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3 회)
23. 최치원 최치원은 경주 사량부 혹은 본피부사람이라고 전한다. 치원이 12살때 당나라에 류학가게 되였다. 《10년내에 성공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힘껏 노력하라.》 라고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고 기록에 있다. 이걸 보면 최치원의 아비가 여느 사람과는 좀 달랐다. 12살이면 아직 아이인데 바다건너 먼 나라에 배우라고 떠나보낼 결심을 한것이다. 인지상정을 초월하여 어린 아들을 떠나보낼만큼 강단이 있고 또 나름대로의 현실에 대한 원한이라든지 야심 같은것이 있은것 같다. 멀리 앞을 보려고 한 사람인가, 아니면 지독한 자존심이 있는 사람인가? 경주라면 그 당시 신라의 왕경 즉 서울인데 거기 6부출신으로서 아들을 당나라에 류학보낸걸 보면 신라에 어떤 체념비슷한것을 느끼고있은것 같다. 그 당시 신라는 아직 과거급제에 의한 인재선발이 기본으로 되여있지 않았다. 국학(國學)이 신문왕 2년(682년)에 설치되였다고 한다. 주로 귀족자제에 한정되였고 그것도 명색뿐이였다. 기본은 성골, 진골 하는 골품제도에 따르거나 혹시 화랑도에서 뽑기도 하였다. 만약 치원의 아비가 자식을 신라에서 출세시킬 생각이였다면 출신이 미미한지라 아들을 화랑도에 넣었을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기자신과 아들에 대한 믿음이 컸고 그때의 당나라형편까지도 어느 정도 알고있은것 같다. 드문히 저절로 똑똑해서 성공하는 사람도 있고 또 우연히 때를 잘 만나 성공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선대가 이루어놓은 터전에
발붙이고 솟구쳐 성공하는것이 보통이다. 후날 치원이 력사에 남는 사람이 된것이 바로 그렇다. 아들의 재능이라든지 능력을 가려볼만 한 시각과 여유가 없다면 그리고 후대를 위해 바치는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한것이다. 치원도 아비 못지 않게 똑똑한 모양이였다. 하긴 김부식이 썼다는 《삼국사기》 렬전에 《치원은 소년시절부터 성격이 세밀하고 민첩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고 기록하고있다. 12살에 류학가서 17살 되였을 때 드디여 빛을 보게 되였다. 당나라 건부 원년 갑오년(874년)에 례부시랑 배찬의 고시에서 단번에 급제하여 선주의 률수현위로 임명되였고 현위노릇을 잘하여 승무랑시어사내공봉(丞務郎侍御史内供奉)이 되여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신라사람으로서는 대단히 출세한것이다. 그때 당나라는 황소라는 사람의 반란에 시달리고있었다. 고병이 제도행영 병마도통이 되여 이를 토벌하게 되였다. 고병은 어떻게 알고 최치원을 불러 종사로 삼아 서기의 임무를 맡겼다. 고병은 고구려후손이였다. 668년 고구려가 망한 이후 많은 고구려사람들이 당나라로 강제로 끌려갔다. 산동성일대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고병은 그런 고구려사람의 후손이였다. 그가 황소의 란을 토벌하는데 우두머리가 된것을 보면 조상들의 피를 받아 싸움을 잘하였던 모양이다. 고병은 이미 함통 7년(866년)에 당나라의 우환거리로 되였던 남조(南詔)를 대파하고 남조가 차지하였던 교지(交趾)를
회복한 전적이 있는 사람이였다. 남조란 운남왕 이모심이 794년에 자칭한것이다. 최치원이 당나라과거에 급제한 해인 874년 이듬해에 왕선지라는 사람이 들고일어나 여러 주를 함락하고 이어 황소라는 사람이 이에 응하여 력사에 황소의 란이라는 대사건이 터진것인데 고병은 이 왕선지, 황소의 란을 진압할 황제의 어명을 받고 최치원을 불러 종사관으로 임명한것이다. 최치원은 황소의 란을 진압할 격문을 써서 이름을 날렸다. 《다만 천하의 사람이 다 죽이기를 생각할뿐아니라 또한 땅속의 귀신들도 이미 죽이기를 의논했다.》 최치원이 쓴 《토황소격문》의 한구절이다. 그러나 아직 최치원은 스무살전의 새파란 젊은이로서 싸움이나 인생에 대해서 많은것을 모르고있었다. 그가 알고있는것이란 과거급제하기 위해 공부한것뿐이였다. 어느날 고병이 종사관인 치원을 불렀다. 《신라사람이라지?》 고병의 물음에 치원은 별생각없이 《예.》 하고 대답했다. 이상한것은 고병이 벌써 두번째 묻는것이였다. 그는 마치 저울눈금보듯이 치원을 건너다보았다. 《난 고구려후손이야.》 하고 초로의 고병은 말했다. 치원은 놀랐다. 나라의 운명을 걸머진 병마도통이 이상한 소리를 하는것이다. 고병은 시무룩이 웃었다. 《아나?》 상관은 무엇을 아는가고 묻는것일가? 치원은 선뜻 대답할수 없었다. 《아는가 말이야!》 고병이 다시 따졌다. 고구려사람이였다는것을 아는가 하는것일가, 아니면 다른걸? 《몰랐소이다.》 하고 치원은 대답했다. 설사 알았다한들 치원은 지금 고병에 대해서 뭐라 할수 없었다. 치원은 멀리 흘러간 고구려의 력사에 대해서 아는것보다 모르는것이 더 많았다. 그런만큼 자기가 고구려의 후손이라고 하는 고병의 말에도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고국을 좋아하나?》 고병이 또 물었다. 치원은 이런 대화가 재미없었다. 다만 자기의 상관이 묻기에 긴장하고있을뿐이였다. 《모르겠소이다.》 《웬 소리? 제가 나서자란 땅, 나라… 그걸 좋아하는가, 나빠하는가?》 《저는 열두살때 고국을 떠났소이다.》 그러니 특별히 모른다는것이다. 아버지도 그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는 고국인 신라에 대해서 좋지 않아했는지 모른다. 그저 10년동안 성공하지 못하면 자기의 아들이 아니라고 했을뿐이다. 고국이니 나라니 하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하하! 쓸개빠진 놈이로군…》 고병은 비웃었다. 치원은 모욕감을 느끼며 자리를 떴다. 고국을 떠난지 5년, 그사이 치원은 공부에만 몰두했다. 오로지 과거급제, 그것만이 그의 소년시절과 청춘시절초입 희망의 전부였다. 그게 곧 아버님에게 효도하는 길이요, 사람되는 길이였다. 결국은 뜻을 이루었다. 그외에 무엇이 더 요구된단 말인가. 고병이란 사람이 알고보니 괘씸한 사람이로구나. 이래서 문은 무와 다르다는것인가. 그러나 무엇인가 모르고있었다는 아픈 후회와 자기에 대한 경멸도 생겨났다. 《너 신라사람이야?》 그 당시 당나라에는 여러 나라에서 모여온 야심가들이 많았는데 그가운데 하나인 치원의 동류들이 어딘가 비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때에도
치원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고병이란 사람이 하는 말에는 왜 모욕감이 드는것일가. 《뭘 좀 알면은 곧잘 시비를 캐자고 모기처럼 앵앵거리지만 정작 알아야 할걸 아는 녀석은 드물거던, 떠벌이들같은게…》 고병은 비웃었다. 선비일반에 대해서 그러는것일가, 치원에 대해서 꼬집는것일가. 치원도 고병을 속으로 깔보았다. 《싸움질이나 좀 안다고 돼먹지 못하게…》 상관만 아니라면 한바탕 끄당기질하고싶었다. 황소의 란을 진압하기 위해 일어난지 5년이 되는 해인 건부(乾符) 6년(879년)에 고병은 황소를 대파하였다. 시체와 병쟁기가 널린 싸움터를 돌아보며 고병은 한숨을 지었다. 그날 저녁 치원은 고병의 부름을 받았다. 가보니 치원 혼자뿐이였다. 치원이 술을 부었다. 그리고 형식으로나마 싸움에서 이긴걸 축하했다. 《이겼다?》 고병은 술을 받지 않고 치원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알수 없는 사람이였다. 《무엇때문에 싸우나, 누구와? 내가 황소 그 사람과 싸워야 할 리유가 뭔가?》 치원은 대꾸할수 없었다. 그자신도 모르고있었다. 다만 황제를 위해서였다고 치원은 생각했다. 《살기 위해서지, 그래…》 하고 고병은 중얼거렸다. 《나는 고구려사람이야.》 고병은 또다시 념불외우듯 했다. 100년전에 안록산란을 진압한 고선지(高仙芝)소리를
했다. 당나라가 서쪽으로 대식(大食)을 거쳐 령토를 넓히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였다, 그도 고구려사람이였다, 고구려사람들은 망국후 당나라에 와서 명성을 많이 떨쳤다, 하지만 결국은 사냥개에 불과했어 하는것이였다. 사냥개란 토끼를 잡은 다음에는 다시 잡혀먹히기마련이다. 고병은 쓸쓸해하였다. 치원에게는 뜻밖이였다. 사나이로 태여나 바라는것이 출세요, 출세면 공명을 얻는것이요, 공명을 얻으면 벼슬도 얻고 생활도 빈궁치 않게 되는것이다. 대개 선비란 권력에 붙어먹기마련일진대 더우기 치원이
과거급제를 위하여 공부한거란 공자, 맹자의 유교가 아닌가. 유교란 겉으로는 례를 숭상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교자체가 권력에 기틀을 두고있는것이다.
권력 그자체는 아니더라도 권력에 붙어 세상을 다스려보려는것이 이른바 유교의 기본실천방도가 아닌가. 이것은 무위를 떠드는 로자나 장자의 교리와는 다른것이다. 그런것만큼 치원이 고병의 말을 들으며 놀란것은 무리가 아니다. 치원은 아직 거기에 대해서 달리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신라사람으로서 이른바 《황제의 나라》에 와서 과거에 급제하여 상까지 하사받았고 벼슬도 얻었으니 그것으로써 만족하였다. 그러나 고병을 만나서부터 치원은 자기앞에 또 다른 새로운 인생의 목표가 슬금슬금 다가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사람이란 누구나 그런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절대로 만족이란 있을수 없는것이다. 마치 바다물을 마신듯이 욕망을 이루면 이룰수록 더 큰 욕망이 생기기마련 아닌가. 바로 그런 약점이랄지, 장점이랄지 인간의 본성을 간파한 싯다르따가 불교를 내놓은것이 아닌가. 일체 욕망을 버리라! 그것이 인생의 도를 이루는 실천방도라고 불교는 가르치는것이다. 그러나 욕망을 없앤다는것이 그렇게 쉬운가. 치원은 자기 눈앞에서 고민하는 한 인간, 보건대 성공한 사람이라 할수 있는 고병이 고민하는것을 보며 크게 깨달았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치원은 고병에게서 처음으로 자기에 대해서와 조상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였다. 치우에 대해서 알게 된것도 그때였다. 당나라사람들도 그렇고 그전의 사람들도 치우라고 하면 오랑캐족의 군신으로 취급하지만 력대 시조, 장군들치고 치우를 숭배하지 않는자가 누구냐. 한나라 고조라는 류방도 그러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 치우가 우리들의 조상이라는걸 아는 사람은 또 몇이냐. 아니, 그건 너무하고 알만 한 사람이면 다 아는것이다. 고병은 자기도 군신 치우의 후손이라고 장담했다. 막혔던 물목이 터진듯 고병은 자기의 심중을 터쳐놓았는데 치원을 특히 놀라게 한것은 고구려와 백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것이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한창 강성할 때 백만의 강병을 가지고있었다. 그런 나라였기에 고구려와 백제는 오, 월나라를 들이치고 나아가서 제, 인,
위, 로 같은 나라들까지 고구려를 섬겼다. 우린 그런 나라의 후손들이라고 고병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런데 치원이 알수 없는것은 그런 고병이 어떻게 당나라의 큰 벼슬을 하는가 하는것이였다. 론리를 따지는데 습관된 치원으로서는 고병의 그것이 리해되지 않았다. 고병은 신라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았다. 치원이 신라사람이라고 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느 대목에서 단 한번 어쨌든 우린 한겨레야 했을뿐이다. 발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치원이 물었을 때 고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발해는 고구려후손들이 세운 나라지 하고 대답했다. 그럼 왜 발해로 가지 않는가고 묻자 고병은 이마살을 찌프릴뿐이였다. 고병은 그후 치원이 귀국하도록 도와주었다. 그의 주선으로 치원은 황제 휘종을 만났고 마침내 신라로 돌아오게 되였다. 당시 당나라는 황소의 란과 잇달으는 무수한 란으로 하여 어지러웠다. 황소가 서울 장안을 점거하는가 하면 다시 관군이 서울을 빼앗고 이렇게 마치 아이들이 술래잡이하듯 관군과 봉기군이 엎치락뒤치락하였다. 이것을 보며 치원은 더 있고싶지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선비였기때문에 란장판이 싫었다. 그러나 신라에 돌아온 치원의 일도 결코 편안치 않았다. 제딴의 큰 포부를 안고 귀국하였지만 신라의 현실 역시
당나라와 피장파장이였다. 치원은 귀국한지 8년이 되던 887년 9월에 고병이 피살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치원은 고병이 무엇때문에 피살되였는지 알수 없었다. 서른살이 되는 치원에게 그 소식은 큰 심리적충동을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