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2 회)
32. 기훤의 소굴을 떠나다 기훤은 궁예를 께름하게 여겼다. 고마를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궁예에게서 값을 받아내기는 하였지만 어쩐지 개 뭣에 보리까끄라기 끼운듯 하다. 애꾸를 보면 무언가 불안한것이 다가드는감이 자꾸 드는것을 도저히 털어버릴수 없었다. 《쫓아낸다!》 하고 부르짖기도 했다. 하지만 부두령들인 원회와 신훤이 궁예와 더불어 북치고 맞장구친다. (이 아이들이 도대체 뭣들 하는거야?) 기훤은 심복졸개를 슬그머니 보냈다. 뭐 별다른건 없다. 술마시고 무슨 제사놀음 벌린다는 졸개의 고자질이다. 《제사?! 건 또 뭐야?》 하면서도 알고싶은것이 있다. 어느 말뼈다귀를 제사지내든 알바가 아니지만 자기에 대한 뒤소리따위 같은것들이 없나 해서였다. 《수작들 할텐데…》 눈알이 굴러갔다. 그러다가 문득 그 눈알이 멎었다. 《뭣이라고?》 하고 기훤은 중얼거렸다. 《송악 사찬 왕륭이 닷새안으로 고마의 인질값을 보낸다고 하오이다. 하면서 주막에서 고마가 직접 나와 심부름군을 만나 값을 넘겨받아주겠다고 하오이다. 그리고 고마는 송악에 돌아가고…》 하고 이틀전에
송악에 보냈던 졸개가 하는 소리였다. 《그러라지.》 들을 때는 호물때기 엿삼키듯 해버렸다가 지금 불쑥 다시 들리는건 뭔가? (응, 그런 일이 있었지?) 기훤의 눈알이 다시 핑그르르 돌았다. 《일을 해야겠다.》 하고 기훤은 일어섰다. 고마의 몸값을 가지고오는 왕륭의 사자를 앞질러 홀치자는것이다. 그때부터 기훤은 궁예네들이 뭣을 하든 일체 간참하지 않았다. 대신 끄나불을 둬서너명 보내서 왕륭의 사람을 기다리게 하였다. 잡히면 좋고 안
잡혀도 그만이라는 거미줄늘이기식이였다. 기훤《장군》의 이 비상한 작전이 성공했다. 뭐 성공이고 나발이고 할게 없지만 《장군》은 그렇게 큰소리쳤다. 《고마는 안 나옵니까?》 하고 왕륭의 집사가 끄나불들에게 물었다. 《위임에 의해서…》 하며 제가 나왔다고 졸개는 대답했다. 《안됩니다, 고마를 직접 만나지 않고서는…》 하지만 기훤《장군》의 졸개들이 보통이 아니였다. 팔짱을 풀며 눈알을 부라렸다. 《이거, 왜 그러시오? 사람을 믿지 못하는거요?》 서슬이 딩딩해서 소리치며 졸개들은 여차하면 강짜라도 부릴 기세를 보였다. 그런 때 보면 왕륭의 집사는 꼭 철부지소녀요, 또 운수도 나빴다. 왕륭의 재물 관리하는데서는 빈틈이 없다는 소리를 듣는 사나이지만 이런 칼물고 뜀뛰기하는 마당에서는 말랑말랑한 계집애였다. 그는 고스란히 고마의 몸값을 몸에 지니고 온것을 후회할수밖에 없었다. 《그럼 좋소. 믿고 선불할테니 대신 들어가서 고마를 내보내주시오. 기다리겠소.》 옷을 벗으면서 그래도 세워보이는 자존심따위의 소리에 산전수전 다 겪은 기훤의 부하들이 꿈쩍할리 없었다. 며칠이 지나 기훤은 사람을 보내 그때까지 기다리고있던 왕륭의 집사에게 일렀다. 《고마는 살아났소. 하지만 그는 여기에 남겠다고 하오. 그러니 돌아가시오!》 집사는 물에서 건져낸 붕어처럼 입만 벌름벌름하다가 돌아가고말았다. 기훤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 《뭐, 술마시고 제사해? 누구걸로? 세상에 공짜는 없다!》 《장군》은 궁예와 고마가 노는것을 지켜보며 너털웃음지었다. 원회가 이 사실을 알게 된것은 기훤의 끄나불덕이였다. 그 끄나불은 궁예와 고마가 뭘 하나 몰래 지켜보던 사람인데 한얼을 받드는 제사하는걸
보고 감동되여 거꾸로 기훤의 행위에 대해 원회에게 불었던것이다. 《너절한 놈… 죽여버릴테다!》 궁예가 뿌드득 이를 갈며 일어섰다. 《거 뭐, 형님이 손을 어지럽힐것 있소. 그 돼지야 우리가 키웠는데 멱도 우리가 따야지요.》 하며 원회와 신훤이 나섰다. 《좋아. 대신 돼지주둥이는 내가 묶어놓지, 소리 못 치게.》 하며 문으로 다가가던 궁예가 멎어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고마는 눈을 내리깔고있었다. 《왜 그러시오? 구경이라도 하시지.…》 하고 궁예가 고마를 보며 의아해하였다. 고마는 고개를 들었다. 기훤은 집사에게 고마가 여기 남겠다고 한다 했다. 값은 빼앗고 사람은 내놓지 않고, 그러니 왕륭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결국은 기훤이 나로 하여금 왕륭이 아니라 궁예를 받들도록 하게 만드는구나. 이것이 하늘의 뜻인가? 하다면 좋다. 《가지 마시오이다!》 하고 고마는 말렸다. 궁예의 눈섭이 쭝긋거렸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돼지같은 놈을 그냥 두자는건 아니겠지?》 《작은 그릇 깨서 큰 그릇 더럽히겠소이다. 그만하시오이다.》 《기훤에게 버릇을 가르쳐주어 세상에 우리를 알리자는거요.》 하고 궁예는 머리통만 한 주먹을 눈앞에 쳐들어보였다. 《그러면 안되오이다.》 《안된다, 왜?》 《왜냐면 이 일은 기훤과 나사이의 일이기때문이오이다. 기훤이 나를 속이고 내 몸값을 가로챘기때문이오이다. 궁예형과 원회, 신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 아니오이까.》 《그게 어찌 동생의 일뿐이요. 일단 우리가 형제가 된 이상 우리들가운데 그 누가 모욕받았다면 그건 우리모두의 일이요.》 《궁예형의 말씀이 옳소.》 원회와 신훤도 격분하였다. 《고맙소이다.》 고마는 감동되였다. 《그럼 왜 우리가 기훤을 죽이면 안되는지 설명하겠소이다. 기훤을 죽여서 우리가 얻을것이 무엇이겠소이까. 설분은 되겠지만 그것이 답니다. 악을 징벌한다고 할수 있소이다. 그러나 지금 징벌할 악은 그것보다 더 큰것이 많소이다. 그러니 한갖 수면우에 던져진 돌멩이격이
되고말것이오이다. 잃은것은 무엇이오이까? 우리는 그저 날뛰는 무리에 불과하게 된것이오이다.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오이까? 아니오이다. 우리는 한얼을 받들어 큰일해보자는 사람들인데 일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세상에 더러운 이름을 남길수 없소이다. 기훤을 죽이는건 깨끗치 못하오이다. 기훤이 이 고마의 몸값을 두곱으로, 그것도 비렬하게 받아먹은것은 물론 고약한것이고 죽어
마땅하오이다. 그런 기훤을 우리가 죽이면 어떻게 되오이까? 기훤은 아직 저 혼자 살자고 하는것이 아니고 백여명의 무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그런다고 그 부하들은 생각하오이다. 이럴 때 우리가 그를 죽이면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소이까? 그건 그렇다치고 기훤은 앞으로
우리가 세력을 얻기까지 방패가 되여줄 사람이오이다. 그자체가 아니라 그에게 모여든 백여명의 무리가 그렇소이다. 그러니 기훤을 죽이는것이 옳소이까, 안 죽이는것이 옳소이까?》 고마는 궁예와 원회, 신훤을 둘러보았다. 궁예는 입술을 삐죽이 내밀었다. 《고마, 딴은 그럴듯한데… 너무 복잡하게만 생각하는게 아니요? 가령 우리가 이 기회에 기훤을 잡아족치고 이 무리를 거느리면 되지 않겠소. 기훤을 잡아죽였다고 해서 다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거요.》 《궁예형! 두령이 되고싶소이까, 당장?》 《아, 아니 그런건 아니고…》 《하하.》 고마가 웃었다. 《궁예형, 나는 궁예형이 이런 오합지졸같은 작은 무리나 거느릴 사람이 아니라고 보오이다. 이 무리를 쥐고 닥달시켜 큰 무리를 만들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러다말것이오이다. 궁예형, 큰사람은 큰일을 하셔야 하오이다.》 궁예는 낯빛이 풀렸다. 《추어주는구려, 그러니 손들수밖에. 하하.》 궁예는 솔직하고 단순한데가 있었다. 《말씀을 들어줘서 고맙소이다.》 《그런 말 마시오. 오히려 우리가 크게 깨달았소.》 궁예는 기분이 좋았다.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고 궁예가 물었다. 《아마 기훤은 우리가 어떻게 나오나 해서 잔뜩 도사리고있을것이오이다. 좀 둔하긴 해도 도적이 제발 저리다고… 그리고 모름지기 그도 머저리가 아닌 이상 벌써 필요한 대책은 세워놓았을것이오이다. 이런 때 우리가 격분을 못 참아서 일어났댔자 큰 리득이 없소이다. 이런 때일수록 모르는척 하고있다가 슬그머니 피하는게 좋소이다.》 《피한다? 그것만은 배짱에 맞지 않는데. 난 아직 피해본적이 없소.》 《딴 곳으로 간다면 어떻소이까?》 《글쎄 그렇다면…》 《제때에 물러설줄 아는것도 이기는것이오이다.》 궁예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고마는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에는 우리가 량길에게 가는것이 좋을듯 하오이다.》 《북원의 량길말이요?》 《그렇소이다. 알아보니 그 사람의 세력이 기훤의 세력보다 큰데다가 또 더 좋은건 제법 고구려를 되찾는다는 명분을 세운다던데 그건 우리의 뜻에도 맞는것이오이다.》 《북원에 량길, 남쪽에 견훤이 있는데 량길을 찾아간다? 조금 더 생각해보는것이 어떠하시오?》 《그게 좋겠소이다. 잘 알아보고 정하는게 좋겠소이다. 그럼 처음 의논한대로 원회를 견훤에게, 신훤을 량길에게 보내여 알아보게 합시다.》 《그게 좋겠소.》 기훤은 원회, 신훤이 며칠 어디 다녀오겠다는 말에 순순히 그러라 했다. 어디로 가느냐, 무엇때문에 가느냐도 따지지 않았다. 푼푼히 로자까지 내주었다. 떠밀며 웃음까지 짓는 기훤의 속심은 무엇인가? 이게 영 머저리인가, 아니면 없던 아량이 생겼는가? 께름직하다. 원회와 신훤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으니 궁예와 고마도 함께 떠나자고 했다. 《걱정말게.》 하며 궁예는 두사람을 떠나보냈다. 《내게도 다 생각이 있어. 쥐같은 놈, 어디 한번 걸쳐보라지. 그때엔 정말 성격 한번 살려보겠어.》 하고 궁예는 벼르었다. 고마는 만일을 생각해서 두사람에게 일이 여의치 않으면 북원에서 만나자고 일러주었다. 《그럴 필요없어. 마음놓고 여기로 다시 오라구. 기다릴테니…》 하고 궁예가 뻐기였다. 두사람이 떠난 뒤 이틀동안 별일없었다. 궁예는 아닌척 하지만 실상 긴장해있었다. 《형은 아직 기훤을 죽일 기회만 노리시오이까?》 고마가 물었다. 《그렇소.》 어딘가 뿌루퉁한 소리다. 고마는 궁예의 속을 들여다보았다. 가볍게 한숨을 쉬였다. 《아직 나를 믿을수 없소이까?》 《아니, 난 고마의 말이 다 옳다고 보오. 하지만 내 성격이…》 《그건 리해할만 하오이다. 하지만 성격이 아니오이다. 무언가 못 마땅한것이 있지요? 아마 너무 내 말대로만 하는것이 기분나쁘신
모양이오이다.》 궁예는 펄쩍 놀라 한참이나 고마를 건너보았다. 《별소리하는구만.》 《형은 여직껏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았는데 이 고마라는 녀석의 말에 너무 고분고분한다고 언짢게 생각하시오이다.》 《어허? 참, 고마는 사람의 눈이 아니시오. 나도 기분이 나쁠 때도 있지만 꼭 짚지는 못했는데, 그렇던가? 허.》 《마음놓으시오이다. 이 고마가 아무리 잘났다 해도 형님과 비할수는 없소이다. 비유하면 형이 큰 호수라면 이 동생은 호수에 흘러드는 하나의 샘이오이다. 내가 형이라는 호수에 새 물을 좀 보탰다고 해서 호수는 아니오이다. 샘에는 고기가 모이지 않소이다. 그러나 샘이 흘러드는 호수에는 큰 고기 작은 고기 다 모이오이다. 나는 형님을 도와줄수는 있어도 큰 무리를 다스리지는 못하오이다. 바로 거기에 차이가 있소이다. 형님은 부디…》 하고 고마는 속에 있던 소리를
풀었다. 호수, 아니 큰 바다가 되여야 한다. 그런데 용서와 양보라는게 없다면 바다는 말라버리고만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총명한것과 어리석은것이 반반씩 버물려있는것이다. 그게 사람이다. 조금씩 그 정도가 다를뿐이다. 너무 잘한것 못한것 딱딱 따지면 무서워하고 무서워하면 피해서 달아난다. 남는것은 아첨군들뿐이다. 이래서는 일이 안된다. 요컨대 고마는 될수록 풀어놓으라는 소리를 한것이다. 묶어서 풀어지는게 있고 풀어놓아서 묶어지는게 있다. 작은 무리는 묶어서 되지만 큰 무리일수록 풀어놓는것이 묶어놓는것으로 된다는 소리를 한것이다. 궁예는 그대로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실천을 해보지도 못했고 세력도 없었기때문일것이다. 《그런데 난 원래 성격이…》 하고 궁예는 걱정했다. 어느 정도 자기를 알고있는 말이였다. 《만약 형이 진실로 큰일하겠다고 하면 때로 성격도 누그릴줄 알아야 하오이다.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혼자서 하는 일을 택하는것이 좋소이다. 타고난 성격을 고친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하는 목적이 뚜렷하다면 그 목적에 다른걸 복종시켜야 하지요. 성격이라는것도 습관이 되면 고쳐질수도 있소이다. 대신 자제라는게 항상 필요하지요.》 《그래, 그래.》 궁예는 고개를 찧었다. 이러는데 뜻밖에도 기훤이 왔다. 혼자 온게 아니고 열댓이나 되는 졸개들을 거느리고있었다. 무슨 일이?! 궁예와 고마는 긴장해졌다. 《그래, 대사님.》 하고 기훤은 여느때와 달리 거슬리게 나왔다. 《우리한테 검술교관으로 있으시라 하였는데 어찌하시려오? 이렇게 술이나 축내고 쑥덕공론이나 하시려오?》 궁예는 그 소리에 벌써 한눈이 지릅떠졌다. 《뭘 말하자는거요?》 《찍어 말하건데 당장 우리한테서 떠나라는거요!》 기훤이 입술에 돼지비게같은 웃음을 잔뜩 바르고 흔들거렸다. 《떠나라? 그거 솔직해서 좋소이다. 그럼 떠나지요. 헌데 셈놓을게 있소!》 《셈, 무얼?》 《왕륭에게서 홀쳐낸 고마의 몸값을 내놓으시오.》 《응, 냄새맡았나? 그건 내거야.》 《그게 어떻게 네거냐?》 《뭐야?》 《곱게 말할 때 내놓는게 좋소. 그렇지 않다가는 무사치 못하리다. 괜히…》 《이 이, 애꾸놈이 못하는 수작이 없구나.》 기훤이 게밥을 물고 펄펄 뛰였다. 《야들아! 뭘 우두커니 보고만 있느냐? 이 두놈을 당장 때려 내쫓아라, 빨리!》 기훤《장군》의 엄명이 떨어지기 바쁘게 기다린듯 무리가 왁 달려들었다. 격투가 벌어졌다. 궁예는 자기에게 덤벼드는 졸개의 이마빡을 주먹으로 탁 쳐서 그 자리에서 즉사시키고 고마에게 달려드는 놈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대적도
웬만해야 할 재미가 있다. 비루먹은 똥강아지 다루듯 하려던 기훤의 졸개들은 궁예의 범같은 기상에 사타구니에 꼬리를 집어 감추었다. 궁예가 어느새 석장을 꼬나들고 기훤을 쫓았다. 기훤이 《장군》체면을 꼬리에 달고 굴러갔다. 궁예는 두목의 뒤를 따라 달아나는 무리들을
파리잡듯 했다. 거대한 쇠바퀴가 굴러가며 범아재비들을 깔아뭉개듯 했다. 고마가 눈에 달뜬 궁예의 앞을 막아섰다. 《그만하시오이다!》 《막지 마시오! 고마, 내 오늘 기훤을 죽여버리고야말겠소. 어따 대고…》 펄펄 뛰는 범을 고마는 애써 가로막았다. 《안되오이다. 어서 여길 피하시오이다. 자, 어서!》 고마는 궁예를 떠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