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회) 

20. 범나비

 

궁예는 박꽃이 핀 울담너머로 광솔불이 타는 시내네 집을 들여다보고있었다. 열어젖힌 문으로 베짜는 바디소리가 가락맞게 울려나왔다. 그리고 시내의 숙인 모습도 보였다. 오늘은 기어코 시내를 만나야 하였다. 이틀동안 궁예는 시내의 집두리에서 어슬렁거렸으나 시내를 만날수 없었다.

궁예는 조심히 봉창으로 다가갔다.

똑똑…

반응이 전혀 없다. 열려진 문으로 다가가 문틈을 두드려도 바디소리는 끊기지 않았다.

《시내!》 하고 궁예는 낮은 소리로 불러보았다.

여느때라면 그만한 소리에 벌써 바디소리가 멎고 시내가 반기며 나왔으련만 그렇지 않다.

《시내!》 하고 궁예는 조금 더 큰소리로 불렀다.

그래도 반응이 없다.

《이것 봐라?…》

궁예는 잠시 우두커니 서있었다.

궁예의 울뚝밸소리를 듣고 천궁과 무달의 태도가 칼로 베듯이 변했고 그래서 그 소리가 시내에게까지 전해졌으리라는것은 뻔하다.

(뭐, 그렇던들 어쨌단 말인가?)

궁예는 그런 일을 두고 앵돌아지지 않는 자기를 대범하다고 여겼다.

(뭐, 당장 죽기라도 하는가?)

천궁과 무달이 쬐쬐해보였다.

그렇다면 처녀의 집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난 뭔가? 사내가 뭐 달고 말이야, 문 열어젖히고 처녀를 끌어안으면 그만이지. 조막손이 닭알 주무르듯…

(이 궁예도 한심하다.)

궁예는 자기가 확실히 달라졌다고 여겼다. 무엇인가가 궁예를 겁들게 하는것이다. 그게 무엇인가? 그것 참…

궁예는 다시 문틀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바디소리가 주춤했다.

《시내! 나요, 나.》

궁예는 낮게 소리쳤다.

잠시후 시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궁예를 보고 별로 놀라지도 않는다. 여느때라면 금방 웃음을 지었겠는데…

찬서리가 내렸구나, 하루아침에…

궁예는 한눈을 끔벅거리며 시내를 보았다.

《어서 좀 나오우.》

시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래입술을 깨무는 시내의 눈굽에 벌써 이슬이 맺혔다.

궁예는 다른것은 몰라도 녀자의 눈물에는 꼼짝 못한다. 저도 모르게 솜털이 찌르르해났다.

《왜 그러우?》 하고 묻는데 시내는 문을 닫았다.

궁예는 눈을 슴벅거리며 닫겨진 문을 바라보았다.

살그머니 문열리는 소리에 궁예는 펄쩍 놀라 고개를 들었다. 울타리를 훌쩍 뛰여넘어 삽짝문에서 기다렸다.

시내가 나왔다.

《여긴 왜 왔어요?》 하고 시내가 딴데를 보며 물었다.

《왜 오다니? 시내가 보고싶어 왔지…》

《그만 가세요. 그리고 다신 오지 마시오이다.》

《시내. 왜 갑자기 새파래졌소, 왜?》

궁예는 서둘러 돌아선 시내의 앞을 막았다.

《그걸 나에게 물어요?》

그것때문이구나. 하지만 뭐 그것때문이 아닐수도…

《답답하우. 무슨 일이요?》

《거기는 존귀하신 임금님의 혈육이라고 하던데…》

(역시 그것이로구나!)

궁예는 씩하니 웃었다.

《음, 그거? 내가 그랬다고 아버지가 그럽디까?》

《누가 말하던…》

《내가 그렇게 말했지. 그래 시내는 내가 임금의 혈육이라는게 나쁜가?》

《난 싫어요.》

《그건 왜?》

《싫으니까 싫은거죠.》

《모를 일인데… 내가 임금의 자식이라면 지금은 몰라도 앞으로 시내를 왕후로 만들수도 있지 않아? 그렇게 되면 호강하겠는데…》

《난 그런 호강 바라지도 않아요.》

《그럼, 천한 상놈 만나서 고생고생하는걸 바라나?》

《놀리지 마시오이다. 난 훌륭한 사람을 바랄뿐이오이다.》

《지금세월에 임금 내놓고 더 훌륭한 사람이 어디 있소?》

궁예는 시내를 뚫어지게 보며 물었다. 마치 처녀의 얼굴에서 무엇인가 캐여내려는듯.

《훌륭한 사람은 출신이나 벼슬에 있다고 보지 않나이다.》

《그럼 재부인가?》

《아니, 마음에 있는거지요.》

궁예는 시내의 맵짠 말에 입을 벙하니 벌렸다.

이런 녀자였던가? 놀라운 일이다. 궁예는 누그러졌다.

《시내! 사실 내가 임금의 뭐라는건 나도 잘 모르는 일이요. 그건 천궁과 아버님이 날 현령보다 은근히 깔보는것 같아서 해본 소리요. 이 세상이라는건 어떻게 된 일인지 속보다 껍데기나 뒤배경을 보고 사람 가리거던. 그런 속물같은것들은 내가 임금의 자식이라면 당장 발밑에 엎드려 개올리는거지.》 하며 궁예는 시들하게 웃었다.

시내는 믿지 못하겠다는듯 옹송그리고 궁예를 보았다.

《그럼 거짓말했단 말이오이까?》

《한번 가죽을 써본거야! 그렇다고 시내에게까지 거짓말하고싶지는 않아. 난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시내에게서 사람다운 대접을 받아보았소. 처음 나에게 물을 주던 일이 생각나오? 이때까지 누구도 나를 그렇게 살뜰하게 대해주지 않았소. 시내는 남들이 다 나를 병신이라고 멸시하는데도 나를 그렇게 대해주지 않았소. 그건 동정이 아니였소. 동정이 아니여서 난 더 좋았소. 이 세상이 아름답고 살만 하다고 말없이 보여준 귀중한 사람이 다름아닌 시내요. 그런 시내에게 내가 왜 거짓말하겠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 그건 상관치 않아. 나는 나대로 살아갈테니까. 그러나 시내에게만은 그렇지 않아. 이 궁예가 덜퉁하고 밸이 사나운건 사실이지만 그건 나를 깔보는 놈들에게 하는거야. 난 웃으면서 시내가 떠주던 그 맑은 물을 영원히 잊지 못해. 그러니 시내가 달라진것이 내가 불끈해서 한 수작때문이라면 마음놓소. 난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 어디서 태여난지도 모르오.》

《날 놀리느라고 그러시는건 아니지요?》 하고 시내는 울면서 물었다.

《아니, 난 세상사람을 다 속여도 시내만은 속이지 않아.》

《그럼 내가 잘못했나이다. 난… 나도 그렇지 않을것이라고 믿으면서도 혹시나 해서 얼마나 속을 썩였는지 몰라요.》

궁예는 시내를 덥석 끌어안고싶었다. 그러나 후- 하고 한숨만 쉬고말았다. 어쩐지 이 마당에서만은 그러고싶지 않았다. 긴숨을 몰아내고 궁예는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그래, 시내는 임금의 자식이라는 소리가 그렇게도 싫소? 옛날일을 보면 그따위 소리를 퍼뜨리면 량반, 상놈 가리지 않고 꾸벅 죽어 모여오더구만. 그래서 들고일어나 큰일친게 어디 한둘인가.》

궁예는 저도 모르게 야심을 내비치였다. 차라리 녀자가 알아주었으면 하는셈도 있었을것이다.

《아무 임금이나 다 그런건 아니오이다. 다만…》

《신라임금만이다 그거요?》

시내는 고개를 까딱했다.

《그건 왜 그럴가? 신라임금이라도 좋은 임금들이 있는데…》

《아버지랑 다른 사람들이 다 그걸 싫어하나이다.》

《그래? 마음 놓아.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참, 조심하시오이다. 현령이 거기를 잡으려 한다나봐요.》

《현령이 나를, 왜?》

《나라에 큰 죄를 지었다나봐요. 무슨 역적이라던지…》

《뭐, 역적? 헛, 하하.》

궁예는 밤하늘에 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웃고나서 이를 갈았다.

《현령이 날 역적으로 본다? 내 그러지 않아도 언제건 한번 그놈의 상통을 깨뜨리려고 했던 참이야.》

《차라리 어디 멀리 몸을 피하시는게 낫지 않나이까.》

《왜? 내가 뭘 잘못했다고 꼬리를 사리겠어?》

《그래도… 관리들하고는 피하는게 낫다고들 하나이다.》

《그건 바보들이나 하는짓이야. 하지만 시내가 하는 말이라면 좀 생각해보겠소.》 하고 궁예는 시내의 손을 잡았다.

《시내, 앞으로 내가 자주 나타나지 못해도 나를 잊지 말아주오. 난 언제나 시내를 잊지 않을테니까…》

시내는 손을 맡긴채 붉어지는 얼굴을 돌리며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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