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회) 

 

18. 아, 왕자라니…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사람의 정이란 한곬으로 쏠리기 쉽다는 말일것이다.

시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궁예가 신라임금의 아들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시내는 처음에 속으로 코웃음쳤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소리로 들리거니와 설사 어딘가 엉뚱한데가 있는 궁예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아버지와 천궁이 궁예에게 쏠리는 시내의 마음을 떠보기 위한것으로 들렸다. 그러나 다름아닌 마음속에 두고있는 사람인것으로 하여 그 소리는 시내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내며 박혀버렸다.

그게 진짜일가? 그가 정말 신라왕의 아들이란 말인가. 거짓말일것이다. 하지만 진짜라면, 그러면 나는 어쩌란 말인가. 아버지와 천궁아저씨는 물론이고 시내, 나에게도 그야말로 마른하늘의 벼락이다.

시내는 자기가 배운것이 없는 천민일지라도 자기가 살고있는 이 땅의 풍토를 잘 알고있었다. 이 패강진일대, 한주일대는 비록 겉으로는 신라의 천하이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신라의 땅이요, 신라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들에 의해 다스려지고있는 땅이라 하더라도 이 땅의 주인은 고구려후예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였다. 잘살아도 못살아도 고구려후손들이라는 자부심을 품고있는 사람들이 이 땅의 진짜 주인들이였다. 그것을 알기에 신라의 벼슬을 하는 사람들까지도 자기들도 고구려의 풍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은근히 암시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결코 여기에 오래 견딜수도 없고 편안히 살수도 없는것이다. 이 숨결, 이 멋은 보이지도 않았고 들리지도 않았다.

시내가 어릴적부터 고구려의 평강공주를 자기 앞날의 거울로 삼은것도 바로 그런데로부터 흘러나온것이기도 하다. 그런 시내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사내가 신라의 진골, 왕자라는것이 사실이라면 시내는 이리새끼를 사슴인줄 알고 품은것으로 되는것이다. 잘살고 못살고, 잘나고 못나고가 사내징표로 되는것이 아니였던 시내에게 궁예가 제입으로 신라임금의 씨붙이 어쩌고 했다는것은 참으로 크나큰 타격이였다.

사랑이란 감정은 설사 주위사람들이 다 비웃고 반대를 하더라도 자기만은 믿는 구석이 있어야 한다는것인데 그 믿음이 허물어진다는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아니야. 그럴수 없어.》 하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귀를 막은 시내였지만 그렇게 애오라지 믿고 꿈꾸던 사람인것으로 하여 시내의 심정은 캄캄한 어둠속에 끝도 없이 떨어지고있는것이였다. 차츰 절망에 빠져들었다. 시내는 끼니도 설치면서 베틀에 앉아 바디질했다. 그렇게 짜는 베가 또 이전처럼 올이 고울수는 없었다. 그래도 시내는 베를 짜고 또 짰다. 만약 시내가 속이 트인 처녀였다면 당장 사내에게 달려가서 설분이라도 토하며 사실을 확인하자고 했으련만 착하디착한 그로서는 그러지도 못했다. 그저 《아니야, 그럴수 없어!》 하고 외마디소리를 되풀이하고있었다. 그 소식을 전해준 아버지조차 원망스러웠다.

궁예로 하여 가슴이 아프기는 시내의 아버지인 무달도 마찬가지였다. 궁예가 제입으로 신라임금의 피붙이소리를 하였을 때에 놀라움과 실망감은 차라리 그가 천한 스님이고 애꾸병신일 때가 그대로 나았다고 돌이켜보게 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동네사람들에게 반쯤 모자라는 사람치부를 은근히 당해오는 처지다. 그것은 신라의 통치도 고구려때의 통치도 다 좋다, 그저 편안하기만 하다면야 하는 소리를 주정삼아 지껄인것때문이였다. 그런데 이제 딸이 마음두고있는 사내가 신라왕자라는것이 알려지면 무슨 날벼락이 떨어지랴. 아주 고자취급할게다.

무달은 그것을 천궁을 통해서 보았다. 스님이면 어떻고 병신이면 어떤가. 그저 사내가 씩씩하고 기개가 있으면 그만이라고 하면서 제법 딸을 두둔하던 천궁도 그 소리를 듣자 아연해하지 않았던가.

마음어진 무달이지만 일이 이렇게 번지자 성미가 살아났다. 별치 않은 일에서도 성을 냈다. 무달의 날벼락을 처음 맞은 사람이 닭 조르던 족제비촌주였다.

《싹다 듣기 싫소. 왜 나를 괴롭혀? 외눈깔땡중놈이든 현령이든 나는 내 딸을 누구에게도 주지 않으려오. 차라리 내 손으로 죽이면 죽였지…》

늘 순하던 황소가 별안간 성이 나서 내지르는듯 한 그 영각소리에 촌주는 천둥맞은 자벌레로 되여버렸다.

《이… 사람, 무달! 내가 어쨌다고 그러나?》

촌주는 섭섭해지는 가슴을 가까스로 누르며 오금을 바들바들 떨었다.

《시끄러워! 썩 사라져!》

무달은 싸리나무삽짝문을 뜯어져라 나꾸어챘다. 이게 늘 봐야 만지기 좋은 나귀좆인가 하여 접어들던 촌주는 숨이 다 칵 막혔다.

《어디 두고보자!》 하고 소인배의 념불을 외우며 촌주는 게걸음쳤다. 닭쫓던 개신세라, 하지만 저게 왜 저럴고 하고 씹어본다.

외눈깔땡중놈은 또 뭐야?

촌주는 두루두루 물어 그 사연을 캐보았다. 그래서 궁예에 대해 알게 되였다.

(야, 이게 뭐야?)

촌주는 키질에 날려가는 보리까끄라기되여 현령에게 뛰여갔다.

《뭐야?!》

촌주에게서 소식을 들은 계진은 대추눈이 튀여나오려고 요동쳤다.

학이 노는데 웬 돼지가… 방자해도 유만부동이지, 현령나으리 밥그릇에 무슨 주둥이질이야. 이걸 참아? 아니다. 본때를 보여주어야지. 세달사의 애꾸땡중놈, 어디 두고보자! 헌데 어쩐다?

계진의 대추눈이 이번에는 구슬알처럼 반지르르 돌아갔다. 벼슬아치의 습성을 계진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곧잘 알았다. 피가 그랬다.

처녀를 탐내여 두 사내 아니, 두 수개가 으르렁거린다는것으로는 일이 성립되지 않는다. 머리털이 곤두설만 한 큰소리가 아니고서는 오히려 거꾸로 물리울수 있다. 작두날같은 시퍼런 칼이 있어야 한다. 그게 뭔가?

계진의 한쪽 입귀가 똥나오려는 개밑구멍처럼 움찔거렸다.

그 땡중놈은 감히 임금님의 성덕을 허물려 했겠다. 상놈이 여느 벼슬아치를 놀리는것도 용서 못할 죄인데 땡중놈이 감히 임금님의 존안을 흙칠해? 뭐 왕자라구? 넌 죽었다. 역적이 다른건가. 때려죽이든 굶겨죽이든 죽이기는 마찬가지라도 어떤 죄명을 씌워 죽이는가는 차이가 있는게다. 기어코 역적을 발가놓게 될것이다.

부르르 몸이 떨렸다.

제가 만들어낸 역적이지만 생각해보니 가만있을수 없다. 이 죽일놈.

흔히 그런 법이다. 음모, 모략은 우선 제가 흥분하지 않고서는 성립되지 않는것이다.

계진의 입술은 애매하게 깨물어져서 빨갛게 피가 졌다.

역적고변에는 우물고누 첫수, 먼저 소리친 놈이 이기기마련이다. 뒤에 소리는 변명으로밖에 안 들린다.

《역적이야!》 하고 계진은 속에서 우뢰소리를 울렸다. 그리고 스스로 놀라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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