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회) 

24. 외로운 나비

 

최치원의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고 한다. 자라는것은 본이름외에 어른이 된 다음에 부르는 별명으로서 실제이름을 피하는 풍습으로 나온것이라고 한다. 중국적인, 유교적인 관습인바 《례기》 곡례편에 이르기를 남자 20살, 녀자 15살에 결혼하여 비녀를 꽂으면 자가 붙으며 자가 붙은 뒤로는 군부(君父), 존장(尊丈)앞에서는 실제이름이 쓰이나 동년배, 벗, 그외 사람들에게는 자로 불리운다고 하였다.

치원의 자에서 해운이란 잘 모르겠으나 고운을 보면 치원이 자기자신에 대해서 아주 외롭게 보았던것 같았다. 외로운 구름이란 최치원의 성격과 그 일생에 대해서 엿볼수 있게 하는 자이다.

신라 헌강 11년인 885년 3월에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돌아와 시독겸한림학사수병부시랑(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이 되였다. 왕이나 왕자에게 학문, 외교, 명령, 군사관계의 일을 보필하는 이를테면 고문격이 된것이다.

신라가 대국, 《황제의 나라》로 사대하는 당나라에서 과거급제하고 거기서 현위라는 벼슬에까지 올랐던 치원으로서는 별로 만족하지도 않았고 섭섭하지도 않은 자리였다.

치원은 귀국후에 우울해졌다. 고국 신라조정의 형편이 그렇게 만들었다. 치원으로서는 운이 나쁜셈이였다.

귀국할 때까지만 해도 치원은 나름대로의 포부가 있었다. 벼슬자리를 노린건 아니고 자기가 보고 느낀것을 고국에서 실현해보리라는것이였다. 유학을 공부한 선비로서 정치에 관여하여 고국을 리상적으로 만들어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임금은 물론 임금을 보필하는 중신들도 치원을 요긴하게 생각지 않는것 같았다.

딱 한번 치원의 의견을 실행했는데 년호를 바꾼것이다. 당나라에서는 이때까지 써오던 《중화(中和)》라는 년호를 치원이 귀국한 해인 885년에 바꾸어 《광계(光啓)》라고 하였다. 그런데 신라에서는 1년이 지나도록 아직 중화년호를 쓰고있었다.

신라의 군신이 치원에게서 다만 그 년호개정만을 차용했을뿐이였다.

그후로는 치원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치원은 글배운 사람이 그러하듯 자존심이 강했다. 자기를 청하지도 않는데 기신기신 들어줍소 하고싶지는 않았다. 식자의 장단점이랄가 리치를 알고있으되 실천력은 따라 못 가는 바로 그것이다.

치원은 날이 갈수록 쓸쓸해졌다.

치원이 남달리 학문이 있으면서도 신라에서 이런 취급을 받는것은 당시 신라조정의 형편과도 관련되여있다. 치원이 돌아온 이듬해 7월에 헌강왕이 죽고 그의 동생 정강왕이 즉위했다. 그런데 정강왕은 1년 채우고 죽었고 다시 정강왕의 녀동생인 만이 즉위했다.

조정은 말할수 없이 어수선해졌다. 이러한 때에 한주의 이찬 김요가 모반하다가 사형되는가 하면 원종, 애노 등이 사벌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은 전전긍긍했다. 이렇듯 발등에 떨어진 불도 미처 끄지 못하는 형편에 언제 치원의 원대한 뜻, 태평성대에나 있음직한 그런 리상정치를 해낼수 있겠는가.

왕도 중신도 부닥치는 현실에 궁여지책일뿐이다.

치원은 한숨을 쉬며 운명, 팔자를 탓하였다.

그가운데서 더욱 치원을 괴롭힌것은 시중 준흥의 질투였다. 준흥은 아래입술이 별스레 두툼하여 보기에도 심술이 바르지 않았다. 이 사람은 정강왕의 시중으로 있던 사람인데 왕의 유언을 받들어 진성녀왕을 등극시킨것으로 하여 조정에서 판을 쳤다.

메돼지같은 놈이다 하고 치원은 불쾌하게 여겼다. 불여우같은데도 있었다.

언제 한번 치원과 눈길을 마주친적이 없었다. 치원이 바라보면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고 죽은체 하지만 일단 치원이 다른 곳을 보면 집요하게 치원의 얼굴을 훑었다.

치원이 무슨 말인가 하면 의례히 아래입술을 비죽이 내미는데 그건 옳다 하기보다 무슨 그런가,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하는 시늉이 더 짙었다. 천성이 섬세한 치원으로서는 그런 꼴을 본다는것자체가 죽을 맛이다.

이놈은 구렝인가? 치원은 그렇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옳기는 한데…》 하는 말이 치원이 내놓는 의견에 빠짐없이 꼭꼭 따라붙는다.

옳기는 하지만 틀린다는것이다. 그럴 때마다 구렝이의 눈깔처럼 산뜩한 빛을 내뿜었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리해해보려고 한적은 없고 《네까짓게 뭘 안다고…》 하는 우둔한 고집만 꽉 차있는 사람이였다.

《신하는 <충성 충>자 하나만 베고 죽을 사람이다. 우리는…》 하고 입술이 열린다 하면 튀여나오는 소리지만 준흥자신은 그 《충성 충》이란 글자자체도 잘 모르고있다.

숟가락을 들면 벌어지는 입술처럼, 똥이 나오면 열리는 홍문처럼 입만 터지면 신하는 바로 그래야 하는것인데 바로 그것이 《충성 충》자라는것이다.

거기에다 되지 못하게 제멋대로 하려고 하는 놈은 아들, 손자라도 때려죽일만큼 미워하거나 압을 가하는 사람이였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옳바른 마음,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마음이라는 《충성 충》자를 리해할수 있겠는가고 치원은 코웃음쳤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것은 이런 놈이 남들에게는 《충성 충》자를 곧잘 강요하면서도 저는 또 저대로 볼장을 본다는 그것이였다. 어찌보면 임금을 위한 《충성 충》자가 아니라 자기를 위한 《충성 충》자인것이다.

창조적인 능력보다는 절대적인 복종이 고금동서 군신(君臣)관계의 본태라고 볼 때 뭐 별로 탓할것도 못되지만 치원은 준흥이라면 치를 떨었다.

농민에겐 누에가, 뱀장사군에게는 독사가 귀중하고 따라서 사랑스럽기도 할는지 모르지만 선비에게는 벌레요, 몸서리쳐지는 흉물인것이다.

준흥이 있는 한 치원은 시름시름 앓을수밖에 없었다.

치원은 그때 또 한사람을 알게 되였는데 병부시랑 김처회였다. 이 사람은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앞이 어떻게 되는가, 래일 무슨 일이 일어날가 하는건 제 알바 아니였다. 지금 당장, 오늘 당장이 문제였을뿐이다. 마치 소잔등에 붙은 등에와 같다. 파리와 같았다. 소가 죽어넘어지건말건, 여위건말건 상관이 없었다. 오로지 지금 피를 빨아먹을수 있다면 그만이다. 소가 죽으면 어찌겠는가 하면 그때는 또 다른 소에게 날아가자 하는것이였다. 아무런 잘못도 느끼지 않았다. 소의 피를 빨아먹는게 잘못이 아니라 소가 된것이 잘못이라는것이다.

치원은 이 사람에게서 또 얄미운감을 느꼈다. 정말 얄미울 정도로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은 제딴의 리치에 맞았다.

례절, 측은지심 즉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기본으로 하여 학문을 닦고 성공한 치원에게는 답답한 일이다.

처회는 로골적으로 치원을 시까슬렀다.

《자네는 대단한 사람이야. 하지만 난 자네를 부러워하지 않아. 왜냐하면 자네의 공명은 대단하지만 그것으로 리득을 보는것은 없기때문이야. 그러나 난 반대로 공명은 자네만 못하지만 먹고 살아갈 구멍은 환하네.》

끝내는 치원이 조정에서 물러나 지방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을 때 그는 김처회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치원은 대산군 태수로 임명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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