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 회)
제 1 편
용감한 사람
2
도소재지의 변두리를 따라가느라면 다박솔덮인 나지막한 산발들에 둘러싸인 한적한 지대가 나진다.
우불구불하니 막되게 자란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서있는 산말랭이를 타고내려오다 확 터져나간 넓다란 골안의 서쪽듬성이밑에 변전소가 자리잡고있었다.
굉장히 큰 변전소였다. 바로 여기에 대형변압기 1호, 2호가 위엄있게 틀고앉아있다.
북쪽의 거악스러운 산발들을 타고 우줄우줄 뻗어온 22만볼트 송전선철탑이 이 변전소앞에 와서 끝났다.
수력발전소에서 내려온 팔목같이 굵은 3상고압선을 변전소의 대형변압기들이 물고 변전시켜 각 방향으로 나누어 내보낸다.
용하지구는 이곳 엄지변전소를 중심으로 철탑들이 종종 들어섰고 은빛고압선들이 하늘을 가리울 지경으로 늘어섰다.
정준하는 변전소의 설비들을 돌아보며 조용히 잔디우를 거닐고있었다. 불당겼던 특대형변압기에 대한 복구재생작업은 오늘도 낮에 이어 밤늦도록 진행했다.
방금 밤일을 끝낸 로동자, 기술자들이 저쪽 수도가에서 손들을 씻고있었다. 이제 들어가 돌격대숙소에서 한잠씩 자고 또 새벽부터 달라붙어야 했다.
그때 저쪽 수도가옆에 있는 포도덩굴밑에서 탁수환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손을 먼저 씻은 사람들이 긴 의자에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한채 한대씩 피우며 무슨 기술토론을 하느라고 목소리들을 높이는것 같았다.
얼마후 그들이 다들 숙소로 간 다음 정준하는 수도가에 가서 손을 씻었다. 그가 포도덩굴밑의 의자에 가앉아 담배 한대를 꺼내물 때 탁수환이 다시 나타났다.
《아직 가지 않았소?》
정준하가 묻는 말에 키가 꺽두룩하고 몸이 마른 편인 탁수환이 빙긋이 웃는것으로 대답하며 곁으로 다가왔다.
《어델 갔댔소?》
정준하가 다시 물었다.
《젊은 사람들이 쓰던 공구들을 그냥 놓고 나온것 같아 다시 작업장에 갔댔지요. 다 거두어 건사했수다.》
《허― 역시 탁동무답군요.》
정준하는 담배갑을 꺼내 그앞으로 내밀었다. 두사람은 의자에 마주앉아 한대씩 피웠다.
탁수환은 정준하와 나이가 비슷했다. 쉬나문살씩 났지만 탁수환은 워낙 숫돌형으로 생긴 얼굴이 컴컴해서인지 별로 더 나이가 들어보였다.
정준하는 언제 봐도 이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 말이 적으면서도 대가 있고 무슨 일을 맡겨줘도 억척스럽게 해제끼는 믿음직한 사람이였다.
탁수환은 도송배전부에서 손꼽히는 목수였다. 동시에 전기기술 특히 변압기수리기술에도 높은 기능을 가지고있었다. 워낙 그는 보수사업소에서 오랜 기간 변압기수리공으로 일한 사람이였다. 그러던 그를 기업소에 탁수환이만 한 목수가 없어 건설직장으로 돌려놨던것이다.
탁수환은 기사장이 마음고생하는것을 상당히 가슴아파했다. 그래서 그의 일손을 하나라도 더 덜어주자고 맡은 일을 늘 손끝이 여물게 하는 사람이였다.
정준하는 담배 한대를 피우고난 탁수환이 잠을 자러 간 다음에도 그냥 의자에 앉아있었다. 마음이 무거울수록 생각은 끝없이 깊어져갔다.
담배를 또 한대 붙여물었다.
(간석지건설사업소 사람들은 자꾸 독촉하는데 나는 그냥 앉아뭉개기만 하고있구나. 저 2호변압기가 불에 타지만 않았어도 대보수기일을 반년이나 앞당길수 있지 않았겠는가. 뭐니뭐니해도 다 내 불찰이다.)
정준하는 괴로운 마음을 이길수가 없어 절로 긴 숨을 내쉬였다. 누군가가 가슴을 꽉 눌러주는듯 하여 호흡이 가빠짐을 느꼈다. 대형변압기 2대를 동시에 대보수하게 된것은 해창군 명산포앞에 있는 큰섬인 가양도에 고압선을 끌어들이기 위한 선행작업이였다.
가양도에 6만볼트의 고압선을 넘기는 거대한 송전선공사를 하려면 첫 공정으로 이 대형변압기들부터 먼저 대보수를 해야 한다. 이것을 끝내야 다음공정으로 가양도송전선공사에 들어갈수 있었다. 그래서 작년부터 이 대보수전투를 벌리였지만 계획날자를 엄청나게 어기였다.
그 죄스러움으로 하여 정준하는 가슴이 타는듯 했다.
더구나 이밤 그의 마음이 조바심과 자책으로 무거운것은 오늘 낮에 간석지건설사업소 기사장과 함께 가양도 앞바다를 현지조사하고 온것때문인것 같았다.
원래 정준하는 오늘 가양도 앞바다로 나가지 않으려고 했었다. 아직 변압기대보수를 채 끝내지도 못한 상태여서 거기부터 먼저 가볼 면목이 없었던것이다.
게다가 자기가 앞질러다니며 바람을 일쿤다고 최장근지배인이 이마살을 지을것 같아 저어되기도 했다.
하지만 도간석지건설사업소 기사장의 끈덕진 성화를 이길수가 없었다. 그도 대형변압기 대보수가 거의 끝나간다는것을 말짱 알고있어 공사의 순차와 련속공정을 미리미리 이어놓아야 된다며 소형뻐스를 끌고와 정준하를 기어이 올려태우고야말았다.
지금도 그의 눈앞에는 아까 낮에 나가본 가양도일대의 앞바다와 간석지등판이 서물거리며 떠올라 몸은 비록 변전소에 있지만 여전히 바다가에 서있는것 같은 환각으로 하여 어데선가 물비린내마저 풍겨오는듯 함을 느꼈다.
…오늘 아침 여덟시.
눈결같이 하얀 소형뻐스는 서해가인 해창군을 향해 가볍게 질주했다. 한참 달려 도소재지를 벗어난 차는 무연한 논벌가운데로 뻗어나간 신작로를 따라갔다.
여러 군들을 통과했다. 명산포까지 가는 길은 해창군 읍거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바다가를 향해 뻗어있었다.
고개길들과 내림받이길을 따라 가로수들과 산기슭 숲속에 숨었다 나타났다 하며 하얀 차는 차창가에 부서지는 해빛을 구슬알처럼 뿌리였다. 바다와 잇닿은 길은 무인지경이였다.
퍽 시간이 걸려서야 명산포에 다달았다.
아득한 하늘끝과 맞닿은 날바다가 창가로 비껴들며 거치른 딴 세계에 휘뿌려진듯 한 느낌을 자아냈다. 망망대해가 산같은 물더미를 안고 뒤채며 무엇인가를 집어삼킬듯 으르렁거리였다.
차에서 바다기슭에 내려서자 해풍이 옷자락을 찢을듯 세차게 불었다. 바다는 한창 밀물시간이여서 파도가 사납게 날뛰였다. 악―악― 울부짖는 밀물이 갈개는 소리, 바람소리, 아욱―아욱― 물결따라 날아예는 갈매기소리…
정준하는 난생 처음 보는듯 한 광경에 익숙되지 않아 놀라운 눈길로 바다의 란동을 지켜보았다.
간석지기사장은 이런데 늘 습관돼서인지 이따위 파도소리쯤은 자장가로 여기는듯 표정이 덤덤했다.
두사람을 부리워놓은 소형뻐스는 꽁지를 들까불며 어데론가 살같이 사라졌다. 저쪽 굽인돌이를 돌아 얼마쯤 가면 자기네 도간석지의 해창군 분사업소 지휘부가 있다고 했다.
명산포일대는 포구마을이 없는 무인지대여서 한산하고 적막했다. 낮이나 밤이나 물소리, 바람소리, 갈매기소리뿐이였다.
포구를 이루고있는 륙지의 기본을 벼랑산이 차지하고있었다. 깎아지른 절벽이 바다깊이 뿌리박고 억년 들이치는 사나운 파도와 해일에도 끄떡없다는듯 억센 기상을 뽐내는양 싶었다.
벼랑산은 이 일대에서 제일 높고 험했다. 가파로운 산기슭을 덮은 울창한 나무숲이 파도소리에 화답하듯 쏴―쏴―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는 인가없는 이 지대의 적막과 고독을 가시려는듯 한 애처로운 울부짖음으로 들리였다.
명산포구에서 직선거리로 2 500메터의 해협을 끼고있는 가양도가 한낮의 해볕에 노그라진듯 한가하게 누워있었다. 바다가운데 거대한 군함모양으로 떠있는 가양도, 그 섬은 퍼그나 넓은 땅덩이였다.
명산포는 륙지여서 이곳이 더 높고 물건너 가양도는 지대가 낮아 내려다보이였다. 가양도의 산들도 높고 험하고 수림이 우거져 원시림 같다고 했다.
간석지기사장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배를 타고 가양도해협을 건너가면 거기는 땅도 좋고 물도 좋고 경치도 좋아 사람살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직 거기는 사람이 없는 무인도였다.
그 섬을 중심으로 하여 바다쪽으로 나가면서 굉장한 간석지가 누워있다. 바다감탕이 덧쌓이고덧쌓이며 높아진 간석지를 개간하면 수천정보의 농토를 얻어낸다고 한다.
수천정보의 새땅, 이 땅만 얻으면 앞으로 이 명산포 날바다를 밀어내고 새로 군이 들어앉을수 있다.
이것은 공상이 아니라 당장 실천해야 할 현실적문제다. 누가 하는가. 간석지건설총국에서 벌써 큰 설계도를 다 그려가지고있다고 한다.
나라의 국토를 넓히고 인민생활에 이바지할 거대한 농토를 얻어내는 일처럼 크고 절박한 과제가 어디 있겠는가.
간석지기사장은 말했다.
《저 가양도 앞바다에 무진장한 땅이 드러나있습니다. 지금은 밀물때여서 물에 잠겼지요. 썰물때 보면 굉장한 땅이 솟구쳐올라와 잠을 자고있습니다. 그걸 둘러막으면 인차 저 땅우로 자동차, 뜨락또르가 내달릴겁니다. 저 가양도는 앞으로 생길 군의 읍소재지로 될거구요. 이런 엄청난 재부를 그저 보고만 있잡니까. 빨리 개간해야지요. 날바다를 막는 일은 우리가 하겠습니다. 도송배전부에서는 전기만 보장해주십시오. 가양도에 송전선을 건설하는것이 우리들에게 있어서 1차적과업입니다. 전기부터 들어와야 가양도에 큰 채석장을 꾸릴수 있기때문입니다. 섬에는 돌원천이 무진장합니다. 돌은 간석지건설에서 기본자재가 아닙니까.
나라의 막대한 국토를 하루속히 넓히는가, 못 넓히는가 하는것은 송전선공사를 언제 해주는가 하는데 달려있습니다.》
간석지기사장의 목소리는 절절하게 울리였다.
내용을 알면 알수록 가양도 송전선공사의 절박성, 긴요성, 의무성이 정준하의 가슴속에 사무치게 차올랐다. 옳다. 자연을 정복하는 길에 우리가 앞장서야 한다.
수천정보의 농토를 얻는다! 이것처럼 큰 재부가 어디 있는가. 뻔히 건너다보면서도 저 떡을 집어먹지 못하는 자신이 반편같이 여겨져 생각할수록 속상하기만 했다.
명산포구 절벽가에서 저기 가양도가 어슴푸레하니 건너다보였다. 배사람들이 섬기슭에 올라갔는지 그들의 움직임이 소인국사람들처럼 작고 아물아물하니 보였다.
물너비가 2 500메터면 오리가 넘는 거리다. 거치른 물결이 기광을 떨며 날뛰는 저 날바다우로 어떻게 송전선을 넘기겠는가. 그것도 고압선을 넘겨야 하지 않는가.
현지에 나와 제 눈으로 확인해보는 정준하의 얼굴은 더욱 암울하니 그늘에 덮이였다.
(지배인은 언젠가 벌써 이곳에 와봤다고 했었지. 현지를 밟아보니 난관이 여간만 크지 않겠다는 예감이 더 드는구나.)
어데론가 갔던 소형뻐스가 다시 그들앞에 나타났다.
간석지기사장은 이제는 그만하고 돌아가자고 했다. 왔던 길에 저 가양도까지 건너가 보았으면 좋겠으나 사업소발동선에 기관고장이 생겨 못 가보는것이 유감이라고 했다. 또 시간도 맞지 않는다고 했다. 섬구경을 하려면 하루밤 자야 한다는것이다.
《지배인동지의 결심도 중요하겠지만 오늘 이렇게 실무가인 전기기사장이 직접 나와봤으니 돌아가서 토론을 잘해주기 바랍니다.》
정준하는 그저 침착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곁에서 운전사가 뭐라뭐라 하자 간석지기사장은 《오― 그래? 거참, 잘했소.》 하더니 어서 차에 오르라고 했다.
뻐스는 곧 떠났다.
차가 도소재지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얼마쯤 달리더니 왼편으로 꺾어 강냉이밭들이 펼쳐진 마을길로 들어갔다. 여기는 벼랑산 뒤쪽이였다. 마을어귀에 다달은 차는 더 가지 않고 잔솔나무들이 보기 좋게 둘러선 펑퍼짐한 잔디판에 멈추어섰다.
《자, 내립시다.》
정준하는 주인이 하자는대로 했다. 청금단처럼 깔린 잔디판은 소나무들과 어울려서 운치를 돋구어주어 쉬여가는 장소로서는 맞춤한 곳이였다. 더구나 좋은것은 샘터가 가까이 있는것이였다.
운전사가 차의 뒤문을 열더니 골숨한 흰 마대를 안아내리였다.
간석지기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귀한 손님을 데리고 나왔지만 이거 점심식사가 변변치 못해서 안됐습니다. 그래 바다가에 왔으니만큼 우리도 점심을 바다식으로, 야전식으로 합시다. 조개구이를 준비했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우.》
운전사가 차에서 잘게 쪼갠 마른 장작을 한단 내리워 불을 지폈다.
불길이 타올랐다. 운전사가 마대를 들어 깨끗이 씻은 왕조개들을 쏟아놓고 그것을 불속에 집어넣었다.
조개들은 인차 바글바글 끓으며 입을 쪽쪽 벌리고 노랗게 익었다. 달짝지근한 냄새가 감미롭게 떠올랐다.
운전사는 다 익은것을 잔디우에 모아놓고 또 생것을 련이어 집어넣었다.
잠간사이에 조개구이는 참 멋있게 되였다.
《자, 앉아서 하나 들어보시우.》
주인이 먼저 권했다.
세사람은 둘러앉아 김이 몰몰 오르는 왕조개들을 한알씩 들고 뜨거워 후후 불었다. 정준하는 주인이 하는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했다. 별것이 아니였다. 진짜 야전식이였다.
왕조개 한알을 먼저 먹고는 그 큰 조가비를 숟갈삼아 들고 다음 조개를 그것으로 슬쩍 긁어먹는다. 참 별맛이였다. 달달하고 향기로와 혀까지 따라 넘어갈 지경이였다.
조개가 너무도 커서 한알만 넣어도 입안에 가득차 한참씩 씹어야 했다. 운전사가 내놓은 병맥주도 그 숟갈대용으로 쓰는 큰 조가비에 부어서 마시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주위에는 빈 조가비들이 수두룩이 널리였다. 한참 앉아 발가먹고나니 더는 아무 음식도 먹고싶은것이 없었다.
맑은 샘물로 입가심을 하고 한대씩 피웠다.
정준하는 주인에게 조개구이를 잘 먹었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오늘 점심값을 할것 같진 못합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먹긴 잘 먹었어두 참 야단이로군요.》
정준하가 속상하다는듯 무거운 언성으로 뇌이자 능청스러운 간석지 기사장은 히죽 웃으며 한술 더 떴다.
《전기기사장이 그렇게 걱정이 큰걸 보니 오히려 더 믿음이 갑니다. 걱정하는 사람만이 일을 제끼니까요. 일하기를 싫어하는 건달뱅이일군들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대신 앞에서만 예, 예 하고 대답은 잘하지요. 기사장동무가 걱정놓소, 우리가 해야지요 하고 큰소리를 탕탕 친다면 난 도리여 곧이듣지 않겠소.》
《허허허.》
정준하는 마음속 시름을 날려버리듯 가슴후련히 웃었다.
자기는 이미전부터 어렵지만 무조건 해야 한다는 결심이 서있으나 최장근지배인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 어쩔수없이 그의 눈치를 보지 않을수가 없었던것이다.
그는 돌아오면서도 자기 생각만은 확고히 굳히였다. 가양도송전선공사는 생각했던것보다 훨씬 어렵겠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반면에 그것으로 하여 바지끈을 단단히 조여매야겠다는 각오를 굳히게 했다. 동시에 지금 끝내가는 변압기대보수를 빨리 마무리해야겠다는 조바심으로 더욱 속이 끓게 했다.
…이윽고 정준하는 포도덩굴밑에 있는 의자에서 일어나 변전소구내길로 호젓이 걸어갔다.
그때 어데선가 나타난 딸이 《아버지―》 하고 부르며 가까이 다가왔다. 아니, 네가… 정준하는 두눈이 커져 마치 처음보는 처녀이기나 한듯 딸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 밤중에 웬일이냐? 불쑥 나타나는게 꼭 홍길동이 같구나.》
그는 딸에게 이상한 눈치를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흥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했으나 저도 모르게 긴장한 빛을 두눈에 띄우고 딸의 자그마하면서도 정묘하게 다듬어진 입술을 지켜보았다.
혹시 입원해있는 제 어머니의 병세가 더 악화됐다는 불길한 소식을 가지고온것이나 아닐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 애가 이렇듯 밤길을 달려올수 있을가.…
아버지의 심중을 맑은 물속 들여다보듯 한 경애가 먼저 입을 열어 안심시켰다.
《아버진 지금 내가 이 밤에 왜 갑자기 왔을가 하고 생각하고있지요? 어머니걱정을 하면서… 마음놓으세요. 어머니병은 아주 호전됐어요. 오늘 퇴원하겠다는걸 며칠 더 있다 나오라고 했어요. 이젠 근심이 놓이지요?》
《허허, 맹랑한것… 말하는걸 보면 아직 철부지 같다니까. 그래 방금 도착하는 길이냐?》
《아뇨, 아까 왔어요.》
《그럼 어디 있었냐? 아버지를 찾지 않고.》
《딸구실도 못하면서 아버지를 찾을 면목이나 있어요. 변압기작업장을 둘러친 벼짚방풍장뒤에 앉아서 아버지가 일하는것도 지켜보고, 로동자, 기술자들이 주고받는 말들도 다 들었어요. 그 장소는 어둑시그레해서 누구도 저를 보지 못했어요. 그냥 기다렸다가 아버지 혼자있을 때 만나느라고 지금 나타났어요.》
《그래 아버지를 찾아온 목적은 뭐냐?》
《아버지가 나라에 큰 손실을 주었다는게 사실인지 알고싶어 왔어요.》
정준하는 침통한 낯빛으로 묵묵히 서있었다. 이윽고 가라앉은 어성으로 입을 열었다.
《경애야, 그 모든건 사실이다. 이번에 현장에서 일하면서 참 많은걸 배우게 되는구나. 그래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운다고 한가부다.》
《아버지, 로동자들의 말을 들으니 이제는 그 기간도 얼마 남지 않고 또 변압기수리도 거의 돼간다더군요. 그 나날 혼자서만 아픈 가슴을 안고있었나요? 이 딸이 알았더라면 그 가슴아픔을 얼마간이라도 나눴을게 아니예요. 야속해요.…》
경애의 긴 살눈섭끝에 방울방울 맺힌 눈물이 야외등빛을 받아 반짝이였다.
《너까지 그걸 알게 해선 뭘 하겠냐. 그러다 혹시 어머니가 눈치라도 채면 어쩔려구.》
《아버지심정은 리해가 돼요. 아버지, 이제는 더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다 알았으니만큼 아버지를 힘껏 돕겠어요.》
정준하는 딸이 기특하여 딸의 탄력있는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고맙다. 네가 오늘 문득 뛰여와서 이 아버지에게 큰 힘을 주는구나.》
《아버지, 정말 힘을 얻었나요? 그렇다면 저도 기뻐요. 그런데 아버지의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어떡하면 좋을가요.》
《그런건 걱정하지 말아라. 그저 너와 어머니건강만 일없으면 난 새힘이 솟는다.》
경애는 아버지의 모습을 새삼스레 눈여겨보았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단단한 몸집이 뚝 찍어세운 통나무처럼 그쯘하고 굳세보였다.
엄지손가락처럼 굵은 막대기를 뚝 잘라 올려붙인것 같은 두드러진 검은 장미가 기세좋게 거슬러일어서있어 기질적으로도 만만치 않게 보였다. 철색의 두릿한 얼굴, 두툼한 입술, 작을사 하면서도 매눈처럼 예리한 두 눈, 날카로운 코등, 처음보는 사람들도 정준하기사장은 고집스럽게 생겼다고 말한다는것을 경애도 알고있었다.
그런 아버지가 지금은 몹시 피로에 지쳐 얼굴이 수척해지고 고뇌에 잠긴 눈빛도 흐릿하니 빛을 잃었다. 경애의 가슴은 에이는듯 아팠다.
아버지는 낮동안은 기업소 건설직장에 나가 시내의 각종 전기망공사를 하는 여러가지 일들을 하고 밤에는 또 자전거를 타고 이곳 변전소에 올라와 변압기수리작업을 한다고 했다.
이 밤작업은 누가 시켜서 하는것이 아니였다. 자기스스로 량심껏 하는 일이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일터에서 살고있어 지칠대로 지친 아버지였다. 요즈음은 밤낮 수리작업에만 붙어 일한다고 했다.
(내가 정말 철없는 딸이였구나. 아버지가 집에 들어와 아무 말 안했다 해도 벌써 알아차리고 어머니를 대신해서 더 따뜻이 돌봐드렸어야 하지 않았을가. 지금껏 아버지의 사랑속에서 어리광을 부리며 사는데만 습관돼서 자식구실을 바로 못했구나.)
경애는 끝없는 자책감에 잠겨 자꾸 눈물이 솟구쳤다. 손수건으로 씻어도 또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그러지 말라고 타일렀다.
딸은 가까스로 눈물을 삼키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혹시 승호가 아버지의 일을 알고있진 않나요?》
경애를 마주보던 정준하는 눈길을 떨구며 저으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목소리는 천연스럽게 울리였다.
《무얼 승호까지야… 멀리 떨어져서 졸업시험공부에 여념이 없을텐데.》
《그래요? 저처럼 모르고있다면 다행이군요.》
《그런 걱정은 말아라.》
《걱정을 안하게 됐어요. 승호가 알면 아마…》
정준하는 더운 숨을 내쉬였다.
이윽고 그는 딸을 데리고 변전소정문밖으로 나갔다.
경애를 변전소소장네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주인아주머니와 함께 거기서 자고 날이 밝으면 집으로 내려가라고 했다. 그리고도 한동안 더 마을길을 거닐다가야 숙소로 들어가 잠자리에 누웠다.
(끝내는 경애가 알고 이곳까지 달려왔구나. 저것이 이 밤 잠들수 있을가. 아니, 못 잘게다. 지금쯤은 혼자서 베개잇을 적시며 소리없이 울고있을게다. 곁에 있으면 위로라도 해주련만…)
정준하는 반듯이 누워 어둠에 잠긴 천정만 올려다보았다. 잠은 천리밖으로 달아난듯 정신이 더 맑아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