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 회) 

40. 왕륭의 그늘

 

신라라는 나라는 뼈다귀를 아주 귀하게 여기였다. 뼈로 사람의 귀하고 천함을 가리여 벼슬등급을 정하였다. 성골은 임금이다. 뒤로는 진골도 되였지만 하여튼 당시 고귀한 뼈는 성골이 으뜸이다. 진골은 벼슬 첫번째 이벌찬으로부터 다섯번째 대아찬까지인데 이들이 나라의 기본뼈다귀였다. 진골들은 옷도 자주빛옷을 입는다. 옷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그에 대해서 아주 웃기는 이야기가 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글이다.

《신라초기의 의복제도는 색체에 대한 고찰이 불가능하다. 제23대 법흥왕때 처음으로 6부사람들의 복색존비제도를 정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오히려 동이의 풍속을 유지하였다. 진덕왕 2년에 김춘추가 당에 가서 당의 의식에 따르겠다고 요청하였다.

당 태종이 이를 허락하고 의대를 주었다. 김춘추가 돌아와서 이를 시행하여 우리의 풍속을 중국의 풍속으로 바꾸었다.

문무왕 4년에는 또한 부인의 의복제도를 고치니 이후로 우리의 의관이 중국과 동일하게 되였다.

우리 태조(왕건)가 천명을 맡은 후에 국가의 모든 법도는 대부분 신라의 옛 법도를 많이 따랐으므로 조종과 상류 남류의 의복도 대개 춘추가 당나라에서 알아왔던 옛날제도일것이다. 내가 세번 중국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우리일행의 의관이 송나라와 다른것이 없었다. 한번은 조회에 들어가다가 너무 일찍 도착하여 자신전정문에서 있었는데 어떤 합문원(闔門員)이 와서 <누가 고려사신이냐?>고 묻기에 <내가 고려사신이다.>라고 말하니 그가 웃으면서 간 일이 있었다. 그리고 송나라사신 유규, 오식이 와서 사관에 묵고있을 때 연회석상에서 우리 옷차림을 한 기생을 보고 섬돌우로 불러올려 소매넓은 옷과 색실띠와 긴치마를 가리키면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모두 중국 3대의복인데 지금까지 여기에서 입고있을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지금 부녀의 례복도 당나라의 옛 제도임을 알수 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의 감정이 어떠했는지 드러난다. 사기라고 하여 일체 감정을 섞지 않았지만 외국사신이 입은 옷이 저희 나라의 옷과 꼭같은것을 보고 《웃었다.》고 한 까닭을.

우쭐했나, 쑥스러웠나? 아마 창피스러웠을것이다. 그나저나 외국사신인데 잰내비처럼 흉내를 내다못해 털까지 같으니 꼭 찝어 말하면 말가죽을 쓴 잰내비같았을것이다.

참으로 신라의 김춘추는 후대를 위해 《거룩한》일을 해냈다. 조금 더 욕심을 부려 옷은 물론 그 뼈까지 중국의것을 모방하고말지 왜 뼈는 또 성골, 진골 그대로 놔두었을가?

하긴 그까짓 옷쯤이야 뭐 남의 나라의것을 입은들 뭘 하랴. 내가 살아남기 위해 부모도 형제도 범의 아가리에 밀어넣는 판인데, 그러면서 망하고…

하여튼 진골들은 옷도 자주빛옷을 입는다. 여섯번째 아찬으로부터 아홉번째 급벌찬까지는 6두품이요, 나머지는 5두품이요 뭐요 한다. 6두품은 비의라고 붉은 비단옷을 입고 5두품은 푸른옷이요, 4두품은 누런옷이다.

한주 송악의 왕륭은 신라골품에서 여덟번째 가는 사찬벼슬을 받았으니 마땅히 붉은 비단옷을 입게 되였다. 홍지초로 물들인 붉은 비단옷은 누구나 입는것이 아닌것으로 하여 위세가 대단하였다.

임금이 있는 서울이라면 몰라라 신라 9주에서도 제일 멀고 편안치도 않은 곳으로 소문난 한주에서 사찬이면 어디냐. 뜨르르하다.

소문에는 한주 우두머리인 도독도 송악의 왕륭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멋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바로 왕륭이 6두품들이 입는 붉은 비단옷을 걸쳤기때문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런데 왕륭은 그 공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벼슬아치옷을 입는걸 보기 드물었다. 왕륭은 여느때는 백저포옷을 입었다. 그러니 왕륭이란 사람은 그 관복을 싫어하는게지.

왕륭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있는것은 그가 사찬이기때문이 아니라 재물이 많은 부자이기때문이다. 왕륭은 패강(례성강)을 중심으로 한 백리아근에 손꼽히는 부자다. 그의 세력은 혈구(강화), 아리수(한강), 칠중하(림진강) 중하류까지 뻗치고있었다. 왕륭은 백명나마 타는 큰 배를 여러척 가지고 바다건너 당나라와 장사하고있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장사하는지 알고있는 사람은 많지 못했다. 왕륭은 물론 그아래 사람들도 거기에 대해서는 일체 돌부처입이다.

바다물이 적게 나가는 조금때가 되면 왕륭이 송악에서 영안성으로 나오군 하였다.

왕륭이 영안성에 온 다음날인 두무날에 큰 배 한척이 부두로 들어왔다. 성에서 배를 바라보던 왕륭은 천천히 성문을 열고 부두로 나갔다. 부두는 바로 성밑에 있었다. 집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을 거느린 왕륭이 부두에 닿았을 때 이미 배는 계삭을 말뚝에 매고 배에 오를수 있게 넓은 발판을 드리웠다.

그 발판을 타고 키는 그리 크지 않으나 날파람있게 생긴 사람이 내려왔다. 허리띠를 바싹 죄여서 그런지 어깨가 넓어보였다. 나이는 40아래로 보이는데 이마살을 찌프리고있는것이 별스러웠다.

왕륭은 꼼짝않고 그를 지켜보고있었다. 왕륭앞에 이른 배군은 입술을 우습게 놀리였다. 뜻밖에 그의 찌프린 눈섭밑으로 부드러운 빛이 흘러나왔다.

《편안하셨소이까?》 하며 그는 허리를 굽혔다.

왕륭은 그저 고개를 끄덕했다.

《별탈없나?》

《예.》

왕륭의 다물렸던 입술에도 웃음이 가볍게 피여났다. 배군은 다시 돌아서서 갑판으로 향했다. 왕륭이 그뒤를 따랐다. 갑판에서 기다리던 수염이 더부룩한 두 배군이 왕륭을 맞이하였다. 왕륭은 잠시 갑판에서 이물과 고물쪽을 보고 이어 내리워진 돛이며 돛줄, 기둥, 배의 다락을 훑어보았다.

《잘 되였나?》 하고 왕륭은 무심하게 물었다.

《선창에 있소이다.》

배군이 대답하였다.

옆에서 듣는 사람은 무슨 소리하는지 동에 닿지 않는것이다. 왕륭과 어깨넓은 배군은 저희들끼리 속생각을 주고받는것이였다.

눈을 찌프린 배군은 다른 배군들에게 눈짓하여 떨어지게 하고 왕륭과 함께 선창으로 내려갔다. 상자들과 쌓인 물건들이 선창에 있었다. 배군은 등불을 켜고 앞장에 서서 왕륭을 안내하였다. 선창구석에 이르러 손으로 상자를 더듬어보더니 등불을 내려놓고 우에 놓인 상자를 내리웠다. 세번째 상자의 덮개를 열어놓았다. 왕륭은 배군이 비쳐주는대로 상자에 다가갔다. 물건들을 내려다보았다.

배군이 설명해주었다.

《이 공작새깃과 비취털은 나라에서 성골출신의 녀자들만 사용할수 있다고 하는데 무슨 목도리 같은데 쓰인다 하오이다. 그리고 이 바다거북껍데기는 머리빗 만드는데 쓰이는데 이것들은 다 부르는게 값이오이다. 벼슬개나 한다는 사람이라면 오금 못쓰는것이니까요. 산동반도 동주 적산초에서는 쉽게 구할수 없는것들이오이다. 이런것들은 저 당나라 남쪽의 양주 같은데서 사라센상인들과 거래를 터야 얻을수 있는것들이오이다.》

왕륭은 듣기만 하였다. 그러나 왕륭은 이런 물건들이 어떻게 매매되고있는지, 또 신라의 서울에서 어떻게 팔리는지 잘 알고있었다. 왕륭은 비취털과 윤기흐르는 대노 즉 바다거북껍데기를 보며 얼핏 녀왕과 서울을 생각하였다.

며칠전 한주 도독이 왕륭에게 서울에 번살이보낼 사람을 맞추어보라는 소리가 있었다.

번살이란게 어디인가 황제를 숙위한답시고 후국 또는 속국들에게 왕의 자제를 보내는걸 본딴것 비슷하다. 그것처럼 주에서 아전으로 뽑혀 서울에 올라가 일종의 대표격으로 왕경에 머무르는 이 번살이를 도독이 나에게 부탁하는것은 무슨 뜻일가? 그저 해보는 소리인가 아니면 엉큼하게 뒤배를 만져보자는것일가?

왕륭이 보물들을 보면서 녀왕을 떠올린것은 그것때문이였다. 녀왕도 서울에 번살이보낼 사람을 왕륭이 뽑아보내는것이 리득이 될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을것이다.

누구를 보낸다? 아직 맞춤한 사람은 없다.

《자단과 침향은 어찌되였나?》 하고 왕륭이 물었다.

《그건 다음번에 마련하기로 했소이다.》

《일 잘했네.》

왕륭은 다시 갑판으로 나와 배군에게 물었다.

《그래 오가는 길에 칼치들이 없던가? 요즘 배길엔 칼치들이 성하다던데…》

해적을 념두에 두고 하는 소리이다.

배군은 히죽이 웃었다.

《그거야 바다기슭이나 따라다니는치들에게나 있겠지요.》

왕륭은 배군을 돌아보며 웃었다.

그때 당나라와 통하는 바다길은 크게 두 길이였다. 하나는 당은포에서부터 배길로 서해를 가로질러 또는 서해안을 따라 북으로 가다가 료동반도 남쪽으로 해서 산동반도 등주에 상륙하는 길이고 또 하나는 령암군에서 해상으로 흑산군도를 거쳐 서해를 가로질러 양자강하구일대로 가는 길이였다. 그런데 서해를 가로질러 당나라로 가는 배길은 누구나 가는 길이 아니였다. 그 배길은 그때 와서 비로소 열린것이다. 왕륭의 배들이 례성강에서 서해를 직접 건너 산동반도 등주로 가는 배길을 열었다고 볼수는 없지만 하여튼 이때까지 서해안기슭을 따라 당나라로 가는 배길에 비하면 상당히 진취적이고 대담한 일이였다. 그만큼 위험도 많았고 리득도 많은것이다. 장사란 리득을 보아서 하는짓인데 리득을 보는것은 꾀와 모험에 따라 그 작고 큰것이 비례하는것이다. 편안한 속에서 편안하게 차례지는 리득이란 있을수 없는것이다. 례성강에서 직접 산동반도로 가는 배길은 위험이 있었지만 바다길에 의례히 있는 해적떼들의 습격을 받지 않는것 또한 유리점이 있었다. 그때까지 해적들은 주로 바다가기슭에 있는 만이나 반도의 음침한 곳에 거점을 두고 배들을 습격하군 하였다. 아직 해적들이 먼바다까지 나가지는 못했다. 하긴 왕륭이 해적을 무서워한것은 아니였다. 왕륭의 배군들은 오히려 해적들이 무서워할 정도로 싸움에 능한 사람들이였다.

왕륭은 자기의 배군들을 특별히 그런 사람들로 꾸렸다.

《물건들을 어떻게 할가요?》라고 배군이 물었다.

왕륭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푹 쉬게, 다같이… 성안에 푸짐히 차려놨네. 그러고나서 보세!》

배군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왕륭은 물건을 한주 도독에게 팔것인가, 직접 서울에 가져다 팔것인가 두드려보기로 하였다. 때는 재물불구기에 딱 좋다. 나라가 어지러운 이때야말로 재물을 늘이는데 기가 막히게 좋은 천부의 기회다. 누구나 좋은것은 아니다. 왕륭,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꼭 알맞는것이다. 왕륭은 자기에게 좋은 때가 지금 봄날의 해볕처럼 발볌발볌 오고있으며 더 좋은 때가 오게 된다는것을 믿고있었다. 그런 때일수록 반대켠을 봐야 한다. 위험은 바로 얼씨구 좋다 하는 그때에 마련되는것이다. 왕륭은 자기에게 드리워지는 그늘이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감촉하고있다.

무엇인가? 외사정의 눈초리였다.

외사정이란 무엇인가? 문무왕 13년(673년)에 지방관리들을 감찰하기 위해 내온 벼슬이다. 외사정은 매개 주에 2명, 매 군에 1명씩 두고 지방관리들의 동향, 직권람용, 탐오행위 등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서울에 있는 외사정들과 같은것이다.

의결 1명, 정찰 2명, 사 4명이 배치되여있다는 내사정이 중앙의 관리들을 감시하는 기관이라면 외사정은 지방의 관리들을 감시하는 기관이다.

왕륭은 보신에 덜퉁한 사람이 아니였다. 오히려 남달리 보신에 감촉이 예민한 사람이였다. 그런 왕륭이 제일 경계하는것은 외사정이다. 물론 외사정 그자체가 무서운것은 아니다. 사찬벼슬이 있는 왕륭에게 있어서 나라의 벼슬아치들을 능히 주무를수 있는 자신심이 있었다. 주의 도독과 그아래 주조, 장사는 물론 군의 태수, 현의 소수와 현위, 현부수까지도 재물이라면 꼼짝 못하는 물건들이다. 요즘에 들어서는 더욱 그렇다. 나라가 망하는것은 바로 관리들부터 썩기때문이다. 외사정도 다를바없다. 그런데 한주의 외사정은 좀 달랐다. 송악 외사정이 지껄이는데 의하면 한주의 외사정이 보통 사나운 뱀눈깔이 아니라 한다. 왕륭은 어쩐지 주의 외사정이 자기를 노리고있다는 느낌을 털어버릴수 없었다. 왕륭이 외사정의 눈초리를 두려워하는것은 장사일때문이 아니였다. 범이 날고기 먹는줄 누가 모르냐. 왕륭이 바다건너 당나라와 장사한다는것은 벌써 비밀이 아니다. 그런 일이라면 외사정은 고사하고 임금의 눈초리도 왕륭에게는 꿈만하다. 해보았자 왕륭에 대해서는 버선신고 발바닥긁기다. 왕륭에게 두려운것은 다른것이였다. 왕륭은 북쪽의 송악을 바라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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