠소.》

《그게 좋겠소이다. 죽지 못해 몸살이난 놈이 아니고서야 다시 올수 없지요.》

동네젊은이들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촌주를 몰고 갔다.

좌상은 촌주의 집을 헐어 궁예를 대접했다.

궁예는 자기앞에 차려놓은 별식들을 보자 그걸 모두 군사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게 했다. 그리고 자기는 다른 군사들과 꼭같이 음식을 먹었다.

《기발이 참 좋구려. 당신은 정말 고구려를 세우시려오?》

기발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을 바라보며 좌상이 물었다.

《난 신라라는 이 썩은 나라를 멸망시키고야말겠소.》

궁예는 술을 들이키고 대답하였다.

《우리에게 바라는것이 무엇이시오?》

좌상이 물었다.

《신라에 조세를 내지 말며 부역도 안하는것이요. 그리고 북원을 치는데 끼우지 않으면 되는것이지요.》

《그건 걱정마시오. 이왕 마을사람들과 의논하고 일어났으니까. 그래, 앞으로 대장은 어떻게 하려오?》

《산불을 놨으니까 불따라 가는것이지요.》

《우리 젊은이들이 당신을 따라가겠다던데…》

《그건 좋소이다.》

《우리 젊은이들을 숫보지 마시오. 그래뵈두 한다하는 사람들이요.》

《알고있소이다. 더욱 좋지요.》

주천은 명절날처럼 흥성거렸다.

하루밤 지낸 궁예는 이튿날 부대를 다시 모았다. 그리고는 나성(녕월근방), 울오(평창), 어진 등의 고을들을 차례로 휩쓸어나갔다.

주천에서 그러했듯이 하루 내지 이틀건너 한 고을씩 습격했다. 그때마다 고을의 벼슬아치들을 살려주어 달아나게 하고는 그뒤를 쫓는 방법으로 습격했다. 궁예는 토끼몰이사냥을 하고있었다. 고구려기발을 든 궁예부대가 습격하는 마을마다 고을마다 백성들은 아직 어정쩡한 눈치로 바라보긴 하였지만 맞서려고는 하지 않았다.

소문은 날개달린것처럼 사방으로 퍼져갔다. 궁예는 옛 6정의 하나였던 하서정이 자리잡고있는 명주(강릉)를 노리고 그 주변의 고을들을 하나씩하나씩 손에 넣는것이였다.

궁예의 의도를 알고 기뻐한것은 고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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