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0 회)
30. 의 합 고마는 자기의 처지가 퍽 맹랑하게 되였다고 생각했다. 갈 곳이 없었다.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기훤에게 이제 더는 붙어있을수 없게 되였다. 그렇다고 왕륭에게 가고싶은 생각도 별로 없었다. 그 사람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고마는 왕륭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별로 그를 원망할 일은 없다. 기훤이 왕륭이 어쩌고저쩌고한 소리는 그대로 귀에 담을 소리가 아니다. 왕륭은 이달말까지 여유가 있지 않는가. 그러니 탓할수도 없는것이다. 일이 이렇게 된바치고 좀더 기다려볼가? 그래, 이달말까지 왕륭이 어떻게 나오는지 두고보자. 왕륭에 대해서 이번 기회에 끝까지 알아보자. 그 사람이 정말 나를 하찮게 보는지 어쩌는지… 가까이 있을 때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물에 빠진 놈 지푸라기잡는 격이다. 맹랑하게 됐다. 참 가만, 사람의 일이란 또 모른다. 더구나 왕륭은 여느 사람과 다르다. 부소압일대에서 왕륭 하면 그래도 다들 알아준다. 재물이 많다고 해서만 아닐것이다. 그런 사람이 정말 쬐쬐하게 놀가? 기다려보자. 만일 왕륭에게서 좋은 소식이 오면 싫든좋든 그에게 의거하는거다. 세월에 실려 사람 변하는걸 기다린다는 정 구차한노릇을 해보는수밖에… 그렇다면 그간 어디에 있을것인가? 여기에 그냥 버티고있을수 없지 않는가. 하, 기막힌 일이다. 일도
너절하게는 돼버렸군. 이 고마의 신세라는게 이러다 말것 아닌가? 내가 찾는 영웅은 언제나 나서려는가. 내가 너무 서뿔리 세월을 속단한건 아닐가? 고마는 문득 궁예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를 찾아가 말시켜볼가? 낯선 그 사람은 원회, 신훤과 벌써 짝자꿍하는걸 보면 뭔가 색다른데가 있는것 같다. 이왕 살려주었으니 이달말까지 붙어있게 해주십쇼 하고 여쭈어봐? 하, 기막히게 거룩한 꼴이야. 그러면 그가 어떻게 나올가? 참, 신훤에게 내가 뱉아놓은 말을 그가 어떻게 생각할가? 붉으락푸르락? 그런 녀석이면 뭐 엿주고 떡주고 할게 없지.
그런 녀석이라면 에라, 시원하게 떠나가버리는거다. 어쨌든 이제는 엎지른 물그릇이다. 내 발로 궁예를 찾아가보자. 고마는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때 문이 벌컥 열리고 궁예가 들어왔다. 고마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이 사람 기다렸나? 그것 참.) 고마는 궁예의 낯색부터 살폈다. 별로 우락부락하는 눈치는 아니다. 그럼 은혜가 어쩌고저쩌고 따지려는가? 괜찮아. 궁예는 고마를 지켜보았다. 그의 볼이 을근을근거렸다. 《거기서!…》 하고 궁예는 손가락으로 찌르듯이 고마를 가리켰다. 《기훤에게 큰일할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했다는게 옳소?》 아따, 이 친구 귀가 보배로군. 뭐 나를 보고 거기라고? 나를 얕잡지도 높이지도 않는다. 애매한게 묘하다. 고마는 엉거주춤했던 자세를 풀고 자리에 앉았다. 《그랬소!》 《그랬다? 그럼…》 하고 궁예는 눈을 내리깔며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다시 번쩍 고개를 쳐들며 물었다. 《나를 도와줄수 있소?》 칼날같은 물음이였다. 이것 봐라! 고마는 뜻밖의 물음에 놀랐다. 별안간 찌르르한 흐름이 등으로부터 솟구쳐 머리우로 치솟았다. 두사람은 서로 마주보고있었다. 방에는 정적이 깃들었다. 얼마후 고마가 눈길을 풀며 물었다. 《대사는 나를 믿소이까?》 《믿소.》 《뭘 가지고?》 《당신이 큰일을 해보려고 하기때문이요. 나 역시 뭔가 큰걸 해보려는 사람이니 우린 서로 같고같은셈이요.》 《내가 거절한다면 어찌하실셈이오이까?》 《난 한번 하겠다고 한건 끝까지 해내고야마는 성미요.》 《그것 좋은 성미이시오이다. 허나 늘 그렇게 된것은 아닐텐데요?》 궁예는 한쪽뺨을 떨었다. 《도선스님이란분이 있었소. 나는 그분에게 뭘 배우려고 했소. 그런데 거절하더군. 하지만 난 끝내 배웠소.》 《도선스님?! 그분을 아시오이까?》 《아오. 난 세달사에 있었는데 두루 알게 된거요.》 고마는 속으로 웃었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더니 이 사람이 왕륭과 련결된 도선스님을 알고있을줄이야. 고마는 궁예에게 가는 마음이 차츰 누그러지는것을 느꼈다. 《하나 물읍시다. 고마! 당신이 말하는 큰일이란 뭐요?》 궁예의 물음에 고마는 숨을 들이키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왜 그런걸 자꾸 물을가. 나를 떠보려는가? 그런것 같지는 않다. 아쉽게도 한눈이지만 그 눈빛이 번개불같이
번쩍이는걸 보라. 그리고 그 눈은 얼마나 밝은가. 사슴의 눈동자다. 이런 사람이 시시하게 놀가? 그럼 말해준다? 조금 더 두고보자. 별로 비밀도 아니지만 만일 내가 바라던 그런 사람이라면 아직 비틀어보았자 안될게 없을테니까. 《안됐소이다. 대사, 난 대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오이다.》 하고 고마는 고개를 돌렸다. 궁예는 비웃었다. 《기훤은 알았소?》 《몰랐소이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기훤에게 큰일을 해주겠다고 하지 않았소?》 《사람이 때로는 실수할수도 있는 법이오이다.》 《실수라… 그럴수도 있지. 당신 혹시 날 깔보는건 아니요?》 《무슨 말씀?》 《그럼 다시 묻겠소. 나하고 흐지부지할 생각을 마시오. 난 그런건 질색이요. 그래 당신의 큰일이란 무엇이요?》 고마는 빙긋 웃었다. 《먼 후날에 가서도 잊혀지지 않을 일이오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까놓고 말하시오.》 《바꾸는것이지요.》 《바꾼다, 뭘?》 《그거야…》 《나라를?》 꽤 급한 성미다 하며 고마는 다시 웃었다. 그러면서도 궁예가 한 말을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바꾸는것도 여러가지다. 그런데 궁예가 대뜸 나라라고 한것이 고마를 저으기 놀래웠다. 이 사람은 그런 야욕을 품고있구나. 고마는 손벽치고싶었다. 《하, 하하…》 궁예가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는 고개를 들고 웃어제끼는 궁예를 바라보았다. 《역적이 되겠다 그 소리요?》 궁예가 웃음끝에 따졌다. 고마는 고개를 저었다. 《역적이라니?! 나는 겨레에게 충신이 될것이오이다.》 《성공하면 충신이요, 실패하면 역적이지.》 《역적이 될 생각은 해보지 못했소이다.》 《꽤나 배짱있어하는 소린데 누구나 처음에 그러지.》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그러지요.》 궁예는 눈을 쪼프렸다. 성한 사람과 달리 한눈 궁예가 눈을 쪼프리자 이상하게 보였다. 온 얼굴이 딴 사람으로 돼버렸다. 《나는 신라라는 나라를 없애버릴테요!》 궁예가 씹어뱉듯 말했다. 고마는 눈길을 돌리며 생각하였다. 이것이 궁예인가? 솔직하고 대담한 사나이이다. 이것은 영웅의 기질이다. 이런 기질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우두머리가 될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람은 내가 찾던 사람인가. 《나를 도와주겠소?》 궁예가 물었다. 《바라신다면…》 그제야 궁예는 허리를 펴고 웃었다. 그것은 마치도 어린아이의 웃음과 같았다. 고마는 웃는 궁예를 새삼스럽게 보았다. 칼날같이 곧은 코마루, 찍어놓은듯 한 입술. 좋은 생김이다. 한눈 멀지 않았다면 참으로 기가 막힌 미남일것이다. 이윽하여 궁예가 퍼그나 느긋해진 소리로 물었다. 《고마! 그래 당신은 무엇으로 나를 도와줄수 있소? 병법이요 아니면…》 고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재부요? 아니면 세상을 놀래우는 무슨 도술같은것이라도 있소?》 고마는 벙긋 웃었다. 《나는 겨레의 얼을 깨쳤소이다. 그건 큰 힘이지요. 겨레의 얼, 그 한얼을 되살리면 못할 일이 없을것이오이다.》 《한얼?! 그게 뭐요?》 《한얼은 일찌기 환인, 환웅, 박달임금께서 하늘의 뜻을 풀어 이룩하신것이오이다. 한얼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저 불함산(백두산)자락에서 살아가는 만리지경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피와 살처럼 깃들어있는것이오이다.》 우리는 남의 땅에서 살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오지 않았다. 바로 이 땅에서 조상대대로 살아왔다. 우리들의 삶의 터, 이 땅은 박달임금때부터 시작하여 추모임금에 이르기까지 내리내리 우리 선조들이 일구고 가꾸고 기름지은 땅이다. 이 땅은 우리의 땅, 한얼이 숨쉬는 땅이다. 겨레의 얼 한얼은 우리들의 하늘과 이 땅 그리고 이 하늘, 이 땅에서 사는 사람 이 셋의 참된 조화를 일컫는 넋이다. 한얼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래일도 이 땅에서 숨쉬며 늘 살아있다. 때로 머나먼 다른 곳에서 모진 추위처럼 낯선 넋이 옮겨올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 땅이 가을끝에 하늬바람불듯, 텅 빈 곳에 눈보라 몰아치듯 보일것이다, 사람이 살수 없는 땅처럼. 하지만 봄이 오면 싹이 트고 여름이면 무성하고 가을이면 풍성해지듯이 한얼은 늘 우리들과 함께 살아있다. 이 땅이 있는 한 겨레는 있고 겨레가 있는 한 겨레의 얼 한얼은 있으며 이 땅에 사람이 사는 한 한얼은 숨쉬고있는것이다. 다만 어리석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따르지 못할뿐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스스로 불행해지고 결국 가련하게 남의 얼을 걸치고 죽어갈뿐이다. 버들가지 피여나는 개울가에 얼음장을 녹이며 돌돌 흐르는 물처럼 고마는 죽 이야기를 풀었다. 《모를 소리요. 세상사람들이 알고있는건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면 유교, 도교 같은것이요.》 하고 궁예는 기웃하며 말했다. 《바로 불교, 유교, 도교! 그걸 아울러 합친것보다 더 크고 밝고 힘있는것이 바로 한얼이오이다.》 《그런걸 내가 왜 모르오?》 《그건 대사님탓이 아니오이다. 이 나라 돼가는 꼴이 그렇게 만든것이오이다.》 설레설레 궁예는 머리를 저었다. 《잘 모르겠소. 그건 그렇고, 다른걸 물어봅시다.》 《무엇이오이까?》 궁예는 그답지 않게 잠간 주저했다. 고마는 기다렸다. 《어서 말씀하시오이다.》 하고 고마는 참지 못하고 부추겼다. 궁예는 히죽이 웃었다. 그때 보면 정말 천진한 아이같았다. 《나는 당신이 보다싶이 한눈이요. 이런 내가… 천하를 다스릴수 있겠소?》 고마는 궁예의 솔직함에 다시한번 감탄했다. 궁예는 정말 힘든 말을 했다. 아마도 그런 근심이 늘 그를 억누르고있었을것이다. 그런 속마음을
고마에게 한것은 그가 고마를 깊이 믿는다는 의미다. 《이 고마는 대사님을 도와 꼭 큰일할수 있게 하겠소이다.》 《고맙소! 하지만 난 큰 결함이 있단 말이요.》 궁예는 한숨을 쉬였다. 《대사님, 때로는 결함이 우점이 되고 우점이 결함으로 되기도 하오이다. 딱 멎어있다면 모르거니와 굴러가는 세상일이란 다 그런것이오이다. 난 능히 대사님의 안타까움을 우점으로 만들수 있소이다.》 고마는 우쭐해지고있었다. 궁예가 뻥해지도록 한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부터 기분이 붕 떴다. 《어떻게 말이요?》 하고 궁예는 이거 모르겠다는듯 물었다. 고마는 또 줄줄 풀어놓았다. 사람은 대체로 평등하길 바란다. 이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그래서 저보다 잘난것 같으면 시기질투하고 못난것 같으면 깔본다. 다
그런건 아니고 대체로 웃사람들이 그렇다는것이다. 만일 대사께서 자기 결함을 늘 잊지 못하고 그걸 감추려고 할것이 아니라 보란듯이 드러내놓고, 그러면서도 남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들을 친밀하게 대해주면 사람들은 성한 사람보다 더 따를것이다. 왜냐하면 대사에게는 결단력과 용맹, 무술이 있기때문이다. 대사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눈때문에 업신당할테지만 대사가 겸손하게, 사람들을 친근하게 대해주면 오히려 결점이 우점으로 될것이다. 그리고 다른것, 대사는 결함으로 하여 이기게끔 되여먹었다. 왜냐? 사람의 나쁜 습성의 하나가 남을 깔보려고 하는것인데 이건 약점이다. 사람을 업신여기고 깔보는 사람은 언제나 실패하기마련이다. 바로 보지 못하기때문이다. 그러니 대사는 실패할 전제를 가진 상대와 싸우게 되는데 어떤가? 그런 사람에게 지겠는가 이기겠는가? 물론 이긴다. 《자, 그러니 대사께서 근심하시는 결함은 곧 대사의 우점으로도 되오이다. 큰일하는데는 그런 결함을 때로는 일부러 만들 필요도 있소이다.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가 모이지 않소이다.》 하고 고마는 말했다. 궁예는 기분좋게 고마의 말을 들었다. 모르고있은건 아니다. 그러나 남이 말해주니 더 옳다고 듣게 되였다. 《대사께서는 신라를 쳐없애겠다고 하였소이다. 저도 같은 생각이오이다. 만약 대사께서 나를 받아주고 나의 말을 받아준다면 나도 대사께서 천하를 거느릴수 있게 해줄 자신이 있소이다.》 궁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고마앞에 두무릎을 꿇었다. 《스승으로 모시겠소. 도와주시오.》 고마도 따라 궁예와 절하였다. 그리고나서 궁예는 그길로 나가 원회, 신훤과 함께 술과 안주를 날라왔다. 고마는 궁예에게 좋은 날을 잡아 한얼을 기리는 제사를 차리게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