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7 회)
27. 싸우고 친해지다 기훤이란 사람은 출신이 보잘것없는 사람이였다. 그러나 사람이 똑똑해서 상전의 귀여움을 받았다. 그의 상전은 한주의 이찬 김요와 결탁되여있었는데 김요는 진성녀왕 1년인 887년에 모반하다가 사형되였다. 그렇게 되자 기훤의 상전도 따라서 죄를 받았고 이때 기훤은 달아나 개산으로 왔다. 기훤은 당장 먹고살기 위해 도적질을 시작하였다. 차츰 무리가 생겨났다. 그런데 무리가 불어나는걸 기훤이 바라는것이 아닌데도 이렇게저렇게
불어났다. 기훤은 처음에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차츰 리득이 생기자 그렇거니 했다. 차츰 좋아하기까지 하였다. 기훤이 자기 무리가 불어나는걸 좋아하지 않은것은 다스리는걸 몰라 당황했기때문이지 다른것은 아니였다. 다스리는걸 알게 되자 《그것도 좋다!》 하고 손벽을 쳤다. 기훤은 용케 자기 무리를 다스리는 법을 알게 되였는데 그것은 극히 단순한것이였다. 그는 자기 상전이 어떻게 그 많은 노비들을
거느리고있었는가를 돌이켜보는 과정에 딴것없이 먹을것이 많으면 무리가 복종하게 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먹을것만 있으면 무리가 아무리 불어나도 좋다. 리득도 있으니까. 하지만 먹을것이 없으면 그때는 끝장이다. 기훤은 자기의 경험으로 사람이란 먹을것, 입을것만 주면 그것으로 만족하여 복종한다는것을 알게 된것이다. 흔히 개를 욕하지만 사람도 개나 같다. 주면 좋아하는거요, 안 주거나 줄것이 없으면 나빠하거나 떠나가버리는것이다. 어찌 천하다는 노비만 그렇다 하랴. 한다하는 대감이요 뭐요 하는것도 역시 먹을걸 주니 임금을 따르는것 아니냐. 먹을알이 없어보지? 무슨
충신이요, 무슨 왕이랴. 결국 대감이요 뭐요 하는것도 왕의 노복이 아닌가! 먹을것만 있으면 무리를 다스릴수 있다 하고 기훤은 제법 큰 리치를 깨달은듯 으쓱하였다. 기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먹을것을 쌓아나갔다. 도적질이 기본이였다. 이럭저럭 먹을것이 쌓아지자 무리들이 불어났다. 별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모여들었다. 살기가 어려워 집을 떠난 사람들이였다. 기훤은 그들을 모아 다시 도적질에 내몰았고 그리하여 무리는 무사히 불어 거의 백여명에 이르렀다. 도적질은 혼자서 하는것보다 무리지어 하는것이 훨씬 편안하고 또 리득도 많았다. 혼자 또는 둬서넛이
도적질하는 경우에는 어정쩡하게나마 나쁜짓 한다는 죄의식에 시달리지만 무리지어 하면 우선 그런 죄책감이 없어지는게 좋았다. 까짓, 염라대왕에게 가는 길도 짝패있으면 두렵지 않을테지 하는 심리가 작용한다. 무리가 불어나자 세력이 생겼고 세력이 생기자 체모가 갖추어졌다. 《장군!》 무리는 기훤을 이렇게 불렀다. 대개 만명 군사를 거느린 사람을 일컬어 장군이라 하는데 도제 백여명 거느린, 그것도 도적들을 거느린 기훤이 장군이라니?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기훤도 그렇고 졸개들도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좋아하였다. 사람은 뭔가 자기를 변명하기 위해 거짓말을 곧잘 꾸며낸다. 추대라는 말이 있다. 밀어서 올려붙인다는 뜻인데 이때에 거짓말이 많이 생긴다. 어쨌든 《나는 보잘것없는 사람이 아니다.》 하는걸 증명하기 위해 《내가 모시고있는 사람은 이러이러하다.》 하고
실제보다 엄청난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하는것이다. 제가 거짓말을 만들어내고는 차츰 그 거짓말에 꾸벅 죽는게 사람이라는 이상한 존재의 특징이면 특징이다. 하여튼 기훤은 무리에서 《장군》이다. 그럴만한 공적이나 실력이 있어서 된것이 아니고 무리가 만들어서 씌워놓은 이를테면 감투 같은것이였다. 그 감투의 제작자는 기훤의 수하에 있는 원회와 신훤이라는 사람이다. 기훤의 졸개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떠돌이 혹은 무지렁이들이였지만 이 두사람은 좀 달랐다. 두사람은 글도 알았고 당시에 글을 어렵게 깨친 사람들이 그러하듯 무예도 익힌 사람들이였다. 벼슬아치는 못하고 구실아치놀음은 좀 하였는데 원래 세상물정 좀 아는 놈이 그런걸 한당대 해먹겠다고 할 놈이 없다. 돼먹지 못하게 글쎄 나리들보다 물정 빤히 알아가지고 《이러이러한건 여사여사하지 않느냐.》 하고 상전에게 시비가르다가 격노한 상전이 냅다 던지는 부채끝에 얻어맞고… 그랬으면 죽었소다 해야 할걸 발딱 성난김에 모해하여 그만 상전이 매를 맞아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구실아치가 감히 어따대고 웃벼슬아치를 뭇매질하다니, 그것도 거의 죽게. 아무리 림종에 이르러 숨이 가르랑거리는 신라라고 해도 용서 못한다. 그러니 갈 곳 어덴가, 죽기는 싫고… 하여 달아나온것이 기훤의 턱밑이다. (이왕 이렇게 된바치고는…)하고 원회와 신훤은 생각하였다. 이녀석을 좀 크게 만들자! 하여 기훤을 《장군!》 하고 불렀다. 거짓말이지만 어딘가 편안한데가 있었다. 아무리 피치못해 도적이 되였어도 하다못해 가짜장군쯤 밑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먹을것밖에 모르는 이 식충같은 놈이 그래도 높이 불러주면 또
몰라, 미꾸라지 룡되겠는지…》 하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뭘 좀 안다는 녀석들이 자기를 《장군》이라고 불러주는데 우쭐하여 기훤은 그 두사람을 부두령으로 삼았다. 부두령으로 삼아 무리를 관리하게 하고 저는 그 두사람우에서 《장군》이 되였다. 원회와 신훤이 무리를 다스리면서부터 무질서한 오합지졸이 차츰 체모를 갖추어갔다. 무리를 크게 두개 대로 나누고 부두령들이 각기 방향을 맡아 도적질을 하게 하였다. 이를테면 전문화시킨것이다. 그러니 기훤의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갔다. 궁예가 나타나기 전까지 원회와 신훤은 열심히 저들의 일에 몰두하고있었다. 이쯤하면 무서울것이 없다 하고보니 《이게 단가? 나나 자네가 이렇게 될걸 바랬는가?》 하는 아쉽고 께름한 찌꺼기도 없지 않았다. 어쨌든 기훤의 무리가 이 일대에서 범노릇은 못하더라도 이리노릇쯤은 하게 되였다. 이때 땅! 하는 소리가 났다. 어떤 놈이 나타나서 감히 기훤《장군》의 발가락을 때려놓은것이다. 어떤 놈이란 다름아닌 궁예였다. 궁예에게 얻어맞은 기훤의 졸개들은 그대로 제 소굴로 달아났다. 달아나면서 어떻게 하면 두령, 아니 《장군》에게 매를 맞지 않겠는가 하고 궁리하며 서로 입을 맞추었다. 《괴물이 나타났다!》 하고 떠들었다. 그놈에게 굉장한 보물이 들어있는 중태기가 있는데 결사적으로 그걸 빼앗으려다가 한놈이 죽었다고 하였다. 《아앙?! 어떤 놈이 감히 이 기훤장군의 부하를 죽인단 말이냐. 참을수 없다. 복수다!》 기훤《장군》의 눈이 토끼눈처럼 새빨갛게 되였다. 피눈이다. 《장군》이 대노한것은 물론 죽은 놈에 대한 복수때문이 아니였다. 외눈깔스님이 가지고있다는 굉장한 보물이 더욱 탐났다. 그렇다고 그것때문에 《장군》이 위신없이 노한척 한다는걸 보여주어서는 안된다. 선불맞은 범처럼 날뛰는 《장군》을 보며 원회와 신훤이 나섰다. 《장군! 우리들이 직접 내려갔다 오겠소이다.》 《그래, 톡톡히 보여주어야 한다. 이 기훤장군을 건드렸다가는 무사치 못하다는걸…》 두사람은 장군의 속을 들어갔다 나온것처럼 뻔히 알고있지만 웃지 않았다. 산을 내려오면서 원회는 《또 한놈 잡아봐?》 하며 웃었다. 신훤은 따라 웃으며 말했다. 《빨리 죄를 지어야 지옥에 가겠는데 몸살나지?》 두사람은 웃음을 거두고 약속이나 한듯 입을 오리주둥이처럼 삐죽이 내밀었다. 그들은 다른걸 생각하고있었다. 뜻밖에 나타난 괴물에 대해서는 졸개들의 눈빛과 허둥거리는 말투를 보고 절반쯤은 거짓말이라는걸 알고있었다. 그러면서도 나선것은 다른 일때문이였다. 벌써 한달전에 그들은 역시 주막집에서 한사람을 붙잡았다. 《굉장한 산삼이 있다.》 해서 벼락치듯 덮쳤다. 잡고보니 진짜 산삼이 있었다. 《그건 내것이 아니요.》 하고 물건임자가 말했다. 《그럼 누구거냐?》 《사찬 왕륭어른의것이다.》 《거짓말이 난당이로구나. 네가 삼캐는걸 우린 다 봤다.》 《나는 송악 왕륭의 사람 고마다. 그 사람에게 삼을 캐주는 심마니다. 그러니 내가 캔 삼은 곧 왕륭의 삼이다.》 《리치풀이 잘한다. 어쨌단 말이냐? 산삼을 건사하고 리치풀이 잘하는 저놈을 죽여라!》 하고 기훤《장군》은 명령하였다. 원회와 신훤은 왕륭에 대해서 알고있었다. 그보다 고마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장군》의 뒤로 슬그머니 가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살려두는게 좋겠소이다, 장군!》 《장군》이 뒤돌아보았다. 《왜?》 《왕륭은 대단한 부자입니다. 의리도 있고 의협심도 있다고 하오이다. 그러니 심마니를 살려두면…》 《그래그래. 인질로 잡아 값을 올그어내자.》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장군》은 역시 장군답게 한개의 돌로 두마리 새를 잡을 궁냥을 번개처럼 해낸것이다. 《좋다. 저놈은 살려둔다.》 하고 《장군》은 임금님처럼 거룩하게 선포했다. 왕륭에게 소식을 띄우고 기다렸다. 벌써 한달이 가까워온다. 그런데 《돈을 가져오라. 그러면 너의 심마니를 살려준다. 안 가져오면 죽인다.》는 《장군》의 으름장은 가다가 말았는지 이렇다할 반응이 없다. 《사람을 막 잡아메치는게 아니다.》 하고 원회와 신훤은 후회하였다. (이녀석이 춰주니까 너무하지 않아? 이제는 사람목숨까지 도적질하자는거야?) 하는 생각이 두사람에게 들었다. 《장군》기훤에 대해서이다. 《어쨌든 가보자!》 하고 원회는 신훤에게 말했다. 그들은 익숙한 산길을 내려 주막으로 향했다. 한편 궁예는 밤새껏 술을 퍼넣으며 주막집주인이 말한 도적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꼬꾸라져 잠이 들었다. 문두드리는 소리에 주인이 궁예를 흔들었다. 한번 잠들었다 하면 업어가도 모르는 궁예가, 거기에다 밤늦도록 술을 푼 그가 쉽게 깨여날리 없었다. 바빠난 주인은 찬물 한바가지를 궁예의 얼굴에 뿌렸다. 그제서야 궁예는 깨여났다. 《뭐야?!》 문두드리는 소리가 더 요란스럽게 울렸다. 당장 문이 깨져나갈것 같았다. 궁예는 석장을 집어들고 빗장을 열게 하였다. (무리지어 들어온다. 그러면 단매에…) 하고 생각하며 궁예는 석장을 들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자 더운 바람만 들어왔다. 다만 한사람이 열린 문가에 서서 궁예보고 말했다. 《우린 당신을 만나겠다.》 궁예는 코웃음쳤다. 제법이다. 례절 다 차리고, 도적들이… 혼쌀났는가? 궁예는 주인에게 눈을 끔벅해보이고 문밖으로 나섰다. 어둑한 문밖에 여러개의 홰가 타오르고있었다. 그가운데 한사람이 팔짱을 끼고있었다. 《당신이 우리 사람을 죽였소?》 하고 키가 조금 작고 몸매가 다부진 팔짱낀 사람이 물었다. 《그렇다. 내가 죽인게 아니고 저희들끼리 쳐서 죽었다. 그래 설분하러 왔냐?》 궁예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 두사람은 빙그레 웃었다. 《무례하시군. 우리 통성이나 하고봅시다. 나는 원회 그리고 이 사람은 신훤이요. 우리는 기훤장군의 부두령들이요.》 뭔가 다르다. 입가지고 싸우러 왔나? 입이면 입, 손이면 손, 발이면 발. 《나는 궁예라는 사람이요, 원래는 세달사의 스님이였소만…》 《아, 스님이군. 헌데 어떻게 여기에 왔소?》 하고 원회가 물었다. 《그거야 당신들이 알바가 아니지요. 나는 떠돌아다니는 객승이요.》 신훤이 한발 나섰다. 《우리 아이들에게 듣자니 대사께서 싸움개나 하시는 모양이시던데 배울가 해서 왔소이다.》 《거 좋소. 그러니 싸워보자, 이것이오?》 《싸우자는것보다 서로 겨루어 가르침을 받자는것이요.》 《마찬가지다. 하여튼 좋다. 입이면 입, 발이면 발…》 신훤이 칼을 들고 궁예는 석장을 들었다. 아직 사방은 어두웠다. 홰불을 밝혔다. 이리하여 주막집앞에서는 때아닌 시합, 아니 싸움이 벌어졌다. 멀리서 컹컹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궁예가 먼저 석장으로 신훤의 검을 다쳤다. 결투다. 싸움이 붙었다.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 검과 석장이 부딪쳐내는 날카로운 소리… 두사람은 상대를 쓰러뜨릴 기회를 노렸다. 벌써 여러번 맞붙었다. 궁예는 술기운에 그러는지 어딘가 휘친거리는듯 한데 그러면서도 어찌나 석장을 교묘하게 쓰는지 마치 요술지팽이가 노는듯 하였다. 갈수록 궁예는
신바람났다. 한켠 신훤은 차츰 힘이 빠졌다. 원회는 두사람이 싸우는걸 벙해서 보기만 했다. 싸움을 구경하면서 그는 생각했다. 저 애꾸가 석장이 아니라 칼을 들었다면 신훤이 벌써 결딴났을것이라고. 궁예는 별로 신훤이 상대로 되지 않았다. 몇번 석장을 놀려보고서 싱거운 생각이 들어 이제는 그저 놀리듯이 대적하고있었다. 원회는 신훤의 검술을 알고있었다. 그닥 눈부시다고는 할수 없으나 신훤의 솜씨라면 당당히 경군의 검수로까지는 되리라고 보았는데 궁예의 솜씨를 보니 기가 막혔다. 원회는 소리쳐 싸움을 말렸다. 《대사! 그만하시는게 어떠시오?》 궁예는 석장을 땅에 댔다. 신훤도 다행인듯 이마의 땀을 훔쳤다. 원회가 군사들처럼 한무릎 꿇고 궁예에게 말했다. 《대사! 우리들의 검술교관이 되여주시오이다.》 궁예는 피씩 웃었다. 《날더러 도적들의 교관이 되라? 난 싫소.》 《그건 우리를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시오이다. 보아하니 대사께서도 이 세상에 별로 용납되지 못할것 같소이다.》 그 소리에 궁예는 찔끔했다. 그래도 고개를 저었다. 《싫소!》 원회는 빙그레 웃었다. 《그럼 그만둡시다. 우리 서로 술이나 마시는것이 어떠하오이까?》 《그거야 좋지.》 하고 궁예는 선뜻 대답하였다. 그들은 인차 통했다. 며칠후에는 주변의 사찰로 가서 어울려 놀기까지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