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7 회)
37. 고인물은 썩기마련이다 북원은 북쪽으로 새섬바위, 길치 그리고 동쪽으로 고운치, 남쪽으로 백운탄, 서쪽으로 동화에 진을 치고 매 진에 사람을 배치하여 북원분지로 들어오는 길을 감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백여명의 기병을 두 대로 나누어 한 대는 모흔이 책임지고 새섬바위, 길치, 고운치를
순찰하게 하고 다음 한 대는 대검이 맡아 백운산과 동화를 순찰하게 하였다. 특별히 북원두령 량길이 그렇게 했다기보다 이를테면 젊은이들의 자위적인 발상이고 그것이 그대로 집행되고있는것이다. 궁예는 말타기를 배우자 순찰에 끼여들었다. 며칠은 모흔과 함께 또 며칠은 대검과 함께 말을 타고 다녔다. 그리고 어떤 날은 거의 2백리가
넘는 매 진을 다 돌아보기도 하였다. 궁예가 이렇게 힘든 기마순찰에 빠지지 않는것은 말타기를 숙련하는데도 있었지만 제딴의 속궁냥이 있어서였다. 궁예는 동서남북 북원을 에워싼 진들을 돌아보면서 이 북원의 지리적우점과 결점에 대해서 낱낱이 파악하며 장차 어떻게 할것인가를 깊이 생각해보는것이였다. 단순한
말타기도 아니요, 단순한 기마순찰도 아닌 보다 크고 넓은 궁리에서 하는 일이였다. 모흔과 대검은 그런 궁예를 비슷이 눈치채고있었다. 그러나 자기들로서는 따라설수도 없는 일이다. 차츰 궁예에 대해서 두려움을 품게 될뿐이였다. 그렇다고 질투한다든가, 위협 같은것은 하지 않았다. 그럴 틈이 없었다. 모흔과 대검은 서로 친한 사이였지만 요즘에 들어서는 차츰 사이가 벌어졌다. 붙어서 돌아갈 때는 몰랐지만 서로 부대를 거느리고 기마순찰을 따로 하게 되면서 두사람사이는 묘하게 벌어졌다. 그렇게 된데는 북원이 벌써
한해 남짓하게 뚜렷한 정부군의 공격이나 위협이 없다는데도 있었다. 말하자면 칙사 김직의 포학에 격분하여 들고일어났을 때의 열이 차츰 식어가고있었다. 궁예는 기마를 배우게 해준 무사안일한 이 몇달을 고맙게 생각하였다. 한편 나라에 《반역》한 북원이 오래동안 물에 물탄듯이 하루하루 지나는것을 폭풍전야의 정적으로 불안하게 여겼지만 대검이나 모흔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닥치는대로 싸우고 아니면 풀어놓는 비교적 단순한 젊은이들이였다. 그렇다고 하여 이런 흐리터분한 생활이
좋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뭔가 꼭 일이 날것이라는 막연한 예측은 하지만 알수도 없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기때문이다. 까짓거, 이러다 일이 터지면 또 그때 가서 보는거지 뭐 하는 생각이였다. 모흔과 대검이 때로는 서로 어울려 진들을 돌아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찌다 있는 일이고 차츰 제가끔 자기 부대와 휩쓸려다니였다. 이 두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며 자기 부하들에게 어떤 말을 하며 자기 맡은 구역을 어떻게 순찰하고있는지 잘 알고있는 사람은 궁예였다. 량길은 한번도 북원을 방어하는 진에 나가보지도 못했다. 관심이 없다고 해야 할지. 이런 량길에 대해서 두 편의 기마대는 내놓고 말을 하지 않지만 서로 좋지 않게 여기고있었다. 《우리가 북원을 지킨다.》고 처음에 젊은이들은 으쓱했다. 그러다가 차츰 해이되였다. 뭘 어떻게 하려는가? 알수 없었다. 그러니 맥이 났다. 《모흔! 대검을 한번 만나보게. 요즘 뭔가 눈치가 다른것 같아.》하고 궁예가 말을 타고 가면서 말했다. 모흔은 잠자코 있었다. 궁예는 모흔이 거느린 부하들도 달라져가고있다는것을 알았다. 모흔을 따르는 부하 쉰명가운데 겨우 열댓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래도 모흔은 말 안했다. 모흔도 왜 그러는지 알고있는 모양이였다. 《궁예형도 싫으면 순찰을 그만두구려.》하고 모흔은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비가 오려나?》 궁예는 모흔의 말을 못 들은체 하며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길치를 지나 고을치를 돌아보고 기마대가 집결하는 곳으로 가니 거기서는 대검의 패가 한창 격구를 하고있었다. 모흔의 패에서 떨어졌던 기마수들도 섞이여 좋아라고 뛰여다녔다. 그것을 보자 모흔의 이마살이 찌프러졌다. 《저 자식들이 순찰은 하고 저러나?》하고 중얼거리던 모흔이 말을 세우고 큰소리로 대검을 불렀다. 땀을 뻘뻘 흘리며 몽둥이로 가죽공을 몰고있던 대검이 말을 세웠다. 《못 들었어, 대검?》 모흔의 짜증섞인 소리였다. 《자식, 멱따는 돼지새낀가? 소리는 왜 쳐?》하고 대검이 웃으며 말했다. 《대검, 너 순찰했니?》 《했다.》 《거짓말, 내가 순찰가면서 같이하자고 할 때 찌푸둥해있었지. 요새 왜 그래?》 《그래 어쨌단거야, 모흔나으리.》 모흔이 눈을 부라렸다. 《자식아, 하라는 순찰은 안하고 격구나 하고있으면 어쩌자는거야?》 《야! 순찰은 량길장군보고나 하라고 해!》 《뭐? 너… 너 그게 무슨 주둥아리질이냐?》 《왜, 못할 소리를 했니?》 《이 자식, 너 죽고싶어그래?》 《죽고싶지 않아서 그런다. 순찰이고 뭐고 이제는 시끄럽다.》 대검의 뻣뻣한 말투에 모흔은 약이 올랐다. 모흔은 량길에게서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그는 그걸 잊지 못해 량길을 하늘처럼 떠받들었다. 《대검, 너 왜 그래?》 《몰라서 묻냐?》 《왼새끼 꼬지 말아!》 《왼새끼는 누가 꼬니? 너 정 모르겠으면 량길보고 물어보라. 그래 앞으로 어쩌자는거야, 이렇게 독안에 든 쥐처럼 돌아치다가 죽자는거야?》 모흔의 눈이 더욱 쪼프려졌다. 입술을 질긋이 깨물었다. 《대검, 너 날 알지? 감히 내앞에서 량길나으리를…》하며 모흔은 거칠게 숨쉬였다. 그러거나말거나 대검은 떠들었다. 《모흔, 난 널 모욕하고싶은 생각은 없어. 하지만 이 자식아! 너도 눈깔이 있으면 보겠지? 어디 말해봐! 들고일어난지가 언제인데 이렇게 진창에 빠진것처럼 꾸물거리고만 있으면 어쩌겠다는거야? 량길, 그
어른 말끝마다 고구려소리를 하던데 그래 이렇게 앉은뱅이놀음하는것이 고구려냐? 내 알기엔 그따위하고 고구려는 토끼와 범같이 다르더라. 이거야 어디… 뭐든 해야 할게 아니냐.》 모흔은 한마디도 대꾸를 못했다. 할 말이 없었다. 대검은 더 열이 올랐다. 《량길장군은 쥐새끼처럼 겁에 질려있어. 그 속심 다 안다. 그 늙은이는 우리와 달라. 이전부터 신라놈들의 턱에 붙어살던 촌주였어. 우리가 신라놈들을 내쫓으려니까 그게 무서워서 발발 떨고있는거지. 떨고만 있으면 좋게? 신라놈들이 다시 우리를 짓밟게 하려고 꿍꿍이를 하는거야. 내 말이 틀린다면 물어봐라. 여보게 친구들, 그렇지 않아?》 《옳아.》 장귀평이 소리쳤다. 대검의 말에 모여들었던 기마수들은 낯빛이 퍼렇게 변했다. 《장군에게 가서 따지자!》하고 누군가가 소리쳤다. 모흔의 뒤에 선 사람은 두서넛이다. 모흔은 대검과 그의 뒤에 몰켜선 기병들을 쏘아보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알만 해, 대검! 너 이제보니 대가리노릇 해보겠다는거지? 량길어른을 반대하게 꼬드기고서… 응?》 그 소리에 대검이 팩 돌아섰다. 《모흔! 너 나를 모욕하냐?》 《모욕은 누가 했어? 량길어른을 욕해서 나에게 똥물을 끼얹는건 누구냐?》 《너 그게 진심이냐?》 《거짓말하겠니?》 《좋다. 내 이때껏 친구라고 네가 눈꼴사납게 노는걸 보고도 참았다. 이젠 못 참는다.》 대검은 칼을 뽑아 두손에 받쳐 눈앞까지 올렸다. 모흔도 천천히 칼을 뽑아 그렇게 했다. 이럴 때 보면 집사정 시중 준흥어른이 한 말이 신통한데가 있다. 《저희들끼리 싸우게…》그렇게 된것이다.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 사나웠다. 모흔과 대검은 오십발자국정도의 거리로 떨어졌다. 이내 칼을 겨누고 박차를 가해 내달았다. 두사람의 칼이 맞부딪치며 아츠러운 소리를 냈다. 칼을 비껴뽑고는 상대의 목을 겨누고 찔러내고 후려쳤다. 그것은 목숨을 건 결투였다. 삽시에 격구장은 무시무시한 싸움판으로 변했다. 칼날이 바람을 가르며 울었다. 두필의 말이 요란스럽게 울부짖었다. 여느때 말타고 재주부리는데서 모흔을 당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대검도 만만치 않았다. 궁예는 처음부터 멀찍이 서서 팔짱을 끼고 구경하고있었다. 이런 일이 언제인가 터지리라 예감했다. 여기 북원에 와서 벌써 몇달동안 궁예는 량길이 소문과는 다르다는것을 알았다. 량길은 늙었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미리 예견하지 못하였기때문에 당황하고있었다. 그러다나니 적극적인 일은 벌리지 못하였다. 아직 달아난 귀족들에게 용서를 비니 어쩌니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고있다. 물론 조세를 모두 없애고 다만 군사를 먹일 량식만을 걷어들이게 하는것도 일이라면 일이다. 그것이 기본이 아닌데도 량길은 모른다. 아니, 모르는지 아니면 딴 생각을 하는지… 방비를 맡은 기병들에 대한것만 봐도 그렇다. 대검의 말이 틀린건 아니였다. 젊은이들은 무슨 일이든지 속시원히 부딪치기를 바라고있다. 그러나 량길은 그렇지 못했다. 뚜렷한 목적이 없는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대검이 모흔에게 한 소리는 마구 줴치는 소리도 있다. 량길이 신라치하가 다시 오기를 바란다는것은 지나친 말이다. 다만 조막손이 닭알만지듯 할뿐이지 량길자신이 엉큼한 수를 쓰는것은 아니다. 모흔과 대검의 싸움, 그것은 이 북원심리를 그대로 반영하는것이였다. 두 젊은이의 싸움은 더욱 치렬해졌다. 그러나 아무래도 대검이 모흔에 비해 약했다. 사람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친구가 되여 어울려다닐 때는 언제고 이렇게 또 죽기로 싸운단 말인가. 모흔이 차츰 대검을 몰아댔다. 대검은 가까스로 모흔의 칼을 피하고있었다. 모흔이 칼을 비틀어 대검을 공격하다가 번개처럼 칼을 휘둘러댔다. 위험하다! 아차하는 순간 대검은 몸을 뒤로 던져 위험을 피했다. 그런데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몸을 뒤번지던 순간 등자에서 발을 뽑아 모흔을 찼다. 뜻밖의 타격에 모흔은 말에서 떨어졌다. 대검이 말을 돌려 땅에 떨어진 모흔에게 칼을 겨누었다. 《너와 나는 친구였다. 그러나 량길을 놓고는 친구가 될수 없다. 어쩔테냐?》 《대검, 짧은 혀를 가지고 긴소리말아.》 《좋다. 날 원망하지 말아! 인심을 받들어 너를 친다.》 대검이 칼을 들었다. 해빛에 칼날이 번쩍이였다. 구경군들의 눈이 흡떠졌다. 《허억!-》 별안간 얼음장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대검의 칼이 허공에서 멎었다. 궁예가 어느새 달려들어 대검의 칼을 막았다. 《뭐야?!》 《대검, 그만하게!》 《뭐라구? 음, 너 외눈깔이… 너도 같이 죽고싶으냐?》 대검이 칼을 당겨 궁예를 내리쳤다. 궁예는 칼날로 대검의 칼을 막고 손목을 틀어 칼등으로 대검의 팔목을 쳤다. 대검이 칼을 떨어뜨렸다. 이걸 보고있던 대검의 패들이 모두 칼을 내들었다. 궁예는 빙그레 웃었다. 《내 말을 듣게!》 청높은 소리가 아닌데도 별스레 우뢰처럼 들렸다. 주춤해졌다. 《모흔은 의리있는 사람이네. 모흔이 량길장군을 옹호하는건 그에게서 은혜를 입었기때문이지 우리의 심정을 몰라서 그런게 아니네. 그래도 모흔을 죽여야겠나?》 칼이 내려졌다. 《대검, 어떤가?》 하고 궁예가 물었다. 대검은 한동안 우두커니 땅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쉬였다. 그리고는 모흔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모흔도 대검의 손을 잡았다. 《량길장군은 우리들의 심정을 알아주실거네. 여보게들, 그때면 우리 본때있게 싸워보자구. 친구들끼리가 아니고 원쑤들하고 말이야!》 궁예의 말에 모흔과 대검이 웃음을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