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9 회)
39. 송악으로 간다는 방립쓴 사나이 둥글소 뿔빠진다는 복더위에 문현재를 넘어 널고개쪽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대나무방립을 쓰고 등거리적삼에 잠뱅이를 입었는데 어깨에 멘 막대기에는 보짐인지 뭔지 모를게 데룽거렸다. 차림새를
보아서는 농군같은데 농군이라면 손에 호미나 낫 같은걸 쥐였거나 하다못해 꼴짐을 들었겠는데 그런것도 없고 워낙 농토산이냄새는 아예 없다. 그럼 나그네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먼길 가는 나그네라면 의례히 로자로 쓰일 물건따위나 부담짝이라도 있을법한데 그런것도 없다. 막대기에 매달린 짐인지 뭔지 한것도 깐깐한 눈길로 보면 벗은 덧적삼과 바지를 둘둘 말아싼것이다. 방립을 푹 내려쓰고 걸어가는 사나이는 아무래도 수상한데가 있었다. 낟알 먹고사는 사람이라면 내가나 나무그늘에서 부채질해가며 쉬고있을 때라 길가는 비여있어 더욱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더위에 푹 찌들어 누구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문현재를 넘을 때 한사람이 그를 불러세웠다. 《이봐!》 호기있는 소리는 길섶에서 떨어진 나무아래서 울렸다. 방립쓴 사나이는 그냥 걷는다. 《이봐!》 하는 소리가 다시 울렸다. 멎었다. 방립을 들치고 그쪽을 보았다. 웃통을 벗고 잠뱅이만 걸친채 오동나무잎사귀로 부채질하는 사람이 보였다. 《나를?》 하고 방립쓴 사나이가 물었다. 《그래.》 그늘아래 사람이 오동나무잎을 멈추며 말했다. 방립쓴 사나이의 눈길은 나무가지에 걸어놓은 옷에 꽂혔다. 웃옷의 깃이 누런색인데 옆에는 같은 색의 허리띠가 걸려있었다. 방립의 눈이 꼿꼿해졌다. 옷깃과 허리띠를 보아 남천정이나 골내근정(신라 9주에 배치된 부대인 10정, 남천정, 골내근정은 한산주에 있었다.)의 군사가 분명하다. 재를 지키는 군사인가 아니면… 한사람뿐인가, 또 다른 사람? 방립의 눈길은 재빨리 주위를 훑는다. 《왜 그러시우?》 하고 방립은 어수룩한 투로 물었다. 《어, 딴게 아니고 어디로 가는 길손이요?》 그늘에서 나는 소리였다. 《송악 가오이다.》 《송악? 어느 송악말이요?》 《어디 송악이겠소이까. 한주 송악이지요.》 《한주 송악이면 여기서 못해도 400리길인데 거길 간다는거요?》 《그렇소이다.》 《거, 베차시겠다. 쯧쯧, 이 더위에… 다리쉼이나 하고 가지 그러지.》 《쉬여갈 길이면 좋겠소이다.》 《어이구, 그래도…》 방립은 그쯤 끝난것으로 알고 다시 걸음을 뗐다. 《서라! 뭔가 수상하구나. 다시 보자!》라는 소리가 막 터져나올듯싶어 방립은 조금 긴장해졌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재를 넘어서 그늘의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되자 방립쓴 사나이는 후- 하고 길게 숨을 내쉰다. 무능해진 10정의 군사들이라 해도 어디까지나 군사는 군사다. 그런 군사가 방립쓴 사나이를 어쩌구저쩌구 따질 대신 오히려 땡볕에 길 축내는걸 측은해하는셈이니 다른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널고개를 넘을 때까지 걸치는 사람 하나 없었다. 있다면 아까 군사처럼 동정하는 눈길로 바라보거나 저런 미련한 놈 봤나 하는 투로 혀를 차는 사람들이였다. 송악 간다는 방립쓴 사나이. 그는 누구인가? 고마였다. 고마는 턱에 맺히는 땀방울을 씻을념도 못하고 줄곧 걷기만 했다. 먼지가 미투리끝에서 풀썩풀썩 피여올랐다. 왕골댄 방립밑으로 줄곧 앞만 보며 걷는 고마는 오갑산에서 헤여진 궁예에 대해서 생각하고있었다. 기훤을 죽여버리겠다고 선불맞은 범처럼 펄펄 뛰던 궁예, 고마는 그의 등을 밀며 겨우 기훤의 소굴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기훤의 무리들은 피본
소파리떼처럼 검질긴데가 있었다. 어수룩하던것이 더 무섭다고 기훤의 졸개들은 궁예와 고마가 달아나기만 하는게 무슨 문둥이 좆잘라먹는 재미인지 내내 따라왔다. 그러다가 백족산어귀에 와서야 떨어졌다. 궁예와 고마는 그대로 내달아 오갑산에 들어서야 숨을 돌렸다. 《난생처음 꺾어져봤다. 저따위것들은 곱게 피하면 더 숫보고 달려들지. 파리잡듯 해야 하는건데…》 하며 하고싶은 밸풀이를 못해 달뜬 궁예였다. 《몇번 말해야 하겠소이까, 새벽이슬 차고 먼길가야 할 나그네가 동네개 짖는다고 개하고 싸울수야 없지 않느냐고. 남들이 보면 웃소이다. 글쎄, 개를 때려서 성풀이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피가 나와도 가려울 땐 긁어야 씨원한건데…》 하던 궁예가 숨을 눅잦히고 고마에게 물었다. 《이제는 어쩔셈이시오?》 고마는 선뜻 대답 못했다. 《이왕 이렇게 된바치고 북원으로 가야지?》 궁예의 말에 고마는 버릇처럼 고개를 끄덕이였다. 《북원으로 가시오이다.》 고마를 따라 고개를 끄덕이던 궁예가 고마의 말에 뚝 굳어졌다. 그의 한눈이 번쩍했다. 《무슨 말이 그렇소? 나 혼자 가라는 소리시오?》 《그렇소이다.》 《그렇다? 그럼 고마는?》 《저는 왕륭을 만나러 가야 할가 보오이다.》 《왕륭?》 궁예의 한눈이 더 커졌다. 그럴 때 보면 궁예의 하나만 남은 그 눈에 흰자위가 많다. 《또 송악의 그 사람?》 《그렇소이다.》 고마는 풀대를 씹으며 대답했다. 궁예는 고마를 뚫어지게 보고있었다. 고마는 궁예의 그 눈빛을 웃으며 받았다. 궁예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질투가 어려있었다. 그 눈빛은 차츰 입술로 번져갔다. 엷은 웃음이 피여올랐다. 그것은 고마가 왜 왕륭을 만나러 가겠다는지 다 안다고 하는 안도의 눈빛이 아니였다. 서리발이 돋쳐있었다. 믿지 않는데서 오는 그 웃음을 보자 고마의 속으로는 한줄기 찬 바람이 쓰윽 스쳐갔다. 이 야생말같은 궁예의 성격, 걸핏하면 성을 내기 잘하는 이 성격을 처음 당하는건 아니다. 이 성격을 잘 다스려야 한다. 떠도는 이리로 살다가 말 인생이라면 내버려두어도 될 일이지만 그렇게 살수 없는 고마나 궁예여서 지나쳐버릴수 없다. 궁예는 앞으로 꼭 큰일을 하게 된다. 그런 궁예에게 이 빌어먹을 성격이 곰팽이로 될수 있다. 무리를 거느릴 사람, 그에게 필요한건 어떤 재간이나 힘에 앞서 너그러움이다. 너그럽지 않으면 안된다. 리해하고 용서하며 물러설줄 알아야 한다. 물처럼 되면 아주 좋다. 두뽐도 못되는 가슴일지라도 바다와 같이 넓어야 한다. 나에게 오는것도 네 마음이고 떠나는것도 네 마음이다.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풀어놓지 않는다면, 그래서 진실로 마음이 내킨 복종이 없는 한 사람이 사람을 다스릴수 없다. 우두머리란 그래야 한다. 나에게 리득을 볼수 있게 하는것은
나에게 달렸지 너에게 달린것이 아니라는 배심이 없다면 결코 우두머리가 될수 없다. 고마와 궁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왕륭이란 사람 꼭 만나야 하시오?》 하고 궁예가 저도 풀대를 뽑아 입에 물며 물었다. 《그렇소이다.》 《언제 그런 생각을 했소?》 《왕륭이 내 몸값을 가져왔다는것을 알았을 때부터였소이다.》 《몸값? 그거야 내가 이미…》 고마는 궁예의 뒤말을 뻔히 알고있다. 몸값으로 말하면 이미 기훤에게 내가 물어주지 않았는가, 그러니 나와 함께 있어야 하는데 이제 왕륭이 몸값을 보냈다고 그쪽으로 쏠려? 하는거다. 《왕륭은 허술히 볼 사람이 아니오이다.》 하고 고마가 말했다. 《글쎄, 그렇다 해도 나와 함께 북원에 가서 자리나 잡은 다음에 찾아가도 되지 않으시겠소.》 궁예의 말투에는 어리광이 있었다. 이것은 궁예의 장점의 하나였다. 어린애의 칭얼거리는듯 한 그런것이 좋았다. 《달라!》하는것도 여러가지다. 상통에 표정없는 개는 꼬리를 슬슬 저어 주인에게 뜨물을 얻어먹고 말 못하는 아가는 칭얼거리는것으로 엄마의 젖을 얻어빤다. 빼앗긴다 하는 위압, 기분나쁜 그 요구를 시퍼래서 하는것보다 《으응, 달라, 달라.》 하고 흔들거리는데는 주면서도 웃고만다. 궁예에게는 그런 칭얼거림이 이따금 나타나군 하였다. 그것도 하나 어색하지 않게 말이다. 하여튼 궁예란 묘했다. 날뛰기 좋아하는 궁예에게 이런 어리광이 어떻게 아주 감촉 못하게 어울리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고마는 고개를 저었다. 《왕륭이 내 몸값을 지불해주었다는건 세상이 다 알게 됐는데 이제 수염씻고 달아나면 웃기지 않소이까. 그것도 그렇지만 앞으로 큰일하자고 해도 왕륭에게 손을 빌릴 필요가 있소이다. 걱정하지 마시오이다. 이 고마가 아무려면 궁예형을 저버리기야 하겠소이까.》 《뭘, 누가 그렇게 생각하나? 우리가 무슨 아낙네들이라고…》 궁예는 툭 터지게 웃었다. 고마도 좋았다. 궁예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데가 있다. 뛰여난 무예, 남다른 총명, 그것때문일가? 아니, 다른 무엇이 더 있다. 그런데 총명한 사람이 그러하듯 선입감도 있다. 그것은 약점이다. 때로는 그것으로 해서 망칠수도 있다. 그런 약점을 고쳐주거나 하다못해 당분간만이라도 억제시켜야 한다. 그러자면… 《북원에 가시면 신훤을 만날수 있을것이오이다.》 하는데 궁예는 딴소리를 했다. 《북원에는 언제 오시려오?》 고마는 잠자코 있었다. 삼찌듯 무더운 날씨에 길을 가며 고마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들였다 내뿜었다. 북원에 언제 오는가? 알수 없다. 궁예의 곁에 바싹 붙어서 일일이 그를 도와주는것이 나쁘지 않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닻을 올리고 돛을 걸었으니 바람이 불어야 한다. 그 바람을 어디서 불러온다? 송악의 왕륭이다. 고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왕륭을 만나보고야 알수 있다. 왕륭은 과연 나를 어떻게 맞아줄것인가? 고마는 궁예에게서 왕륭에게로 생각을 돌리려고 애썼다. 걸음은 더위에 지쳐 느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