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 회)
제 1 편
용감한 사람
1
봄볕이 따스한 입김으로 괃아졌던 동토를 쓰다듬어 나무가지마다 움을 틔우고 꽃망울을 피웠다.
수룡강건너에서 불어오는 훈풍이 향긋한 입술로 그 망울들을 흔들며 입맞추어주는듯 어느 사이 꽃들은 만첩으로 피여나 꽃구름을 이루었다.
시내공원들이 꽃속에 묻히여 사람들의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그러다가도 때없이 얼음꼬치같은 비발을 들붓기도 했다.
밤이였다.
오늘도 낮동안은 아지랑이 아물아물 피여나 봄의 훈향이 무르녹는듯 했다.
하지만 경애가 집을 나서려 할 때엔 또 바람꽃이 터져나왔다. 처녀는 불안한 눈길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밤날씨가 나빠지는구나. 어쩌면 좋을가.)
경애는 아래입술을 감물고 마음의 진정을 얻으려 애썼다. 이제는 더 미루지 말고 오늘 밤중으로 아버지한테 가봐야 돼. 아버지는 분명 나한테 속을 주지 않고있어.
어머니는 시병원에 입원해있으니 쉽게 얼려놓을수 있겠지만 이 딸의 눈까지 가리우려하는 아버지를 어쩌면 좋아. 아니… 어리석은건 나야. 지금껏 반년가까이 아버지한테 얼리워온 내가 더 못난 딸인지도 몰라. 어째서 아버지는 나한테까지 속을 주지 않을가. 어머니를 모르게 하는 아버지의 심정은 리해가 돼.
하지만 나까지야… 그건 이 딸을 믿지 않는다는 무언의 불신이 아닐가. 그래!… 경애는 분해서 혼자 숨을 할딱거렸다. 아버지가 원망스러워 저도 모르게 눈물이 괴여올랐다.
내가 아직도 철부진가. 당장 시집을 보내야겠다고 늘 입버릇처럼 외우는 아버지가 나를 철부지로 보다니. 어머니가 앓지 않는다면 아버진 여사모사한 일이 있었다고 좋은 소리건, 무거운 소리건 다 말해줬을거야. 그러니 아버진 어머니는 믿으면서도 이 딸은 믿지 않는다는거지.…
경애는 바깥을 내다보며 아버지를 칭원했다.
이윽고 그는 손수건으로 눈굽을 꾹 눌러닦고 침착한 표정을 짓기에 애썼다. 감정이 가라앉자 아버지를 턱자없이 탓했던 자신이 돌이켜지기 시작했다. 정말 내가 아직도 철부지가 아닐가. 아버지는 두 자식가운데서도 내가 맏이라고 승호(남동생)보다도 더 믿고 위해주지 않는가.
아버지가 나와 어머니한테 말해주지 않은것은 우리가 알아서 좋을것이 없어 그랬을거야. 아버지가 속이 깊다는걸 내가 모르는가. 그런데도 앵돌아져 샘바리처럼 마음속으로 떼질을 쓰며 아버지를 탓하다니. 이런걸 두고 불효자식이라고 하지 않을가.
늦긴 했지만 내가 이제는 알았으니 더는 이밤을 미루지 말고 아버지한테 가서 위로해드리자.
경애는 창가에서 물러났다. 결단성있게 몸을 돌려 출입문가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거리로 뛰쳐나가 두주먹을 감아쥔채 종종걸음치기 시작했다.
무궤도전차에 뛰여오른 그는 종점까지 갔다. 거기서 내려 동북쪽인 서주군방향으로 가는 대도로에 들어섰다. 여기서부터는 가로등이 없다. 넓다란 길 좌우에 키높이 자란 가로수들이 우거져 뿌잇한 달빛에 우중충한 그림자들을 던졌다.
얼게빗달이 중천에서 헤염치며 밀려드는 검은구름떼에 쫓기듯 꼴깍 잠겼다 떠오르군 하며 힘겨운 숨박곡질을 했다.
경애는 신바닥에서 불이 일 지경으로 바삐 걸었다. 걷는다기보다 달리였다. 아버지가 일한다는 용하변전소는 시내에서 30리밖의 산골안에 자리잡고있었다. 경애는 거기까지 걸어가는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사범대학 체육학부를 나와 지금껏 시소년회관 탁구지도교원으로 일하고있지만 달리기에서도 뒤지지 않았다.
늘씬한 키에 미끈한 두다리를 가진 육체미만 보아도 모든 운동에 자신만만할것만 같다. 처녀는 전도유망한 국가탁구선수후비들을 키워내는 사업에 남다른 긍지를 가지고있었다.
경애가 살구나무가로수들구역에 들어서자 무리지어 피여난 꽃가지들에서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바람질에 꽃잎들이 분분히 날리였다.
포장한 대통로우에 락화가 한벌 깔리여 이리저리 밀리고 휩쓸렸다. 꽃잎들은 눈송이처럼 어지러이 날리며 처녀의 머리와 어깨우에도 쏟아져내렸다.
꾸르릉― 우중충한 산발너머에서 둔중한 우뢰가 울었다. 뒤미처 수룡강쪽 밤하늘을 찢으며 시퍼런 번개가 번쩍! 눈앞을 때렸다. 어스름하니 비치던 반달은 끝내 먹장구름속에 먹히우고 후두둑― 비방울이 떨어졌다. 경애는 공허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참으로 야단스러운 밤이였다.
길가에 오가는 자동차들이 많아 좀 태워달래볼가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처녀는 키를 쭉 뽑은데다 얼굴생김이 동그스름하면서도 눈, 코, 입이 방정하게 놓이고 까만 두눈이 별로 반짝반짝 빛을 뿌려 대번에 남자들의 호감을 사는 인기형이였다. 게다가 성미까지 활달하고 웃는 낯으로 인상이 좋아 지나가는 차나 얻어타는것쯤은 식은죽먹기였다.
하지만 경애는 머리를 저었다. 차를 탄댔자 얼마 못가 이 대통로를 버리고 소로길로 갈라져야 하므로 다시 내려야 했다. 비꼬치같은건 두렵지 않다. 봄비가 와야 얼마나 올텐가. 그런데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못된다.
(정말 아버지가 일을 잘못하여 로동을 한다는게 사실일가?)
경애의 머리속에 차흐르는 생각은 오직 이것뿐이였다. 아버지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 그렇게 됐단 말인가. 일밖에 모르던 고지식한 아버지가 아닌가.
오죽하면 아버지를 곧은 막대기라고까지 하겠는가.
도송배전부 기사장 정준하는 사실 그런 사람이였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 기사장사업을 운영부기사장한테 림시로 넘겨주고 송전선건설직장에 나가 일하고있었다. 벌써 댓달쯤 됐다.
경애는 지금껏 이것을 모르고있었다. 전부터 좀 이상한 눈치는 채고있었으나 아버지는 집에 들어와 아무 말도 안했고 늘 봐야 천연스럽고 흔연했었다.
경애도 팽이처럼 바삐 돌아치느라 언제 아버지와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
정준하는 워낙 기사장으로 일할 때도 집에 들어오는 날이 많지 못했다. 낮에도 출근, 밤에도 출근이였다. 아니면 거미줄처럼 엉킨 전력설비들을 보려 서른개나 되는 도내 시, 군송배전소들에 나가있기가 일쑤였다.
집에는 경애 혼자 있을 때가 많았다. 건강하던 어머니가 왜 갑자기 병이 났는지 시병원에 입원해있고 남동생 승호는 몇년전부터 전기전문학교에 가있어 방학에나 한번씩 다녀간다. 집은 늘 비여있었다.
경애는 또 자기대로 소년회관 탁구소조를 끌고나가기에 바쁜데다 집에만 오면 어머니가 있는 병원에 가 시중을 들어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어떻게 됐는지 알지도 못했다.
끼때에 마주앉아서도 아버지의 기분과 인상은 예전과 같았고 일욕심을 부리는것 외에는 더 다른 기미가 느껴지지 않았었다.
눈치를 채기 시작한것은 얼마전에 시내를 지나가다 아버지가 높은 콩크리트전주에 올라가 전선작업을 하는것을 우연히 본 후부터였다.
(아니? 기사장이 저런 일까지 하는가?)
다른 하나는 새해부터 지금껏 아버지가 승용차를 타고다니는것을 본 기억이 없었다. 도송배전부앞을 지나가면서 몇번 정문을 들여다봐도 기사장승용차는 청사앞마당 한켠구석에 늘 한가하게 앉아있었다.
누구에겐가 사실을 물어서 알게 된 경애는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는 앓고있는 어머니와 내가 이 사연을 알면 근심할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않은것은 물론 나라앞에 진 잘못을 씻자고 그렇게 밤낮일만 하는것 같았다.
아버지는 정말 너무해. 글쎄 앓는 어머니한테 말하지 않은것은 잘한 일이지만 이 딸까지도 못 믿을건 뭐야.
그가 한참 걷느라니 길 한가운데에 대형화물자동차가 가로질러 서있었다. 불을 환히 켜놓고 기관실에 올라선 운전사가 무엇인가 고치고있었다.
지금 서주군에 큰 강철공장을 세우고있어 자재를 실은 많은 화물자동차들이 이 길로 수없이 오고갔다.
경애가 그 화물자동차앞에까지 갔을 때 좁아진 옆길로 뻐스 한대가 조심스럽게 빠져나오고있었다. 뻐스의 전조등이 너무 눈부시여 경애는 고개를 숙이였다. 그는 고장난 차곁을 지나가려고 얼른 좁은 길에 들어섰다.
순간 달려오는 자전거와 부딪쳐 둘다 넘어졌다. 자전거가 뻐스의 뒤꽁무니에 바싹 붙어오는줄을 미처 못 봤던 경애여서 그만 피하지 못했던것이다.
자전거를 탄 청년은 창황중에도 처녀를 위해 손잡이를 날래게 조절하여 경애는 그저 넘어졌을뿐이지 다친 곳은 없었다. 청년이 자전거와 함께 넘어지면서 쇠부딪침소리를 크게 냈다.
경애는 얼른 일어나 자전거밑에 깔리운 청년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세워주었다. 경애는 미안하여 얼굴을 활딱 붉히였다.
《다치지 않았습니까? 어쩌나… 저때문에… 죄송합니다.…》
《피차 같습니다. 저때문에 처녀동무도 넘어지지 않았습니까. 제가 오히려 죄송합니다.》
청년은 헌헌한 목소리로 뇌이며 아무렇지도 않은듯 싱긋 웃었다. 그는 두발과 다리, 팔을 우뚤우뚤 놀려보며 몸상태를 가늠해보았다. 그러는 청년을 경애는 겁먹은 눈길로 바라보며 송구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요. 아무렇지도 않군요.》
청년은 또 흰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그 순간 처녀는 웬일인지 청년이 별로 낯익어보여 기억을 더듬어보고싶었으나 그럴 경황이 없어 그의 몸상태에만 신경을 썼다.
《정말 일없습니까?》
《걱정할것 없습니다.》
경애는 막혔던 숨을 호― 내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청년은 씽하니 자전거를 들어 다시 세워놓았다.
마대안에서 무슨 쇠붙이들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또 났다. 처녀는 얼결에 파철을 실어오는가고 물었다.
청년은 산줄작업에 필요한 공구들과 기구들이라고 했다. 자기는 산줄공이라고 하며 어느 기계공장에 부탁하여 그곳에 가서 각종 산줄도구들을 만들어가지고 오는중이라고 했다.
(산줄공의 직업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몇마디 말만 듣고도 그가 벌써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이라는것을 대뜸 짐작할수 있었다. 산줄공이라는것을 보니 도송배전부사람이 분명했다.
자전거를 일으켜세운 청년은 《에― 넘어진김에 쉬여간다는데…》 하며 호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냈다. 그러던 청년이 무춤 굳어지며 경애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고장난 자동차의 전조등이 길가를 환히 비치긴 해도 여기는 차의 뒤쪽이여서 그리 밝지는 못했다. 청년이 먼저 알은체를 했다.
《별로 낯이 익어보이는데요.… 저를 모르겠습니까?》
《저는 누군지 잘…》
《작년 가을 묘향산탐승길에서 만났던 기억이 나지 않습니까? 그 꽃수건…》
그때에야 경애는 그래서 아까부터 이 청년이 별로 눈익어보였구나 하고 생각하며 두손을 붕긋한 앞가슴에 포개얹었다.
《어마나― 동무였군요. 미처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뭐 미안할것까지야 있습니까. 그때 우린 잠간 만났던 인연이였으니까 돌아서면 누구나 잊어버리지요.》
《그래도 동무는 저를 도와주고도 오히려 먼저 기억하지 않습니까.》
《허― 난 그때 동무를 퍽 인상깊이 봤던것 같습니다.》
청년은 공연히 얼굴을 붉히였다.
묘향산등산의 그 아름다운 가을날 동무들과 함께 상원암으로 오르던 경애는 목에 살짝 둘렀던 화려한 꽃수건을 휘―익 올리부는 골바람에 그만 날려보냈다. 하르르한 수건은 벼랑가로 가벼이 날아갔다.
이를 어쩌나. 벼랑아래로 날아내릴줄만 알았던 꽃수건이 어쩌자고 낭떠러지에 위태롭게 뿌리박은 소나무에, 그것도 허공으로 뻗어나간 마지막가지에 가서 걸리였다.
저걸 어떻게 걷어온단 말인가. 별로 굵지도 못한 소나무가지밑으로는 아찔한 벼랑이다. 처녀들은 아쉽지만 그 꽃수건은 버린것이라고들 하며 어서 등산길을 오르자고 위안했다.
뒤따라오던 남자들도 어쩔수가 없어 처녀를 도와주지 못했다. 이렇게 몇패가 지나간 다음 한 청년이 무슨 일로 떨어졌댔는지 자기 대오를 따르느라고 헐썩거리며 올라오고있었다.
처녀들한테서 사연을 들은 그 청년은 벼랑가의 소나무가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싱긋 웃었다. 이어 빨래줄에 널은 옷가지라도 걷으러 가듯 대수롭지 않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곧 락락장송의 가느다란 가지우를 날렵하게 기여나가기 시작했다. 그 재빠르고 익숙한 그리고 균형잡힌 동작은 꼭 나무에 오르는 검은 청서를 방불케 했다. 유유히 꽃수건을 내리워가지고온 청년은 그것을 경애에게 돌려주며 웃었다. 경애는 물론 처녀들이 다들 고맙다고 인사하자 그는 오히려 게면쩍은듯 얼굴을 붉히며 《무얼요.》 하고는 도망치듯 그들앞에서 달아나버리였다.
처녀들은 그 청년이 산줄공이기때문에 교예사와도 같은 재능을 갖고있다는것을 알리 없었다. 어쨌든 그런 고마운 청년이 오늘 이렇게 먼저 경애를 알아본것이였다.
《그런데 이밤에 어델 혼자 갑니까?》
청년이 물었다. 경애는 그한테 사실대로 말할수는 없어 그저 고모네 집에 일이 있어 간다며 이젠 거의다 왔노라고 했다.
이때 고장났던 대형화물자동차가 부르릉하고 발동을 걸었다. 차가 떠나는것과 동시에 그들도 헤여졌다. 경애는 산줄공청년에게 잘 가라고 친절하게 인사했다.
그는 다시 어두운 길을 따라 두주먹을 부르쥐고 달리다싶이 걸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