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3 회)
33. 북원의 량길 신라때에 북원이라고 불리워진 곳은 원래 고구려의 평원군이였다. 그러던 곳이 신라 문무왕(661-681년)때부터 북원으로 되였다. 오늘의 원주로 된것은 고려 태조 23년(940년)때부터이다. 북원은 태백산줄기의 오대산에서 서남으로 뻗어내린 차령산줄기가 처음엔 백석산줄기를 낳고 다음에는 가마산줄기, 그 다음 운무산줄기를 낳는데 바로 그사이 즉 차령산줄기와 운무산줄기사이에 자리잡고있는 분지였다. 고구려에 이어 이곳을 차지한 신라는 북원에 소경(小京)을 두었는데 신라에 9주 5소경이 있었다는것을 미루어보면 북원이 신라때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를 알수 있다. 진성왕 6년(임자년) 봄에 궁예는 북원의 량길에게로 왔다. 개산(죽주)의 칠장사에서 기훤의 무리를 털어버리고 차령산줄기를 타고 북상하여 150여리 산길을 톺아온 궁예가 북원에 닿았을 때는 몰골이 말이 아니였다. 그때 북원은 량길이 지배하고있었다. 량길은 나이가 쉰이 넘은 늙은이였다. 량길은 북원태생이였다. 조상대대로 북원에서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3대째 북원에서 살아왔다. 그는 할아버지때부터 행정촌의 촌주로 있었다. 후기신라시기의 행정구역을 보며는 9주 5소경으로서 주밑에 117군, 군밑에 293현으로 나뉘여있었다. 5소경이란 김해, 중원, 북원, 서원, 남원 5개 지역을 말함이요, 9주란 상주, 량주, 한주, 명주, 삭주, 강주, 전주, 웅주, 무주를
말한다. 여기서 한주, 삭주, 명주는 본래 고구려땅이였고 전주, 무주(광주), 웅주(공주)는 백제지역을 병합한듯 보인다. 그래서 아전인수격의 이른바 신라에 의한 3국통일이란 말이 나와서 상당히 오랜 세월 그렇겠거니 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이 떡, 저 떡에서 조금씩 가져다 모아놓고 큰 떡, 작은 떡 다 합쳤다고 소리치는 격이였다. 그건 그렇고 신라의 행정구역에 대한 소리다. 아홉개의 매 주에는 우두머리가 있는데 이를 총관 혹은 도독이라 하였는데 총관은 661년부터 불리웠고 도독은 785년부터 불리웠다고 한다. 그 관등은 급벌찬(9관등)이상 이찬(2관등)까지 임명되는것이 상례였다지만 대체로 진골계급에서 독점하였다. 군, 현의 우두머리들은 중앙으로부터 임명되는것이 보통이였다. 한편 주, 군, 현밑에 촌들이 있는데 이것은 다시 행정촌과 자연촌으로 나눈다. 행정촌은 몇개의 자연촌이 합쳐서 이루어진다. 행정촌의 촌주는 그 지방의 토착세력가가 임명되였는데 그는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행정관의 통제를 받아 중앙의 통치를 대행하였다. 말하자면 앞잡이들이였다. 이들은 신분적으로는 진촌주와 차촌주로 나누이고 관직도 외직(外職)대신 중앙귀족의 5두품이나 4두품에 해당되는 경직(京職)으로 한정하였다. 토착세력가인 촌주들은 여러개의 자연촌락을 지배하는 족장으로서 적지 않은 토지를 소유하고 촌민의 조세, 동원, 부역에 따른 각종 조사통계에 관한 임무를 가지고있었으며 군사임무도 지니고있었다. 본래 고구려, 백제에 속해있다가 신라에 들어온 지방의 촌주들은 본토(신라)지방의 촌주들과 다른 특수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였다. 신라의 중앙정부에서 보면 그들이 신라인이 아니였고 그렇다고 토착민들도 아니였다. 토착민들은 그들대로 촌주들이 자기들과 같지 않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촌주들은 중앙정부와 백성들의 간층이였다. 이런 촌주노릇을 누구나 쉽게 하는것은 아니였다. 우로는 중앙정부의 귀족들을 잘 섬겨야 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잘 다스릴줄 알아야 하였다. 이런 간층의 량길은 촌주노릇을 곧잘했다. 북원에서 량길나으리 또는 길어른 하면 세살 난 아이까지 다 알았다. 그렇게 된데는 그가 신라의 벼슬살이하는 촌주라는데만 있지 않았다. 량길은 여느 관리나 촌주들과는 다른게 있었는데 그 하나가 자기를 고구려사람이라고 내놓고 말하는것이였다. 낯모를 사람은 물론 아는 사람을 만날 때도 량길은 어느 대목이든지 꼭 자기를 고구려후예, 고구려사람이라는걸 빠뜨리지 않았다. 이것은 다른 촌주, 관리들에게서 전혀 볼수 없는것이였다. 신라에 매여살면서 감히
고구려사람이라고 내놓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량길은 남다른 배짱이 있거나 어떤 타산이 있어서 그랬을것이다. 그게 뭘가? 하여튼 그런 량길의 말은 사람들에게 마술과 같이 묘한 작용을 하였다. 토배기들은 물론 이주해온 사람들도 누구나 그것을 좋아하였다. 아마 이 북원땅이 고구려때 평원군이여서 그랬는가? 신라와 당의 야합에 의해 백제가 무너지고 이어 고구려가 망한 뒤에 이곳은 행정상 신라의 북원으로 되였으나 사람들은 대체로 이전대로 고구려사람들이였다. 신라는 이곳을 중시하여 소경으로 정하고 관리를 보내 다스렸지만 이곳 백성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신라는 옛 고구려사람들을 동족으로, 한겨레로 대한것이 아니라 점령당한 노예로 대했다. 이붓자식을 한가정의 자식으로가 아니라 머슴으로 부려먹는것과 같다 할가. 형제아닌 남이요, 따라서 노비가 되는것이 마땅하다는 속좁은 계집의 여무진 타산이다. 그러니 자연히 층이 갈라질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을 통치하는 벼슬아치들은 존귀한 신라사람이요,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원쑤같은 고구려사람들이라는 지배의식이 거의 2백년이 지나도록 달라지지 않았다. 이로 하여 량길이 말끝마다 자기를 고구려사람이라고 하는것이 백성들에게 친근감을 주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량길은 여느 백성들, 본토배기들에게만 그렇게 말한것이 아니라 관리들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다만 그 방법이 조금 달랐는데 아주 교묘하였다. 량길은 나리들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촌놈이오이다.》 하고 말하군 한다. 량길의 그런 말에는 묘한 의미가 있었다. 얼핏 듣건대 그 말은 량길이 자기를 낮추어 개올리는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만 않았다. 그는 당신은 신라사람, 나는 고구려사람이라는 의미로 말하군 하였다. 제입으로 수군댄적이 있어 그런가부다 한다. 언제인가 북원에 새로 부임되여온 우두머리가 량길의 그 말을 듣고 《내가 듣건대 그대는 북원의 첫째가는 실력가라고 하던데 왜 하필 촌놈이라고 하오?》 하고 물은적이 있었다. 그때 량길이 공손히 대답했다. 《촌놈이니 촌놈이라 하오이다.》 《촌놈이란 무슨 말이요?》 하고 그 우두머리는 뻔히 아는 소리를 물었다. 량길은 서슴지 않고 《촌놈이란 고구려사람이라 그 말씀이오이다.》고 대답했다. 그 관리는 한참 길의 말을 의미해보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신라에 비한 고구려의 낮춤이 마음에 들어서였을가? 상전이 웃으니 량길도 따라 웃어댔다. 《하하.》 무던히 시원스러운 웃음이였다. 그 일이 한입건너 두입건너 알려졌다. 뼈대있는 사람들은 그로 하여 량길을 두고 《그 사람 이거군!》 하며 엄지손가락을 보였다던지… 자기를 촌놈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사람에게는 서울놈에 비해 자기를 낮추는 례도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촌놈다운 자존심과 우월감이 묻을 정도로 배여나온다. 량길은 자기를 촌놈이라고 불러 나리들의 미움을 받지 않으면서도 자기딴에 긍지도 가진다. 이런 량길의 속심을 사람들은 저희들과 속이 통하는 사람으로 제켠에서 알아 량길을 존경까지 하는것이다. 《나는 촌놈이오이다.》 하는 소리가 한때 북원일대에서 류행되였던것만 보아도 량길이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치였는지 잘 알수 있다. 설사 눈치있는 관리가 량길이 《촌놈 같기는 고구려사람》이라는 말뜻을 알아차리고 아주 괘씸하게 여겨도 그들은 또 그들대로 어쩔수없이 못 본척 해두었다. 한건 북원에 파견되여오는 관리들의 하나같은 처지랄가 특성이랄가 하는것과 관련되여있었다. 신라본토의 어느 주, 군, 현의 관리들과는 달리 이곳 북원이나 한주, 패강진일대의 관리로 파견되여오는 나리들은 별로 관리로서의 의무 같은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떤 미욱한 놈을 내놓고는 대개 자기들이 서울(경주) 즉 중앙에서 밀려난 신세라고 생각하고있었기때문에 그저 부임기간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면서 나라에서 내려보내는 조세나 징발을 제때에 하고 더 좋기는 자기의 출세밑천을 마련하면 그만이라는 태도들이 만연하고있었다. 그런데 나라에 욕먹지 않을 일이라는건 량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되는게 별로 없었다. 이곳 사람들은 성미가 《사나워》서 걸핏하면 들고일어나군 하였던것이다. 그저 무턱대고 일어나는것이 아니고 뭐를 알기는 또 얼마나 잘 아는지 한다하는 관리들도 《어, 어. 그래그래.》 할 때가 드문했다. 바로 그래서 미운 놈 떡 한개 더 준다는 격으로 량길의 언행을 못 본척 해두는것이다. 또 량길은 눈치있는 사람이여서 자기 상전이 《이놈, 뭣이 어째? 보자보자하니 안되겠구나. 죽어봐라!》 할 정도로 미욱을 부리지도 않았다. 량길이 북원일대에서 나으리, 어른으로 떠받들리는것은 다만 그가 남들이 감히 못하는 말을 떠벌이기때문만이 아니다. 길은 이곳에서 인심이
대단했다. 그는 남을 잘 도와주는것으로 소문났다. 같은 촌주들과 소경의 관리들치고 량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량길의
도움이라는걸 가만히 들어보면 아주 로회한데가 있었다. 그는 북원의 한다하는 사람들을 무턱대고 도와주는 법이 없다. 말하자면 부처님의 자비로 하여 도와주지는 않는다는것이다. 량길은 남을 도와주는데서 타산이 아주 밝았다. 대체로 그는 도와주는 사람을 둘로
가르는데 그가운데 재산이라든지 권세가 좀 쩝쩔한 사람에 대해서는 꼭 례물이 있어야 하였다. 아무때나 사람이 사는것에 권력이 있기마련이고 권력이 있는것에 반드시 부스레기를 얻어먹으려는 령리한 족속이 있기마련이다. 그들을 가리켜 바보스러운데다가 미욱하기까지 한 백성들은 얄미운 놈, 나쁜 놈 하지만 권력맛에 혀를 대본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이라 한다. 량길은 북원에서 한다하는 촌주인데 그걸 비유해서 말하면 권력의 문 혹은 그 문손잡이와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권력으로 리득을 얻으려는 놈팽이들은 쉬파리처럼 량길에게 붕붕 날아들었다. 이런 무리들에게 꼭 례물을 밝히는 량길을 깜찍한 놈이라고 할수는 없는것 같다. 한번은 어떤 촌주의 아들이 북원의 우두머리인 사신(또는 사대등이라고도 하였다.)의 아들을 때린 일이 있었다. 아이싸움이 어른싸움이 되여 사신이 촌주를 징벌하겠다고 윽윽거려 촌주는 그만 파리대가리처럼 까맣게 되였다. 물에 빠진 놈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그 촌주가 량길에게 뛰여왔다. 량길은 콩콩 뛰는 촌주의 말을 들으면서 이게 웬 강건너 불이야 하고있었다. 《야, 좀 도와주소. 어른이야 조물주같은분 아니시오.》 등등의 아첨에도 끄떡 안하다가 눈치차린 그 촌주가 슬그머니 례물을 내놓자 대뜸 해봅세다 했다든지 하는 말이 있다. 물론 량길이 나서서 안되는 일은 없다. 사신은 뒤구멍으로 례물을 받고 괘씸한 놈, 다시 그랬단 봐라, 에험 하고 촌주는 촌주대로 에, 혼났다 녀석! 하며 제 자식의 대가리를 쥐여박았다 한다. 그런데 이런 량길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량길을 잘못 볼수 있기때문이다. 량길은 있는 놈에게서는 꼭 례물을 받고 도와주었지만 그 례물을 자기가 꿀꺽해버리지는 않았다. 권력 혹은 정치라는게 같고같은 소리인데 세상에는 이걸 가지고 기막히게 장사질하는 총아들이 득실거린다.
이들을 가리켜 정치적인 협잡배 혹은 간상배라 하며 침을 뱉는 얼빠진 사람들도 있다. 량길은 얼빠진 사람들에게 욕이나 침을 뱉고 다닐 사람이 아니였다. 그의 집에는 받은 례물 혹은 뢰물을 쌓아두는 고간이 있는데 그 고간에 있는 재물을 량길은 절대로 사취하지 않았다. 그는 례물들이 공짜로 생긴것이긴 하지만 결코 제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 례물들을 다른데 쓴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데 쓴다는것이 더
정확할것이다. 말하자면 이놈에게서 받은 례물을 저놈에게 쓰는 방법이라는건데 그런 식으로 량길은 인심을 낚는것이였다. 재물이란 정한 주인이 따로 없는 법, 빙빙 돌아가기마련인데 그런 재물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으뜸인 인심을 낚는것은 별로 량심이라는지 그러루한데 꺼리지 않는다고 보는것이 아마 북원 량가의 속심인지. 하긴 촌주로서 땅마지기도 부족하지 않은 량가였으니 그쯤 인심을 낚는것을 탓할수도 없거니와 야박한 그때에 재물에 유독 탐내지 않았다는것만도 량길의 됨됨을 알수 있다. 례물 또는 뢰물을 바치고 량길에게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당장 코등, 발등에 떨어진 불이 급해서 바친 재물이 아깝다고 생각지 않았다. 파리란 놈은 재수없이 사람이 먹는 밥도 빨고 사람의 피도, 땀도 빨아먹는다고 괘씸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파리는 파리니까 밥도 먹고 피도 빨고 땀도 빠는게 아니냐, 돈놓고 돈먹으며 재물놓고 재물먹는 세상에서 누가 누굴 탓한단 말인가 하는 제딴의 리치도 있겠거니와 유지들이 량길에게 찔러준걸 아까워하지 않는것은 그들대로 큰 리득이 있기때문이라 그것이 곧 신변의 안전 내지는
명예고수라는것이였다. 즉 있는 놈은 있는 놈대로 제 리득을 얻는다 이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량길이 있는 놈에게 하듯이 꼭 례물을 받고야 남을 도와주는것은 아니였다. 량길은 가난한 사람들도 잘 도와주었는데 거기에도 깜찍한데가 있었다. 아무나 턱턱 도와주는것이 아니고 또 아무때나 그러는것도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앞으로 쓸모가 있어보이는 녀석들, 례컨대 체격이 남다르다든지 재간이 있다든지, 하다못해 주변에 인심부스레기라도 흘리고 다니는 사람에 한해서만, 그것도 그들의 일생에서 잊혀지지 않을 그런 날, 례컨대
장례라든지 혼례식이라든지 환갑이라든지 할 때 도와준다. 상대가 요구치 않아도 꼭꼭 도와준다. 물론 이때 도와준다는 그것의 밑천은 남에게 받은 례물이나 뢰물이였다. 재미있는것은 이렇듯 제것이란 꼬물만큼도 쓰지 않으면서 재치있게 인심을 낚는 량길을 누구도 탓하지 않고 오히려 날이 갈수록 량길나으리, 길어른 한다는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량길이 인심을 얻는것이 어떤 뜻이 있어서거나 흉칙한 야심이 있어서 그러는건 아니라는데 그의 인심사기 내지 인심낚기의 특징이 있다. 량길은 그저 그렇게 사는것이 좋았을뿐이다. 남에게 업수임을 당하거나 짓밟힐 정도로 가난하지도 않으면서 또 남을 짓밟으며 사는것도 바라지 않으며 제것을 가지고 제 코아래구멍이나 건사하며 어찌다 생긴것을 빙빙 물수차바퀴 돌리듯 하여 인심을 얻으며 사는것이 량길에게는 좋았던것이다. (이게 사는 멋인지…) 하고 량길은 생각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